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장안면은 3.1운동의 성지이다. 특히 수촌리의 큰말, 가장말, 꽃밭에, 방축골, 용당골 등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김여근(김명호), 김응오, 김응식, 김종학, 김규완, 김명우, 백순익, 차인범, 정순영, 백낙열, 최병한, 최병혁, 윤영선, 장소진 등 숫자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애국지사들을 거명할 수 있다.
화성을 충의 도시라 함은 장안면을 두고 일컫는 것일 것이다. 항일운동의 유적지 역시 장안면에는 다수 있다. 수촌리의 수촌교회,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 항쟁지, 기린골의 천도교 전교실, 횃불시위의 원조 개죽산 등 항쟁의 근거지 또한 그러하다.
장안면에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다수 살고 있다. 석포리에는 차병한의 손자 차진환, 차병혁의 손자 최진갑, 조암에는 김종학의 손자 김영설, 가장말에는 김응오의 손자 김수천, 방축골에는 백낙열의 손자 백윤기, 용당골에는 김명호의 손자 김석규, 꽃밭에는 김응식의 아들 김재영, 백순익의 아들 백상기, 장안면에는 양순서의 손자 양창록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장안은 3.1운동의 요람이요, 항일운동의 성지이고, 그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는 곳이다. 필자가 만나본 후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하지는 않으나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어 항상 마음 흐뭇하였다.
그런데 오늘 꽃밭에 살고 계신 백순익 지사의 아드님인 백상기선생께서 어렵게 생활하시는 것을 보고 못내 마음이 아팠다. 백순익은 1919년 4월 1일부터 3일까지 우정 장안지역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화수리에 있는 주재소를 파괴하는 한편 일본 순사 가와바다(川端)를 처단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한 애국지사셨다. 그러므로 일제는 지사에 대하여 온갖 악형을 가하였으며, 징역 3년형을 구형 투옥시켰던 것이다. 지사께서는 3.1운동의 공로로 1990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6월 28일 백순익지사의 둘째 아드님과의 면담을 위해 화성시 장안면 꽃밭에로 향하였다. 꽃밭에의 골목길에 폐가처럼 다 쓰러가는 집에 백순익의 차자인 백상기선생과 그의 부인이 살고 계셨다. 노인분들은 품위를 일치 않고 계셨지만 1917년생인 백상기씨는 침해 등으로 거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여 수원병원에 입원했다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부득이 퇴원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병색이 완연한 할머니를 대하며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허물어진 집을 바라보며, 필자의 마음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독립운동가 후예이신 9순의 두 노인분들을 대하며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었다.
해방이후 친일파의 자손들은 친일의 덕택으로 높은 교육을 받아 순조로운 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감시와 탄압과 차별대우로 제대로 된 학교 한번 다녀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능력과 실력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결국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교훈'을 주게 된 것이다. 중국본토와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을 한 한 애국지사는 후손들에게 앞으로 절대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나서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고 하니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첫댓글 휴....
친일파 놈들은 배불리 먹고 등따시고 독립운동가 분들은 배 곪고 등 누일 곳이 없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정말 가슴아픈 말입니다. 어떻게 이럴까요..국가는 없어져도 나만살면 된다는 친일파놈들.. 이나라가 아직도 비웃음을 당하는 이유는 그런 놈들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음에 참 맘이 안좋네요..
화가 나는게 아니라 속이 터질려고 하네요..강해 집시다..우리가 강해져야 함니다.. 지금은 그분들에게 줄것이 피나는 눈물뿐이지만..그리고 감사하다는 말뿐이지만..
오죽하면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서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우리 정말 배은 망덕한 존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