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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10.12 16:55
호수 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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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전주에서의 이중섭. ⓒphoto 허종배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은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다. 그는 향토색 짙은 우리 고유의 미감이 풍부한 그림 속에, 반 고흐와 비견되는 화풍을 표출한 글로벌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기왕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 벽화나 고려청자의 무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와 조선 후기 김정희의 서예 등 여러 종류의 민족문화 유산에서 유래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수준 높고 민족색이 풍부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같은 덕목들은 사실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모든 문화예술 부문의 창작과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데, 이중섭은 이를 앞선 시기에 이미 일정 부분 탁월하게 이뤄내고 있었다.”(‘이중섭평전’ 최석태)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이희주(李熙周)와 안악(安岳) 이씨 사이의 2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쪽 윗대는 세종 때 쓰시마 정벌로 이름난 이종무 장군이 시조다. 증조부 이동규는 자작 농토에 소작지까지 많이 빌려 억척스럽게 일하여 100칸이나 되는 집을 소유했다. 모친도 평양의 부유한 상인 이진태의 딸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무역으로 벌어들인 많은 자산을 증권에 투자해 크게 성공한 평양의 민족자본가가 됐다.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평안무역과 ㈜조선소주를 경영하기도 했다.
이중섭의 부친 이희주는 1886년 이창희의 셋째로 태어났다. 이희주는 조부 이동규와 달리 문약하고 우울한 성격이었던 듯하다. 소작인들의 추수를 살펴보라고 탈곡장으로 보내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들가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이중섭이 다섯살 때 작고했다. 따라서 모친이 집안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탓에 가사에는 서툴렀으나 말을 잘하고 아는 것이 많아 만물박사라고 불렸다. 주산과 바느질에 능했고 과자 따위를 만드는 솜씨도 좋았다. 그녀에게는 친정에서 물려받은 100석의 재산과 함께 700석이 넘는 농토와 과수원이 있어 살림은 넉넉했다. 이중섭이 아기였을 때 12살 연상의 형 중석(仲錫)이 결혼하여, 그는 모친과 형수의 보살핌을 함께 받으며 자란다.
소문난 대식가… 음식 보면 그림 먼저 그려
평양으로 간 이중섭은 1923년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후일 이중섭과 함께 일본에 유학했던 평생 친구 김병기는 졸업 때까지 내내 한 반이었다. 동급생으로는 채병덕(초대 육군 참모총장), 이용문 장군이 있다. 친하게 지낸 동네 친구로 극작가 오영진, 소설가 김이석이 있다. 고향 친구인 시인 양명문, 소설가 황순원과도 훗날 가까이 지내게 된다.
어린 시절 이중섭은 자치기와 달음박질 같은 놀이와 운동,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음식을 잘 먹어 그의 조카딸은 대식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먹을 것을 받고서도 곧바로 먹지 않고 그림을 그리곤 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고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는 친구 김병기네 집에 자주 가서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의 화구와 미술서적을 구경하기도 한다. 일본에 유학했던 이름난 유화가인 김찬영은 당시 평양미술단체 삭성회를 이끌기도 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루는 김병기가 수채붓을 보여주자, 이중섭이 붓에 물감을 찍고 물을 묻히더니 입으로 쭉 빨아낸 후 종이에 죽 그으면서 “이렇게 하면 물감이 흐르지 않고 잘 그려진다”고 말했다. 김병기는 상당히 구체적인 기술을 알고 있던 이중섭을 놀라서 바라보았다.
이중섭은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 유학 중이던 형이 방학 때 돌아와 공부하지 않는다고 꾸짖기도 했다. 나이 차가 컸으므로 부친을 대신했던 형이 매우 어려운 존재였던 것 같다. 그와 김병기는 방학이면 형에게 붓글씨 수업을 받았다. 후에 이중섭이 그림 외에도 편지나 엽서의 주소나 이름자 표기에 유별난 집착을 보인 것도 형의 그런 성향 때문인 듯하다.
