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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제주도 여행, 이날 7시를 조금 넘긴 이른 아침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8월초 휴가가 절정이라 출발할 때부터 제주도는 인파로 북적일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주공항에 내리고 보니 상황은 정반대였다. 공항 대합실도 그렇지만 제주시와 일부 유명 관광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주도는 휴가시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산한 표정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번잡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렌트카를 찾으러 갔다. 월드렌트카에서 미리 예약해둔 k5차량을 수령한 뒤 곧바로 숙소로 출발했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제주시 남쪽, 한라산 동쪽에 있는 한화콘도. 옆에는 프라자 cc가 위치한 곳으로 한라산 중턱이라 고도가 꾀 높았다.
지난달말 전경련이 주최한 하계포럼에서 묵은 숙소가 강원도 알펜시아였던 탓에 콘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다. 도착하고 보니 한화콘도는 오래된데다 내부시설도 그다지 좋지 않은 그저그런 콘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최근 시설을 업그레이드한 듯 전체적으로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전 이른시간부터 푹푹찌는 고온다습한 날씨였지만 콘도미니엄 로비는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은 채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었다. 에너지를 절약하고 적당히 덥게 지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싼 가격을 치르고 이용하는 시설이 쾌적하지도 않다는 생각에 얹짢은 기분이 들었다.
여장을 푼뒤 라면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이날 1시 25분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어머니와 장모님을 마중하러 다시 공항으로 차를 몰아갔다. 도착예정시각을 조금 넘긴 2시 34분쯤 두분이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비행시간이지만 무사히 입국장을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자 평소보다 더욱 반갑고 마음이 좋았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의 시작이었다.
첫 일정은 제주도 동쪽 끝 성산 일출봉에서 배로 들어가야 하는 섬속의 섬 우도였다. 성산항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3시를 넘어 있었다. 대합실로 표를 사기 위해 갔더니 이미 입도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여름휴가철이라 자동차를 이용해 우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고 오전부터 이미 많은 관광객이 우도로 들어간 뒤라서 섬이 적정 자동차 입장 숫자를 넘었다는 것이 대합실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발을 돌렸다. 다음 카드로 선택한 것이 성산항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으로 잡아 문주란 자생지와 산호해수욕장, 제주 해녀박물관들이 있는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였다.
워낙 내려쬐는 뙤악볕이 강하고 날도 더워서 에어컨이 빵빵한 차에서 내리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해안도로에서 비자림으로 이어지는 도로 부근지점에서 한 차례 차에서 내려 바닷가로 나갔다 이내 차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 견딜수가 없었다. 그래도 휴가 첫날이라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레임에 엄마와 아내, 아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점, 첫날이니 남은 날에 대한 푸근함과 기대가 엔돌핀 수치를 높여줬다.
해안도로를 거쳐 비자림 관광길에 올랐다.
사실 비자림 관광은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이번 휴가의 주요 테마는 한라산과 우도였던 것, 그러나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선택한 일정이 비자림이었는데, 우리 가족 모두 비자림 관광을 한 경험이 없어 결과적으로 잘된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고려때부터 자생하기 시작한 비자나무 3000여그루가 노목으로 거목으로 자라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독특하게 느껴졌다. 어른 팔로 3~4길이나 되는 나무둥치, 그 둥치에 덕지덕지 붙은 이끼가 제주땅에서 흐른 세월과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자나무는 침엽수에 가까운데 그 침엽수림이 근 700년동안이나 활엽수림에 점령당하지 않고 버티면서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비자나무에 우리가 모르는 독특한 기운이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생물시간에 배운 지식에 따르면 산의 수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끼-관목-침엽수림-침엽활엽수림-활엽수림으로 천이하게 마련인데 이 법칙이 제주의 비자림에서는 지켜지지 않은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아무튼 침엽수에 가까운 나무지만 그 숲의 깊이가 워낙 깊어 대낮인데도 숲속으로 들어가니 어두컴컴할 정도로 풍성했다. 나뭇잎 하나하나는 가늘고 작지만 수백년 세월을 흐르는 동안 수백 수천개의 가지를 가진 큰 나무로 자라나 태양을 겹겹이 차단한 효과인가 싶기도 했다.
비자나무 고목들은 저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나무 둥치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관광도 정해진 데크를 따라 하게끔 돼 있었다. 숲 중간쯤에는 이른바 연리목과 대장나무쯤으로 보이는 거대 고목이 서 있는데 이것들이 관광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고 입장로에서부터 비자림 전체를 둘러보는 관광로가 산책길이고 경관길이고 볼거리이기 때문에 비자림은 가족단위로 둘러보기에 딱인 곳이다.
첫째날 만찬장소는 물항식당이었다. 제주항 바다에 바로 접한 곳 제주에서 이름난 맛집이었다. 이 식당은 제주건 육지건 구분없이 제주 갈치집의 이름으로 널리 퍼진 제주물항, 물항식당의 원저작자이자 원조였다. 식당안에는 식당이름을 특허라도 등록했는 지 도용하면 조치를 취한다는 말과 함께 그곳이 원조임을 알리는 현수막까지 붙여두고 있었다.
둘째날은 한라산 관광에 나섰는데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져 노심초사하느라 한라산 산행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화창한 날씨에 산의 깊은 그늘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느낌, 처음으로 한라산을 산행한다는 기대가 작용해 출발은 아주 좋았고 산뜻했다. 속밭대피소로 이름지어진 곳까지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준석이는 가장 앞서서 혼자 산행을 했고 두분 어른들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모양이었다. 저멀리 앞서간 준석이가 걱정된 탓에 재은이는 쉬지 않고 속밭, 진달래밭까지 내질렀다.
