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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소정공파-참의공(탁)파-첨정공(순)․죽호공(섭) 후
(坡平尹氏 昭靖公派-參議公(琢)派-僉正公(淳)․竹湖公(涉) 后)
낙재공(휘 벽) 후손 계보 및 약사 1
(樂齋公(諱 璧) 後孫 系譜 및 略史)
낙재 종중(樂齋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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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기 973년(제4대 광종 24년) 임지인 경주에서 서거하시니 향년 81세이었으며 이는 태사공의 양쪽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태사공의 뒤를 이어 5세손인 문숙공(文肅公)(諱 관․瓘)은 서기 1040년(제10대 정종 6년) 6월 1일 파주에서 탄생하고 자(字)는 동현(同玄), 호(號)는 묵재(黙齋),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문숙공(文肅公)께서는 제11대 문종 27년(서기 1073) 진사과에 급제하고 그 다음해 대과에 응시하여 문과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 관직은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 예빈주부(禮賓主簿)를 거처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주(廣州), 충주, 청주, 도출추사(道出推事)를 역임하고 상서이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추밀원원사(樞密院院事),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판한림원사태학사(判翰林院事太學士)가 되었고 제15대 숙종 9년(서기 1104)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동북면행영(東北面行營)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로 발탁되어 제1차 여진정벌의 장도에 오르게 되고 그 후 태자태보판상서병부한림원사(太子太保判尙書兵部翰林院事),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 참지정사상주국감수국사(參知政事上柱國監修國事)가 되었으며, 제16대 예종 2년(서기1107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정1품)에 임명되어 동년 12월에 제2차 여진정벌에 오르게 되어 정주(定州)로부터 진격하여 여진촌락 135처를 격파하고 함주 이하의 여진정벌 지역에 6성을 쌓고 이듬해(서기1108년) 2월에 3진성을 더 쌓아 모두 9성을 쌓고 돌아왔다가 7월에 다시 출정하고 또 그 이듬해(서기1109년) 5월에 빼앗긴 길주성을 회복하였다.
그 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공신 호(功臣 號)를 받고 문하시중판상서(門下侍中判尙書) 이부사지군국중사(吏部事知軍國重事)에 제수되었으며 예종 6년(서기1111년)에 71세로 운명하시었으며 예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문숙공은 고구려의 옛 강토인 북녘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여 민족전성시대를 구현하겠다는 웅지 하에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700리까지 진격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천리변경에 구성을 쌓고 40만의 남방민을 이주시킴으로서 민족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여 이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지회강(拓地恢疆)의 위업을 이룩한 위대한 영걸이었다.
문숙공(文肅公)에 이어 15세손인 소정공(昭靖公)(諱 坤 15世孫)은 고려 말에 태어나 문과급제하고 조선 조에 들어와 벼슬이 동지총제(同知摠制),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正2品)에 올라 우리 오윤(吾尹)이 고려조 500년의 영화에 이어 조선 조 500년간에도 영화를 누리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우리의 중시조(中始祖)이다.
특히 조선 조 제2대 정종2년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源)(後에 第3代 太宗)을 도와 공을 세운 공로로 추충익재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공신 호를 받고 파평군(坡平君)에 封하여 졌다.
소정공(昭靖公)은 아들을 희이(希夷)(上護軍公), 희재(希齊)(漢城公), 삼산(三山)(府院君公)의 3형제분을 두었는데 우리는 둘째 한성공(漢城公)(諱 希齊 16世孫)으로 이어지며, 한성공은 벼슬이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고 부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追增)되었다.
한성공(漢城公)은 고려말 서기 1380년에 태어나 정계에 진출하여 서기 1407년 제천감무(提川監務)에 제수되고 태종 9년(서기1409년) 뜻하지 않게 중부(仲父)인 원평군(原平君)(穆)과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백씨(伯氏) 상호군(上護君)(希夷)과 더불어 삭탈관직 유배되었다가 신원(伸寃: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이 되어 공조참의(工曹參議),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한성공의 아들은 경(坰)(白川公), 은(垠)(參議公), 증(增)(副使公), 배(培)(掌令公), 훈(壎)(牧使公), 감(堪)의 6형제분인데 우리는 둘째 참의공(參議公)(諱 垠 17世孫)으로 이어지며, 벼슬은 공조참의(工曹參議),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제7대 세조 4년(서기1458년) 광주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참의공(參議公)은 사로(師路)(忠景公), 사석(師晳)(執義公), 사유(師有)(郡守公), 사화(師華)(別坐公), 사공(師貢)(司正公), 사하(師夏)(通禮公), 사건(師騫)(司直公), 사연(師淵)(護軍公), 사맹(師孟)(禦侮公)의 9형제를 두었는데 이를 우리는 세칭 9방파(九房派)라고 부르며, 우리는 둘째 집의공(執義公)(諱 師晳 18世孫)으로 이어지면서 파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집의공(執義公)의 호는 만돈암(晩遯庵)이며 벼슬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종3품)에 올랐다. 집의공은 35세가 되어도 과거에 뜻을 품지 않고 다만 학문연구와 정신수양에만 전심전력하였으며 고매한 덕행을 쌓았던 것이다.
집의공의 이와 같은 인품이 조야에 알려지자 세조 9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불사(不仕)하였으며, 또 제9대 성종 조에 주부(主簿)(正6品)벼슬을 내렸으나 불사하고 그 후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임명하였으나 또한 나아가지 아니하자 성종 8년(서기1477년)에 조정에서 다시 공을 불러 사헌부집의(종3품)를 제수하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때 성종은 어지러운 정치를 잘 다스리는 길과 그 배우는 방도를 집의공에게 물었다고 했다.
그 후 집의공은 제10대 연산조에 이르러 왕이 음탕하고 날로 포악해짐으로 왕에게 정사가 산같이 쌓이고 영이 서지 않으므로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 라고 극언으로써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사모를 벗어 던지고 관삼(官彬)을 찢어 버린 후 청주로 피신하였다.
청주 옥화대(玉華臺)로 피신한 집의공은 산 동쪽에 수 칸의 초가를 짓고 은거하면서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수훈정(受訓亭)이라고 하고 소나무 5그루와 버드나무 5그루를 심고 후학 20여인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살았다.
집의(執義)라는 관직과 호를 따서 우리는 집의공파(執義公派), 또는 만돈암파(晩遯庵派)라 하고 있다.
집의공의 아드님은 오(石奧․ ․修義公), 전(石眞 ․縣監公) , 적(磧 ․司果公)이고, 우리는 장방(長房)으로 이어지며 수의공(修義公․19世孫)은 용궁 무이촌(龍宮 武夷村)으로, 현감공(縣監公)은 그대로 청주에 머물고, 사과공(司果公,정6품 관직)은 공주로 각각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수의공은 벼슬이 수의(修義․종8품)에 이르므로 우리는 수의공파(修義公派)라고 부르며, 수의공은 아드님에 은좌(殷佐․察訪公), 은필(殷弼), 좌상(佐商)(無后), 은수(殷秀)(無后), 4형제분을 두셨으며, 우리는 장방(長房)으로 김천찰방(金泉察訪)을 지내신 찰방공(察訪公․諱 殷佐 20世孫)으로 이어지며 찰방공은 아드님을 8형제를 두셨는데 근(菫), 우(瑀), 완(琓), 탁(琢․參議公), 왕발(王發․無后), 왕헌(王獻․無后), 침(琛), 박(珀․無后)이시다.
우리는 넷째인 참의공(參議公․諱 琢 21세손)으로 이어지며 손자 죽호공(竹湖公․諱 涉․23세손)이 현달(顯達:입신출세)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다시 참의공(參議公)이 용궁(龍宮) 무이촌(武夷村)에서 대죽(大竹)으로 이거하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자리를 잡으니 이때가 조선조 제11대 중종 35년으로 서기1540년경이며 참의공이 우리 신풍(新豊) 오윤(吾尹)의 파조(派祖)가 되는 것이다.
