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에서 제2연화봉까지 7KM여는 콘크리트 포장 길이다.(천문대 차량 통행을 위한 걸로 보임)
천문대를 지나 연화봉 까지는 기분 좋은 산책로 같은 신작로 길. 넓은 신작로인 관계로 밤 하늘이 휜히 보인다..
연화봉을 지나면 제1연화봉까지는 내리막의 등산로, 제1연화봉을 지나면 사방이 조망되는 초지로 국망봉까지 이어진다.
국망봉부터 고치령까지는 꾸준한 내리막으로 오르막이 별로 힘들지 않다.
다만 체력이 남아 있을 때만 그렇다는 것이고 ..11시간 여를 버틴 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구간마다 느낀다.
실로 얼마 만에 그친 비 인가, 비가 그치자 이제 태풍 소식이 있으니.. 폭풍 전야라 했던가, 하늘은 구름 한점 없다.
소백산의 밤 하늘은 무수히 많은 오색찬란한 별들이 머리 위로 쏟다져 내려 오고 그믐달 마저 보름달 인양 밝다.
내 어릴적 여름날, 저녁을 밭죽으로 먹고 와상에 누워 밤 하늘을 쳐다보면 딱 이 하늘 이였다.
그때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찾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였는데..오랜만에 푸른 밤 하늘에 별들을 쳐다보니 긴가민가 자신이 없다
<죽령~고치령 구간의 고도표와 지도>
죽령탐방소를 지나 제2연화봉까지 콘크리트 포장길을 풀벌레의 소리를 들으며 세벽 길을 오른다
제2연화봉
토성 고리전망대
외에 금성,목성등 전망대 이름들이 별들의 이름이다
콘크리트 포장길은 끝나고 신작로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하늘을 쳐다보니 그야말로 별들이 머리 위로 쏟다진다
소백산 천문대는 어둠속에 있다
연화봉에 있는 해시계 전망대
<연화봉>
소백산에서 세번째로 높은 연화봉은 비로봉에서 능선을 타고 서남으로 십리거리에 있는데 비로봉 국망봉과 같이 정상은 초원으로 되어있다. 봄철이면 온통 진달래 철쭉꽃의 화사로움이 말할 나위없고 가을이면 초원에는 온통 천자만홍의 온갖 이름모를 풀꽃으로 눈이 내릴 만큼 호화현란한 바다를 이룬다 하니.꽃피는 춘삼월에도 와야하고, 설경으로 환호하는 눈 내린 겨울에도 와야하고..
연화봉에서 가파른 마루금을 한참 동안 내려와 안부에서 제1연화봉을 오르는 나무계단에서 실로 오랜만에 일출을 감상했다.
제1연화봉 비로봉을 향하여
<경북 영주시 순흥면 순흥지>
사진의 저수지 뒤로 옛 도호부가 있던 순흥면 소제지가 있다.
죽령 남쪽 영주에서도 풍기나 순흥은 역사 갈피에 이름께나 떨친 땅이다. 풍기는 예로부터 인삼이 유명했고, 더불어 사과와 인견직물도 이름이 났다. 금계동은 편안한 삶을 누릴 만한 땅으로 꼽은 이 땅의 십승지 중 첫 번째로 꼽혔다. 순흥은 지금이야 보잘것없는 시골 동네에 불과하지만 경상 북부의 중심지로 한 시절을 누렸던 도호부(都護府)의 땅이었다. 조선초까지 영월,태백,봉화,울진을 포함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쑥대밭으로 허물어졌다. 지금의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수장 되었다. 그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20여 리나 흘러 가서야 멈췄으니 지금도 ‘피끝마을’이 있다.
제1연화봉과 비로봉 중간 지점에서 천둥리 (구봉)방향으로
운해가 한폭의 동양화를 만들었다
비로봉 정상이 보인다
함박꽃 이질풀
<소백산 비로봉>
비로봉은 석가의 眞身을 높여 부르는 칭호
소백산은 미륵이 주도하는 도솔봉(천)과 비로나자불(부처)이 주도하는 비로봉이 있으며 그 사이에 연화봉이 있다.
