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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의 죽음 2
그랬었구나.
결국 민이는 그렇게 해서 복수를 하였구나.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같은 하늘 아래에버젓이 살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한을 풀어주지 못한나를...
이 방에 앉아 민이는
원한으로 사무친 밤들을보냈을 것이다.
때로는 지함을 그리워하며
기나긴밤을 눈물로 적셨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부질없이 지나가버린
옛일이라고생각하면서도
지함의 눈시울은 벌겋게 달아오르고있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후원 곳곳에 무리를 지어 자라는
모란이 보였다.
모란은 아직 때가 일러 피지 않았다.
지함은 그것도 필시 민이가 가꾸던 것이라고생각했다.
죽음을 작정한 순간에도
민이는 삶에 대한한가닥 애착을
모란을 통해 피워낸 것인지 몰랐다.
지함은 오래도록 눈물 고인 부연 눈으로
모란을보고 있었다.
"이 방을 쓰시던 분이 심어놓으신 겁니다.
오월이면
후원이 온통 붉은 모란으로 가득 차지요.
그래도썩어빠진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곳이랍니다."
정작의 말투는 영락없는 북창이었다.
안명세와 민이는 그들이 목표로 하는 일을
목숨을 바쳐 이루어냈다.
그러나 지함은 목숨을 바치면서라도
해내야 할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들의 불행을 맞아 기방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세상을 비관한것뿐이었다.
지함은 가슴이 저려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없었다.
쓸쓸히 발길을 돌려 힘없이 대문을 향하는 지함을
정작이 불러세웠다.
"이 선비님.
선비님께서는 송도로 가실 것이지요?"
북창이 그것까지 일러준 것일까?
지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시면서
제게도 송도로 가라 하셨습니다.
저도 데려가주십시오."
"몇 살인가?"
"이제 열 여덟입니다."
"사서는 배웠는가?"
"일별(一瞥)은 했습니다만... 꼭 데려가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계모도,
이복 형제들도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그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별 가지고는 안 되네.
모든 것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
좀더 공부를 하게.
사서를 제대로뗀 다음에 오게.
그게 좋다네."
정작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이 없었다.
계모와 이복 형제들 속에서 형 정염의 말을 믿고
지함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공부가 부족하니 아직 떠날 때가 아니라는 말은
핑계였다.
지함은 정작과 함께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정순붕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민이의 생명을앗아간 정순붕,
그 자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함은 정작과 함께 가기가 싫은 것이었다.
내가 아직도 정순붕에 대한 원한을
떨쳐버리지못했구나.
지함은 북창에게서 도가를 전수받으면서
모두떨쳐버렸던 것으로 생각했던 원한이
다시 부글부글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장부란 쉽게 떠나지 않는 법일세.
참고 견디는 것,
그것도 장부의 일이야."
지함은 변명하듯이
정작을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를둘러댔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면서도 정작의 말투나 표정에는
아쉬움의빛이 역력했다.
정순붕의 집을 나와서야 지함은
송도로 떠날 일이머리에 떠올랐다
. 얼핏 본 집안 살림으로는
길 떠날여비조차 궁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있는 돈을 다챙겨보라고 일렀으나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아내는종도 하나 없이
집안의 궂은일까지 혼자 하고 있는형편이었다.
하기사 형 지번이 유배나 다름없는
청풍군수노릇으로
두 집안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당연한일이었다.
부인이 전 재산이라고 내놓은 돈은
송도까지 가는여비로 쓰는 데에도
간당간당할 정도였다.
그것마저쓸어갔다가는
두 모자가 굶어죽을 판이었다.
낙담한 지함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책만읽어댔다.
다음날 아침,
지함은 아내에게 받은 돈 전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벌써 떠나십니까?"
아직 열흘이 되지 않은 걸 두고
아내가 이르는말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교육을 제대로 받은 탓인지
집에 돈 한 푼 남겨놓지 않고 다 들고 나가는데도
부인은 지함의 행동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다.
"아니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소.
저물기 전에들어올 것이오."
