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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네 집 노비는 몇구(口) 였을까?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사회사 연구에 정말 큰 성과를 남긴 학자를 꼽자면, 지금은 은퇴하신 이수건 선생을 꼽고 싶다. 제임스 팔레가 <Confucian statcraft and Korean institutions>(<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이란 제목으로 번역) 에서 무식하게 조선시대 노비를 일괄적으로 slave로 해석했고, 조선시대 신분질서의 변화를 주장한 한국학계를 비판했지만 정작 이수건 선생이랑 학술회의장에서 만났다면 엄청 깨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팔레의 책을 보면 지 입맛에 맞는 신분제안정론을 주장한 '송준호'의 설은 인용하면서 이수건 같은 진짜 정밀한 사회사 연구는 하나도 인용을 안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수건의 책을 안봤는지, 아니면 보고도 지 입맛에 안맞아 무시했는지 궁금하다.)
밑에 쓴 '정조떡밥 2' 에서 인용했듯이 신랄하게 영남학파를 깐 분이신데, 재미있게도 이 분이 또 영남출신의 진짜 영남남인의 후손이시다. 이른바 한국사학계, 혹은 한국철하계 내에는 문중사학(門中史學) 내지는 보학(譜學)이라고 비꼬는 어둠의 세계가 존재한다. 어느 지역 출신, 어느 가문의 후손들이 "우리 할배 잘났어." 내지는 "우리 가문 잘났다.", "우리 조상 죄없셈. 저 쪽 가문이 역적이셈." 뭐 이런 류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이문열의 <선택>이나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도 그 수준으로 따지자면 이런 문중사학과 비슷한 '문중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혈통, 출신 지역에 따라 자신의 조상이나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역사학에 대한 열정이나 동기란 다름아닌 자신의 과거에 대한 호기심 일테니까. 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간혹 자신의 조상이나 당파에 대한 과도한 옹호와 왜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중이나 종친회에서 제공하는 연구비를 받고 엉터리 글을 써주는 경우도 있고. 하여튼 방대한 사료수집과 치열한 연구열정, 객관적 시각으로 사회사 연구를 하신 분이 바로 이수건 선생이다.
오늘 인용하고자 하는 책은 이수건 선생이 쓰신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일조각)에서 2장 5절 '퇴계 이황가문의 재산유래와 그 소유형태' 부분이다. (237쪽~270쪽) 간단하게 이 책에 대해 설명하자면, 사회사적 관점에서 이른바 '영남지역의 학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어떤 사회경제적 배경 하에서 형성되었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학문적 사승관계, 정치활동, 형성과 분화과정을 서술했다. 흔히 미국 동양사학계에서 '벤저민 엘먼'의 <From philosophy to philology>(<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로 번역)를 사상사에 현지조사[fieldwork] 개념을 도입한 사상사와 사회사를 결합한 역작으로 평가하는데, 나는 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를 사상사를 사회사적으로 접근한 명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퇴계 이황가문의 재산유래와 그 소유형태' 부분의 머리말을 보면,
다방 면에 걸쳐 진행된 퇴계연구는 그 미세한 분야까지 좁고 깊게 천착되어 이제는 더 구명해야 할 곳이 없을 정도로 손대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유독 퇴계의 경제적 기반인 그 가산의 유래와 규모 및 그의 치산이재에 관해서는 아직도 규명되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퇴계가 아무리 위대한 학자이자 언행범절이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상 어떠한 인물도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신격화되거나 성역화해서 불가침의 상태로 두고 연구하는 자세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한국의 성리학상 유종의 위치에 있는 퇴계를 두고, 그 가산규모나 치산이재라는 용어 자체가 퇴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느낌이 든다고 하겠지만, 퇴계는 평소 조행(操行)과 학문에 침잠하여 내외관직과 조야(朝野)를 출입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도 치산이재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여기에 당대의 다른 유학자들과 대비시켜 볼 때, 퇴계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
조선시대 사림의 지조와 절개는 주자학적인 의리와 명분에 영향받은 바도 크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공고한 '지주적 성격'위에서 재조, 재야인사를 막론하고 일정 수준의 노비와 토지를 갖고 비교적 안정된 경제생활을 활 수 있는 바탕 위에서 가능했듯이, 퇴계의 평생사업과 사상, 학문도 그가 다진 일정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성취되고 수련, 은축되어 갔던 것이다. (...)
