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은 소리없이 찾아오는 살인자! 언뜻 그 말이 실감이 난다.
아내가 당뇨병에 걸린지 13년. 현재 나이가 43세이므로 서른살 젊은 나이에 당뇨가 찾아온 것이다. 아무래도 유전
성인 것 같다. 왜냐하면 장모님께서 그 무렵에 당뇨가 심한 상태였고, 급기야는 만성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셨
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름대로 관리에 힘써 왔다. 하지만
당뇨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어느새 발바닥이 터지기 시작하고 다리의 무감각 증세와 통증으로 저녁으로는 잠을 설치기가 일수다. 또한 양쪽
눈의 망막 혈관이 터져 최근에 와서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나의 바램은 더 이상 진전 되지 않기를 원했는데
이제는 몸이 붓기 시작한 것이다. 부은 다리를 눌러보면 마치 솜뭉치 눌러 놓은 것 처럼 원상 회복이 안된다.
거기에다 구토와 더불어 복수가 차서 호흡이 곤란하고 고혈압과 수술한 한쪽 눈마져 이상이 왔다.
이렇게 쉽게 무서운 합병증이 오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한 일이다. 장모가 만성 신부전증으로 얼마나 고통을 겪
으셨던가! 기억하기 조차 싫은 이병이 아내에게 찾아 온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자수성가 해야 할
입장에서 시작 되었기 때문에 사는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구경이나 외식한번 제대로 못 한채 살아왔다. 앞으로도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옛 어른들 말에 의 하면 가정에 "가고"가 없어야 산다
고 했다. 집안에 누구라도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정의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경제적 부담은 물론 감정적 손상
은 가족 모두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다.
나는 큰 충격과 더불어 삶의 의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고, 나의 무지함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아내는 아내대로 실의에 빠져 살고 싶은 의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 병마와 싸워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럴려면 우선 환자에게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선 안되고 항상 긍정적인 확신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
다. 가족 모두가 노력해야 할 부면 이다. 또한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공통적인 견해를 갖고 환자가 가족에
대한 심적부담 을 갖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나는 아내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럴려면 내 자신
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현실에 직면한 이 난관을 긍정적으로 보고 포기 하거나 낙담하지 않은 것이다. 병원에서는
투석을 권한다. 1주일에 3번씩 받아야 한다는데. 당뇨로 약해질대로 약해진 아내가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지 한편
으로는 난감 하였다. 사실 혈액 투석은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최선책인가를 생각하
면서 의사와 상담하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도 듣게 되었다.
결국은 신장이식 수술을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알게 된 나는 아내에게 나의 신장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뜻을 아내에게 밝히자, 아내는 먼저 나를 걱정한다. "주사도 못 마즘시롱, 검나게 아프껀디 어치께 아퍼서
흘라그요." 그러면서도 실의에 차있던 아내의 모습에서 한 가닥 희망을 엿 볼수 있었다. 사실 나는 현재 50세가
되도록 병원 신세를 져 본적이 없고, 주사도 맞아 본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아내의 그 모습을 보고 한층 결심이
굳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에게 신장을 주어서 삶의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신장 이식에 대해 알아본 결과, 서울 인제대학 저동 백병원에서 거의 100% 성공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
는 백병원 흉부외과 에서 코디로 일하시는 신혜숙 선생과 통화 하게 되었는데, 부부가 혈액형이 같다면 이식 할수
있는 확률이 90% 이상 가능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O형이었기 때문에 그 말은 나에게 참으로 용기와 힘을 주
었다. 우리는 정밀검사를 받아보기 위해 입원중인 아내를 퇴원 시키자 마자 순천에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 창 밖은 온통 흰눈으로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저런 곳을 아내와 함께 다녀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눈 풍경에 매료 되어 잠시 고통을 잊는 듯 보였다. 아내는 구경 다니는 것을 매우 좋
아하지만, 병 때문에 다니지 못 한다. 이번에 수술이 성공 한다면 신혼 여행 삼아 제주도라도 가봅시다 라는 제안
에 그 사람도 찬성이다. 몸이 퉁퉁 부은 아내를 데리고 백병원에 도착 했을때는 아침 8시! 우리 부부의 심정을 알
기나 하듯 날씨가 무척이나 춥고 매서웠다. 흉부외과를 갔더니, 신 선생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긴장과 불
안으로 찌든 우리의 마음은 신 선생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매우 큰 위안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신장 제공 여부를
알기 위해 기초적인 혈액 검사를 해야 한다. 혈액검사를 통해 혈청 및 조직은 물론, 20 여가지를 검사하게 될 것
이다.
