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을 움직였다고 구타하고
증언자 : 전종태(남)
생년월일 : 1956. 5. 19(당시 나이 24세)
직 업 : 공업사 직원(현재 역전 카뷰레터 운영)
조시일시 : 1988. 12
나는 광주시 신안동에서 1956년(실제는 55년) 5월 19일 2남 7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 위로 다섯 명의 누나만 있었고 내가 큰아들이었으므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버지께서는 집에 밧줄공장을 차려 놓고 자동차 헌 타이어로 고무 밧줄을 만들어 파셨다. 그러므로 집안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에 숙문중학교(현재 송원중)에 입학하였지만 학업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1학년 1학기 말에 자퇴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서 놀고 있으려니 주변 어른들 눈치도 보이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 어른의 소개로 인쇄소에서 잠깐 일을 했지만 일하는 것에도 흥미를 못 느껴 그만두고, 1970년부터는 유동에 있던 흥진공업사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3년 석유파동이 있게 되자 폐차된 자동차의 헌 타이어로 고무 밧줄을 만들던 아버지의 공장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헌 타이어가 품귀현상을 보여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장과 함께 신안동 집을 팔고 현재 살고 있는 용봉동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집안이 곤란하게 되자 누나들이 직장을 다니며 가계를 꾸려나갔고 나도 몇 군데 직장을 옮겨가며 가계에 보탰다. 그리하여 1980년 나는 화순에 있는 학성공업사에서 자동차 정비 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북동에 있는 어느 음식점에서 자동차 정비공 친구들과 함께 '나루터'란 계모임을 가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때 계모임을 끝내고 친구 한 명과 시내로 나오다가 수창국민학교 옆에 있는 '인재병원' 근처에서 공수부대원이 학생으로 보이는 한 사람을 구타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학생은 수창국민학교 쪽으로 도망을 가려다 뒤쫓아오는 공수대원 한 명이 던진 곤봉에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때 공수부대원 5, 6명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치고 개머리판으로 찍어버렸다. 그러자 그 학생의 얼굴 부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한참을 짓밟던 공수대원들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사거리 쪽에 주차해 있는 군용차에다 실으려고 네 명이 팔다리를 하나씩 들고 가는 것이었다.
그 때 나와 친구와 시민들이 함께 지켜보고 있다가 '우' 하는 야유를 보내니까 김엽병원 앞에다 버려두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사거리 쪽으로 가버렸다. 시민들이 그 학생을 병원 안으로 옮겼다. 그렇게 인제병원 근처에서 밤늦게까지 계속 구경하고 있다가 용봉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20일경(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붙잡힌 날은 KBS 방송국이 불타고 있을 때였다고 기억한다. 왜냐하면 내가 잡힌 날 KBS 기자도 그 불타고 있는 현장에서 뒤늦게 붙잡혀왔기 때문이다) 아침에 부모님들께선 "일을 나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화순이니까 괜찮다"고 대답하고 집을 나서 화순에 있는 학성공업사로 갔다. 그날 일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놀다시피 하다가 광주로 나오다가 학동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장 친구에게 광주시내의 상황을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친구가 "아무 일 없으니까 와도 된다"고 해서 다시 17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전남대 입구 사거리 근처에 있는 주유소에서 차가 정차했다. 공수부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롯데제과 부근에서는 시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전부 내려서 제각기 자기 집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도 역시 용봉동 집으로 가다가 국민콜택시(현재 영일식품) 앞에서 시위대와 만나게 되었다. 시위대는 인원이 굉장히 많았는데, 개중에는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가기도 이상하고 그래서 나도 그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제일 앞장을 선 꼴이었다. 전남대 입구 사거리에 거의 도착하자 공수부대들이 '협상하자'고 했다. 잠시 시위대들이 멈춰서 있을 때 갑자기 공수부대원들 쪽에서의 '잡아라' 하는 구호와 함께 시위대열이 제각기 흩어지게 되었다. 나도 국민콜택시 골목으로 돌아서다가 공수부대원 한 명에게 붙잡혔다. 그 공수대원은 무전기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전병인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도 총을 들고 있었다. 잠시 동안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그 공수대원의 총을 뺏어들었다. 그런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공수부대원 3, 4명에게 머리 뒷부분을 얻어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남대 어느 강의실이다" 했다. 그때의 내 모습은 머리, 얼굴 할 것 없이 짓이겨져 피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부대원 2명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다친 머리털을 깎아내고 뒤통수 부위를 꿰매주었다. 아마 뒤통수를 맞을 때는 몰랐는데 대검으로 찔린 모양이었다 .