1929년 이중섭은 정주 오산고보에 입학해 하숙 생활을 한다. 오산학교에서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문화적 정체성 또는 일체감을 익힌다. 그는 잊을 수 없는 은사 임용련을 만난다. 진남포의 지주이자 기독교도인 임용련은 배재중학 3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추적당해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라는 미술학교에서 역사화와 벽화를 공부했다. 그는 이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건너가 재불 화가 백남순과 결혼했다. 이들은 1930년 동아일보 전시장에서 부부전을 여는데, 부부 모두 서양화의 본거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으며 이듬해 오산학교로 부임한다.
유학파 임용련 선생과의 만남
임용련은 이중섭의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준 교사였다. 그는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장래의 거장이라고 칭찬했다. 새로운 사조를 소개했을 뿐 아니라 민족적인 감각과 형상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했다. 이중섭보다 한 해 선배인 우일근(전 서울대 생약연구소장)씨의 회고담을 옮긴다.
“임용련이 도화 시간에 학교 본관을 그린 이중섭의 수채화를 들고서 논평하기를 ‘지붕 앞줄의 기와가 줄지어 있는 부분을 잘 연결했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낱낱이 그리지 않으면서도 무리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중섭군의 새로운 발견이다’고 했다.”(‘이중섭평전’)
임용련은 아내에게 이중섭의 재능을 자랑했으며, 장래 대화가로 예약이 돼 있다고까지 극찬한다. 이후 이중섭은 수채화를 열심히 그리며, 새로운 재료로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는 임용련의 자유로운 미술 교육에 힘입은 것이었다.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하고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기도 했는데, 훗날 담배 은박지에 끝이 뾰족한 쇠로 선을 긋고 오목한 부분에 물감이 배게 하여 완성하는 이중섭 특유의 창의적인 그림도 이 시절의 자유로운 재료 사용 경험에서 유래했다. 백남순도 이중섭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이광수는 임용련 부부의 전시 평에서 백남순을 사실적이고 라틴적·남구(南歐)적이며 자유·경쾌하다고 했는데, 이런 요소가 후일의 이중섭에게도 나타난다.
이중섭은 1935년 도쿄의 제국미술대학에 입학해 스케이트를 타다가 크게 다쳤다. 이듬해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 입학한다. 교수가 그의 그림을 피카소의 모방이라고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는 등 갈등을 빚는다. 그는 많은 학생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조선말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을 보여 급우들의 찬탄을 받는다. 이 무렵 민족 차별을 하지 않는 쓰다 세이유 교수를 만나 급속히 가까워진다. 쓰다는 한지에 먹물을 칠하고 긁어서 형상을 그린 이중섭의 손바닥만 한 그림을 보고 아주 좋은 평을 내리기도 하며, 큰 화가가 될 것이라고 격려한다.
“권투·철봉·뜀박질…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이중섭은 1938년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창립한 자유미술가협회 전람회에 3점의 ‘소묘’와 2점의 ‘작품’을 첫 출품해 협회상을 받는다. 유럽에서 일어난 초현실주의를 일본에 소개하고 보급한 미술평론가인 다키구치 슈조는 “이중섭이 환각적인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소품이지만 큰 배경을 느끼게 한다. 옛 신비 속에서 생생한 악마가 꿈틀거리고 있다”라고 평한다. 1940년 지유텐(自由展)에 출품한 이중섭의 작품들에 대해 김환기는 ‘문장’지에 “이 한 해에 있어 우리 화단에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였다. 정진을 바란다”는 글을 실었다.
이중섭은 일찍부터 소를 열심히 그렸다. 오산학교 시절 어찌나 소를 열심히 그렸는지 학생들 사이에 “이중섭은 소와 같이 산다. 소와 입 맞춘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훗날 원산 시외인 송도원에서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 소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한다. 김환기는 “작품 거의 전부가 소를 취재했는데 침착한 색의 계조(階調), 정확한 데포름, 솔직한 이메주, 소박한 환희, 좋은 소양을 가진 작가다. 쏘쳐오는 소, 외치는 소, 세기의 음향을 듣는 것 같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린이었다”고 격찬했다.
