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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긴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
아주 편한 밤과 달리 매우 심란한 아침이었다.
뇌성 벽력뿐 아니라 카미노에 든 이래 처음인 공포의 바람과 함께 퍼붓는 비때문에.
아무리 희화해도 사랑이랄 수 없고 바야흐로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
결투를 하기 위해서는 판초로 배낭을 포함해 온 몸을 덮음은 물론 준비해온 비닐로
다리까지 감싸는 중무장이 필요했다.
이렇게 했지만 대결할(길떠날) 엄두를 낼 수 없게 쏟아 부었다.
새벽같이 기상했건만 19일째의 출발 시각은 4월 22일(금) 08시 10분 전.
거리 개념이 애매한 것이 반도인의 특성인가.
한반도와 이태리반도가 닮은꼴이라고 느꼈는데 이베리아반도에서도 같은 느낌이다.
들쭉날쭉하는 이정표 말이다.
그동안 자주 보았거니와 마을 벽에 써놓은 322kms는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뜻
하는 듯 한데 사아군에서 315km가 이틀을 더 걸었는데도 더 많이 남았다니?
실제로는 이미 290km대로 떨어졌다.
중무장에 하늘이 겁을 먹었나.
알베르게를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강상태로 변하더니 마을을 벗어날 때 즈음에는
내리는 듯 마는 듯 하여 전혀 지장이 없는 날씨였다.
수로(canal)를 건널 쯤에 뒤따르는 한쌍의 대화가 우리말 같아 걸음을 늦추었다.
예상대로 젊은 이들은 서울에서 왔으며 여인의 집은 한 때 내가 살았던(그녀가 태어
나기 전에) 수유동 U초등학교 근처란다.
사아군에서 몇시간 함께 걸었던 S 이후 2번째로 잠시나마 동행하는 한국인들이다.
어제 갈라섰던 길과 합류해 오르비고 강(rio Orbigo)을 건넜다.
길이 300m인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는10~11c에 로마시대의 다리 위에
20개의 아치로 증 개축했다는 돌다리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고 가장 유명한 돌다리중 하나로 알려진
대로 명품 다리다.
순례자들에 대한 공헌도는 차치하고 이 다리에 얽힌 설화 또한 화려하다.
야고보의 성년인 1434년, 레온출신 귀족기사 수에로 데 키뇨네스(Suero de Quino
nes)가 이 다리에서 '파소 온로소'(Paso Honroso)라는 마상시합을 열었다.
순례를 계속하려는 기사는 누구든지 이 길목을 지키는 기사집단(키뇨네스와 10명의
동료기사)과 마상시합을 해야만 하는.
'파소 온로소'는 '영예로운 길'이라는 뜻이므로 시합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서 가는 길
이라 해서 그같은 이름이 붙었는가.
시합은 성 야고보의 축일인 7월 25일 앞 뒤 15일간 계속하게 되었다.
7월 10일에 시작해 축일인 25일 하루를 쉬고 8월 9일까지
1달 동안에 유럽 전역에서온 기사 68명과 727회의 시합에서 300개의 창이 부러졌다.
공교롭게도 이 해의 7월 25일은 일요일이 겹친 특별한 성년이었으므로 예년에 비해
더 많은 기사 순례자들이 이 시합을 해야만 했다.
하루 중지한 것도 축일이라는 이유보다 시합중에 아라곤 출신 동료기사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고도 할 정도로.
그 후, 이 시합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초에 마창 시합 행사를 갖고 있단다.
한데, 수에로는 왜 이같은 위험천만한 행사를 벌였을까.
중세기사들의 뛰어난 마상기예로 오랜 여행에 심신이 지친 순례자들을 위로하려고?
부르고스 왕실 귀족들이 콤포스텔라로 순례가는 기사들을 초대, 마상시합을 하면서
충분히 쉬게 한 다음 다시 순례길에 들게 하는 것이 당시의 그곳 관습이었다지만.