소백산의 다른 이름으로 이백(二白), 또는 백산(白山)으로 불린다.
"이백"은 산경표가 나타나기 전까지 태백산과 하나의 산군으로 보아 (태백과 소백을 합친 말 뜻) "이백"이라 하였고 "백산"은 밝다. 깨끗하다 으뜸이다. 라는 뜻으로 가장 높거나 정기가 맑은 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소백산은 장엄하게 솟아있어 영남에서 태백산의 버금가는 웅대한 산이면서도 험준하거나 날카로운 기가 없이 순후한 모습의 토산으로 온아하고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기상의 영기어린 성산으로 살기가 없다.
술사 남사고는 소백산을 보고,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라고 했고 그의 저서에서도 태백, 소백산은 피난에 첫째 가는 땅이라고 해서 소백산에 안긴 풍기가 십승지지의 첫째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비로봉에서 본 소백산 중계소와 천문대
비로봉에서 본 지난 구간의 도솔봉, 묘적령, 묘적봉
아침 먹고 올려다본 비로봉, 멀리 옆의 첫 번째 봉우리가 도솔봉이다
국망봉 오르는 중
국망봉의 유래
국망봉에서 바라 본 구름 덮인 비로봉 전경 국망봉에서 조망한 상월봉, 국망봉 다음 넘어야 봉우리
상월봉에서 조망한 국망봉 능선
<늦은맥이재>
좌측으로 내려서면 신선봉과 민봉,구봉 방향이다. 백두대간 길은 직진.
죽령에서 이곳까지 대략 7시간 소요,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 구치령 까지는 아직도 9KM나 남았다.
아,인제 지친다. 나에 체력의 한계는 여기까지가 딱인디..그러나 앞으로 더 가야 할 시간이 4시간여....
<마당치>
마당치는 마당처럼 넓은 공터로 되어있기 때문에 마당치라고 한다. 또는 馬落里
馬落里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충북 단양군 영월면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들이 마지바위라 불리는 곳에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불리는 지명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이곳 주민들은 영월이나 영춘으로 나가는 대신 고치령을 넘어 다녔다. 새벽에 대문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는 먼 하룻길 이었지만 순흥장(2·7일)이나 부석장(1·6일)의 규모가 제법 컸기 때문이다.
<고치령>은
영주의 순흥과 단양의 영춘을 잇는 고치령(770m)은 신라시대에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고치(古峙)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큰 고개인 죽령을 포함해, 영월 하동과 영주 부석을 잇는 마구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지금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이나 고갯마루의 산신각에서 치성드리는 무속인들 외엔 찾는 이 별로 없는 고개지만, 20여 년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들의 통행이 잦은 고갯길 이었다.
고치령 고개를 경계로 소백산 쪽은 "소백지장"이고 태백산 방향은 "태백천장"이다
<고치령의 산신각>
고치령의 산신각은, 가운데에 산령각(山靈閣)이라 썻고 좌. 우에 있는 주련에는 아래와 같이 썻다.
왼쪽에는 차산국내지령지성(此山局內至靈至聖) "산의 영역이 모두 지극하게 성령스럽고 성스러웠으면 한다"라고 쓰고
오른쪽에는 만덕고승성개한적(萬德高勝性皆閒寂) 수만가지 덕이 높고 번성해서 모든 사람의 본성이 여유로우면서 고요하기를 바란다"고 써 있다.
고치령 산신각엔 금성대군과 단종대왕이 모셔져 있다. 민간에 전승되는 무속신앙에 의하면 세조에게 쫓겨나 유배지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 신령이 되었고, 조카를 보호하다 형인 수양대군 눈밖에 난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후 소백산 신령으로 모셔 졌다. 비록 올바른 세상을 꿈꾸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초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다.
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순흥으로 유배당한 금성대군이 영월 청령포에 갇힌 단종과 소식을 주고받을 때 그의 밀사들이 이 고치령을 넘나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치령은 순흥에서 영월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치령은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의리의 통로로 승격되는 것이다.