집을 나온 지함은 남대문 밖 저잣거리로 향했다.
농사 준비로 농부들은 여념이 없을 때였지만
그래도저잣거리는 제법 북적거렸다.
옷감이며 농기구며과일이며
여인네들의 패물에 이르기까지
시장에는없는 것이 없었다.
나무를 한 짐 내려놓고 흥정을 붙이는 나무꾼,
가져온 물건을 다 팔고 술을 한잔 걸치고는
시비를걸고 있는 중늙은이,
봄나물을 한 소쿠리도 안 될만큼 펼쳐놓고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노파,
비단을 사라고 외쳐대는 비단 장수.
저잣거리는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지함은 늘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홍성에 있을 때도
구태의연한 선비들보다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것이 더 즐거웠는데,
바로 이런 분위기 탓이었다.
이들은 비록 사회적으로야
출세길이 막힌 평민이거나천인들이지만
삶의 자잘한 재미와 슬픔을
솔직하게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다리가 아프도록 저잣거리를 쏘다닌 다음에야
지함은 나막신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는 봄비정도야
나막신 없이도 다닐 만한 터인데다가
제철이 아닌 봄이어서
나막신 장수들은 파리를 날리고있었다.
지함은 가져온 돈을 다 털어
그날 나온 나막신가운데
질 좋고 무늬를 곱게 놓아 제법 공을 들인것을
모두 사들였다.
"이 많은 걸 다 어디다가 쓰시려는 겁니까?"
사가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물건을 떨어주니
군소리없이 팔면서도 나막신 장수들은
지함이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긴 이런봄날에 한두 켤레도 아니고
달구지 그득히 나막신을사가니 이상할 법도 했다.
지함은 그저 빙그레 웃고는
나막신을 달구지에 가득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입이 벌어진 것이야 당연했다.
달구지에서부린 나막신이
마루를 가득 채웠으니.
"그 돈으로 이걸 사오신 겁니까?"
"그렇소."
부인의 입에서
낙담한 듯한 한숨소리가 새나왔다.
신나는 건 아들 산휘뿐이었다.
산휘는 나막신을신어보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제 어미의한숨에는 아랑곳없이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많은 나막신을 어디다 쓸 것인지
물어볼 법도하건만
아내는 한숨을 내쉴 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함도 군소리없이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북창이 주고 간 책들을 독파는 하고 한양으로 왔으나
가르침이 높다는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자면
아직도 한참 부족한 실력이라 여겨진 탓이었다.
나막신을 사온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더니
아침밥을 막 먹고났을 즈음부터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한동안가문 뒤끝이긴 했지만
봄비치곤 매우 거센빗발이었다.
기세 좋아봐야 봄비가 하루 이상가겠느냐고
다들 느긋해 했지만 비는 여간해서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지함은 도롱이를 받쳐 쓰고 남대문으로 나갔다.
길마다 물이 고여 나막신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상인들은 금세 지함을 알아보았다.
"아니, 나막신을 다 쓸어간 양반 아니시오?
그 많은나막신은 어디다 두셨습니까?"
나막신 장수들은 물건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있었다.
나막신을 더 사러 왔소."
"세상에.
남대문의 나막신이란 나막신은 모조리사가놓고
무슨 나막신이 남아 있다고 그러십니까?
나막신을 찾는 사람은 한둘이 아닌데
물건이 있어야장사를 하지요.
한 켤레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아십니까?
부르는 게 값입니다.
그런데도 장사를 할수가 없어요.
물건이 있어야 팔기도 하고
이문도 볼거 아니겠소."
그래 한 켤레에 얼마나 하오?"
"세 배로 뛰었어요
닷푼 하던 게 지금은 한냥반이랍니다.
그나마 없어서 못 팔지요.
이러다간 두 냥도 더 나갈 판입니다.
나막신 깎는 게 어디 쉽기나하나요.
한 사람이 온종일 깎아대야 몇 개를
만들까말까 한 걸요."
나막신 장수들은 지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지함만 아니었으면 이 기회에
한몫 챙길 수 있었을텐데
싶은 모양이었다.