미모의 부인에게 반해 사랑의 노예가 된 수에로가 시합을 열어서 무수한 창을 부러
뜨려 사랑의 족쇄에서 벗어날 것을 성 야고보에게 맹세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기사
정신에 비춰볼 때 불합리한 창작이 아닐까.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서 젊은이들은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
길을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 가겠단다.
어차피 돌아서 나올 텐데 뭐하러 가느냐며...
카미노를 걷기 위하여 1년간 특별저축, 특별휴가 등 어렵살이 왔다는 그들인데도 대
카미노 자세와 관심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은데 어안이 벙벙해졌다.
국내의 길에 대해서는 아예 백지인 그들과 무슨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절대의존의 감정
다시 홀로 되어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Orbigo)로 갔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쾌적한 시골길은 산티바녜스 데 발데이그레시아스(Santibanez
de Valdeiglesias) 마을로 이어진다.
마을의 트리니다드 교회(Iglesia de la Trinidad/성 삼위일체)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정오의 종소리에 맞추어 모여든 신도들로 만원 상태였다.
순례길에서 처음 보는 대 성황이다.
때마침 예수의 수난 금요일이라 그런가.
주민 200여명인 마을의 성인 남녀가 총 출동한 듯이 보였으니까.
작은 마을의 교회에 무어인의 처단자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와 순례자 산
로케(San Roque)의 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도 치열한 전쟁을 겪었을 터.
내가 미사의식에 조금만 익숙했다면 아마 걷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다만 조금이라도 훈련받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국내의10대로를 비롯해 만리길을 걸을 때도 예배시간에 교회 앞에 당도했을 때에는
반드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철칙처럼 이행했으니까.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나그네에게는 정기적 관성적 종교 의식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간절함이 있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표현을 빌리면 '절대의존의 감정'일 것이다.
나의 '그 분'을 향한 절대의존의 감정은 카미노에서도 절대적이다.
산티바녜스데 발데이그레시아스를 벗어나면 "카미노에서 가장 평화롭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길이 시작된다.
맞는 말이긴 한데 들머리는 카미노에서 샌들의 단점이 잠시나마 드러난 구간이다.
비가 많이 왔으며 계속해서 내리는 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오르막구간에 자갈을 깔기는 했지만 진흙길이 되어 샌들로는 징검다리 건너가듯
돌을 밟고 가기도 용이하지 않았으니까.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는 고개마루는 페레그리노 서낭당(城隍堂)이다.
익살스런 순례자 마네킹(mannequin)과 돌무더기들, 십자가 위에 까지 올라가 있는
돌들, 그늘을 만드는 나무와 벤치 등.
과수원과 우거진 오크숲, 밀밭 사이를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길이 계속된다.
길가 작은 호수를 지나고 관목지대와 농장지대도 지난다.
폐농장 건물 앞에 작은 천막지붕으로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은 초미니 가게의 주인은
기인에 다름 아닌 젊은이다.
<La Casa de los Dioses/ 신들의 집>가 음각된 하트 모양의 세요(sello/스탬프)와
기부금 박스(Divotion Box)가 비치되어 있다.
쿠키를 비롯한 간단한 먹거리, 차와 음료수 등을 먹고 마시고 가라는 그는 우리 말을
또렷이 한마디 한다.
"반갑습니다"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 아스토르가
널따란 경작지 농로가 된 카미노는 우뚝 서있는 돌십자가 앞으로 이어진다.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de Santo Toribio)다.
5c때 아스토르가의 주교(Bishop) 토리비오를 기리는 십자가란다.
그는 어떤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추방당했는데 샌들을 깨끗이 닦으며 "아스토르가의
것은 먼지까지도 다 털어버린다"고 외쳤다는 곳이 바로 십자가가 서있는 지점이라고.
한데 이 곳 이름이 왜 기쁨(즐거움)의 산(Monte de Gozo)일까.
분노(울분)의 언덕(Colina de Colera)이라 해야 맞을 텐데.
이름이야 어떠하던 뒤만 빼고 아스토르가를 비롯, 3방향의 조망권이 명품 지점이다.
비가 그친 것만도 다행인데 산뜻하지 못한 시야에 유감을 가진들 무슨 소용.
