| | | ▲ 전태규목사 |
2014년 7월, 한양대학교 총동문목회자협의회 정기총회에서 제 6대 대표회장에 추대 된 전태규 목사(서울 서광감리교회), 그는 벅찬 가슴으로 말한다. “부족한 사람이 크고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 다음은 한양대학교가 내게 베푼 장학금 때문입니다.” 한양대학교와의 특별한 인연을 설명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전태규 목사, 그는 목사된 것이 기쁘다고 말한다. 우선 그의 어릴 적 신앙 이야기를 묻자 그는 열렬하게 설명한다.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 하시던 중에 6.25를 맞이하였고, 아버지는 방공호에 숨어 지내면서 살려주시면 신학교에 가서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 중에 아버지를 살려주셨고, 아버지는 하나님께 약속하신대로 목사님이 되셨으니 저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자라고 해서 자녀가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전태규 목사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열렬한 마음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전태규 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천석 목사님이 1974년 겨울 논산 화정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셨어요. 그때 우리 교회 성도들은 부흥집회가 나를 위해 열렸다고 말했어요. 저는 부흥회 도중에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몸이 진동하고, 방언이 터지고, 얼마나 펄펄 뛰었던지 두 번이나 넘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일 후에 신학교에 들어갔지요.”
전태규 목사는 목회와 부흥사역을 함께 하고 있다. 부흥사역이 그의 뜨거운 신앙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전태규 목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아버지가 항상 들려주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으면 한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할 수 만 있으면 많은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권하셨는데,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20년 전에 부흥단체에 들어갔지요.”
청년 전태규는 신학생 신분이었던 1979년도 12월, 18평 건물을 얻어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기도와 공부를 양 날개로 삼아 균형을 이루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목회가 시작되었을 때도 공부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마침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자에게도 장학금을 준다고 하였다. 신학대가 아닌 일반대에서 목회자에게 장학 혜택을 준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 전태규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당시 전태규는 개척교회의 가난한 전도사였다. 학교에서 입학금을 20% 감면해 준다고 해도 나머지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등록금 때문에 합격 통지서를 들고도 기쁨 반 걱정 반으로 집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급히 전화를 받으라고 하였다. 전화를 하신 분은 아버지가 시무하시던 도고온천감리교회의 권사님이셨다. 권사님이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 때를 회상하는 전태규 목사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노량진역 근처 다방에서 만났는데, 권사님은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으셨어요. 누가 볼까 좌우를 살피시더니 가방에서 신문지에 쌓인 것을 꺼내 펼치시는데 만 원권 한 뭉치 100만 원 이었습니다. 정말 큰돈이었지요. 권사님은 좋은 일에 쓰시려고 저금통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저금통이 다 차서 어려운 사람에게 주려는 순간 가난한 전도사가 생각났다는 겁니다.
그 일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아내 또한 큰 은혜를 받았지요. 당시 대학원 등록금이 60만 원이어서 나머지 40만 원은 중고 피아노를 사서 아내가 아이들 레슨을 시작했어요. 덕분에 등록금 걱정 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요. 그 때 일을 통해서 엘리야 시대의 까마귀 역사가 오늘도 나타남을 확인했고, 지금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000명은 언제든지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저는 굳게 믿고 있어요. 다만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아 기적이 동반되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요.”
1982년 3월, 젊은 전도사 전태규는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윤리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수님께서 ‘랍비’ 라는 소리를 들으셨지요?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본받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교육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후에 교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싶었는데 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한양대학교를 통해 멋지게 응답해 주셨고, 한양대학교는 목회를 하는 저에게 지금도 특별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목사가 신학교가 아닌 일반대학에서 특별한 영감을 받고 있다니, 도대체 한양대학교는 어떤 학교일까? 전태규 목사를 통해 듣는 한양대학교 이야기는 정말 특별했다.
“한양대학교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참되고, 착하고, 고운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학교입니다. 설립자 고 백남 김연준 선생님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교회 성가대에 섰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김연준 선생님의 곡은 미국 카네기홀 등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성악가들에 의해 불리어졌습니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하셨고, 탁월한 지성과 낭만을 소유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고, 한양대학교 학생들에게 모든 사랑을 바치신 분입니다. 한양대학교가 기독교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실천’을 전면에 내세운, 다시 말하면 건학이념이 예수로부터 나왔습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학교가 많이 있지만 전면에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을 내세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지구촌 곳곳에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대학교 임에도 목회자가 약 700명 정도가 배출되어서 지구촌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학교 내에는 채플실이 마련되어 있고, 교회 위층에는 기도실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학생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도 한양대학교 출신입니다. 이만하면 제가 한양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번에 특별히 한양대학교 총동문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믿음의 사람 고 백남 김연준 선생님을 통해 한양대학교를 세우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들어서 쓰신다.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뛰어나야 한다. 그래야 사명을 제대로 감당 할 수가 있다. 한양대학교 총동문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은 전태규 목사, 그는 오늘도 한양대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전태규 목사의 비전을 들어보자.
“우선 한양대학교의 복음화를 위해 애써야 하고, 총동문회와 유기적 관계를 잘 이어가면서 목회자협의회를 활성화시키는 것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동문목회자들의 모임이 활성화된다면 회원목회자들의 친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서로가 협력하겠지요?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제가 장학금을 받고 한양대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인재 양성을 위해 장학사업을 벌이는 일입니다.” 일을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의 실천을 건학이념으로 내건 한양대학교에 목회자협의회가 있어 전태규 목사의 사랑의 실천은 더욱 더 확고해 가리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전태규 목사가 권해준 음악을 들었다. 한양대학교 설립자 고 백남 김연준 선생님이 작곡하고, 첼리스트 장한나가 연주한 ‘비가’를.
크리스챤신문, 2014. 7. 26, 12면.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