우리는 3층 채혈실 에서 각각 주사기 20 정도의 혈액을 뽑았다. 나는 괜찮았지만, 아내가 걱정 되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피가 많이 부족한 관계로 악성 빈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놀랍게 설계되어 있는 것
이 분명하다. 그 후에도 채혈을 많이 했지만,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검사 후 2003년 1월 7일부로
3인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병실에는 폐암 수술 후 재발 되어온 환자와 교통사고로 한쪽 팔이 절단된 젊은 아주
머니가 계셨다. 낙담해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우리만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이 아니구나.'자위 하면서 동병
상련을 느꼈다. 오히려 팔이 절단된 아주머니는 아내가 더 부럽다 한다. 입원 한지 이틀째 되던 날 신 선생으로부
터 희소식이 왔다. 우리 두 사람의 혈청과 조직이 잘 맞는 다는 것이다. 참으로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이제 전문
의 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서류 심사가 끝나면 수술 여부가 확정 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신장을 직접 줄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교환 방식으로 장기를 공여 받을 수 있지만, 번거로움이 줄어든 것이다.
얼마후, 위원회에서 수술해도 좋다는 결정이 났다. 수술 날짜는 보름 후인 1월 28일로 잡혀졌다.
아내는 이제 수술을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 해야 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검사를 다 했다. 수술 하게
되면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면역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만일 몸에 병균이 있게 되면 치
료가 어려워져 2차 감염이 될 확률이 크다. 아내는 그 전에 앓았던 결핵이 의심 스럽다며 결핵 약을 다시 복용하
고 헬리코박터균을 없애는 약을 먹었다. 아내는 독한 약 때문에 자주 토하고 식사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혈당
조절과 대 소변 양을 체크 하면서 무슨 음식을 먹고 마셨는지 음수량 기록표에 자세히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장병 환자는 짜게 먹어서는 안되므로 병원 식사는 거의 소금기가 없었다. 우리가 그 음식을 먹어보면 평소에 얼
마나 짜고 맵게 먹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길들여진 식습관을 고치기란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아내는 가족이 가
져온 반찬에 늘 손을 댄다. 그 상황이 안쓰럽긴 하지만 환자의 보호자는 그렇게 하지 못 하도록 막아야 한다. 이
렇게 해서 수술을 위한 필요한 절차를 밟아 갔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내를 살려야 겠다 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달
리다 보니 앞으로 발생하게 될 입원비 및 수술 비용이 걱정 되었다. 지금까지도 상당한 비용이 지출 된 것이다.
IMF 로 가정이 가뜩이나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내는 연이어 병원 출입을 해야 했고, 예고 3년 재학중인 아들의 학
비도 만만치 않다보니, 재정적인 면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막막 하기만 한 것이다. 고민 끝에 신혜숙 선생에게
우리의 처지를 말하자 한국 심장 재단에 의뢰해 보는 것이 어떻게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가족이나 배우자가 장기
를 제공할 경우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수술 비용을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한국 심장 재단(서울시 송
파구 신천동 11-9 한신 오피스텔 207호)을 찾았다. 상담 후 필요한 서류를 접수 하기 위해 순천으로 내려갔다. 서
류 접수는 팩스나 우편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재단에 서류를 접수 했다 해도 바로 지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심장재단 위원회에서 서류 검사 후 지원 여부가 결정되는데, 그럴려면 적어도 2주 이상 걸린다. 그런데 지원 결정
이 나기 전에 수술을 하게 되면 지원 받기가 어려워 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불가피 하게 1월 28일 수술 일자를 2
월 04일로 연기 하게 되었다. 수술이 1주일 더 늘어 졌지만 수술 비용을 지원 받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참을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이번 수술로 인해 매우 곤경에 처할 상황이었다.
