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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축복사역(8) / “성령의 숨 쉼은 곧 영성입니다!”
+ 본 문 : 시 편 23편 1절 - 6절 (구약성경 817쪽)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과 생업, 사랑하는 모든 자녀 손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옆의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도한 대로 됩니다.” “축복한 대로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의 시편 23장 말씀을 가지고, 지난 주에 이어,
‘성령의 숨 쉼은 곧 영성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함께 한 번 큰소리로 따라서 합시다. “쉼은 곧 영성입니다. 그래서 쉼은 축복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골목골목에서 엿장수의 가위소리를 흔하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엿판에 엿을 등에 짊어지거나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흥겹게 박자를 맞추며 엿장수가 골목을 지나가면,
떨어진 고무신, 깨진 냄비, 빈 병을 가지고 나가서 바꿔 먹는 엿 맛은 둘이 먹다가 혼자 죽어도 모릅니다.
여름이면 그 맛있는 아이스께기 통을 짊어지고 “아이스께끼” 하고 외치던 소리도 이제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어릴 때 정말 재미있게 하고 놀았던 자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딱지치기, 벼락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등의 그 재미있는 놀이들도 이미 오래 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깨부수고, 싸워서 점령하고, 잔인하게 죽이는 게임기 게임에 몰두합니다.
이런 아이들 대부분이 컴퓨터나 게임기 놀이에 중독되어 있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과거의 놀이 문화는 몸이 부딪치며, 어떤 때는 서로 양보도 하고, 어떤 때는 심하게 싸우기도 하면서,
인간성을 키워 나갔습니다만, 요즘 아이들은 폭력과 파괴를 통해, 재미만 있으면 무조건 옳다고 판단하여,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불행이나, 심지어 생명도 개의치 않는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웁니다. 양보도 타협도 전혀 없습니다.
요즘 이익 집단들을 보면, 강력한 투쟁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막가파식의 집단행동들을 저지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완전 편을 가릅니다. 서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모두 다 남 탓입니다. 감옥에 보내라고 합니다. 너도 죽으라고 합니다. 내 탓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까요? 한마디로 사람됨,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성령으로 숨 쉬는 인간됨의 영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교회도 교회다움의 영성, 성도다움의 영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목사와 성도들도 잃어버린 교회다움, 목사와 성도다움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지 않고 생령이 되는 영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할 수 없고,
이런 교회와 신앙인은 하나님께 거치는 교회와 사람이 되고, 교회의 시험도 이런 사람들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목사와 성도들도 잃어버린 교회다움, 목사와 성도다움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하고 생령이 되는 영성을 회복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한 관계가 될 수 있고,
이런 교회와 신앙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와 사람이 되고, 교회의 부흥도 이런 사람들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백성들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 아닙니까?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목사를 목사답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우리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이 영성을 찾아 회복하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영성을 회복하여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성이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몸과 생각과 영혼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날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우리와 지금 동행하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영광스런 단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행복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성이 분명한 교회와 성도, 영성이 건강한 교회와 성도는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영성이 살아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영성이 살아 있는 건강한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하루아침 기도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요술방망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이 반복과 지속된 양육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생활은 체질화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생활이 체질화 되고서야, 강퍅한 우리의 심령이 활짝 열릴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체질화 되어 있어야,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의 체질화가 되어 있어야, 경건한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영성이 열려 있는 사람, 영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이 헌신하는 교회라야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영성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영성이 메마른 사람이 헌신하겠다고 나서면, 교회는 시끄러워집니다.
영성적인 사람은 언제나 조용히, 그리고 열심히 봉사합니다. 영적인 성도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연극도 아닙니다.
정말로 교회가 교회다우면 세상이 변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열매는 자연히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영성이 건강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고, 영성이 건강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성도들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바른 영성을 가져야,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학자 리처드 백스터라는 분의 말은, 제 가슴을 예리하게 도전해 옵니다.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면서, 당신 자신에게는 결핍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십시오.
남들에게는 잘못됨의 경계를 요구하면서, 당신 자신들은 멸망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밥상을 잘도 차려 주면서, 당신 자신들은 굶어죽는 일들이 없도록 하십시오.
남들에게는 잘 믿으라고 타이르고 권면하면서, 당신 자신들은 불신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십시오.
남들에게는 성령님을 모기라고 강권하면서, 당신 자신은 성령님을 거절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개인과 사회를 구원하는 사명을 수행하려면, 먼저 당신 자신의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까지 영성이 회복된 개인과 교회에, 하나님 당신의 구원 역사를 맡겨 오셨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의 인구가 70억이 넘는데, 사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이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간이 있고, 자신에게 세상을 맞추어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두 부류의 인간 중에, 후자에 속한 자신에게 세상을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이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악한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주님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립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미국의 한 안경 광고에서, 안경점 주인이 나와서 어눌한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안경밖에 없습니다."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그 안경점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제가 아는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중세 신학자 중에, 아주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수도원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저는 오직 예수님만 원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들이 샘솟듯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살면, 주님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면 그 어떤 문제도 놀라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옥문이 열리고,
풍랑이 잠잠하게 되고, 기쁨이 회복되고, 그 어떤 문제에서도 강하고 담대하게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옛날 경남 함안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교회에 충성스럽지 못한 김집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장년 교인이 20여 명 모이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남자 집사님은 두 명 뿐이었습니다.