고치령 산신당은 마을사람들이 매년 소를 잡아 제를 올릴 정도로 영험한 제당이라 타지에서도 무속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물론 백두대간 종주자들도 쉬어가면서 무사 산행을 빌기도 한다. 짙은 숲과 어우러져 성스러운 기운이 넘치던 산신각은 그러나 2001년 어떤 기도객이 켜 놓은 촛불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현재의 산신각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이곳은 백두대간 분수령이 행정구역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 고치령 북쪽의 마락리를 비롯해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 도래기재 서북쪽의 우구치리도 모두 그렇다. 이 마을들은 모두 행정구역으로는 영주에 속하면서도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탓에 남한강 수계가 된다. 이곳의 분수령은 도계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로 제법 굳센 편이다. 그래서 흔히 첩첩산중에 갇힌 이 마을들을 ‘영남의 고도(孤島)’라 부르기도 한다.
마구령의 남대리(南大里)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명당으로 꼽히는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순흥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을 북쪽의 어래산(1,063m)은 영주와 충북 단양, 강원도 영월이 만나는 ‘삼도봉’이다.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주의 순흥장, 단산장(4·9일), 부석장이 서는 날이면 단양 의풍리와 영월 와석리 사람들과 땔감이나 산약초를 둘러매고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화전민 이주정책 이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마을은 한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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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발취한 역사 이야기 한토막>
Ⅰ.죽령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의 죽지랑도 죽령과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진덕여왕 때 사람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 도독사로 가면서 죽령을 넘을 때 만났다는 한 거사와의 인연으로 태어났다 해서 아들의 이름을 죽지로 지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 책에는 죽령이 ‘죽지령(竹旨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려나 죽령이 ‘죽지령'이거나 지난 호에서 말한 ‘죽죽이'에서 왔거나 모두 ‘죽'이 뿌리다. 그 죽 뿌리를 찾다보면 죽령이 ‘큰 고개'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풀이에 이른다. 그 해석은 죽령 고개에 무릎 장단을 치고 추임새까지 넣어놓는다. 큰 고개가 한자에서 뜻 빌림을 하면서 ‘대재'가 되는데, 여기서의 ‘대'가 다시 ‘대나무=죽(竹)’으로 이어졌다는 것. 우리말과 한자가 뒤죽박죽 뒤섞이면서 죽령으로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데, 죽령(더 남쪽으로 잡으면 안동)은 우리나라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에 걸린다. 대나무 선을 그어보면,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울진 죽변에서 내륙으로 들어와 마침내 백두대간에 걸리면서 죽령~새재~추풍령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죽령은 우연 같은 필연으로 ‘대나무도 넘기 힘든 고개’가 된다.
대나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주 힘겹게 죽령을 넘어간 종이 하나 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는 이 종의 본디 자리는 안동 땅이었다. 경주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과 함께 범종의 대표로 꼽히는 것이다. 상원사가 세조를 기리는 절집이 되면서 나라 안의 이름난 종을 찾다가 안동 남문루에 걸려 있는 이 종을 점찍었다. 100여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가는데, 죽령 잿마루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36개의 종 젖꼭지 중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보내고 나서야 재를 넘었다는 이야기다.
옛날 죽령은 시끌벅적한 고갯길이었다. 삼국의 싸움터를 지나, 새 나라 고려의 이념이 경상북부의 큰 도시 안동과 순흥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과거 길의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이 부지런히 재를 넘었다. 죽령주막 앞 골짜기를 따라 희방사역까지 2.5킬로미터의 그 옛길이 이어진다. 이 길에는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떡집이며 마방이며 객점이며 짚신장수까지 있어 그야말로 어느 저잣거리에 못지 않게 시끌벅적했다. 술집은 희방사역 자리의 마을 어귀에 있던 무쇠다리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죽령의 고갯마루 주막거리가 두 번째, 그 사이에도 느티정과 주점 주막거리가 있었을 정도였다니 그 흥청거림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 고갯마루 주막을 물려받은 것이 죽령주막 인가 ??