이 작업에는 퇴계에 의해 정리된 그의 내외조상의 행장, 묘비문과 그의 자상한 가서 및 그의 '손자녀분재기'와 같은 윤색되지 않고 구체적인 면모를 지닌 자료를 통하여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 (위의 책, 237쪽~239쪽. 굵은 글씨는 본인이 강조함. 본문의 일부 어려운 단어는 본인이 쉽게 풀어 썼음.)
흔히 사용하는 '상부구조'를 지배하는 '하부구조' 같은 맑시즘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영남학파 특히 영남학파의 수장이었던 이황의 경제적 기반을 분석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분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위 머리말에서 보듯 이수건 선생은 퇴계 가문에 남아 있는 분재기(재산상속 문서)와 가서(가족에게 보낸 편지글) 같은 고문서를 통해 그 경제활동을 분석했다.
흔히 퇴계가 남긴 글이라면 퇴계문집을 떠올리는데, 문집이란 정치적, 학술적 목적을 위해 발행되는 책이므로 해당 저자의 모든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글이라든지 해당 저자의 체모를 손상시킬 수 있는 글들은 의례 빠지기 마련이었다. 문집의 편집, 편찬은 본인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후 수년 혹은 수백년 뒤 자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수집, 정리, 발간된다. 이 과정에서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거나 가감되기도 하는 것이다. 퇴계문집의 경우 흔히 <퇴계전서>, <도산전서> 등이 퇴계가 남긴 모든글을 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경제문제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은 빠져 있다. 퇴계가 자손들에게 보낸 편지(가서)에는 농업, 토지매매, 세금, 재산분쟁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현재의 <퇴계전서>에는 학문과 교훈적인 내용만을 실었을 뿐이다.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 372쪽 참고.)
퇴계 가문인 진보이씨는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의 5개 토성(土姓)의 하나로 중소군현의 토성이족(호장층)의 성장과정이 그렇듯 본관의 호장에서 출발하여 고려말 조선초에 과거나 군공으로 사족에 편입되었다. 퇴계 집안을 일으킨 사람은 5대조였던 이자수(李子脩)인데, 고려말 잡과에 급제하여(충숙왕 17년, 1330) 벼슬길에 올라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 침입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2등공신에 책봉, 밭 50결과 노비 5구(口) 등을 하사받아 사족층에 편입되었다.(국사 시간에 배웠던 여말선초 신흥사대부의 성장을 떠올려보라. 향리 가문에서 양반으로 편입된 퇴계 가문이 대표적 예이다. 사족이지만 송준호 선생이나 제임스 팔레 같은 미국학자들은 이러한 한국사에서 신분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려의 지배가문이 조선시대에도 계속 지속된다고 보고 있으며, 한국사에서 신분제 변화를 한국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왜곡으로 비판하고 있다. 송준호와 에드워드 와그너가 이런 관점에서 족보를 분석하고 <사마방목>을 분석했는데, 사회사 연구의 정밀성이나 사료 이용을 보자면 이수건 선생 보다 하수라고 생각한다.) 같은 향리 집안에서 태어난 이자수의 형제 이자방의 경우는 운이 없었는지 능력이 없었는지 계속 향리로 생활했고, 이자수의 가문이 퇴계로 이어져 영남지방의 확고부동한 명문양반이 된 것에 비해 동생 이자방의 가문은 조선시대에도 향리가문이 되고 만다.