이중섭의 ‘대향(大鄕)’이라는 아호는 1942년에 애인의 모습을 담은 연필화 ‘여인’에 처음 등장한다. 오산학교의 설립자 이승훈이 펼친 ‘대이상향 운동’과 관련지어, 그것의 줄임말에서 유래한 듯하다.
1940년 이중섭은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이중섭과 가까워지게 된 계기를 말한다.
“학교 가운데 뜰에서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키가 헌칠하고 잘생긴 청년이었죠.…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권투도 잘했고, 철봉, 뜀박질 등을 멋있게 해냈죠.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죠. 아마 저뿐이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도 그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였습니다. 어느날 실기 수업이 끝나고 붓을 빨게 되었는데 옆에서 그도 붓을 빨고 있었죠. 그때 우리는 단 둘뿐이었습니다. 그가 자연스레 말을 걸어왔어요. 그때부터 다방 같은 데에서 자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이중섭평전’)
마사코는 일본에서는 드문 가톨릭 신자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부친은 재벌 기업인 미쓰이 계열사의 사장이었다. 마사코와 사랑에 빠진 이중섭은 1940년 말부터 관제 엽서에 그림을 그려 그녀에게 보낸다. 1940년 1점으로 시작해 1941년에는 80여점이나 그렸다. 4년간 모두 100여점에 이른다.
소련인 평론가도 “천재” 극찬
숙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조카 영진씨.
1943년에 이중섭은 제6회 지유텐에서 출품작 ‘망월(望月)’로 특별상인 태양상을 받는다. 원산에 돌아온 후 수년간 같은 방을 썼던 조카 이영진(79·서울대 미학과 졸업)씨에 따르면 이중섭은 여러 해에 걸쳐 두고두고 손질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배를 타고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왔다. 5월 결혼하고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꿨다. 8·15 광복을 맞아 미도파백화점 지하실에 벽화를 그린다. 이때 명동에서 친구가 조폭에게 뭇매를 맞자 맞서 싸우다가 순찰 미군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진다. 이듬해 원산에서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고아원에 가서 아이를 돌보는 자원봉사를 한다.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이 ‘음향’에 실린 시와 표지화에 인민성과 당성이 결여돼 있다고 이중섭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해 8월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냈다. 이 작품을 소련인 평론가 나달이 극찬한다. 그러나 이듬해 원산에 온 소련의 미술가와 평론가 3인이 이중섭의 그림을 보고 천재이기 때문에 ‘인민의 적’이라고 비판한다.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난 직후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됐다. 이중섭은 부인, 두 아들, 조카 영진과 함께 남하해 부산으로 온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신상 조사 후 출입이 허용되면서 부두에서 짐부리는 일을 한다. 이때 널빤지를 훔친 껌팔이 소년을 마구 때리는 헌병을 말리다가 그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큰 상처를 입는다.
이듬해 악화된 전세에 따른 당국의 종용으로 가족과 제주도로 건너간다. 여러 날 걸어 서귀포에 도착한다. ‘피난민과 첫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작품이다. 변두리의 작은 방을 배정 받아, 식량 배급을 받기도 했으나 가족 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랐으므로 자주 바다로 나가 게를 잡거나 해초를 뜯어와야 했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평온한 눈빛을 지닌 소를 목격하고 다시 소 그리기에 열중한다. 얼마 후 조카 이영진이 찾아왔다. 서귀포로 근무지를 옮긴 그는 먹을 것을 구해 자주 가져다주곤 했다. 그가 가져온 통조림 깡통으로 그릇을 대신할 만큼 극심한 빈곤은 계속되었다.
