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통로..문경새재 그리고 연풍
김대건
신부님의 생가가 있는 당진지역은 일찍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던
신앙의 못자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면서 내포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동쪽으로 마냥 떠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듯...
하염없이
걷다가 발견한 곳이 소백산 자락 첩첩산골 연풍. 문경, 제천지역입니다.
관가의 감시를 피할수 있고.. 박해가 심해지면 언제든지 산으로 은신할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땅의 신앙인들은 새재를 넘나들며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한 많은 고개를 넘으며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구름을 보며 용기를 얻고, 태양을
보며 희망을 얻었을 겁니다. 묵묵히 신앙을 증거하고.....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땅은 넓어만 갑니다.
새재의
관문하나 하나를 통과 할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감시병이 조는 틈을 타서 야밤에 수구문을 통해 드나 들었다고하네요.
<사진
설명: 문경새재 제 1관문 수구문>
죄인이
아니면서 죄인처럼 살아 가야했던 신앙인 덕에 우린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답니다. 그 신앙에 얼마나 어렵게 우리손에 들어왔는데...그
과정을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때요.. 이 수구문 ...천국의 문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런 간절한
기도덕에.. 주님께서는
조선인 신부님을 주십니다. 바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랍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단지 1년동안 사목 행위를 하다가 순교의 칼을 받은
것과 달리 14년의 유학생활을 마친 최양업 신부님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이 산길을 넘나들며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퍼뜨렸답니다.
그래서
최양업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고 부른답니다. 초기 천주교의 체계를
바로를 잡으신 분이지요. 아쉽게도 순교의 칼을 받지 못하고, 주막에서
급사를 하셔서..여태 성인 반열이 오르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은 하늘만큼 크답니다. 전 개인적으로 김대건 신부님보다 최양업
신부님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업적이 클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지요..화낼때는 화내고..괴로울때는 괴로워
하고.괼. 교우들과 허심탄회하게 막걸리까지 나누면서 참신앙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최양업신부님은
문경의 진안마을 어느 주막에서 급체로 돌아가십니다. 진안마을 성지.
문경새재를
넘어 봅니다.. 요새는 터널까지 뚫려 연풍까지는 10여분이면 넘습니다..
곰씹으며 자신과 신앙을 돌아보며 한많은 새재를 넘었던 선조와는 많은
차이가 있네요. 빠름을 미덕으로 알며 '朝變夕改'처럼 변하는 제 신앙을
반성해봅니다.
연풍에서
가장 먼저 우릴 맞이해주는 건물이 '연풍공소'랍니다. 쭉뻗은 나무밑에
아늑한 건물이 보이지요.
연풍현의
수령의 행정을 보좌하는 연풍향청 건물이었습니다. 풍속을 바로
잡고 민정을대신하는 일을 했고 그러나 간혹 권한을 남요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었다고 안내문에 쓰여 있네요.
' 민폐를
끼치는 일'...바로 천주교 신자를 잡아 들이는 것이랍니다. 저 건물에서
무수히 많은 신앙인들이 죄없이 죽어갔답니다.
일제때는
헌병대 주재소로 사용되었고, 광복후에는 연풍 지서로 있다가 1963년
천주교에서 매입하여 연풍공소로 쓰였다고 합니다. 죽음의 현장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미사를 드리는 장소로 바뀌었다니... 주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공소는
일제때는 독립군을 잡아들였던 헌병사무실로 쓰였답니다. 박해시절,
일제시대 사용햇던 형구랍니다.이 구멍에 머리를 짓이기고, 지하에서
이 구멍에 밧줄을 달아 교수형을 행했다고 합니다. 슬픈 상징물입니다.
연풍에서
죽어간 순교자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작두를
이겨낸 신앙인 황석두(루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황석두는
나이 20세에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갑니다. 우연히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밤새 토론을 합니다.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면서 '천국의 과거'에
급제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저는 과거에 이미 급제하여 돌아왔습니다."
라로 말합니다. "과거일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여.."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는 작두를 가져다 놓고 그만 두라고 최후 통첩을 합니다.
"작두밑에
목을 내밀어 죽을 지언정 천주를 공경하겠습니다." 그 이후..황석두는
3년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합니다. 온갖 약으로도 그 병을 고치지 못함을
알고 상심해하는 아버님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버님..제가
배우는 교리를 엄하게 다스리므로 더 이상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벙어리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 천주학이 무엇이길래..내 아들이
저렇게 빠졌을까? 그리고 그 이상한 교리가 담겨진 책을 아버지는 탐독합니다.
그리고
온 식구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열렬한 신자가 됩니다..아멘
정성이
가득한 꽃이 황석두(루가) 묘소에 놓여 있습니다.
그 후 황석두는
다불뤼 주교의 일을 돕습니다. 성서번역과 사전편찬을 일을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에게 신부님 서품을 주기 위해 교황청에 특별히 요구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황석두의 부인이 들어갈 수녀원이 없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감시를
눈초리를 벗어나 무수히도 새재를 넘나들며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서슬퍼런 병인박해때 그가 모시던 신부님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당합니다.
다불뤼 주교 옆에 있던 황석두는 스스로 밧줄을 묶습니다.
"나도
잡아가 주세요. 저분들은 나의 스승입니다. 단,,,하루라도 헤어져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분들이 살아난다면 나도 살려니와 내 스승들이 죽는다면
나도 죽겠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선교사 3명과 황석두, 장낙소 5명은 충암 보령군의
갈매못에서 순교의 칼을 받아 죽습니다.
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이곳 연풍에 안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새가 되어 새의 고개 (새재)를 넘고 계십니다. 거룩한 새의 순교자들
덕분에 우린 보다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교수대가 있던 치명터랍니다. 그곳에 높이 10미터의 거대한 노천
십자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십자가랍니다. 주님은 신앙인이 넘나들던 새재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정수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도
참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순교 현양비가
더욱 의연하게 보입니다. 맨주먹으로 추방당하고 신앙을 지키고자
이곳까지 왔는데..
결국은
죽음으로서 주님과 약속을 지킵니다.
지금은
주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새재를 넘는 길은 주님걸었던 십자가의 길이
아닐까요?
성지 바로
앞에 수백년된 느티나무가 서있습니다.
신앙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았는지...가지를 무겁게 숙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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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 문경골짜기 고요에사는데..제가 참 바보같아요!신자인데다..문경살면서..진안성지도 한번도 안가보고 연풍성지도 못갔답니다..얼마나 주님게 죄송스러운지..더 바보같은건 성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세레받은지 얼마안되서 그런지..꼭 찾아 가보고 싶네요..교통편이 좀 불편해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