이석(향리) -이자수(잡과급제)-이운후-이정-이계양-이식-이황
-이자방(향리)
(다른 형제들은 생략하여 이석에서 이황까지 이어지는 관계만으로 단순화 했음)
퇴계의 증조 이정은 여진정벌에 종군한 공으로 한산군수, 선산부사를 역임한 외에 세조의 원종공신 3등에 봉해져 약간의 특권을 받았다. 이때에만 해도 '자녀균분상속'이라 3남 6녀의 형제관제였던 퇴계의 조부 이계양은 많은 재산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부유한 종조(從祖) 가문에 양자가 되고 아내의 재산을 받아 옛 의인현 온혜동에 거주하여 전답을 일구었다. 이곳은 하천과 계곡을 따라 전답이 전개되어 물을 대기 좋고 주위에 개간가능지가 많아 노비와 같은 노동력만 있으면 쉽게 새 전답을 일굴 수 있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의인지역에 재지적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퇴계가문은 급속히 성장하였고, 이러한 가문의 성장 과정은 퇴계가문과 통혼을 한 풍산 류씨, 예안 김씨, 의성 김씨 등도 비슷했다. 즉 고려시대 호장층에서 시작하여 고려말 과거, 군공 등으로 사족화하면서 읍치 또는 본관을 이탈하여 외곽의 향촌이나 인근 지역으로 옮겨 새터전을 잡았고, 토성이족과 재지품관이란 기반 위에 치산이재에 밝은 조상이 나와 일정한 부를 축적하여 자손을 벼슬길로 내보내는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은 3자녀에게 균등하게 상속시켜서(이때만 해도 남녀구별 없이 균분상속이었고, 아들이 없는 경우 사위나 외손자가 제사를 잇기도 하였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은 그 재산의 1/3만을 받은 셈이었다. 당시는 남녀구분 없는 균분상속 관행 덕에 재산형성은 아버지[父邊], 어머니[母邊], 아내[妻邊]로 부터 각자 물려 받았고, 특히 아내의 상속재산이 재산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이식의 경우는 처가쪽 상속재산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7명의 자녀를 둬서 퇴계의 상속재산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수건은 퇴계사후 17년만에 그 자손들에게 분금한 '화회문기'(和會文記)에 기반하여 퇴계 당시 재산의 유래와 규모를 추정하였다. 위 문서는 선조 19년(1586)에 초안하여 임란 이후 광해군 3년(1611)에 정서한 것으로 퇴계의 손자 5남매가 각기 1부씩 나눠가진 것이다. 퇴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요절하여 장자 이준이 유일한 상속자였고, 이준의 재산과 이준 아내의 재산을 그들의 5자녀(퇴계의 손자들)가 나눠가진 것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문기에 기록된 이준의 재산은 퇴계와 그 아내의 재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기 외에도 위에서 밝힌대로 조선시대에 발간된 퇴계문집에는 집안살림에 관한 기록이 실리지 않았으나, 퇴계는 가서에서 상당히 자주 집안의 경제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수건이 문기와 퇴계가서의 경제관련 문건으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퇴계의 재산은 다음과 같다.
현존 전기나 문집상으로 본다면 사림은 거개가 경제적 기반없이 빈한한 처지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청빈, 검약한 생활태도와 실제의 재산규모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위의책, 258쪽, 굵은 글씨 본인이 강조.)
퇴계의 초년에는 다소 곤궁했지만 전처, 후처의 재산을 분금받고 또 자신의 출사와 기존재산의 증식, 준(아들)의 농사감독 및 자신의 규모있는 치산재리로 인해 중년 이후부터는 수삼채의 집과 150구 내외의 노비, 수천두락의 전답은 확보하고 있었다. 이 러한 재산규모는 당시 재지사족의 수준에서 본다면 중간수준에 위치하며, 퇴계를 전후한 당시의 재지사족 예를 들면 오천의 광산김씨, 하회의 풍산류씨, 천전의 의성김씨, (...) 등은 퇴계가문보다 오히려 더 많은 재산규모를 보유했던 것이다. (...) 특히 노비세전법이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으니 일정한 노비만 확봐게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비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퇴계 생전의 노비 150여 구가 16년 뒤에는 3백여 구로 증가한 것이 그 예이다. (위의책, 260쪽~261쪽, 굵은 글씨는 본인이 강조. 본문의 일부 어려운 단어는 본인이 쉽게 풀어 썼음.)
가서에 실린 경제활동은 크게 1) 전답매매와 포목, 곡물, 소금, 미역 등의 교역 2) 영농, 경작, 파종, 제초, 천방(둑) 작업 및 노비경작 3) 노비단속, 노비사역, 추수 및 수조(收租) 감독 4) 의령 처가쪽 재산 및 둘째 아들 재산의 처리문제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당시 재지사족들의 재산경영은 그들의 재산을 田, 民으로 대표하듯이 노비의 사역과 감독에 역점이 두어졌다.
중년부터 퇴계의 소유재산이 크게 예안, 영천, 의령, 풍산 네곳에 산재하였는데, 그 소재지마다 일전한 토지와 노비 및 농막이 있었다. 토지가 있는 곳에는 의례 노비가 있어 경작노비, 소작인, 창고지기, 우두머리 노비[幹奴]로서의 기능을 했는가 하면, 농장이 있는 곳마다 감독(인척 또는 우두머리 노비가 담당)이 있어 수조(收租), 노비신공, 타작감독 등을 담당하였는데 퇴계는 아들 준에게 그러한 업무를 총괄케 하였다. (...) 퇴계의 전답경작은 거의 노비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종 질병으로부터 노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평소 방역과 치료에 소홀함이 없게 가서를 통해 당부하였다.