서귀포로 통영으로
이중섭은 서귀포에 1년 가까이 머물면서 물질적으로는 엄청나게 어려웠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없이 행복했던 장면을 화폭에 담아 ‘서귀포의 환상’과 ‘섶섬이 보이는 풍경’과 같은 주목할 만한 그림을 남겼다. ‘서귀포의 환상’은 제목 그대로 평화와 풍요가 꿈을 넘어서서 환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어린아이가 평화롭게 전투기가 아닌 새를 타고 푸른 서귀포 앞바다를 날고 있다. 해안에는 어린아이들이 풍요롭게 먹을 것을 나르거나 한가하게 누워 있다.
서귀포는 이중섭과의 소중한 인연을 놓치지 않고 1998년 이중섭거리를 조성했고, ‘이중섭 예술제’를 시작했다. 2004년에는 이중섭 미술관을 세웠고 그 취지에 공감한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과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이 이중섭의 작품 9점을 기증했다. 조선일보사는 매년 이중섭 미술상을 시상해 올해로 23회째를 맞고 있다.
1951년 겨울 이중섭의 가족은 부산으로 건너오지만, 이듬해 부인이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고 아이들 건강도 악화돼 부인과 아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듬해 일본에 간 부인이 보낸 일본 서적을 팔아 생활비를 보태고자 했으나 이중섭은 책값을 떼이고 큰 손해를 보았다. 또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부인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돌려주지 않아 막대한 빚을 진다.
1954년에 통영 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데 몰두하여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을 남긴다. 이듬해 초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냈다. 이중섭은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그림 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남은 그림을 대구로 가지고 가서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에 영양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쇠약해졌다. 왜관의 구상(具常) 집에서 요양하게 된 이중섭은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쳐다보는 자신이 포함된 ‘구상네 가족’을 그린다. 그들 가족이 부러웠던 듯하다.
정신병자로 몰려 강제 입원
이중섭은 대구로 올 때부터 노이로제 환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여관의 손님 신발을 모두 거두어 씻기도 하고, 청소를 하기도 하여 친구들로부터 정신병자라는 말을 듣는다. 한 달 동안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하며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필로 사실적인 자화상을 그린다.
이중섭은 1955년 9월 서울에 올라왔으나 다시 친구들이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시킨다. 그후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기며, 늦가을에 퇴원해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지낸다. 이때 극심한 황달 증세를 보인다. 이듬해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 무료 입원실에 입원하나, 원장 최신해가 정신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내려 즉시 퇴원한다.
그러나 그후 상태가 극히 나빠져서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다시 입원한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별세한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른다. 화장된 뼈의 일부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안장된다. 이중섭은 아들 둘을 남겼다. 모두 일본에 살고 있다. 장남 태현(64)씨는 화구상을 하고 있으며, 차남 태성(62)씨는 건축디자인업을 하고 있다.
내가 본 대향 이중섭 김병기 화가·전 서울대 미대 교수 대향 이중섭은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함께 다니고 일본에서도 같은 미술학교를 다닌 절친한 친구다. 대향은 키도 크고 미남이었다. 일본애들 앞에서 애국적인 노래를 거침없이 불렀다.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 그때 한국에 관한 노래는 다 애국적이었다. 대향은 커서도 꼭 인력거꾼이 입고 다니는 것 같은 반코트 차림이었는데, 주머니에는 골동품상에서 주워 모은 목각 도자기 파편이 가득했다. 대향은 한 인간이 극한상황 속에서 그림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갔다. 아내와 애들이 있는 일본에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형제가 싸우는데 어디 피란 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향의 포인트는 반커머셜리즘이었다. 누구한테 팔려는 생각 없이 그냥 그렸다. 그의 주검을 내가 발견했다. 적십자병원에 만나러 가니까 침대에는 없고 시체실에 있었다. 대향은 은박지 골필화, 데생으로 6·25전쟁이라는 리얼리티를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대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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