신풍(大竹)까지의 낙향 경위를 살펴보면 만돈암공(諱 師晳 ․執義公)께서는 한양에서 청주로 피신하고 그 아드님 수의공(修義公․諱 石奧 )께서는 청주에서 용궁으로 그 손자인 참의공(諱 琢)께서는 용궁 무이촌에서 신풍(大竹)으로 각각 이거한 것이다. 참의공(諱 琢)께서는 희증(참판공), 희안, 희민(무후), 희상(호군공), 희정(무후), 희로(무후)의 아드님 6형제 분을 두셨는데 현재 이곳 신풍에는 공의 첫째 아드님이 호조참판을 증직 받아 참판공이라 부르는 참판공(휘 희증 22세손)의 후손과 넷째로 호군을 지낸 호군공(휘 희상 22세손)의 후손 일부가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참판공(휘 희증)은 아드님을 형제분을 두셨는데 첫째가 첨정공(僉正公․諱 淳 23世孫) 둘째가 죽호공(竹湖公․諱 涉․23世孫)으로 첨정공은 탕보(湯輔․24世孫) 향(晑․25世孫)을 거쳐 두원(斗源)으로 일가를 이루고, 죽호공은 탕신(湯臣․24世孫)과 탕빙(湯聘)의 형제분을 두었으며 탕신은 요(墝), 돈(墩), 완(垸), 장(墇) 4형제를 두어 요(墝․25世孫)는 현재 철재(哲在․38世孫), 돈(墩)(25世孫)은 광식(光植․36世孫), 완(垸․25世孫)은 형철(炯喆,37世孫), 장(墇․25世孫)은 대수(大洙․35世), 기병(己秉․36世孫)으로 일가를 이루고, 둘째인 탕빙(湯聘․24세손)은 성(晟․25世孫)을 거쳐 기태(基泰․39世孫)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며, 호군공(護軍公․諱 希商 22世孫)도 4형제분을 두었으며, 홍(泓․23世孫)은 호군(護軍: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4품 무관)을 지냈으며 탕우(湯佑․24世孫) 지원(之垣․25世孫)을 거쳐 원석(元碩․36世孫)으로 일가를 이루고, 연(泳․23世孫)은 운신(耘莘․24世孫) 선복(善馥․25世孫)으로 무후가 되고, 곤(滾․23世孫)은 탕민(湯民․24世孫) 지유(之有․25世孫)를 거처 종창(鍾昌․35世孫)으로 일가를 이루고, 호(湖․23世孫)는 천옥(天玉․24世孫) 기운(起運․25世孫)을 거처 태혁(泰赫․35世孫)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이곳 신풍에는 첨정공(휘 순)의 후손과 죽호공(휘 섭)의 후손 그리고 호군공(휘 홍)의 후손 일부가 일가를 이루어 단란하게 살고 있다.
‘집(火集)’자의 백씨가 ‘헌(火憲)’자 이신데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가 고향인 경오(敬五․35世孫)가 구미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신풍(新豊)의 전설
이곳은 그 옛날 주변이 커다란 왕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으면서 앞으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들판이 전개되고 그 너머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건너는 살아 꿈틀거리는 용과 같은 산들이 둘러쳐 진 목가적인 마을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한대(大竹)’라고 불리어지는 곳이었다. 여기에 8문중이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화락하게 살고 있으니, 그 8문중은 가평李氏, 경주崔氏, 밀양朴氏, 인천蔡氏, 김녕金氏, 김해金氏, 영천李氏, 동래鄭氏 등이라고 전한다.
낙동강 기슭 주변 환경이 수려한 곳에 곡강진(曲江津) 바위 위에는 가평 이씨들이 지은 화려한 곡강정(曲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매일 연회를 열고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당골이라는 곳에는 8 문중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서당이 있어 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날도 즐거운 연회를 베풀고 있는데 호호백발의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하는 말이 “이곳 곡강진 바위굴 깊숙한 곳에 여러 번 승천하여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가 있는데, 이를 잡아야만 귀 문중이 더욱 귀하게 되고 번창할 것이다.”라고하자 가평 이씨 가문에서 그만 탐욕이 생겨 바위굴 입구에다가 장작불을 피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몇 며칠을 두고 불을 피우니 바위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물이 들끓게 되며 수증기가 하늘은 뒤덮고 컴컴해지기 시작하더니만 그만 천지가 암흑으로 변하면서 그 안에 있던 이무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고, 이 때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바위가 갈라져 흩어지면서 커다란 바위 한 덩어리는 갈라진 바위사이에 걸치는가 하면 그 밑에는 커다란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면서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아름다운 곡강정은 불타버리고 동시에 서당골에 있던 서당에도 불이나 타버리는가 하면 커다란 왕대 숲도 시름시름 말라 버리게 되고 팔문중이 단란하게 살던 마을에서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되고 말로서 말 많으니 말조심하자고 나쁜 말을 가려 무덤(言塚)을 만들어 지난날의 화락을 되찾으려고 하였으나 꿈은 이미 사라지고 자꾸만 젊은 사람이 없어지는가 하면 죽게 되자 모두들 무서워서 하나 둘 동네를 떠나게 되고 마을은 점점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가평 이씨들도 재앙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고 다른 성씨들도 하나 둘 떠나 버린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웃 동리에서 이웃 동리로 퍼져 용궁의 무이촌에 사는 윤씨의 성을 가진 탁(琢)이라는 분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와 보니 과연 소문과 같은지라 이곳에서 하루 밤을 지새우게 되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당부하기를 “아무도 내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는 자가 없구나, 네 시조가 용연(龍淵)에서 태어나셨고 또 겨드랑이에는 용의 표시인 비늘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내 시신을 거두어 청미산(靑美山)에 장사를 지내주고 소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가꾸면 네 자손들이 이곳에서 영원히 번성하리라.”하고는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기이하게 여기고 문득 일어나 곡강진이라는 곳으로 나가보니 거기에는 몇 달이 되어도 썩지 않은 이무기 시신이 있어 이를 거두어 청미산에 후히 장사를 지내고 무이촌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또 다시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정성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런데 왜 소나무 심는 것을 잊고 이곳에 있느냐?
하루 속히 그 곳에 가 소나무를 심고 살기를 바란다.”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尹琢(탁)이란 분이 가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청미산에 소나무를 심고 가꾸니 과연 자손이 번창하게 되고 이곳에 있던 다른 문중들은 하나 둘 떠나 버리고 오윤만의 집성촌이 이루어 졌으며 이분이 바로 신풍 윤의 파조가 되는 것이다. 곡강진에 가보면 아직도 커다란 바위가 갈라진 바위 사이에 걸쳐있는가 하면 가평 이씨들의 문토가 일부 남아 있고 서당골에는 서당이 있었다는 자리를 파 보면 지금도 기와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붉은 청미산은 소나무로 가득 심겨져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최근에 와서 다른 잡목이 우거지고 우리 윤이 하나 둘 떠나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근에는 아직도 김녕김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경주최씨 동래정씨가 일부 살고 있는가하면 그 외의 성씨들은 거의 다 떠나고 몇몇 성씨들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 한대(대죽)와 오윤은 이렇게 이루어 졌으며 오윤의 시조가 용연에서 태어나시었으며 양쪽 겨드랑이에 용의 표시인 비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 오윤은 용과 인연이 깊어 이곳으로 찾아들게 되고 문호를 차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풍이라는 이름은 근세조선 말기인(고종43년) 1906년 9월 일제에 의하여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3. 28世 낙재(璧)공의 괘겸(掛鎌) 입향(入鄕)
죽호공(휘 섭․23세손) →장자 탕신(24세손) →4자 장(墇․25세손) →3자 방길(邦吉․26세손) →차자 집(火集․ ․27세손) →독자 벽(璧․28세손)로 이어져 내려 왔다. ‘집’자 할아버님은 조선 숙종조에 사셨고 (1693~1747․壽55) 산소는 상학(翔鶴)에 유원(酉原) 쌍분이며 前墓는 壬原이다.
외아드님 ‘벽(璧)’자께서는 1709년에 나시어 1758년에 몰하시어 50세를 누렸다. 묘는 군위군 소보면 평호리(괘겸) 절골 유원(酉原)에 쌍분으로 모셔졌다. 그 아드님 원탁(元鐸․29세손), 원석(元錫) 형제분이시다. 이하 세계표는 ‘파평윤씨 소정공 첨정공․죽호공파세보’(1992년 발행)를 참조하기 바란다.
입향조 ‘벽(璧)’자 할아버님의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입향조 璧자 할아버님 비문
증가선대부 파평윤공 휘 벽(璧)의 자(字)는 치원(致元)이며 호(號)는 낙재(樂齋)이시며 그 계출(系出)은 파평으로 고려 태사 휘 신달(辛達)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대로 고관을 지내며 고려의 귀족으로 있었고, 조선조에 와 휘 곤(坤)이 추충좌명공신 이조판서 파평군 시(諡號) 소정공이 있었다.
