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얼극단은 9년째 무언극 〈거울인형〉과 〈기억해봐〉를 공연하는 가족극단이다. 연출과 배우, 조명과 음악, 매표와 극장 청소 등을 모두 가족끼리 다 한다. 다른 직원은 물론 아르바이트생 한 명 없다. 공연은 주말에만, 〈거울인형〉은 토요일, 〈기억해봐〉는 일요일에 한다. 연출은 아버지 이건동 씨가, 조명과 음향은 어머니 이희즙 씨가 맡고 4녀 1남의 다섯 자녀는 배우로 연기를 한다. 공연마다 배우와 스태프가 교차된다. 〈거울인형〉에는 첫째 가은(34), 사라(28) 씨가 출연하고, 셋째 한울(23), 넷째 가람(21), 다섯째 해님(20) 씨는 스태프로 표를 팔고 관객을 안내하고, 신발 정리 등을 한다. 반대로 〈기억해봐〉에는 셋째·넷째·다섯째가 배우로 출연하고, 첫째와 둘째는 스태프로 활동한다. 〈기억해봐〉에는 아버지 이건동 씨도 출연한다.
한얼극단은 일체의 홍보나 마케팅을 하지 않고, 할인티켓 하나 없다. 티켓 가격은 1만5000원. 관객은 대개 한두 명으로 한 해 찾은 관객이 총 80명 정도다. 23평짜리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무언극, 7명의 가족이 한두 명의 관객을 위해 공연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연일까.
공연을 관람하려면 반드시 전화 예약을 해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예약하면 예외 없이 일곱 가족이 총출동하지만, 예약 관객이 없을 때는 문을 닫는다. 최근엔 다섯 주째 연속 공연했다. 기자 일행은 〈거울인형〉을 관람했다. 공연장은 혜화동 로터리 골목길에 있다. 로비가 없기 때문에 공연 전에는 건물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 이날은 마침 관객이 두 명 더 있었다. 마임 공부를 하는 예고생 남녀.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렀다고 한다. 기자 일행의 예약이 없었다면 이날 공연은 없을 터였다. 스태프를 맡은 한울·가람·해님 씨는 관객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눴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울리자 스태프가 층층이 촛불이 켜 있는 계단을 따라 관객을 지하 공연장으로 안내했다. 공연장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객석과 무대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언극 〈거울인형〉에 등장하는 소품은 단 3개. 사다리와 장난감 휴대전화, 액자 틀이 전부다. 바보인형 역의 가은 씨와 공주인형 역의 사라 씨는 몸짓과 표정만으로 90분짜리 5막 연기를 한다. 공연은 신선하면서도 심오했다. 바보인형과 공주인형의 탄생, 사다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 휴대전화 신을 통해 보여주는 진정한 소통의 불능, 액자와 거울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참 존재의 의미 등. 장기 공연으로 다져진 배우들의 연기는 농익었고, 자매의 호흡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90분의 무언극은 지루하지 않고 숱한 생각거리를 던졌다. 공주인형이 찡그리면 같이 얼굴이 일그러졌고, 바보인형이 눈물을 흘리자 콧등이 시큰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배우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본 연극은 처음이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아버지 이건동 씨와 3명의 동생들은 음향실의 어머니 곁에서 진지하게 공연을 관람했다.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은 아버지 이건동 씨는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독일 폴크방 국립예술대학 연극과를 동양인 최초로 졸업했다. 폴크방 대학은 세계적인 안무가 고 피나 바우쉬를 배출한 곳이다. 1993년 귀국해 10년간 대학교수(청주 서원대)를 지낸 그는 2003년 교수직을 버리고 대학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연기를 전공한 학생들과 작업했지만 경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가족들이 나섰다. 아버지의 무언극을 계속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가족들은 배우를 자처했다. 막내 해님 씨가 중1 때였다. 이때 시작된 가족극단의 역사는 9년간 쉼 없이 이어졌다.
다섯 남매는 주중에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생활하고 주말에는 무대에 선다. 첫째는 영어강사이고, 나머지는 회사원이다. 이들은 “연기가 본업이고, 회사일이 부업”이라며 “연기하기 위해 회사 일을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얼극단 가족은 특이한 점이 많다. 우선 첫째 가은 씨만 제외하고 최종학력이 ‘자발적 고졸’이다. 둘째 사라 씨는 한신대 독문과를 다니다 1학년 때 자퇴했다. 셋째부터는 “서울대에 합격해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막내 해님 씨는 칵테일 기능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주말에 일체 약속을 잡지 않는다. 자녀가 클수록 ‘직장문화의 비중이 커지고 가족문화는 사라져간다’는 생각에 가족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다. 한얼극단 가족들은 주말 내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공연 준비를 하고, 공연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품평회를 한다.
배우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묻자 하나씩 관객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본 후 “행복했어요”라며 활짝 웃던 소녀, <거울인형>을 10번 이상 관람한 논술교사, 무뚝뚝한 표정으로 왔다가 갈 때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70대 할아버지 두 분 등. 사라 씨는 이렇게 말했다.
“딸을 데리고 온 중년 여자분이 기억나요. 많이 슬퍼 보였죠. 저희 공연을 보시고 카페에 후기를 남기셨는데, ‘출구가 생각나다’라는 제목이었어요. 힘든 일이 있었는데, 저희 공연을 보시고 출구를 찾으셨다고요.”
한얼극단의 철학은 ‘예술이 아니어도 좋다. 연극이 아니어도 좋다. 당신이 좋고 내가 좋고 우리 모두가 좋으면 그만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관객이 공연을 통해 얻는 것보다 우리가 관객을 보며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적자공연 행진을 보다 못한 지인들이 “나만을 위한 프러포즈 공연으로 콘셉트를 바꾸고 티켓 값을 올리는 게 어떠냐”고들 하지만 가족들은 콧방귀도 안 뀐다. 주말 공연장 대여를 문의해 오면 ‘있을지도 모르는 관객’ 때문에 거절한다.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했다면 가족들이 공연장을 다 떠났을 것”이라는 이건동 씨의 말에 가족들은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은 한 명이면 족해요. 배우보다 관객이 적을 때가 많지만 상관없어요. 저희 공연 관객은 좀 특별한 분들이세요. 대부분 냉소적인 표정으로 오셨다가 공연이 끝난 후에는 표정이 밝아져서 가시는 분이 많아요. 그때의 보람과 기쁨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해요. 공연장이 크거나 관객이 많으면 느낄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