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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39) /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헌신!”
☞ 말 씀 : 요 한 복 음 12장 1절 - 8절 (신약성경 p.167)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다시 베다니라는 마을을 찾으십니다.
베다니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地名)으로, 예수님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고, 귀신 들린 자들은 온전해졌으며,
방황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 중에 클라이맥스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시신인 상태로 나흘 동안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문을 치울 것을 말씀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온 몸에 수의를 입은 채로, 살아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던,
그때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예수님께서 그렇게 베다니에 온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셔서 나사로의 집에 계시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내용인 마태복음 26장 6절 - 13절,
마가복음 14장 3절 - 9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다시 가셔서,
나사로의 집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문둥이 시몬’ 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과거에 시몬은 문둥병자였으나 예수님께서 치유하셔서 온전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도착하셔서 시몬의 집으로 가시고,
제자들, 마르다, 나사로, 마을 사람들도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에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참석자들은 모두 희색이 만면한 채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집에서 잔치 분위기가 무럭 익어가고 있을 때,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이 들어 있는 옥합을 들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일 년을 일하고 받은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은 돈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그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생각합니다. 모든 사물에는 형상이 있고 본질이 있습니다.
형상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본질은 눈으로는 안 보입니다. 예를 들면, 꽃은 눈으로 봅니다.
뿌리는 눈으로 못 봅니다. 꽃은 형상이고 뿌리는 본질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형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본질입니다. 형상은 본질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보는 눈이 있다고 사물의 전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형상은,
눈으로 보지만 근본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형상도 보지만, 본질도 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사람은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물의 전체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기룟 유다와 마리아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냥 평신도입니다.
제자인 가룟 유다는 형상만 보는 사람임에 반하여, 마리아는 본질을 보는 사람입니다.
제자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겉만 알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배반자가 되었고,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지극히 비싼 향유는 최고급 향유를 말합니다. 품질이 좋고 귀할수록 값은 더 비쌉니다.
나드 향유는 히말라야 산에서 나는 식물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계산으로는,
적어도 노동자가 일 년 받은 품값을 안 쓰고 모은 돈, 300 데나리온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라고 했습니다. (마 26:8-9) 오늘 본문 4절 말씀과,
5절에서는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3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 며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의 언니는 마르다요. 오라비는 나사로였습니다.
언니는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동생은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 듣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마리아는 깊은 믿음과 생각이 있는 여성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나드 향유 한 근은 깜짝 놀랄만한 고액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예물은,
예수님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그것을 드릴만한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부자는 많이 드렸으나,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린 헌금이었다고 하셨습니다(막 12:42-44).
과부의 헌금과 마르다의 예물의 공통점은, 힘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힘을,
다하며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 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8)
“내 마음이 순수하니 내 힘은 열 사람의 힘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가족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누가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것입니다. 순수함이란 이질적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가롯 유다에게도, 마리아 같은 순수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욥 1:8)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의 뜻은, 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
제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마리아가 한 일을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에 부어진 나드 향유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우리 속담에 “머리가 삼단 같다.” 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 숱이 많고 긴 머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머리가 삼단 같지 않았다면 머리털로 발을 씻지 못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 하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 304장 찬송입니다.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마리아야말로, 주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극치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풀었습니다. 머리를 푸는 것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기기 위해서,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주님의 발 앞에 숙였습니다.
“국궁국궁(鞠躬鞠躬)” 이라는 말은 “존경의 뜻을 표하며 몸을 굽히는 것” 을 말합니다.
존경하지 않고는 참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존경이 겸비해야 합니다. 깊이 사랑하면 삶이, 행동이 우아해집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사람을 크게 키워줍니다.
사랑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홉을 주고도 마저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와 자존심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걸레처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고 말씀했습니다.(막 1:7-8)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한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신발 끈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발을 자기 머리털로 씻겨 드렸습니다.
누가 어떻게 보든지, 누가 무어라고 비난을 하든지, 마리아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하는 소리도, 몰지각한 여자로 취급하는 시선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예감했습니다.
그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영적인 눈 - 예수님을 읽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되고, 큰 보람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순모(純毛)같은 여인입니다. 순수한 모직물로만 짜여진 순모같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시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거짓과 시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마리아는 지고한 사랑과 지순한 순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절 하반절 말씀에 “...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어드린 향유에서는, 그녀의 고운 마음이 향기로 피어오릅니다.
그녀의 마음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의 매력을, 어느 시인이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나드 향유는, 3백 데나리온이라는 고가의 물품 값과,
진정과 신령의 합쳐진 보배입니다. 마리아의 눈물에서 나오는 무취의 그 냄새를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에게서 나는 향기로운 그 냄새를 퇴색시켜서는 안 됩니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그게 바로 진심이 담긴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고향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에서 고향의 맛을 느낍니다. 깊은 사랑과 믿음에서 깊은 냄새를 맡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 보는 오감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로였습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는 손놀림으로 자신의 향기를 날렸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연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눈치를 보거나 주위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의 진심을 있는 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와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향기는 성스러웠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하나님께서는, 번제물의 향기로운 냄새를 흠향하셨습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구별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번제로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를 받으신 후,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하셨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가뭄과 사계절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창8:20-22).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마리아의 향기는 예수님을 아는 자의 냄새였습니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향기입니다. 생선은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는 향기를 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 15절 말씀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아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린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마리아의 나드 향유에서 나오는 향기는 세상 끝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아멘! - 마리아의 향유는 티끌에 묻혔던,
양심을 씻어 주었습니다. 마리아의 머리 숙임이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게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내 죄 씻어 주신 그 분의 발에 향유를 부으셔야 합니다.
지금 마리아가 향유를 쏟는 그 손,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그 손은,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값비싼 향유를 드린 마리아는 천만금짜리 유향보다 더 비싸고 존귀한 영적 여인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 마리아처럼 우리의 헌신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