18세손에 휘 사적이 집의(執義)를 지내다가 연산조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시었다. 용궁 죽고향(竹皐享)에서 제사를 올리니 이름하여 만돈암이다. 23세손에 휘 섭(涉)이 있어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그 공으로 장예원 사평을 제수 받으니 호가 죽호(竹湖)로 (수의공의) 5세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집(火集)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방길(邦吉)로 은덕자수(隱德自修)하시었다. 부군(낙재공)께서는 숙종조 기축년(1709년) 3월 28일에 태어나셨다. 천자(天姿)가 순근(純謹)하고 지행(志行)이 고결하였으며, 풍채가 수랑(秀郞)하고 기우(氣宇)가 호방하셨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버리고 강호를 마음대로 노니시며 산수에 뜻을 부치셔서 사람들과 떨어져 쓸쓸하게 적라서강에서 사셨다. 사람들로부터 덕과 행적을 감추고 자손을 가르치고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산수 간을 편안히 즐기면서 세속의 사물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시니 초연히 속세를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때는 영조 무신년으로 정희량의 역모(謀逆) 반란의 시기였다. 영남 일원이 뒤집힌 파도의 바다처럼 시끄럽고 조야(朝野)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를 때에 부군께서는 태연히 스스로를 지키며 명철보전 하셨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데 부군의 평소의 마음가짐과 처신함이 얼마나 신중했는지 알 수 있겠다. 영조 무인년(1758년) 10월 9일에 집에서 수를 마치시니 수(壽)가 겨우 50이었다. 군위군 (소보면)낙거리(괘겸) 유좌지원(酉坐之原)에 장례 지냈다. 배(配)는 신안 주씨로 종의(宗儀)의 여식이다. 공이 돌아가신지 20년 후에 돌아가셔서 같은 산소에 부장하였다.(附葬同塋) 몇 백년전 유사(遺事)와 행적을 자손들이 가진 가승(家乘)에 기록된 바 대로 간략히 전말을 적어둔다.
尹昌漢 撰 尹永漢 書
庚申(1980년)음 2월 20일 設表碑
4. 죽고서원(竹皐書院)
가. 죽고서원(竹皐書院) 배향(配享)인물 : 윤사석(尹師晳)(執義公․18세손), 윤 섭(尹 涉)(執義公의 5代孫, 竹湖公․23세손)
나. 죽고서원(竹皐書院)의 역사
서기 1771년(신묘 영조 47년)에 유림의 뜻을 모아 서원을 건립하여 한산(韓山) 이종수(李宗洙)가 집의공 사석을 봉안하고 임여재(臨汝齋) 류 규(柳氵奎 )가 상향(常享) 축문을 작성하였으며, 이어 여강 이천섭(李天燮)이 죽호공(竹湖公) 섭(涉)의 봉안문을 작성 배향시켜 모시었던 것이다. 그러나 1868년(무진 고종5년) 9월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철되고 1902년(임인)에 죽고서원 유허비를 건립하고 참찬(參贊) 면우(俛宇) 포산(苞山) 곽종석(郭鍾錫)이 찬(撰)하고 후손 한오(漢五)가 서(書)하다.
다. 죽고서당(竹皐書堂)
죽고서원이 훼철(1868년 9월)되고 배움의 장소가 마땅치 못하여 서원이 해체된 잔해 일부를 갖고 규모를 축소하여 43년이 지난 뒤 1911년(신해)에 현재의 위치에 죽고서당을 중건하고 학문을 강론하게 되었으나 신 문화의 유입으로 학교가 세워져 서당으로서의 역할은 사라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고서원 복원자금 출처/집의공(윤사석)의 종중 토지 매각대금 일부와 후손들의 성금으로 충당
2. 윤씨 관향(本)에 대한 고찰
○ 尹氏는 파평 윤씨 외에 관향이 약 25본이나 된다.
즉 파평(坡平), 남원(南原),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평(海平), 칠원(漆原), 무송(茂松), 예천(醴泉), 기계(杞溪), 양주(楊州), 현풍(玄風), 죽산(竹山), 고창(高敞), 평산(平山), 영천(永川), 여주(麗州), 경주(慶州) 등이다.
○ 그 중 가장 오래된 성은 칠원 윤씨로서 신라 제29대 태종무렬왕 때인 서기650년경에 득성이 되었다고 하며 그 다음이 우리 파평 윤인데 서기 893년에 시조가 탄강하였다.
○ 관향 별 중요 인구수를 살펴보면 2000년 현재 파평 약 71만 여명, 해남 약 4만8천명, 칠원 약 4만4천명, 남원 약 3만7천명, 해평 약 2만2천명, 무송 약 1만3천명, 함안 약 6천명 등이다.
○ 우리나라 성씨는 16세기까지는 약 4300성이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는 약 300성으로 줄어들면서 왜정을 거쳐 8.15광복 후에는 약 250성이 되고 있다.
3. 파평 윤씨가 명문(名門)인 이유
○ 세종대왕 및 퇴계(퇴계) 선생의 오윤(吾尹)에 대한 극찬.
우리 민족의 성군이신 세종대왕께서 오윤에 대하여 ‘대신의 후손으로서 파평윤씨같이 번성한 가문이 없다’고 칭송하였으며, 퇴계 선생도 오윤에 대하여 ‘동방에서 으뜸가는 명족(名族)이다’라고 극찬하였다.
○ 시조 태사공 이래 천여 년의 유구한 세월동안 문무장상(文武將相)을 배출한 천년 거벌(巨閥)이다.
○ 조선 조 최다 과거 급제자 배출
조선 조 500년간 문과급제자 14,624명 중 왕족인 전주 이씨를 제외하고는 오윤이 가장 많이 합격하였다.
① 전주이씨 844명
② 파평윤씨 420명
③ 안동권씨 359명
④ 남양홍씨 329명
⑤ 안동김씨 325名
○ 6명의 왕비와 6명의 왕 배출.
○ 세종대왕을 전후한 왕실과 통혼사례 다수.
○ 당시 오윤 출신 중 20여 명이 왕실과 통혼하였다.
○ 세종대왕의 매부 즉 태종의 부마(사위) 중에서 4名.
○ 세종대왕의 자부 즉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貞靖公 璠의 따님).
○ 세종대왕의 부마인 충경공(忠景公:師路 九房派의 長房).
○ 세종대왕의 증손인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平靖公 壕의 따님).
○ 세종대왕의 현손인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靖憲公 汝弼의 따님) 및 문정왕후(文定王后:靖平公 之任의 따님).
○ 그 외 세종대왕의 증손서 2명 (成宗의 駙馬 2名 等).
○ 조선 조에 있어서 역대 국왕들의 오윤에 대한 특별 예우.
○ 제5대 문종은 오윤에 대하여 문숙공(文肅公) 윤 관(尹瓘)의 위국훈업(爲國勳業) 실행은 고려 오백년사나 우리나라 천백 대의 기틀을 공고히 한 것 일뿐 아니라 그 충의지적(忠義之蹟)은 가히 다른 대의 신하와 비길 수 없이 큰 것이므로 그 자손들에 대하여서는 호세(戶稅), 군역(軍役), 잡역(雜役) 등을 면제해 주라는 전교를 내려 오윤에 대하여 특별예우를 하였다. 이 예우에 대하여서는 제9대 성종, 제14대 선조, 제19대 숙종, 제21대 영조 등도 같은 내용의 전교를 내려 그 시행이 해이해지면 수년 후 다시 전교를 내려조선 조 500년간 오윤에 대하여 특별 배려를 하였다.
○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 편찬.
- 파평 윤씨 족보는 제7대 세조 3년(1457년)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82년 후인 제11대 중종 34년(1539)에 간행하였다.(己亥大譜)
- 안동 권씨 족보가 제9대 성종 7년(1476)에 간행되어 우리 기해대보보다 63년앞섰으나 편찬 시작은 기해대보가 20여년 앞섰던 것이다.
- 그 다음이 문화 유씨 족보로 제13대 명종 17년(1562)에 간행되어 기해대보보다 23년이 늦다.
6. 세(世)와 대(代)의 구별
○ 시조(始祖)를 일세(一世)로 하여 차례대로 따져서 정하는 것이 세(世)이고 자기를 뺀 나머지를 차례대로 따지는 것이 대(代)이다.즉 세(世)는 자기까지 합하여 계산한 대수(代數)이며 대(代)는 자기를 빼고 아버지까지를 合하여 계산한 대수를 말한다.