Ⅱ.풍기 저마다 먹고살 건 움켜쥐고 찾아왔다 소백산 남녘 자락에 안긴 풍기(豊基)는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터다. 웬만한 장마에도 홍수가 들지 않고, 백두대간이 북녘을 가린 덕에 때때로 녈비(지나가는 비)가 내려 가뭄이 들지 않는다. 거기에다 진흙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섞인 모래 진흙땅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죽령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단양이 석회암지대 이지만, 그 남쪽 풍기 땅은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사양토다.
풍기가 풍요로운 땅이 되는 데에는 뭐니뭐니 해도 인삼이 으뜸이다. 풍기인삼은 예로부터 그 이름 값을 톡톡히 했다. 풍기인삼을 담았던 종이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인삼 내가 풍긴다고 했고, 두세 번 달여먹어도 좋을 만큼 약효가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삼은 열여섯 냥, 금산삼은 열 냥, 풍기삼은 여덟 냥을 한 근으로 쳐서 값을 매겼다고 한다.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의 300그램을 다른 지방의 인삼 375그램과 같게 쳤을 정도였다. 모양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두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말린 인삼을 구부린 정도로 보아 산지를 구별했다. 강화․김포․개성 인삼은 곧은 그대로인 ‘직삼’이며, 금산인삼은 완전히 구부린 ‘곡삼’이고, 풍기인삼은 그 중간쯤으로 꼭 절반을 구부리는 ‘반곡삼’이다. 이 구부림은 약효보다는 그 지방의 습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곡삼인 풍기인삼의 뿌리는 소백산의 산삼에 닿아 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산삼은 이름난 진상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734) 당나라에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가에서도 즐겨 썼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산삼을 바치라고 성화였을 테고, 풍기사람들은 얼마나 들볶였을까. 그래서 소백산 산삼 씨앗을 받아서 기르게 된 것이 풍기인삼의 시초라는 것. 또 하나는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산삼 씨앗을 구해 풍기읍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인삼은 ‘반음-반양’ 즉 그늘과 햇볕이 적당히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또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물이 잘 빠져야 한다. 땅이 너무 기름져서도 안 되고, 밤낮의 기온 차도 커야 좋다. 이런 조건은 사과 농사에도 좋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리고, 봄이면 녈비가 내려 가뭄 걱정이 없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울타리는 역시 소백산이 어깨 겯고 있는 백두대간이다. 흔히 죽령을 넘어온 풍기 바람이 세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이고, 대부분의 삼밭이나 사과밭은 소백산에 등을 기대고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으니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풍기를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해서 뭍의 제주도라 불렀다. ‘풍기 삼다’ 중 바람과 돌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도 여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여자’는 십승지에 그 뿌리를 둔 곁가지에서 비롯되었다.
본디 승지는 경치 좋은 곳이나 지형이 뛰어난 곳을 일컫는다. 하지만 승지는 풍수의 시각으로 보아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한다. 신라 말의 도선을 비롯해 고려 말의 무학, 조선 중엽의 남사고․ 이지함들이 이른바 최고 풍수 도인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열 곳의 승지, 즉 십승지를 꼽았다. 십승지로 꼽히는 곳은 조금씩 다른데, 남사고의 십승지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지난 호에 말한, 소백산에게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절을 했다던 그 사람이다. 그가 첫번째로 가리킨 곳이 바로 풍기 인삼의 텃밭이자, 훗날 정감록 마을이 된 금계동이다.
조선시대의 비결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남사고의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동인 것은 같다. 하여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감록>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를 찾은 때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6․25 때 피난 와서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도 큰 피해가 없었고, 6․25 때도 스쳐가는 정도였다니 십승지의 ‘영험’ 덕을 톡톡히 봤다.