그 두 집사님 중의 한 분이 김집사님인데, 믿은 지가 오래되어 그 교회 주동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1월 첫 주일이 되면, 교회애서 월 얼마씩을 드리는 월정헌금이라는 것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김 집사님은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고, 그 교회에서 제일 많이 헌금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해마다 그렇게 제일 먼저 손을 들어 헌금을 작정하였고, 제일 많은 월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김 집사님은 그해 12월이 다 되어도, 한 달치도 월정헌금을 드리지 않고 해를 넘깁니다.
또 새해 첫 주가 되어 월정헌금을 작정하면, 그 김 집사는 또 제일 먼저 손을 들고 가장 많이 작정합니다.
그것도 작년 수준보다 언제나 30% 올려 작정하고, 그해 12월이 되어도 한 달치도 내지 않고 해를 넘깁니다.
김 집사는 해마다 상습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담임 전도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왜 월정헌금은 그렇게 많이 정해놓고 한 달치도 내지 않습니까?" "형편이 되어야 내지요."
"그럼 왜 형편도 안 되는데 제일 먼저 손들고, 그것도 제일 많이 작정을 하십니까? 형편대로 하셔야지요."
"그야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지요. 내가 먼저 제일 많이 올려 정해야, 다른 교인들이 따라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담임전도사님이 물었습니다. "내지도 않을 것,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작정하면 무엇합니까?"
그랬더니 그 김 집사님이 말도 안 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작정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도 중요하지만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해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척, 말로만 떠벌리고 실천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니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요즘 미국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니 'nominal'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nominal Christian - 이름뿐인 크리스챤이라는 말입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찾아오신 여러분들은, 정말? 진정으로? 참된 크리스챤이라고 자부하십니까?
크리스챤 -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말입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은 감동을 주는 말입니다. '고난 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라는 말입니다.
안디옥교회에 모인 크리스챤은 처절하게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목격하고도(행 6장-7장)
안디옥에 모여 교회를 세웠고, 고난당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터키 - 튀르키에의 한 지방인 갑바도기아의 교부였던 닛사의 그레고리(335-394)는,
"크리스챤의 의미에 대하여" 라는 글에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이라 했습니다.
외형적인 크리스챤이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 닮아가는 내면적인 크리스챤이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레고리 교부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서커스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원숭이를 잘 훈련 시켜, 서커스에 등장시킬 때에, 오랫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몹시 배고픈 상태에서 무용수의 옷을 입고, 사람의 가면을 쓰고, 밴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했습니다.
엉성한 춤을 추는 무용수가 원숭이인줄 모르고 사람들이 즐기고 있을 때, 미리 짜여 진 각본에 의해서,
청중 가운데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원숭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나나를 무대 위로 던집니다. 이것을 본 순간,
원숭이는 자기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인 것을 잊어버리고, 바나나를 향하여 돌진합니다.
그리고 원숭이는 꽉 끼는 무용수의 옷을 입고 가면을 썼기 때문에, 바나나를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쓰고 있던 사람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바나나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웁니다.
사람들은 원숭이의 본래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바나나를 탐욕스럽게 먹고 있는 원숭이를 조롱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럴 듯하게 진행되던 서커스는, 한바탕 조롱과 웃음으로 서커스답게 끝나게 됩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보통 때에는 그리스도의 흉내를 잘 냅니다.
말도 거룩하게 하고, 선한 행위도 하고, 예수쟁이 냄새를 풍기려고 성경찬송도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돈 문제가 걸리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기가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을 다 잊어버립니다.
자신은 욕심이 하나도 없는 척 하면서 사실은 욕심 부리고, 자신의 직분을 앞세우고 잘 믿는 척 내세우고,
그러면서도 마치 원숭이처럼 자기 앞의 먹을 것이 있을 때, 가면을 찢어 버리듯이 예수를 찢어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교회안에 초신자들은 이런 nominal Christian - 이름뿐인 크리스찬들을 보면서 비웃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어. 항존직분자들도 별수 없어" - 그러면서 조롱하게 됩니다.
참된 크리스챤은 외적인 말과 행위나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되십시다.
인생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열대에 있는 상품 같은 인생, 상품 같은 신자입니다.
진열대의 상품은 한 순간에 반짝거리고 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새 물건이 나오면 값이 떨어집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작품 같은 인생, 작품 같은 신자입니다. 작품은 비록 순간적인 반짝임은 뚜렷하지 않지만,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가가 나타나고 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잘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상품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작품 같은 삶입니까?
지금 우리가 성령으로 숨 쉬는 쉼이 있는 영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인생은 작품 같은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숨 쉬는 쉼의 영성으로 영혼이 잘 되어야 범사도 잘 되고 육신도 강건해집니다.
이걸 잘 말해 주는 엑기스와 같은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다시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이 시편 23편을 요약하면 “쉼은 무엇이다.” 그렇습니다. “쉼은 영성이요. 축복입니다.”
이 시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성령으로 숨 쉬는 쉼의 영성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 되고, 아울러 범사가 만사형통하고, 삶에 지친 우리의 육신도 강건하시기를,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며,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항상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여 주시고,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