예컨대 父子의 사이는 世로는 二世이지만 代로는 一代인 것으로 始祖로부터 36世인 사람은 代로는 35代孫이 된다
1. 파평윤씨 참의공(參議公:琢)파 계보 및 약사
1世 신달(莘達)(太師公)
2世 선지(先之)(功臣公)
3世 금강(金剛)(僕射公)
4世 집형(執衡)(文靖公)
5世 관(瓘)(文肅公). 이하 계보는 앞 페이지 참조
2. 시조 신달(莘達․태사공)의 탄생, 1世
○ 태사공(太師公)은 우리 파평 윤씨의 시조
○ 탄 생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7년(서기893) 음력 8월15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에 있는 용연에서 탄생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100여년 전의 일이다.
○ 탄생 내력
파평면 눌노리(訥老里)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는 태고적부터 큰 연못이 있어 이를 용연(龍淵)이라 불렀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연못 속에는 용인이 살고 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풍우가 몰아쳤다고 전한다.
○ 태사공이 탄생하실 당시 용연 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그 못 위에 한 옥함(玉函)이 떠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그 고을 태수(太守)에게 알려 확인 차 태수가 왔을 때는 이미 옥함은 연못 중앙으로 밀려들어가고 해는 저물어 다음날 확인하기로 하고 돌아갔는데 그때 연못 건너편에서 늦게까지 빨래를 하던 윤 온(尹 媼)이라는 노파가 있었는데 옥함이 그 노파의 앞으로 감에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의 우모(羽毛)에 쌓인 어린사내아이가 있었다.
노파가 신기하게 여겨 그 아이를 자세히 본즉 얼굴은 용의 얼굴을 닮았고 양 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어 해와 달을 상징하였으며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돋아 있고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다.
이에 노파는 이 아이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고 데려가 정성을 다하여 키우니 기골이 장대하고 재기가 뛰어났는데 이분이 바로 오윤의 시조이다.
※ 용연(龍淵)
용연은 원래 광대한 연못으로 추측되나 유구한 세월에 의해 주위의 침간(浸墾)으로 현재의 면적은 2,531평으로 파평 윤씨 종중으로 소유 등기되어 있으며 수호전(守護田) 1,530평이 있다.
○ 윤씨 성을 얻은 경위.
- 옥함에 尹 字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 태사공이 옥함에서 나올 때 손바닥에 尹 字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설.
- 옥함을 건진 노파의 성이 尹氏였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 우리나라 古史를 보면 건국신화나 씨조 설화에는 탄생 경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신화적인 사례가 많은데 그 예가 천강설(天降說), 지생설(地生說), 난생설(卵生說), 등의 설화가 있는데 우리 시조의 경우는 용연 탄강설이다.
○ 성장과정
- 옥함에서 나오신 태사공께서는 윤 온 노파의 극진한 정성으로 양육되었으며 성장함에 기골이 장대하고 재국이 뛰어났다.
- 공께서는 파평산 아래 살면서 그 산 꼭대기에 치마대(馳馬臺)라는 훈련장을 만들어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무예를 닦으면서 한편으로는 학문에 매진하여 후일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 송도)에 있는 조정에 출사(出仕:벼슬을 하여 진출)하였다.
※ 치마대(馳馬臺) : 태사공께서 파평산 마루에 축을 쌓고 말을 타고 무예를 닦은 곳으로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임진강(臨津江)의 유래 : 개경(開京)에 출사하기 위하여 파평산(坡平山) 아래에 있는 집에서 70여 리를 말을 타고 임진강을 건너 내왕하였는데 말이 빠르기가 나는 듯 하였고, 강을 건널 때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물결을 끊고 마시듯 강을 건넜다고 하여 이곳을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 지었다가 후에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 이것이 다시 후일에 와서 음이 변하여 임진강(臨津江)이 되었다고 전한다.
○ 당시의 시대적 배경
삼국을 통일하였던 신라는 말기에 이르러 귀족사회의 부패와 국왕의 실정으로 도처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각지에서 토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전국적인 난동의 와중에 빠져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게 되자 이 틈을 타 각처에서 군벌이 봉기하였는데 그 중 견훤(甄萱)은 완산주(完山州․全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건국하고 궁예(弓裔)는 개성을 근거로 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한반도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소위 후삼국이 결성되었다.
○ 그 후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휘하에 있던 장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국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건국하였으며(서기918년 당시 태사공 25세) 그 뒤 17년 후 935년 신라의 경순왕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어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그 다음해 왕건은 끝까지 반항하는 후백제를 정벌하여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 당시 태사공(太師公)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과 같이 왕건을 도와 궁예와 견훤을 정벌하고 왕건의 삼국 통합에 많은 공을 세웠다.
○ 그때 공신(功臣)으로 一等이 5名, 二等이 12名, 三等이 10名, 四等이 2명 등 모두 29명이었는데 이때 공신 중에는 신숭겸(申崇謙:平山 申氏, 始祖), 배현경(裵玄慶:慶州 裵氏, 始祖), 장길(張吉:安東 張氏, 始祖), 홍유(洪儒:義城 洪氏, 始祖), 김선평(金先平:新安東 金氏, 始祖), 류차달(柳車達:文化 柳氏, 始祖), 이도(李棹:全義 李氏, 始祖) 등이 유명하다.
○ 태사공(太師公)은 이등공신에 책훈(策勳)되어 벽상삼한(壁上三韓), 익찬공신(翊贊功臣)의 공신(功臣) 호(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을 받았으며 태사는 정일품의 관직으로 왕의 고문이다.
○ 고려는 건국 후 25년만에 태조 왕건이 승하하고 제2대 혜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태사공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대도독(大都督:東京 大都督)에 부임케 했는데 태사공 보령(寶齡)이 51세며 81세로 서거할 때까지 재임 30년간을 수도인 개경에 한 번도 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 때 아드님 공신공(功臣公:先之)은 인질로 개경에 있었기 때문에 그 후 부자간에 한 번도 상면치 못하였다.
○ 혜종(惠宗)이 태사공을 동경 대도독으로 부임케 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일설은 당시 동경 대도독부와 서경 대도독부(평양)는 국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곳이었기 때문에 서경 대도독부에는 왕족을 보내고 동경 대도독부에는 태사공을 보내어 신라 유민을 통치하기 위함이었다는 설. 일설은 태사공의 인품이 너무 비상하고 출중하여 왕인 혜종이 이를 꺼려 공을 외지인 경주에 보낸 후 그 곳에서 서거하실 때까지 부르지 아니 하였다는 설이 있다.
○ 公께서는 제4대 광종(光宗) 24년(서기973) 임지인 경주에서 서거하니 향년 81세였으며 이는 공의 양쪽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 공의 배위는 문화 류씨(柳氏)로서 문화 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누이이며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申崇謙) 부인의 동생이고 고려태조 왕건의 비 류(柳)氏의 언니라고 하나 다른 설도 있다.
○ 공의 묘소는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기슭에 모셨다.
○ 배위 묘소는 태사공 묘소에 합장되었다는 설과 경주시 남면 봉동산 아래 박달리에 모시었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 태사공 묘 실전(失傳) 및 심묘(尋墓)
- 공의 묘는 이조 중엽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경주의 토호 이하지(李厦榰)라는 자가 공의 묘 표석을 분질러 땅에 묻고 자기네 묘를 몰래 써서 실전되어 오던중 숙종 45년(서기 1719년) 경주에 거주하던 후손 윤 숙(尹 璹)이, 이 사실을 서울에 있는 일가 여러 사람에게 알려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 당시 서울에 있던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 등 유수의 종인들이 종회를 연 끝에 종인 대표를 경주에 보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에게 소청을 하였으나 이하지의 간계로 오히려 무고로 몰리는 등 별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그 후 각종 전기, 보책(譜冊), 사료 등을 통하여 찾고자 하였으나 정확한 증거될 만한 것을 얻지 못하던 중 영조 13년(서기 1737년) 후손 봉정(鳳庭)이 경주(慶州) 영장(營將:진영장)이 되어 그곳 주민들의 소문을 토대로 하여 그들이 지목하는 묘 아래를 파본 결과『대부 윤(大夫 尹)』이라는 비석 조각이 나왔으나 그것만으로 확정하기 곤난하던 중 영조 15년(1739)에 후손 양래(陽來)가 경상도 감사에 부임한 후 병정을 동원하여 7일동안 그 부근을 파본 결과『선지 금강(先之 金剛)』이라는 넉자의 비석조각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 글씨 넉자는 곧 太師公의 아드님인‘선지(先之)’와 손자이신 ‘금강(金剛)’의 휘자(諱字)이므로 太師公 묘소가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곧 이하지(李厦榰)가 투장(偸葬:남몰래 묘를 씀)하였던 분묘 6기를 파서 이장시킨 후 태사공의 묘역을 다시 봉축하고 그 이듬해인 서기 1740년 묘표를 다시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 그 후 10여년이 지난 1751년 묘 왼쪽에 재사(齋舍)를 지어 제기, 의물(儀物) 등을 보관하여 묘를 수호하였으며 그 재사는 그 후 독지가의 성원으로 수차례에 걸쳐 증,개축되었다.