팔도에서 온 이들로 넘쳐나던 그 시절 풍기사람 열에 여덟은 타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특히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 많아 풍기는 ‘이북5도’라 불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명주의 본고장이었던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1930년대부터 ‘쪽닥베틀기(족답기)’ 한두 대씩을 가지고 인견사(人絹絲)를 원료로 한복 속옷감 따위로 쓰이는 인견직을 잤던 것이 ‘풍기인견직’의 시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대도시를 비롯해 전국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0년도에 100대 정도에 불과했던 쪽닥베틀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1,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었다. 풍기인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6․25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공장들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충당하느라 집집마다 인견직을 짜는 베틀소리로 밤을 밝혔다. 요즘은 그 베틀기를 이은 100여 개의 섬유공장에서 인견직․나일론․폴리에스터 생산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본디 풍기에는 황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 황씨를 바람과 돌과 함께 ‘풍기 삼다(三多)’로 꼽았다. 하지만 인견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천 명을 넘어서면서 황씨 대신 여자를 삼다에 넣었다. 백두대간 산자락의 자그마한 마을과 섬유공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 방직공업은 원료 산지나 시장이 가까운 대도시 근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풍기인견은 교과서적인 상식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풍기의 풍요는 소백산 울타리에 그 뿌리를 두고, 이곳의 바람과 물과 세월의 흔들림이 버무려낸 것이다. 십승지에 어울리게 이처럼 딱 떨어지는 땅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풍기역 뒤편 비로봉 가는 길이 금계리다. 한때 정감록 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옛날도 잊은 듯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다. 그러나 십승지로 풀이하자면 소백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으며 금선계곡을 타고 온 비로봉의 옥수로 몸을 적시는 땅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비로사가 있다. 자세한 절집 내력이야 알길 없지만 당간지주며 부도며 주춧돌로 미루어 짐작컨대 소백산 자락에서 가장 오래된 큰절일 듯싶다. 또 희방사는 선조 1년(1568)에 만든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관해 왔던 절이다. <월인석보> 1권 머리에 붙은 <훈민정음>의 것까지 모두 200장의 판목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령과 소백산에서 싸움이 치열했던 1951년 1월 13일, 유엔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희방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다만 그 <훈민정음> 판목으로 찍어 만든 책 한 벌을 잿더미 속에서 나중에 가까스로 건져냈다.
Ⅲ.순흥 고구려 땅에서 일으킨 남대궐의 ‘반역’ 슬픈 역사의 땅 순흥은 경상 북부의 행정․문화 중심지였던 도호부가 있던 땅이다. 옛 순흥도호부는 관할지역만도 지금의 충북 단양군 영춘, 강원도 영월군 상․하동면과 태백시의 황지․철암․장성, 경북 예천과 울진군의 일부를 포함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쑥대밭으로 허물어졌다.
지금이야 영주시에 하나로 묶이지만, 예로부터 순흥․풍기․영주는 오랫동안 엇비슷한 크기로 나뉘며 역사를 이어왔다. 본디 세 고을 모두 고구려 땅에 들었다. 그 시기는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했던 470년 무렵의 장수왕 때인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백제와 함께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빼앗으면서 고구려를 밀어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고구려 영양왕 1년(590), 온달은 ‘죽령 이북 열 고을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출사표로 달려와 온달산성에서 신라와 대치했던 것.
순흥에서 만날 수 있는 고구려의 흔적은 ‘어숙묘’와 ‘읍내리벽화고분’이다. 이 둘 모두 고구려나 백제 고분의 형태인 횡혈식고분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것들은 수혈식고분이며 벽화고분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숙묘는 돌문에 새겨진 글자를 해석한 바에 따르면 신라의 관직에 있던 ‘어숙’의 묘이며, 신라 진평왕 17년(595)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읍내리고분은 539년쯤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주인들이 고구려사람일까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사람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땅을 더 넓혀 보면, 순흥 동쪽 봉화․울진까지 확대된다.
고구려의 남쪽 끝머리 영토였던 영주 사람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울 때 신라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티었다고 한다. 그런 옛날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주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영주사람들의 기질이 굳고 끈질기다고 평한다. 그것은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뀌는 국경지대의 사람들이 험한 세상 견뎌내는 삶의 방식이었으리.