그 뒤 일렬로 세우고 손을 뒤로 묶어서 무릎을 꿇린 채 허리를 편 상태로 사람들을 앉혀놓았는데, 그것은 '총을 빼앗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공수대원들마다 곤봉, 군화발 등으로 어느 부위 가릴 것 없이 무차별로 구타했다. 그렇게 맞다가 쓰러지면 군화발로 발가락을 밟아버리는 바람에 생발톱이 빠지기도 했다.
날을 새우며 맞기만 했기 때문에 배는 무지하게 고팠는데도 다음날 점심때까지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채 오후 3-4시경에 '철수'하는 명령과 함께 어디론가 다시 끌려가게 되었다. 끌려갈 때는 포승줄로 두 명씩 묶여 밀폐된 탑차에 빽빽이 실려갔는데, 최루탄을 넣으니까 사람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겨우 몸을 움직여 유리창을 깼는데 유리창을 깨고 나자 다시 '호로'(덮개)를 씌워버렸다. 그렇게 대충 3-4시간 끌려가다 보니 사람들은 서로 살려고 비좁은 차량 안에서 몸부림을 쳤고, 그 와중에 세 사람 정도가 밑바닥에 깔려 짓밟혀 죽게 되었다. 한참을 끌려가다 교도소에 내렸을 때는 약간 어두컴컴해졌을 때였다. 차에서 내리게 되니 '이제 좀 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때 느닷없이 차량에 탑재된 기관총으로 너희들을 죽여버린다고 겁을 주었는데, 갑자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어떤 사람이 "나는 몇 대 독자다. 우리 집에 연락만 좀 해주라"고 하면서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돈, 시계 등을 던졌다. 그 사람은 결국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았는데, 공수부대원들이 물을 떠다가 얼굴에 뿌린 다음 사진을 찍고 발로 차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가 막히고 '하느님 아버지, 살려주십시오'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뒤 완전히 캄캄해졌을 때 총성을 들었다. 갑자기 총성이 나니까 공수대원들이 약간의 동요를 보이더니 창고로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창고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앉힌 후 기가 막힌 밥을 주었다. 그것은 완전히 '짠밥'이었는데도, 하루를 굶고 나니 그 '짠밥'도 사람들이 정신 없이 먹었다. 그렇게 해서 교도소로 끌려간 날부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교도소로 이송된 날에도 몇몇 사람은 원산폭격을 당하고 또 몇몇 사람은 줄을 맞춰 무릎꿇고 앉아 있었는데, 나를 비롯해 몇 명은 따로 불려나가 "이 새끼들은 주동자다" 하면서 죽도록 맞았다. 그렇게 맞다가 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잠을 자면서 끙끙 앓는 사람이 있으면 공수부대원들이 와서 "너희들 어디가 아파" 하면서 짓밟곤 하였다. 그때문에 잠도 깊게 자지 못했다.