○ 1833년 묘소 근처에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창건하여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毁撤)되고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 봉강재(鳳岡齎) : 태사공의 묘소와 재사, 봉강서원이 있던 부근일대의 영역을 말한다.
- 위토 관계 : 임야 103 정보, 밭 약 5,000평, 논 약 25,000평
二世 선지(先之․功臣公)
○ 아버지 太師公을 따라 고려의 삼한 통일에 헌신하여 그 공로로 공신 호를 받았는데 관직이나 그 외 사적에 대해 고증할 만한 자료나 사료가 없어 잘 알 수가 없다.
○ 공은 태사공이 동경 대도독(경주)으로 봉직하는 동안 30년간 인질로 개경에만 살았다.
○ 공의 묘는 풍덕군(지금 개성시) 중면 식현리에 모셔졌다.
○ 공은 인질로 개경에만 머무르다 돌아가자 아버지 태사공이 계신 경주에 안장하기 위하여 상여가 그곳으로 가던 중 식현 고개에 이르러 상여가 더 나아가지 않고 상여 중간이 부러지기에 그 곳이 길지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안장하였으며 그 후 공의 아드님이신 복야공(金剛)도 그 바로 아래 안장되었다.
○ 천 여년 동안 실전 되였다가 이조 정조 3년(서기 1779년) 후손 승지 윤숙이 그 지역 주민의 소문을 토대로 그 부근을 발굴하던 중 위의 무덤에서『尹先之』아래 무덤에서『僕射 尹金剛』이라는 지석(誌石)을 발견하게 됨에 공의 묘와 복야공의 묘를 찾게 되었다.
3世 금강(金剛․복야공․僕射公)
○ 공의 관직은 상서성좌복야(尙書省左僕射․正二品)에 이르렀으나 그 외의 사실은 고증할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다.
○ 공의 묘는 아버지 공신공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으며 실전 및 심묘 경위는 功臣公(先之)의 묘와 같다.
四世 집형(執衡․文靖公)
○ 복야공(금강)의 아드님으로 관직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었고 사후에 상서성우복야(尙書省右僕射․正二品)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묘는 연안(延安) 자달동(紫達洞)에 있으며, 실전되었던 것을 이조 순조 7년(서기 1807년)에 후손 군수 광부(光孚)가 종인 각(殼)과 평산군수 치험(致儉)을 현지에 보내어 부근을 발굴한 결과 공의 휘자가 쓰인 지석이 나와 묘를 찾게 되었다.
○ 배위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손녀이다.
3. 문숙공 윤관(尹瓘)장군
五世 관(瓘․文肅公, 文科)
○ 문정공(文靖公․執衡)의 아드님으로 고려 제10대왕 정종(靖宗) 6년(1040) 6월 1일 파주에서 탄생하고 자(字)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黙齎),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 고려 제11대 문종 27년(서기 1073년)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고 그 다음해 대과(大科)에 응시하여 문과 장원급제하였다.
○ 그 후 관직에 나아가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 예빈주부(禮賓主簿)를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합문지후(閤門祗侯)의 합문(閤門)은 고려 때 조회(朝會) 의례(儀禮)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요즈음 의전 비서관(儀典秘書官)과 같은 것)로서 광주(廣州), 충주, 청주, 도출추사(道出推使)를 역임하고 상서이부원외랑(尙書吏部員外郞),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추밀원원사(樞密院院事),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판한림원사태학사(判翰林院事太學士)가 되었고 제15대 숙종 9년(1104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동북면행영(東北面行營) 병마도통사(兵馬都統事)로 발탁되어 제1차 여진정벌(女眞征伐)의 장도에 오르게 되고 그 후 태자태보판상서병부한림원사(太子太保判尙書兵部翰林院事),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 참지정사상주국감수국사(參知政事上柱國監修國史)가 되었으며, 제16대 예종 2년(1107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正一品)에 임명되어 제2차 여진정벌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공신 호를 받고 문하시중판상서(門下侍中判尙書) 이부사지군국중사(吏部事知軍國重事)에 제수되었다.
○ 공은 고구려의 옛 강토인 북녘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여 민족전성시대를 구현하겠다는 웅지 하에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칠백리까지 진격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천리변경에 9성을 쌓고 40만의 남방민을 이주시킴으로서 민족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여 이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척지회강(拓地 恢疆)의 위업을 이룩한 위대한 영걸이다.
※ 여진정벌(女眞 征伐)
○ 여진은 만주 동북부 일대에 걸쳐 살던 퉁구스의 일파로서 말갈 만주족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발해, 고려초기에는 그들 나라의 지배하에서 만주의 동북부 변방에 흩어져 살았는데 고려 제6대 성종때, 즉 10세기말에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우꼬내가 부족을 통일하더니 그 아들 영가(盈歌)가 추장이 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고려의 동북변방을 자주 침범하여 괴롭혀 왔었으며, 제15대 숙종 때에는 영가의 조카 오아속(烏雅束:우야소)이 함경도 함흥 일대를 침범함으로 고려에서는 이를 격퇴코자 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 제1차 여진 정벌
제15대 숙종 9년(1104, 공의 보령 64세) 왕은 참지정사(叅知政事)인 공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로 발탁 임명되어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 때 공은 적과 분전하였으나 적은 반유목민인 무리로 기병인데 반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당해 낼 수가 없어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들과 화맹(和盟)을 맺고 돌아왔다.
○ 제2차 정벌
첫 출정에서 돌아온 공께서는 상대방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적수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시고 왕에게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할 것을 건의하여 말을 가진자는 신기군(神騎軍)으로, 말이 없는 자는 신보병(神步兵)으로, 승려는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하여 맹훈련을 거듭하였다. 그 때 여진정벌의 숙원을 풀지 못하고 숙종이 승하하고 예종(16대)이 즉위하자 예종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여진정벌의 꿈을 품고 있던 중 부왕의 상을 마친 즉위 2년( 1107년) 이를 결행하기로 하고 공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동년 11월 25일 서경(평양)에서 북정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 때 왕은 서경에 행차하여 공에게 부월(斧鉞:군 지휘의 증표)을 주고 격려하였다. 이리하여 공은 휘하의 30만 대군을 지휘하여 서경을 출발 동북방면으로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천리변경의 수 많은 여진촌락을 함락시키면서 연전연승, 두만강 북방 칠백리까지의 여진을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공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찾은 북녘 땅에 영주(英州․北靑), 복주(福州․端川), 웅주(雄州․吉州), 길주(吉州․鏡城), 함주(咸州․咸興), 의주(宜州․德源), 평융(平戎․鏡源), 통태(通泰․渾春), 공험령(公嶮嶺․延吉) 등 9성을 축조하고 두만강 건너 칠백리 밖 선충령(先春嶺)에 고려국경비를 세운 후 전승지에 반도 남쪽의 백성 40만명을 이주시킨 후 이듬해인 서기 1108년 4월 9일 개경에 개선하니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정벌 중인 1108년 4월 2일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의 공신호를 받고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임명되었다.
○ 제3차 정벌
공께서 2차 정벌에서 개선한 후 얼마 안 있어 여진이 또 웅주(길주)를 침범하므로 왕명에 의하여 1108년 7월 7일 공이 오연총(吳延寵)과 더불어 또 출정하여 여진군을 정벌하였다.
이때 왕은 공에게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 식읍(食邑:국가에서 공신에게 조세를 받아 개인이 쓰게 한 고을) 2500호(食實封三百戶)를 봉하였다.
○ 제4차 정벌
이듬해인 서기 1109년 여진이 또 길주(吉州․鏡城)를 침범함으로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정벌토록 하였으나 패배함으로 다시 공으로 하여금 출정케하여 그 해 5월 21일 제4차 북정 길에 올라 정주에서 길주로 진군 중 여진이 화친을 청해와 다시 정주로 돌아와 그 진의를 파악하는 등 대기하다가 조정의 회군지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 9성 환부(還附)와 문숙공의 회군
공의 4차에 걸친 정벌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궁지에 몰린 여진은 당황한 나머지 사신을 보내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대대손손 조공을 밭치겠으니 9성을 돌려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는 나약한 문신들이 9성을 계속 지키기 어렵다는 구실 하에 여진에 환부해줄 것을 극력 주장하고 심지어는 공을 죄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까지 있었다. 이리하여 7월 2일 개최된 중신회의에서 9성을 반환하기로 결정되어 공이 심혈을 기울여 개척한 9성을 여진에게 환부하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민족사의 일대 통한의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곧 왕명에 의하여 공은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게 되고 회군 도중에 왕이 신하를 보내어 부월을 거두게 함으로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하고 곧 바로 공의 사가로 가게 되었다.
