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발견]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모란공원에 간다. 그곳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죽은, 아직도 스물두 살인 전태일이 있다. 그리고 문익환, 박영진, 박래전, 성완희, 문송면, 김귀정, 조영래…. `민주 열사 묘역'에 들어서는데 낯익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밥이 되지 않고,
알콩달콩 생활의 잔재미를 북돋우지도 못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저들과 나는 왜 이곳에 오는가. 오월과 십일월이면 밀린 부채를 탕감하듯 나는 왜 서둘러 묘지를 찾는가. 묘지 부근에서 유독 살지게 자라는
나무들. 붉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움켜쥔 적단풍나무 줄기에 이마를
댄다. 어떤 꿈을 덜고 어떤 꿈을 더하러 우리는 묘지로 오는가….
고백하건대, 어떤 `책'을 읽고 눈물 흘려본 기억이 있다면 내겐 이 책이 유일하다. 그것은 좋은 책이라든지 감동적인 책이라든지의 범주를
넘어선, 날것 그대로의 아픔과 분노가 촉발시킨 눈물이며 그때의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둥근 포용성이 아니라 날카로운 예각으로 나의 내부를 찢으며 온다. 어린 스물에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와서 내 바깥의 `나들'을 깨닫게 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인간적인'이라는 말이 빚는 빛과 그늘의 웅덩이를 들여다보게 하였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국민학교조차 졸업할 수 없었던 삶의 조건 속에서 전태일이 남긴 빼곡한 일기 속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과 분노와 탐구와 희망과 고통받는 어린 생명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다. 지극한 사랑을 품은 대가로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분신 산화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 이전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노동자'의 대자적 인식이, 인간의 조건을 각성한 `노동운동'의
격류가.
우리는 흔히 `평균적'으로 살만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배불러도 단 한명의 굶주린 이가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바로 이 땅에서, 가까이 북녘에서, 몸 팔러 고향을 떠나온 이국의 노동자들 속에,
제3세계에 가해지는 숱한 폭력과 착취 속에, 이 막돼먹은 세계 속에
순연한 `긍정'이 놓일 자리는 불행히도 없다. `자기부정'과 `부정'을 `부정'하여 도달한 `긍정'의 좁은 문이 있을 뿐.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비처럼, 스스로를 태운 재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전설의 새처럼.
시인 김선우
한겨레신문 2000년 1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