순흥면사무소 마당 한켠에는 고려 충숙왕 때 다시 지었다는 누각 봉서루가 옛 도호부의 영화를 이야기하듯 서 있다. 공민왕이 썼다는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흥주는 고려 때의 순흥고을 이름이다. 땅만 넓었다고 옛 순흥도호부를 꼽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임금의 태(胎)를 가장 많이 묻었던 땅으로 도호부 중의 도호부로 꼽혔던 도시였다. 고려말까지만 해도 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한강 이북은 송도(개성)라 해서, 남순북송(南順北宋)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사방 십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는 아흔아홉 칸 짜리 기와집들이 즐비했고, 집집마다 쌀밥을 짓고 참나무숯불에 자반고등어를 굽던 마을이었다. 자부심 강했던 순흥이었으니 안축의 경기체가 <죽계별곡>도 술술 읊어졌으리.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의/천년 흥망 속에도 풍류가 한결 같은 순흥성 안에/다른 곳 아닌 취화봉에 임금의 태를 묻었네/아, 이 고을을 중흥시킨 모습 그 어떠합니까/ … / 아, 소백산 높고 죽계수 맑은 풍경 그 어떠합니까’.
금성대군이 세조 3년(1457) 순흥으로 유배되면서 순흥부사 이보흠은 뜻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한다. 그들은 순흥도호부 관할 고을에 격문을 띄우고,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글을 보내 뜻을 함께 할 선비와 무사를 모았다. 고치령을 넘어 소백산 북녘 자락 남대천에 ‘남대궐’을 짓고 한강의 ‘북대궐’과 대항하겠다는 큰 꿈을 키웠다. ‘첫째, 순흥을 근거지로, 도호부의 군사 700여 명을 움직여 이웃 고을을 점령한다. 둘째, 죽령과 조령을 장악해 한양과의 연락을 두절시켜 영남을 아우르고, 온 나라에 격문을 띄워 동지들을 모은다. 셋째, 남대궐을 짓고 상왕을 모셔 복위에 대비하며, 힘을 길러 한양으로 진격한다.’ 그 즘 단종이 영월 땅에서 읊은 애절한 시 한편이 소백산을 넘어와 순흥고을을 적시곤 했다. ‘달 밝은 밤에 자규새 울면/시름 못잊어 다락에 기대었네/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전하노니/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하지만 그들의 꿈은 순흥도호부 관노의 밀고로 일순간에 깨어진다. 겹겹의 포위망에 갇힌 순흥은 ‘역적의 고을’로 불탔고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서울로 옮겨져 경회루에서 참형을 당했고,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살육 당한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지금의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수장되었다. 그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20여 리나 흘러가서야 멈췄으니 지금도 ‘피끝마을’이 있다. 그 아수라가 지나간 죽계천에서는 밤만 되면 애처로운 넋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이어졌다. 쑥대밭이 되고 90년 뒤 소수서원을 세워 냇가 바위에 ‘경(敬)’를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한 뒤에야 넋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고 한다. 소수서원이 경 자를 새긴 또 다른 내력이 있다. 소수서원은 본디 통일신라 때 문을 연 숙수사라는 큰 절집이 있던 자리다. 순흥이 불바다가 되면서 숙수사도 불탔으니 석불들만 드문드문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면서 석불이라는 석불은 죄다 소에 던져버렸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받들던 조선이라 절터에 서원이 들어앉는 일은 흔했다. 아무튼 비가 내리는 칠흑의 밤이면 그 소에서 무엇인가가 뛰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지 ‘첨벙’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는데, 경 자를 새겼더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어른 키로 열 길이 넘도록 깊은 소였다지만 요즘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얕다.