○ 그 6년 후 여진은 우야소의 아우 아골타(阿骨打)에 의하여 통일된 후 금(金)나라를 세우고 만주지방을 근거로 하였던 요(遼)나라를 멸망시킨 대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후 군신의 관계를 맺기를 강요하여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당시 문숙공의 주장대로 여진을 계속 복속시켜 그 영토를 지배하였더라면 역사의 판도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 후 조정 일부 문신들과 간신배들이 공을 벌주자고 왕에게 계속 간청하므로 왕이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마지못해 공에 대한 공신 호를 삭(削)하고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太保는 正一品으로 王의 고문)를 제수하였다.
○ 공은 회군 후 사가에 계시다가 회강웅지(恢疆雄志)가 좌절되는 천추의 한을 품고 2년 후인 1111년 5월 8일 보령 71세로 영거(永逝)하고 파주군(지금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예장되었으며 그 후 예종 조정(睿宗 廟庭)에 배향(配享:신주를 모심) 되시었다.
※ 상서대(尙書臺)
상서대는 파주군 천연면 웅담리 파평산 동쪽에 있으며 문숙공께서 수양정(修養亭)으로 쓰시던 별저(別邸)이며 그 경내에는 공께서 친히 식수하신 괴목 수 주가 있었다고 하며 그 곳에서 독서와 낚시를 즐기셨다고 한다.
○ 1980년 5월 8일 서울 서소문 공원(서울역 부근)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1981년 소설가 유현종(劉賢鍾)氏가 문숙공 일대기를 중심으로 한 역사소설 “천년의 한”이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민족의 한이 서려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물실기(實記) “문숙공 윤관장군”이 임중빈(任衆彬) 작가에 의해 쓰여 져 있다.
○ 공은 언인(彦仁), 언순(彦純), 언암(彦巖), 실명(失名․大禪師), 언식(彦植), 언이(彦頤), 언민(彦旼) 아들 7형제를 두었다.
○ 공의 배위는 인천 이씨로 부는 상장군(上將軍) 성간(成幹)이고 조부는 대장군 눌(訥)이다.
○ 문숙공 묘 실전(失傳)과 심묘(尋墓)
- 실전(失傳)
조선 조 제10대 연산군 당시에 파주군, 고양군, 양주군의 태반이상이 왕이 사냥하는 유행소(遊幸所)로 정해짐에 따라 공의 묘가 있는 분수원(汾水院)도 이에 포함되어 부근 민가의 철수와 일반인의 입산금지로 인하여 수호치 못하게 되고 이것을 시점으로 종지(宗支) 자손은 자연 멀리 가 살게 되고 수호가 어렵게 되었으며 또 잦은 병화로 인하여 후손들이 돌볼 기회가 적은 틈을 타 제15대 광해군 6년(1814)경부터 제18대 현종 2년(1662) 사이에 청송(靑松) 심씨(沈氏)의 심지원(沈之源․政丞)이 그의 조부 묘를 비롯한 수 기의 묘를 문숙공 묘 뒤에 투장(偸葬)하고 1663년 경 자신의 묘도 그 곳에 투장하여 공의 묘 뒤에 있던 곡장(曲墻)을 헐고 묘비를 파손하여 땅에 묻어 흔적을 없애므로 인하여 공의 후손들이 수 세에 걸쳐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지내게 됨에 따라 실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심묘(尋墓)
제21대 영조 39년(1763) 심문(沈門)에서는 그 투장한 사실을 더욱 은폐하기 위하여 심지원의 무덤 앞에 있는 고총 즉 문숙공의 큰 무덤을 작은 무덤으로 만들고 잔디를 입힌 후 다른 곳에 있는 덕수 이씨의 이호문(李好文)이란 사람의 고비(古碑)를 옮겨 그 고총 앞에 세워놓은 것을 우리 종중에서 발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기 시작, 이호문의 후손되는 자를 추궁한 결과 심문에서 토지를 사주면서 그 고총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하고 제사를 지내 달라면서 부탁하기에 그 고비를 그 곳에 세웠다는 사실을 실토받게 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종중에서 고총 및 길옆에 있는 조그마한 무덤을 파헤쳐본 결과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교자총(轎子塚:문숙공이 여진 정벌 시 왕에게 하사받은 수레)이 틀림없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종전부터 그 고총은『尹 侍中 의 분묘』라는 전설이 없지 않았으나 고증이 없었던 관계로 이호문의 후손의 실토와 교자총을 발견하여 그 고총이 문숙공의 분묘가 틀림없음이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그 후 종중에서 이 사실을 영조 왕에게 상소하고 좌의정 윤동도(尹東度․후에 영의정)가 국왕에게 직접 상주하였는데 왕께서는 이 사건을 경기 감사에게 처리하라는 하명을 하였으며 공의 비석과 지석이 없으므로 다만 이호문의 고비를 제거시키고 양가에서 현상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리었다.
우리 종중에서는 그대로 순종할 수 없어 다시 현장을 답사하다가 심문에서 그 고총 좌편 10여 보 밖에 있는 도랑에 공의 묘비를 묻었다는 그 근처에 사는 노인의 말을 듣고 그 곳을 파헤쳐 드디어 깨뜨려진 공의 묘비조각을 발견 하게 되었는데 그 비의 제1행에『주국문경(柱國文敬)』제2행에『대부(大夫) 추좌리평(推佐理平)』제3행에『숙공(肅公) 윤만지묘(尹漫之墓)』제4행에『연3월개(年三月改)』라 하였으니 만(漫)은 공의 처음 휘(諱)임으로 공의 묘비가 틀림없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후 동도공(東度公)께서 이 사실을 영조 왕에게 상고하고 문숙공의 분묘를 고제(古制)대로 개봉축(改封築)하고 수호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하였던 바 왕은 문숙공의 묘를 종전대로 봉축할 것이며 심문의 묘에 대하여서는 심지원은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이니 그대로 수호하라는 비답(批答: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이 내려져 결국 심문의 묘를 현상대로 두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나 2007년 10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장허가를 받아 심씨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영조 40년(1764년) 주군(州軍)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을 깎아 공의 분묘를 크게 봉축하였으며 그 때 영조는 예관을 보내어 공의 묘전에 치제(致祭)하였다.
○ 심문(沈門)과의 산송(山訟) 당시에 우리 종중의 도사(都事) 희복공(熙復公)(南原派)이 국왕 앞에서 불경한 언사를 하였다는 죄과로 벌을 받고 독장(杖毒)으로 종명하였으며 심문 쪽에서도 심정최(沈廷最)라는 자가 투장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 그 묘 산은 심문에서 투장하고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받은 사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종중에서 묘를 찾은 후에도 임야 및 송목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법적 분쟁이 일제때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우리 종중소유로 확정되었으며, 분묘 문제에 대하여서는 끊임없는 분규가 있다가 1969년 우리 종중에서 심묘와의 사이에 곡장을 쌓아 관리하여 오는 등 갈등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2005년 양 문중이 문숙공의 묘역 2,500여평에 심씨 묘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였으나 두 문중의 묘가 매장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어 이장 절차에 어려움을 겪다가 각고 끝에 2007년 11월에 당국으로부터 이장 승인이 나고 2008년 6월에 이장 완료함으로써 400여년 끌어오던 산송(山訟)을 양 문중의 화합으로 끝을 맺었다.
※ 분수재(汾水齋) : 분수재는 문숙공의 묘소와 사당, 교자총이 있는 부근 일대를 말하며 우리씨족의 성역이다.
六世 언이(彦頤․文康公, 문과)
○ 문숙공의 여섯째 아드님으로 자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고려 제16대 예종때 문과급제하였다.
○ 인종때 기거랑(起居郞)이 되고 우사간(右司諫) 정지상(鄭知常)과 우정언(右正言) 권적(權適) 등과 함께 정치의 득실을 논의함에 왕이 칭찬하며 그 뜻을 받아 들였고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전임되어 경연(經筵)에 나아가 왕에게 학문을 강의하여 왕의 칭찬과 상을 받았다.