아내는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혈당 조절과 조혈제 등 필요한 처치를 계속 받아왔지만, 상황은 점점더 악화 되었
다. 매일 체크 하는 소변량이 줄어드니까 몸이 붓기 마련이고, 혈압은 자동적으로 상승 해서 밤이 되면 보통 200
이상을 초월한다.그러니 두통이 심해져 잠을 잘수 없는 것이다. 둘이서 병실을 나와 계단에 앉아서 추우면 들어갔
다가 나오기를 매일 밤 잠을 못자고 이러하니 아내는 차라리 죽었으면 한다. 옆에서 지켜본 나도 무척이나 힘들기
는 마련이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차라리 함께 끝냈으면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에
게 그런 감정을 보여서는 안된다. 아무튼 이대로 가다 보면 수술을 받기도 전에 무슨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
처럼 혈압이 높아진 이유는 신장이 나빠져서 그러므로 약도 소용없고, 이식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조금 보였던 오른쪽 눈은 이제 불빛 정도만 식별하는 거의 실명 상태에 와 있었다. 안과에 검사를
해보니 혈관이 막혀 이미 상당한 망막 세포가 죽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시각을 찾을려면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 그
러나 흉부외과에서는 지금 수술 하게되면 신장 이식에 큰 문제가 생길수 있으므로 다음으로 미루라고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그저 막막 하기만 할 뿐이다. 눈을 선택 할것인가! 신장을 선택할 것인가!
둘다 중요한 기관이 아닌가! 실제로 한쪽 눈을 감고 걸어보면 참 답답 하기 이를 때 없다. 아내는 성한 눈 마져
약시가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수 있겠는가!
하지만 흉부외과 의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아내는 2월04일 수술을 위해 2주를 남겨 둔채 투석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피를 맑게 해서 이식을 해야 신장에 손상이 안간다는 것이다. 아내는 목의 혈관에 호스를 꼽은
채 하루 4시간씩 누워 있어야 한다. 한번에 보통 3~4kg씩 체중을 빼기 때문에 부기는 많이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
만 혈압은 밤이 되면 여전히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안압까지 올라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통증으로 몸부림 친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 것인지 수술 날짜만 손꼽아 기다려 진다. 그래도 아내는 행복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석실에 가보면 이 세상과 다른 별개의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일주일
에 3차례씩 와서 투석 하지 않으면 생명 유지가 어려운 사람들로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다 신장 이
식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제공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
만 그 분들은 모두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즉면해 있는 문제를 회피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
다. 삶이 지친다고 생각이 들면 투석실 을 한번 가보라. 참으로 격려를 받게 될 것이다. 수술 날짜가 눈 앞에 다
가 왔다. 마음이 급해서 심장 재단에 연락해 보니 아직 지원에 대해 결정 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더 이상 수술을 미룰수가 없었다. 수술 전에 설날 연휴여서 병실도 비고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처럼
여유를 가진 듯 했다. 우리는 명절과는 상관이 없었다. 보호자 였던 나는 이제 수술 1주일을 남겨두고 신장 제공
을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하기 위해 아내와 다른 병실로 입원 하게 되었다. 딸아이가 우리를 간호 하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수원에서 올라 왔다. 나는 입원 하자 기본적인 검사와 신장 혈관 조형술을 받았다. 신장 혈관 조형술
은 하체의 동맥선을 통해 콩팥가까이 기구를 넣어 약품을 쏘게 되면 신장 혈관을 선명하게 촬영 할 수 있으므로
수술을 용이 하게 할뿐아니라 두 개의 콩팥 중 떼어내도 무리가 적은 것을 판독 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검사다.