퇴계의 노비 사용 원칙은 (...) 가급적 관용을 베풀되 상전을 원망하지 않고 심복케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퇴계는 노비들의 태만과 완강으로 인해 파종, 제초, 비료주기의 적기를 놓치는 것을 개탄해 마지 않았고 외지전답 소출이 노비들에 의해 훔쳐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퇴계는 준에게 '어리석은 노비'가 '잇속을 품고 집안일을 한다'든지, "듣자하니, 노비들이 모두 태만하여 일하지 않으니 지극히 문제가 심각하다. 그 중 가장 심한 놈을 골라 매를 때려 놀라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 했는가 하면, 노비가 완강하여 상전을 위해하려는 자는 "어찌 눈앞에서 부르리요, 때려 죽이니만 못하겠다."라 하여 강경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위의책, 268쪽, 굵은 글씨는 본인이 강조. 본문의 일부 어려운 단어는 본인이 쉽게 풀어 썼음.)
이러한 퇴계의 규모있는 영산으로 집적한 재산이 결국 그 후손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시켜 놓은 동시에 도산서원을 퇴계학파의 본산으로 그 위치를 유지하게 한 것도 퇴계가 이룩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위의책, 270쪽)
이 처럼 이수건의 연구는 정치사, 사상사에서 '사림의 등장'의 등장이란 사건이 어떠한 경제적 배경-황무지 개척과 노비 경영-을 통해 이뤄졌으며, 그들이 어떠한 어떠한 위치에서 출발하여 가문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정치하게 밝혀냈다. 내가 송준호나 팔레, 와그너 같은 학자들의 조선시대 신분제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몇몇 가문들의 족보만을 믿고 한국사회의 주요 지배층이 통일신라에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본 것은 세밀하게 각 가문의 고문서를 분석한 이수건에 비하면 기반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노비문제에 대해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몇마디 더하겠다. 고려와 조선시대 노비를 농노로 볼 것인가, 노예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농노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보충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백명 이상의 노비를 거느리고 그들을 데리고 농업경영을 한 것에 대해 현대적인 감정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것이다. 퇴계학파가 인간 이황을 성인에 가까운 위대한 학자로 만들어 놓은 것에 비해 이 연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 이황의 현실적 모습을 밝혀 놓은 것 뿐이었다. 현실에서 초월한 무결점의 존재로 떠받드는 것도 위험하지만 현대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수건은
상속과 분쟁 전민이 차지하는 비중도 시기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초기에는 노비가 재산의 주종을 이루며 퇴계 당시인 16세기에는 전(田)과 민(民)이 거의 동일한 비중을 유지하다가 17세기부터는 노비는 급격히 감소되는 반면 토지가 재산의 대종을 차지하였다. (위의책, 264쪽)
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지주의 농업경영이 노비경영방식[作介制]에서 병작제(幷作制, 지주-소작인이 수확을 반반씩 나누는 방식)로의 변화를 담고 있다. 조선 전기에만 해도 미개간지, 황무지 등이 많았고 농법의 발전과 더불어 이들 지역은 급격하게 개발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이 재지사족이고 사림들의 경제적 기반이 이것이었다. 이처럼 개간할 토지가 많이 남아 있을 때는 그 토지를 개간하고 운영할 노동력의 소유가 중요하지만, 조선후기처럼 미개간지가 줄어들고 기존의 농토에서 효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노비경영이 아닌 병작반수제가 더 효율적이었다. 조선전기와 후기의 노비제 변화는 이러한 토지경영과 결부시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단순한 현대적 감상으로 쉽게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퇴계의 노비경영은 더도 덜도 아닌 당대의 하부구조일 뿐이다.