○ 관직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당문학호부상서판형부사상주국(政堂文學戶部尙書判刑部事上柱國․정3품)에 오르다.
○ 예종때 아버지 문숙공께서 왕명을 받아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었는데 공교(工巧)하지 못하다 하여 김부식(金富軾)이 함부로 고친 일이 있어 공께서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중 인종때 왕이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케 하고 공에게 그에 관하여 질문하고 논하게 함에 공이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으로 하여금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하여 그 원한을 설분하였다.
※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 제11대 문종의 넷째 아들로 불문에 입문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한 분이다.
※ 김부식(金富軾) : 유학자로서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을 뿐 아니라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 어 그 난을 평정한 사람이다.
○ 제17대 인종 13년(서기 1135년) 묘청의 난 때 원수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 함락때 공을 세웠으나 김부식이 주역강론 때 당한 원한으로 공이 적과 내통하였다고 음해하여 양주 방어사로 좌천되었다가 6년만에 광주 목사로 복귀하여 왕에게 해명하게 되었다.
※ 묘청(妙淸)의 난
이 난은 서경파(西京派)인 승려 묘청이 백수간(白壽幹), 정지상(鄭知常), 등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개경의 지덕은 쇠하여 졌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함으로 수도를 서경으로 천도하여 금나라를 정벌하여야 한다고 하며 난을 일으켰으나 개경파인 김부식 일당에 의하여 평정되다.
이 난으로 인하여 김부식을 정점으로 하는 외척 경주 김씨가 권력을 잡고 사회는 더욱 혼란하게 되어 왕권이 추락되면서 최씨 무신(武臣)의 난을 유발케 되었다.
○ 공은 학문이 높아 세인들이 해동공자라 불렀다.
○ 의종 초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예종 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에 능하여 이름 이 높았고 특히 주역에 밝았다.
○ 만년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고향인 파주에 살면서 승 관승(貫乘)과 친교를 맺고 소일했으며 의종 3년(1149)에 돌아가셨다.
○ 공의 맏형 언인(彦仁)은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손자 대에서 남원 윤씨(南原 尹氏)로 분파되고 현손 대에서 함안 윤씨(咸安 尹氏)로 분파되었다.
○ 둘째형 언순(彦純)은 벼슬이 시어사(侍御史)였으나 무후(無后)하고, 셋째형 언암(彦巖)은 흥왕사(興旺寺) 주지를 역임하고, 넷째형은 휘 불명으로 대선사(大禪師)로 역시 무후하며, 다섯째 형인 언식(彦植)은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오르고 손자 은형(殷衡)이 덕산군(德山君) 호를 받아 덕산군 파조(派祖)가 되었다.
○ 공의 동생 언민(彦旼)은 벼슬이 봉어(奉御․정6품)에 이르렀으나 무후하다.
○ 인담(鱗膽), 자고(子固), 돈신(惇信), 자양(子讓), 돈의(惇義), 돈효(惇孝),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인담(鱗膽), 자고(子固), 돈신(惇信) 3형제분이 문과급제하였다.
○ 배위는 광주(光州) 金氏이며 묘는 분수원(汾水院) 문숙공(文肅公) 묘와 같은 경내에 모셨다고 하나 실전되었다.
※ 坡平 尹氏에서의 남원(南原) 尹氏와 함안(咸安) 尹氏 분파(分派)
○ 남원(南原) 尹氏와 함안(咸安) 尹氏는 문숙공(文肅公)의 맏아들 지후공(祗候公․彦仁)의 후손들에 의하여 분파되었다.
○ 지후공의 손자인 휘 위(威)가 고려 제20대 신종 때 남원의 민란을 덕으로 평정하고 그 공적으로 남원백으로 봉작되면서 공의 후손들은 남원 윤씨가 되었는데, 위의 손자인 휘 돈이 함안 민란을 역시 덕으로 다스려 그 공적으로 함안백으로 봉작되면서 함안 윤씨가 파생되고 공(휘 돈)의 맏아들 휘(諱) 희보(希甫)의 후손들은 함안을 본관으로 사용하였고 둘째 아들 휘 영찬(英贊), 셋째 아들 휘 신갑(莘甲), 넷째아들 휘 신을(莘乙)은 그대로 남원본을 계승하게 되니 이로서 坡平 尹氏에서 南原尹氏, 咸安 尹氏가 파생되었다.
七世 돈신(惇信․侍郞公, 문과)
○ 文康公(彦頤)의 셋째 아들로 제17대 인종 때 문과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정4품), 동궁내시 강학사(東宮 內侍講學士․정3품)에 오르게 되었다.
○ 제18대 의종 24년(1170년) 8월 30일 밤 동궁에 계시다가 정중부의 난으로 인하여 참화를 당하였다.
※ 정중부(鄭仲夫)의 난
○ 고려는 과거제도실시(제4대 광종 때) 이후 문치(文治) 우위주의를 실시하게 됨에따라 자연 무반(武班) 출신은 소외되고 천시되었으며 문신이 무신이 맡아야할 병권까지 맡게 되었다. 이 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문신의 무신에 대한 횡포의 반발로 일어난 것으로 정중부(무신)가 문신 김돈중에게 수염을 촛불에 태움을 당하고 대장군 이소용은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등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아니라 김부식이 무신의 지휘권까지 빼앗아 불만이 높던 중 의종과 문신 일행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여 유흥을 즐기는 틈을 타서 무신 정중부 일당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궁궐을 습격하여 무신들이 왕을 폐출하여 유배를 보내고 명종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 난으로 인하여 문신들은 몰락하고 모든 관직은 무신이 독점하여 무인독재정치가 시작되고 후에 최충헌 등에 의한 최씨 무단정치가 4대에 걸쳐 60여년간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 공의 위로 3형제와 공의 맏형인 문정공의 아드님 3형제가 문과급제하였기 때문에 세인들은 이를「삼제댁(三第宅), 양사댁(兩師宅)」이라 하여 매우 부러워하였으며 공이 그 때 참변을 당하지 않았으면 더 귀하게 되었으리라 한다. 공의 묘는 임단 석주원이라 전하나 실전되었다.
○ 아드님에 상계(商季), 상영(商英)을 두었으나 상영은 무후하다.
八世 상계(商季․留守公)
○ 성품이 강직, 청렴하고 덕망과 재국이 뛰어나 아버지 시랑공(侍郞公․惇信)의 참화에 충격을 받고 정계에 나가지 않다가 노년에 왕(명종)의 부름을 받고 서경 유수로 봉직하다가 돌아가셨다. 묘는 임강 석전이라고 하나 실전되었다.
○ 아들은 복원(復元), 복장(復璋), 복규(復珪) 3형제를 두었으나 복장, 복규는 무후하다.
九世 복원(復元․錄事公, 문과)
○ 유수공(留守公․商季)의 맏 아드님으로 제20대 신종때 문과급제 하시고 1198년 태상부녹사(太常府錄事․정9품)가 되셨으나 최충헌의 무신독재에 염증을 느끼고 초야로 돌아 가 생활했다.
○ 손자 문현공(文顯公․珤․보)이 현달하여 은청광록대부 상서성 좌복야(銀靑光錄大夫 尙書省 左僕射), 한림학사(임금의 조서 작성․정4품)로 추증되었다.
○ 배위는 인천 이씨이고 묘는 공의 아버지 묘소와 같은 곳이라고 하나 실전되었다.
○ 아들은 어사공(御使公․純) 한 분이다.
十世 純(御使公, 문과,)
○ 녹사공(錄事公․復元)의 아들로 제23대 고종때 문과급제하고 감찰어사로 봉직하다가 나라가 어지러움에 초야로 돌아갔다.
○ 아들 문현공(珤․보)이 현달하여 은자광록대부 수태위문하시중 평장사판 상서형부부사(銀紫光祿大夫 守太尉門下侍中 平章事判 尙書刑部事)로 추증되었다. 당시는 무신 최우(崔瑀)의 정방(政房) 독재정치가 심하였고 고종 16년(1229)에는 몽고군이 침입하여 1232년 6월에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고 1235년에는 몽고군이 재차 침입하였으며 1258년에는 최씨 무단정치가 무너지는 등 어수선한 시기였다.
※ 몽고(蒙古)의 침입
○ 만주 흑룡강 상류의 유목민인 몽고족이 1206년 태무진(鐵木鎭)이라는 영걸에 의하여 통합되고 나라를 세워 황제에 오르니 이가 곧 元의 시조 징기스칸(成吉社汗)이다.