이것이 사단의 화근이었다. 평소 등산을 가면 가장 뒤에 쳐지는 것이 재은이였는데 체력 생각없이 아들 걱정에 마구 힘을쓰다보니 탈이 난 것. 가장 뒤에 쳐져서 따라가던 내가 전화를 받은 건 11시를 조금 넘은 시각. 언제쯤 도착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쁘지도 않고 몸사태도 괜찮은 것 같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하고 보니 평소 앓던 지병(?)이 도져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얼마전(올해 여름) 그러니까 정당팀을 떠나 산업부로 발령을 받은 얼마뒤 강남의 한 기자실에서 업무를 보는 아침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재은이였고 일어서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화 걸 당시 있던 곳은 목동 한신청구아파트 상가에 있는 에어로빅 체육관 계단이었다. "빨리 와서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는 소리에 난 난감했다. 강남에서 목동까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족히 1시간 이상은 걸릴텐데 한숨에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손 놓고 있자니 상태가 장난이 아닌 것 같고 생각끝에 한신청구에 사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친구가 왔을때는 완전히 움직일 수 조차 없는 상황이 돼서 결국 119를 불러서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가는 길에 어지럼증이 더해져 구토까지 하는 난리가 났었다. 그런지 10여일이 겨우 지난 상황에서 또다시 그 병이 도진 것. 그것도 한라산 정상을 바로앞에 두고 그런일이 벌어져 여간 곤혹스러운 처지가 아니었다. 계속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고 내려가는 것도 불가능해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단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하기는 어렵고 정상 등반에 걸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결단을 내렸다. 준석이는 제일 먼저 정상으로 출발했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두분도 설득해서 정상 등반에 나서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한라산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메니에르병 환자가 발생했으니 가능하다면 약을 구해서 진달래밭대피소로 좀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는데 전화를 받은 쪽도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약을 구하려면 당사자가 있어야 하고 직접 상태를 확인하기도 어려우니 당연했지만 워낙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니까 연락을 해둘테니 일단 대피소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보라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니 대피소에서 우리에게로 한 명이 찾아와서 살펴보고는 직원들이 쉬는 방으로 안내하면서 안정을 취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방으로 가서 한참을 앉아 있어도 증상이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또 한번 결단을 내렸다. 병원에서 배운 메니에르운동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운동을 시켰더니 갑자기 구토를 하며 더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증상이 호전되기 위한 전조현상이었는 지 잠시뒤에 제 컨디션이 돌아오는 지 먼저 올라간 준석이와 엄마들이 걱정되니까 정상 등산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그 전에 대피소 관리인이 짐을 실어나르는 모노레일 비슷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하산을 하면된다고 해서 산을 내려갈 걱정은 던 상태였다. 정신이 돌아온 거 같고 또 내려갈 방안도 마련됐으니 가도 되겠다 싶었고 그것보다는 먼저 올라간 준석이가 달랑 물한병 들고 혼자서 정상으로 갔으니 그게 더 큰 걱정이었다. 그리고 정상등반의 마지노선인 1시를 정확히 20분 가량 남겨두고 있어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정상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싶어 출발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쉼없이 발걸음을 옳겨 거의 정상부근에서 두 어머니를 따라 잡고는 상황을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곧장 정상으로 달려갔다. 준석이는 정상 데크 한쪽에서 누워서 쉬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정상에서 4명이 만나서 사진도 찍고 백록담이며 운해며 경치를 구경하고는 느긋하게 하산하기 시작했다. 재은이가 무사히 내려가고 있다는 전화가 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분 부모가 걱정이었다. 이미 오전 7시 50분부터 정상도착시간 오후 2시까지 6시간 험한 산길을 걸어 힘도 빠지고 지쳐 있는 상황이라 온전히 내려갈 수 있을까 내심 큰 걱정이 앞섰다. 자주자주 쉬면서 내려가면 된다고 하지만 편도로 8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70대 노인들이 왕복으로 주파하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신 다리 아프다는 말을 반복하는 소리를 들으며 애초 진달래밭에서 길을 돌렸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지 말자고 말류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평생 지금 아니면 언제 갈 기회가 있겠느냐는 말을 반복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정상에 오르고 말겠다는 기세였던 것. 그래서 당시에 말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쉬는 빈도가 잦아지고 속도가 갈수록 떨어지니까 자연 하산속도는 더욱 떨어지게 되고 출발지점인 성판악까지 내려왔을 때는 시침이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들도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등산길 입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하산 도중에 발생했다. 진달래밭과 속밭을 한참지나고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장모님과 나 엄마 순으로 하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철퍼득 소리가 들렸고 순간 시선을 돌리니 장모님이 앞으로 넘어지고 있었고 그 앞에서 하산하던 남녀가 괜찮으냐고 황급한 목소리로 물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놀라 일단 앞으로 뛰어가서 부축해서 일으켜드리고 다친데가 없는 지 물었는데 워낙 소리가 크게 들린 탓에 골절상이나 타박상을 크게 입지나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도 아무데도 다친 곳은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날 우리가 준비해간 먹거리는 오이와 과자 같은 것 뿐이었고, 점심시간에는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사먹게 됐다. 그때 장모님이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오이 한 조각에 초코바만 챙겨먹은 상태라 허기가 졌고 힘이 빠지다보니 다리를 헛짚어 넘어진 것이었다. 장모님은 라면을 드시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가지 걱정스러운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또 혹여나 가다 주저앉으면 어쩌나 걱정하다 보니 신경이 한껏 곤두서고 힘이 들었던 지 내려오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그래서 이번 한라산 산행은 기적과도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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