바로 아래에 있는 베가 쉼터에는 유대를 과시하려는 듯 젊은 한 팀이 하나의 탁자에
비좁게 앉아 노닥거리고 있다.
메고 온 배낭들로 보아 아마 예정된 일정이라 비를 무릅쓰고 강행중인데 갠 날씨를
고마워 하고 있나?
잠시 급경사를 타면 산 후스토 데 라 베가(San Justo de la Vega)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에서 갈라섰던 대체 길과 합류해 아스토르가로 가는 마을이다.
아스토르가를 3.2km 남겨둔 이 외곽마을이 바야흐로 발전중이란다.
많은 가게와 식당, 바르 등이 그 증거라고.
마을을 나온 카미노는 투에르토 강(rio Tuerto)을 건넌 후 로마시대의 다리라는 몰데
리아(Puente de la Molderia) 인도교를 건넌다.
레온 들머리에서 걸어보았던 육교보다 더욱 복잡하나 편한 육교로 기찻길을 건넌 후
세비야(Sevilla) 발 플라타 길과 합류해 고지대인 아스토르가로 오른다.
아스토르가(Astorga)는 원래 켈트족의 거주지였다가 로마인의 거점이 된 지방이며
당시의 지명(로마식)은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Asturica Augusta)였단다.
스페인 북부 광산에서 채굴한 귀금속들을 이태리 반도로 운송하기 위해 남쪽 항구로
가져가는 수송의 전략지점이었다.
그래서 은의 길(Via de la Plata)이라 했는데 카미노 세비야 ~ 아스토르가의 플라타
길(은의 길)의 오리진(Origins)이다.
한데, 지금은 농산물 교역의 중심지로 탈바꿈했으며 명품 리스트에는 빵과 비스킷과
초콜릿이 올라있다니 화려한 귀금속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먹거리의 시대?
"목욕으로 망했다" 는 말이 전해올 만큼 목욕을 즐긴 로마인의 마을답게 로마시대의
목욕탕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데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9c 건축물인 주교궁(Palacio Episcopal/Bishop's Palace)은 현란한 교회건축의
전담자 가우디(Antonio Gaudi)의 것이라는데 카미노에서 무수히 만나게 되는 그의
작품들도 고백컨대 나의 관심 밖이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력은 인정하지만 내 관심은 오직 길에만 집중돼 있으니까.
작지만(2009년에 인구 12.100명) 오래되었으며 2개의 대형 카미노를 가진 도시답게
역사적이고 유서깊은 건물들이 많으며 깨끗하고 활기가 넘쳐 보이는 도시다.
비가 그쳤으며 해가 중천인데도 초입의 알베르게에 적잖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중
이었고 교회, 광장과 거리 등 중심가는 시에스타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붐비었다.
많은 사람의 손에 우산이 들렸다는 것은 아마 비가 그치기 전에 수난일 미사를 위해
집을 나왔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정오의 트리니다드 교회가 그랬는데 아스토르가가 그러한 것은 당연한가.
평소에는 교회 안이 한적하지만 고난주간을 지키는 신심(信心)이 읽히는 광경이다.
내 걸음을 붙드는 것들
아스토르가에서는 오른 만큼 내리막도 있다.
내리막 길가에 서있는 노란색 페인트칠한 십자가가 예사롭지 않게 마음을 끌어갔다.
순례자의 사망사고 지점이란다.
별다른 위험지대가 아닌데 지병이라도 지녔던가.
거리의 십자가에 대한 느낌이 별로 좋지 않게 되기는 하와이 어느 섬에서 부터다.
교통사망사고 지점마다 경각심을 갖게 하려고 십자가를 세웠는데 왠지 찜한 후부터.
해골 표지판 보다는 낫지만 십자가가 오용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시덴시아 산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Residencia San Francisco de Asis)는 건물
보다 울타리 나무의 전지 방식이 눈을 뺏어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주의깊게 관심갖는 사항중 하나니까.(Gaudi의건축보다더)
내리막 길이 끝나고 조금 더 나아간 지점의 길가에 있는 소속 불명의 암자 엑세 오모
(Ermita del Ecc Homo) 벽에 써있는 글이 또 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리글을 포함해 독일, 일본, 프랑스, 아랍(?), 포르투갈(?),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으로 씌어있는 "신앙은 건강의 샘"이라는 글이다.