○ 몽고는 만주지방에 있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하는 등 침략의 구실을 찾아오던 중 고종 18년(1231년) 마침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고종 41년(1254년)까지 사이에 전후 6차에 걸쳐 침략하게된 것이다.
○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과 약탈로 전국은 초토화되어 농촌은 파탄이 되고 백성들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해져 결국에는 고려 멸망의 촉진제구실을 하였고 향후 150여 년간 고려는 직 간접적으로 몽고의 지배를 받으므로 우리 민족은 굴욕적인 역사의 한 시대를 보냈던 것이다.
○ 배위는 홍주 이씨이며 묘는 장단 유관솔현이라 하나 실전되었다.
○ 아들은 문현공(보) 한 분이 있다.
十一世 보(珤,文顯公, 문과)
○ 시호는 문현이며 제25대 충렬왕 2년(1276년) 문과급제 하였다.
○ 중요 관직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정2품), 弘文館學士. 成均館大司成(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정3품의 당상관직) 僉議政丞('첨의정승'은 고려 시대 최고 중앙행정관청에서 일하는 부총리급의 관직)을 지냈다
○ 이때는 원(元․蒙古)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노년에는 고향인 파주 상서대에 은퇴하여 살다 제27대 충숙왕16년(1329) 향년 78세로 돌아가셨다.
○ 배위는 울산 박씨이며 묘는 장단군 동남 고현작목곡이다.
○ 아들은 계종(繼宗․贊成公), 안시적(安礻啇․代言公), 중왕차(中王且․奉錄公), 안숙(安淑․良簡公), 암(諳․少府公), 안비(安庇․太尉公) 여섯이며 맏아들 계종의 딸이 고려 조 제28대 충혜왕비인 희비이며 무후하고 셋째아들 중왕차(中王且)도 역시 무후하며 그 외는 각 파조가 되었다.
十二世 안숙(安淑․良簡公)
○ 문현공(보)의 넷째 아들로 제25대 충렬왕 4년(1278)에 태어나 제31대 공민왕2년(1353년) 향년 76세로 돌아가시다. 추성좌리(推誠佐理) 공신호를 받고 관직은 첨의사사(僉議事司․ 贊成事․고려 후기 문하부(門下府)의 정2품 관직)가 된 후 삼중대광 영평부원군(三重大匡 鈴平府院君)의 군호(君號)를 받았다.
○ 제27대 충숙왕이 5년간이나 볼모(인질)로 원나라 수도에 가 있을 때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왕의 신변보호에 신명을 다 바쳤고 제29대 충목왕이 재위 4년만에 돌아감에 왕의 이복 동생인 충정왕(30대)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컸으며 그로 인하여 공신 호를 받았다.
○ 배위는 교하 노씨이며 묘는 장단군 부동 밀암이다.
○ 아들은 리(莅:判書公), 척(陟:鈴平君) 두 분이시다.
十三世 척(陟,鈴平君)
○ 양간공(良簡公․安淑)의 둘째로 제30대 충정왕 2년 우부대언(右副大言)이 되고 공민왕 12년(1363년) 군부판서(軍簿判書․고려 병부(兵部)의 장관 명칭)로서 최영, 이성계 등과 같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補理功臣)과 영평군(鈴平君)의 군호를 받았다.
※ 홍건적(紅巾敵)의 난
○ 홍건적은 중국대륙에서 백련교도(白蓮敎徒)들이 한림아(韓林兒)를 두목으로 반몽흥한(反蒙興漢)의 반란을 일으킨 집단. 홍건적은 원(몽고)의 쇠퇴한 틈을 타 원의 서울을 함락시키는 등 위세를 떨치다가 만주를 덮치더니 공민왕 8년(1359년)에는 4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 의주, 서경을 함락하고 개경까지 육박하였다가 고려군에 의하여 격퇴 당하였다.
○ 2년 후인 공민왕 10년 10만 대군으로 재차 침략하여 개경을 함락하니 왕은 복주(안동)로 피난하고 이 때 공은 최영, 이성계 등과 같이 이를 격퇴시켰다.
○ 배위는 전의 이씨이며 묘는 장단군 임강 동저가사리이다.
○ 형이되는 리(莅)는 판서벼슬을 하였고 그 아들 혁은 부마로 야성군의 군호를 받고 야성(野城․盈德) 尹氏 시조가 되었으나 지금은 환본하여 모두 파평 윤으로 쓰고 있다.
十三世 승순(承順․忠簡公․문과)
○ 영평군(鈴平君․陟)의 넷째 아들로 시호는 충간이며 제31대 공민왕 때 문과급제하고 상호군(上護軍․고려·조선 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 겸 군적전서(軍籍典書), 문하평리(門下評理),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개성부의 우두머리․종2품)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정승(護政府 左政丞)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수충양절보리공신(輸忠亮節輔理功臣)의 공신 호를 받았다. 공은 오인택, 조린 등과 요승 신돈을 제거하려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났다.
※ 신돈(辛旽)
승려인 그는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국사로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자 국정을 전횡하고 급진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나중에는 공민왕을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 당시 고려를 자주 침범하던 왜구를 물리치는데 또한 공을 세웠다.
○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왕씨로 공민왕의 후사를 정하라는 명 제의 지시를 받고 돌아와 이를 전하므로 창왕이 폐위되고 왕씨인 공양왕이 즉위하였다. 배위는 단양 이씨이며 묘는 장단저가사리라 하나 실전되었다.
○ 공의 맏형 승휴(承休)는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벼슬을 하였으며 후손들이 평안도 중화지방에 가서 중화문중(中和門中)을 이루었으며, 둘째형 승도(承度)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벼슬을 하였으나 무후하고 첫째 아우 승도(承度)는 左尹 벼슬을 하였으나 역시 무후하며, 둘째 아우인 승례(承禮)는 벼슬이 판도판서에 오르고 판도공파(版圖公派) 파조가 되었다.
○ 판도공파는 이 파에서 왕비가 세 분(貞熹王后, 章敬王后, 文定王后) 나오고 정승 판서가 여러분 배출되는 등 후손들이 현달하고 번성하여 우리 소정공파(昭靖公派)와 더불어 파평윤씨 중에서 명문이라할 수 있다.
4. 판도공파(版圖公派)
十四世 승례(承禮․版圖公)
○ 공은 소정공(昭靖公)의 숙부로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고려 시대에 둔,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등을 관장한 중앙행정관서인 판도사(判圖司)의 으뜸 벼슬) 판도공파(版圖公派)의 파조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고려말 국운이 쇠해질 때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파주 교하땅(파주군 교하면 와초동)에 낙향하여 명유인 길재(吉再․冶隱) 등과 노후를 보냈다.
○ 공은 아들 다섯과 딸 일곱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대제학(大提學․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벼슬)을 지낸 제학공(提學公․ 珪)이고 둘째는 부윤(府尹․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 벼슬을 한 보로(普老)이며, 셋째는 제주공(祭酒公) 전(琠)인데 무후하고, 넷째는 정정공(貞靖公) 번(璠)인데 아들 3형제가 모두 정승과 판서반열에 올랐으며, 다섯째 아들은 사정공(司正公) 지성(之成)이다.
○ 공의 넷째 아들 정정공(貞靖公․璠)의 후손들은 교하땅 일원의 광대한 사패지(賜牌地․王이 下賜한 땅)를 중심으로 6백 여년 동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현재까지 연면히 가통을 이어오고 있다.
○ 이곳은 정희왕후(貞熹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세 왕비와 정승 세분(사분․士昐, 사흔․士昕, 원형․元衡)을 낳은 길지이기에 세조께서 이곳을 자신의 묘지로 삼으려 했으나 장인인 정정공(번)이 먼저 돌아가 이곳에 묻히자 양보했다는 설이 있다.
○ 이곳에는 정정공(번)의 묘소를 중심으로 이정공(夷靖公․士昐, 右議政) 양평공(襄平公․士昕,右議政) 성안공(成安公․士昀, 禮曹判書)의 아드님 파릉공(坡陵公), 그 외 정평공(靖平公․之任),영상공(領相公․元衡) 등의 묘가 있다.
○ 그 외 공의 자손 중 부원군(府院君)은 정정공(貞靖公․坡平府院君)을 비롯하여 파주부원군(坡州府院君․士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汝弼),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王頁),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之任) 등이 있고, 판서는 공간공(恭簡公․欽), 공양공(恭襄公․繼謙), 판서공(判書公․春平) 등이 있다.
○ 따라서 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5세 1품(5代에 걸쳐 내리 正一品벼슬이 남), 二子 三公(두 아들이 政丞)의 길지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