이 논문은 내 학문역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대한 내 소회를 말하라면, "대단히 정직하고 치밀한 연구였다"는 것 외에 "역시 공부는 돈 있는 놈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ㅠㅜ 겉으로야 점잖게 청빈한 선비를 내세웠지만 다들 노비를 백구씩 거느린 지주들이었고 사실 그게 많은 축에도 못 들었다지 않은가? 사림파의 등장 이면에는 다 그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나같은 포의한사(布衣寒士)는 학문을 폐(廢) 해야지.......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나는 이수건 선생의 이 논문과 관련해서 한가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몇년 전에 나는 같은 대학 모형(다른 과 소속)의 제안으로 어느 아르바이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모 기관이 발주한 자료 전산화 작업이었는데, 그 작업의 총책임자는 역시 같은 대학의 ㅈ박사였다.(이 사람은 철학과) 이런 알바라는 것이 그렇듯이 책임자에서 작업자까지 전공은 달라도 다들 같은 학교 사람들이었다. 뭐 그래서 더 편했는지 몰라도 그 책임자 ㅈ박사는 작업 동안 허구헌날 잔소리가 멈출 줄 몰랐다. "뭐가 맘에 안든다." "뭐가 빠졌다. 다시 해라." 주절주절 쪼아대는 폼이 참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어찌어찌 내가 이수건 선생의 퇴계 노비 논문을 언급했다. 첨에는 몰랐는데 그 ㅈ박사가 아마 그 동네사람이어서 가계가 영남 남인의 후예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당장 그 ㅈ박사는 정색을 하며 이수건 선생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논문때문에 이수건 선생이 지역에서 비난을 받았다느니, 종가나 서원 출입을 못하게 되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마치 엉터리 논문을 써서 모함이라도 한 것인양 열을 냈다. 학번이 깡패라고 나이도 많고 학번도 높은 양반에게 (더구나 작업관리자 --;)와 얼굴을 붉힐 수도 없어서 암소리 못했지만, 그 ㅈ박사의 발언 중에 이수건 선생을 비난하는 발언은 있었어도 그분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말이지 그는 이수건 선생이 마치 영남지역에서 매장이라도 당한 것처럼 발언했지만, 이수건 선생은 그 논문 이후로도(논문은 90년에 발표, 책은 95년에 발행) 연구 잘만 하셨고 명예롭게 은퇴하셨고 훌륭한 제자들도 길러내셨다. 아마도 주자 이후 가장 위대한 성현이 백명 이상의 노비를 거느렸으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쪼잔하게 경제문제를 논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엄청난 불경이었으리라. 그들의 성현은 오직 한없이 근엄한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망을 제거한다."(存天理去人慾)만을 논하는 무결점의 존재여야만 했으니까. 하기야 모 교수가 '퇴계문화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가 감히 '극복'이란 단어를 넣었다는 이유로 쫒겨날뻔 했다지 않은가!
별 말 안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속으로 "소인배"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당시 작업이 꽤 빡빡하게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야간 작업까지 필요한 상황이라 나는 시간을 더 낼 수 없어서 얼마 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법 쏠쏠한 알바라 좀 아쉬웠는데, 나중에 그것이 큰 행운이었을 줄이야!!!!!!!!
후에 소개를 해줬던 모형에게 기막힌 소식을 들었는데, 그 ㅈ박사가 알바비 지급을 거부했다고 한다.
발주처였던 그 모기관이 작업을 검사했는데 자신들의 요구에 미달했다는 거였다. 작업자들이야 책임자 ㅈ박사의 무수한 갈굼대로 묵묵히 일을 해줬으니, 만약 문제가 있다면 첨부터 지침과 감독을 잘못한 ㅈ박사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사실 작업자 입장에서는 모기관으로부터 직접 그 소식을 전달받은 것도 아니었고, 그 ㅈ박사를 통해서 들은 것이었으니 그 ㅈ박사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아닌지도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실랑이 끝에 작업자들은 변호사와 고소까지도 상담한 모양이었지만 소송의 부담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나야 일찍 그만 둔 관계로 내 알바비는 제대로 받았지만 오히려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들이 작업은 작업대로 더 하고 돈은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작업자들이 ㅈ박사의 아파트까지 찾아 갔던 모양인데, 그 지독한 인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아... 그 ㅈ박사 퇴계 선생을 숭상하다 못해 퇴계 선생의 노비 착취까지 본받으셨던가? 그래도 퇴계는 천한 종놈들을 착취했을망정 같은 선비를 착취했다는 말은 못들었다. 그런데 퇴계를 그토록 숭상하는 ㅈ박사는 동학(同學)도 등쳐먹는구나! 아놔~ 그거 훔쳐먹고 부자되라. 얼마후에 그 ㅈ박사가 퇴계에 관한 연구서를 냈다는 언론기사를 보았다. 어헐헐헐헐~ 왜 사냐면 웃지요.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