전남대학교에서는 공수대원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교도소에선 공수대원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아니나다를까 교도소에서 만난 공수대 상사 한 사람(전북 고창 해리 사람)이 "부마사태 땐 너희들보다 더 심했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런데 끌려간 이튿날인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공수부대 운전병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타나서
"너희들 중에 운전할 줄 아는 놈 있으면 손 들어봐"
하기에 몇 명이 손을 들었더니 '나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앞에 나가자마자 그 공수대원이
"너희 새끼들 죽어봐라"
하면서 두들겨패기 시작하는데, 영문도 모르는 우리는 눈 앞이 캄캄하였다. 한참을 맞고 있는데 공수부대 중령이 나타나서 우리를 두들겨패던 공수부대원 운전병을 발로 차면서 쫓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들 중에서 내 지프차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자, 그때부터 수십 명의 공수대원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걷어차는 것이었다. 그렇게 원인도 모르는 채 죽도록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받을 때는 사복을 입은 수사관들이 나왔는데, 그들이 몇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내가 잡힐 당시의 공수부대 대위가 와서 수사관들에게 "저놈이 주동자"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잡힌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랬더니 수사관들이 "그렇다면 한번 속아주지" 하면서 조서를 꾸몄다. 그리하여 난 판정을 좋게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공수대원들이 철수하고 육군(20사단)에게 인계되었는데, 그들은 공수대원들이 잡혀온 사람들을 분류해 놓은 것을 무시하고 다시 한데 섞고 공수부대원들을 능가할 정도로 잔혹하게 굴었다. 특히 그들은 취침시간에 공수부대원들보다 더 잔혹하게 굴었다. 나도 한 차례 당한 기억이 있다. 당하던 날 '취침' 구호와 함께 잠을 잤는데, 새벽에 발가락을 조금 움직였다고 불려나가 4명에게 곤봉으로 한 시간을 맞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는데, '기상' 소리를 듣고 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자 커다란 곤봉으로 다시 구타하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 겨우 일어났다. 따라서 그 뒤엔 취침시간에도 정신적으로 공포감에 빠져 거의 두 눈만 감은 채 잠을 자지 못했다. 아마 결정적으로 육군에게 맞은 것으로 지금도 이렇게 아플 것이다.
아무튼 날마다 헬기가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전쟁을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여기가 바로 전쟁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도소 생활을 했다. 그리고 다시 버스에 실려 시트에 머리를 처박고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군기를 잡는다고 한바탕하고 그 뒤부턴 그렇게 심하게 당하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이젠 사는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인가 열 명씩 불려나가 강당에서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내용은 칠판에다 문구를 적어놓고 그대로 베껴 보냈는데, 대충 '곧 석방될 것이고 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6월 4일 석방되기 몇 시간 전에 속옷을 갈아입으라고 팬티, 러닝샤쓰를 가져다줘 갈아입고 상무대로 나왔다. 나올 때는 아버지와 통장이 함께 나와 계셨는데, 그때 완고하신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께선 상무대에서 '사회에선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쓰셨다고 했다. 그래서 큰아들을 보시는 순간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으리라.
석방되던 날(6월 4일) 평소에 아버님과도 친분이 있어서 유동에 있는 최외과 병원(옛 한국병원 자리, 광주고속 근처)에 입원했다.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나의 눈이 거의 검은 눈동자는 없고 흰 창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3일 만에 퇴원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서 한약, 침, 단방약 등으로 치료를 했으나 별 차도는 없었다.
그렇게 집에만 있다가 1982년 3월에 결혼을 했으나 노동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내가 집 근처에 있는 비닐 하우스에서 일당을 2천5백-4천원을 받고 일을 해서 가계를 겨우 꾸려나갔다. 그러나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아이들 2명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더 나은 일거리를 찾아서 아내가 집 밖 멀리 나갈 수도 없었다.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아버님께서도 유동에 있는 한약방에서 일을 하신다.
지금도 나는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간혹 오른쪽으로 얼굴에서부터 발까지 마비가 오기도 한다. 한약방에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어혈이 생겨서 그런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간혹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신병자'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 때 교도소에 끌려가서 맞은 이후로 사소한 일에도 느닷없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대충 4개월 동안 광주역 앞에서 '역전 카뷰레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는 지금 광주고속 앞에서 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책-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과 테이프를 판매하여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조사.정리 박종신)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