허허. 지함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전처럼 장에 나막신이 있었더라면
지금같이 값이뛰었겠는가.
"나막신을 팔러 나왔소."
"예?"
상인들은 지함의 차림새를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차려입은 건 분명 양반인데 나막신을 팔겠다니
그런가아닌가 하고 살피는 눈치였다.
양반이 돈 버는 일에관여했다가는
큰 흉이 되는 세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상업이란 천민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 냥은 받아야겠소.
비는 내일도그치지 않을 테니
파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이오."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뭔가 쑥덕거리더니
곧달구지를 한 대 불러 지함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선비님은 어떻게 비가 올 줄 아셨습니까?"
허허. 가물면 비가 오는 법이지요."
"하지만 봄비가 이렇게 많이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요.
나막신 장사 몇 년 만에
봄에 물건이이렇게 달려보기도 처음이구요."
운이 좋았다고 해둡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질 좋고 무늬를곱게 새긴 나막신만
골라서 사가신 것입니까?
다른것은 값이 너무 싸서
장사가 안 될까봐 그러셨나요?"
"허허허. 양반들 돈 좀 빼앗아보려고 그랬소이다."
상인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두냥이나 값을 불렀는데도
선뜻 따라나선 것이 내일까지
비가 멈추지 않을 것이란 지함의 말을
그대로 믿는모양이었다.
지함은 천문을 읽었을 뿐이었다.
비가 많이오리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그 흔적이 있었다.
구름의빛깔이 그러했고,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까지 그랬다.
벌써 북창의 천문은 그런 곳까지 닿아 있었다.
음양오행으로 양수(陽水)가 콸콸 쏟아지는 날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지함은 처음 집에서 가져간 돈의 네 배를
아내에게내놓았다.
아내의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젖는 것 같더니
이내아내는 고개를 들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지함을쳐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먼저 보인 눈물이야
처음으로 집을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씀에 감동한 것일테지만,
나중의 눈길은
며칠 만에 이만한 돈을 버는능력을 갖고서도
지금껏 가족을 내팽개쳐온 남편에대한 원망이었다.
어쨌거나 산휘와 부인이
한동안 먹고 살 돈을건네주고 나자
지함은 마음이 한결 편했다.
지함은 아직도 아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잘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이의 영상을
다지워버리지 못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새로운 운명이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지함은 이 엄연한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민이가 아닌다른 여인이 아내가 되어 있고,
아들이 있고,
그리고살아 움직이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며칠 뒤 지함은 보던 책과 돈만 챙기고
가벼운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 또 얼마 만에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기약없는 이별이었다.
그러나 부인은 눈물을보이지 않았다.
산휘만이 지함의 소매끝에 매달려
애처롭게 눈물 젖은 목소리로 떼를 썼다.
"싫어요, 싫어요."
며칠 만에 정이 든 것일까.
어머니가 나무라며잡아떼는데도
산휘는 어린 팔로 악착같이
지함의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지함의 가슴이 아려왔다.
"울지 말아라. 아버진 금세 돌아오실 게다."
아내가 아이를 달랬다.
아내 자신이 그렇게 믿고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본능적으로 긴 이별을예감하는지
어머니의 말에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아내가 간신히 아이를 떼어내고는
발버둥치는 어린것을 꽉 부둥켜안았다.
등뒤로 자지러지는 산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함은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지함이 곁에 있는다고 산휘가 짊어져야 할
삶의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닐 터였다.
어차피 삶이란
이런 이별과 고통의 연속인 것을...
산휘야.
너는 조금 더 일찍 이별의 고통을 겪는것뿐이다.
그러나 좀처럼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오장육부를 다긁어내는 듯한
산휘의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사이로 들려오는 아내의 소리없는 울음을
지함은 들을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운명이
지함을 두드리고 있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하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책을 만저본지가 참으로 오래 되었내요.
눈이 침침하면서부터 돋보기를 사용 하고.
그뒤로는 책과 멀어젔습니다.
모처럼 장문을 접했내요. ㅎ
책은 지금도 끼고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