정체는 모르겠으나 맞는 말이다.
무엇보다 카미노에서 다른 나라 글들과 함께 당당히 한자리 하고 있는 우리 한글을
보는데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비가 완전히 그쳤으므로 석양때 까지는 무작정 걷겠다고 나섰는데 웬 제동이 자꾸?
이번에는 독일 나치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다.
각국의 연간 순례자 통계에 의하면 독일은 자국인 스페인에 이어 단연 2위다.
한데, 그들 중에는 나치즘(Nazism)의 부활을 열망하는 사이비 순례자들이 있는가.
차량의 센다 진입방지용 시멘트기둥의 가리비 마크 아래에 나치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가 버젓이 찍혀있다.
이따금 보게 되며 나무에도 그 기가 매달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분명 계획적이다.
아스토르가 이후 일행처럼 가는 중인 나이 든 에스파뇰들이 돌로 긁어내는 등 지우
려고 애를 쓰고 있다.
젊은이들과 달리 나치를 경험한 세대니까 그럴 것이다.
A-6고속도로를 고가로 넘은 후 조금 더가서 있는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Murias de
Rechivaldo)는 아스토르가에서 5km쯤 되는 마을이다.
아직 해가 제법 남았을 뿐더러 여기 머물 요량이 아니었으므로 지장은 없지만 연중
무휴라는 지자체 알베르게의 문은 닫혀있고 사설 알베르게는 맘에 들지 않았다.
침대 8e+식사 12e를 묶어 20e를 내란다.
넓은 안뜰을 자랑하지만 한밤 자고 새벽에 떠날 나그네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냐.
4km 남짓 되는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를 향해 나셨다.
아스토르가 이후 800m 대에서 1.000m에 육박하는 고원지대에 넓게 난 직선도로를
옛 야고보의 길이라고 우길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 앞에서는 가물가물 했으나 꽤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레온산맥(Montes de Leon)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걷고 있는데 지루할 리 없다.
그렇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삭막한 길이다.
흔한 밀밭이나 과수원, 목장으로 적합하지 않은지 개간을 하지 않았고 바람이 심한
탓인지 나무도 자라지 못하니까.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에서 갈라져 나갔던 대체도로를 흡수하는 십자로를 지나면 곧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다.
외지인이 드나들 일이 없으며 주민수가 50여명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며 가진 느낌은 결코 성장하는 마을이라 할 수 없다는 것.
그런데도 2개의 바르가 붐빈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내 몸 의탁해야 하는 급선무 두고 남의 마을 걱정하는 오지랖 넓은 늙은이. <계 속>
디카가 비맞지 않도록 우산까지 받고 담았는데도 아름다운 오르비고 다리(아래)와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이 행방불명이다.
국내의 산과 길에서도 이따금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며느리가 새로 사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역시다.
늙은이의 손가락에 문제가 있나?
오르비고 다리만 유난히 청명한 날씨인 것은 빌려왔음을 뜻한다.
산티바녜스 데 발데이그레시아의 삼위일체 교회(Iglesia de la Trinidad)와 교구 운영 알베르게(위1.2)
카미노에서 가장 평화롭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보존된 이 길(아래)을 거부한다면 카미노에 온
까닭이 무엇?
이 청년(위)이 우리 말 한마디를 한다. "반갑습니다"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아래)
산 후스토 데 라 베가(위)와 아스토르가 가는 길(아래)
계단 없는 육교(위/지그재그로 오르내리므로 다소 많이 걷기는 해도 편하다)
(알베르게/위)
고도 아스토르가에 현대식 교회는 분명 이색적이다(아래)
늙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들(위)과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마을(아래)
이렇다 할 풍광이 없는 고원의 직선 십리길인데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파노라마를 펼치는
레온산맥 덕이다(위/육안에 미치지 못하는 기계가 아쉽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마을(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