소수서원은 이곳에서 난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을 기리려고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 서원의 시초로 치는 백운동 서원은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지내면서 임금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아 이름이 바뀌었으니 사액서원의 효시로 꼽힌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책이며 논밭이며 노비까지 내려보냈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받았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 안에 이런 사액서원이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특권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썩는가보다. 소수서원 뒤쪽 죽계천에 있는 제월교는 청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 짜하다. 옛날, 흥청망청인 선비들과 놀아나던 기생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이 다리 밑에 버리고 달아나곤 해서 청다리로 불렸다. 자식이 없는 집에서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를 주어와 길렀다고 한다. 옛날 어른들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왔단다’ 하던 우스갯소리의 그 다리가 순흥에선 바로 이 청다리다. 이 지방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얼러댈 때 ‘청다리 밑에 갖다 버린다’거나 ‘네 어미는 청다리 밑에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 단다’ 하는 것으로 청다리를 끌어 들인다. 소수서원에서 청다리로 가는 길에 금성단이 있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죽계천에 수장되었다는 수많은 선비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200여 년이 흐른 뒤인 숙종 45년(1719)에야 단을 세웠다. 울타리 너머에는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말없이 금성단을 지키고 서 있다. 순흥도호부가 풍비박산 날 때 불타 죽었다가 순흥이 복원되면서 다시 살아나 오늘날까지 1200년을 살고 있다.
순흥에서 고치령으로 가는 옛길은 장고개를 넘어 두렛골서낭을 지나 세거리로 이어진다. 두렛골서낭은 금성대군과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참절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 500년이 넘도록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대를 이어온 두렛골 서낭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 2시에 지낸다. 여느 서낭당과 달리 이곳의 제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나 임금에게나 쓰는 황송아지다. 제물에 쓸 송아지를 살 때도 흥정을 하거나 값을 깍지 않는 것이 불문율 이다. 특이한 것은 송아지에게 깍듯한 예우는 물론이고 호칭도 ‘어른님․대군님․양반님’ 등으로 부른다. 두렛골 서낭제는 복위운동의 실패로 스러져간 모든 넋들에 대한 기림이자, 그들을 제물로 바쳐 다시 영혼을 위무하는 애절한 살풀이춤 이다. 고치령(800m) 잿마루에도 낡은 서낭당이 하나 서 있다. 금성대군이 이 재를 넘으며 단종 복위의 뜻을 세웠다 해 건의령이라고도 부른다. 길 오른쪽에 단종과 금성대군을 함께 모시는 산령각(山靈閣)이다. 매년 정월 열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 북쪽 즉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경상도 마을인 마락리 사람들이 고치재 산령각에서 제사를 올린다.
Ⅳ.연꽃마을 떠나면서도 머무를 수 있는 깨달음? 비로봉과 연화봉 아래 풍기가 큰 연꽃 봉우리라면, 좌석리 연화동은 연화폭포 아래의 작은 연꽃 봉우리다. 40여년 전만 해도 이 작은 연꽃마을에 서른 여섯 집이 살았다. 그 중 <정감록> 비결파가 열 집이었고, 여섯 집은 평안도에서 온 이들이 었다. 6․25 때는 국군이며 인민군이 고치령을 넘었다지만 이곳은 개새끼 하나 다치지 않았다. 지금은 다 떠나고 여덟 집만 남았다. 비결파는 경기도 용인에서 와 8대째를 산다는 정승연(67세) 뿐이다.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정감록>에 나오는 ‘인종구어양백(人種求於兩百)'의 ‘양백'을 소백산과 태백산의 사이 고치령이라 해석하고 연화동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연화동에서 ‘굶주림을 면하고 전쟁을 피했'으며, 일생을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냈다'. 또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정감록>의 이야기도 이곳에서 겪었다.
“9대에 걸쳐 천석꾼을 이룬 최씨 집안이 있었는데, 여 연화부수라는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번듯한 석물들을 잔뜩 썼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김씨네 집안에 빚을 지는 처지까지 되었지만 한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갚을 수가 없었지. 김씨네가 돈 대신 묫자리를 달라고 하니 내줄밖에. 그 명당은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자리’인데, 그렇게 무거운 석물들을 올려놨으니 가라앉는 것은 당연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