연휴가 끝나고 수술 하루 전 수술을 집도 하실 구본일 과장을 비롯한 의사진들이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그날밤 주치의 선생은 수술 동의서를 가지고 오셨다. 그는 수술 할 때 발 생 될 수 있는 문제와 수술 후에
있게될 상황 들을 구체적으로 설명 해 주셨다. 아내는 수술 하루전, 이미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게 되었는데 그것
은 이식을 하게 되면 자기 몸 속의 세포가 거부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 하기 위해
서 약을 먹는 것이라 한다. 거부 반응 가운데에는 초급성, 급성, 만성 거부 반응이 있는데, 무엇 보다도 초급성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술 후 3~7일 간이 고비다. 그리고 조직이 맞다 해도 초급성
거부 반응이 생겨서 이식했던 신장을 제거 한 경우도 얼마간 있다. 그런 경우 이식한 신장을 다시 떼어내면 되므
로 생명에 지장은 없다. 단지 원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면역 억제제는 하루 두차례씩 정확한 시간에 먹지
않으면 신장이 금방 손상 될 수 있다. 실제로 딸이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 받고 상태가 매우 좋아 졌는데, 7년쯤
되었을 때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 결국 콩팥이 망가진 사례도 있었다. 또한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면 면역 기
능이 매우 약해 짐으로 특히 감기나 그 밖의 질병에 감염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그리고 음식 가운데,회는
삼가 해야 한다. 따라서 수술이 끝나면 이식 받은 환자는 한달 동안 격리 되어 감염을 막고 거부 반응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갈등이 컸다. 아내는 의사의 극단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까지 온 것은 무엇때문인가 결과가 어떠하든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2월 04일 아침! 잠을 설치고 나서 우리 부부는 파란 수술 복장을 갖추고 항생제
반응 검사를 끝마쳤다. 아내는 매우 담담해 보였다. 우리는 서로가 잘 될테니 걱정 마라고 안심 시켰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성공을 빌었다. 가족들은 벌써 와 있었다. 아침 7시 30분 경 나는 아내를 뒤로 둔채 가족
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수술실로 향하였다. 딸과 고3 인 아들이 내 침대 옆에 바짝 서 있었다. 내가 수술
실에 들어갈 때 아이들은 잘 받으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도 부모가 같이 수술 하니까 매우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나보다 한시간 후에 들어올 것이다. 수술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곧 마음의 평정을 찾을수 있었다. 수술은 한시간쯤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
안 무척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사람은 누구나 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
은 입장에 있다고 해서 너무 좋아할것도 아니다. 또 내가 현재 불행한 입장이라 해서 너무 슬퍼 하거나 괴로워 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아내에게 꽃 한송이, 아니 양말 한컬레 선물 한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 기
회에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 할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행복 스럽다. 심 호흡 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고 나
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중환자실에서 깨어 났을때는 오후 1시30정도 된 것 같다. 딸
아이의 우는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고통은 매우 컸지만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의사의 말에 참으로 안도감이 들었
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만치 무균실 에 아내 혼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가 회복 되었다는 말은 들었지
만 상태가 어떤지 매우 궁금 했다. 의사와 간호사의 정성어린 손길로 나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 졌고, 아내 역시
신장 수치가 아주 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심장 재단에서 500만원 한도 내에서 수술 비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했
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은 나의 고통을 상쇄 하고도 남았다. 중환자실에서 3일째 되는날 나는
일반 병실로 옮겨 졌다. 아내에게 우려 했던 초급성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아 한고비 넘은 것이다.
아내는 인제 소변이 잘 나오고 신장 수치도 정상을 유지했기 때문에 일주일 후 무균실에서 1인 병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는 2월 13일 퇴원 하게되었다. 아내는 특히 새벽으로 소변이 많이 나와 딸아이의 잠을 설치게 했다. 의
사들은 아내의 상태를 보고 대 만족해 했다. 딸의 간병과 더불어 아내의 몸은 많이 회복 되었기 때문에 3월 04일
날 퇴원하게 되었다. 이전에 혈당 조절도 잘되고 혈압도 거의 정상이 되었다. 얼굴에 혈색이 돌고 몸의 부기도 완
전히 빠진 것이다. 나 또한 50세 임에도 신장을 제공 했지만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더욱이 우리 부부는 무
수혈 수술을 했기 때문에 부작용이 전혀 없고 회복력도 훨씬 빨랐다. 참으로 성공 적인 수술이었다. 그러나 아내
는 퇴원후에도 관리를 아주 잘 해야 한다. 사실 관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퇴원후 1,2주 간격으로 병원에 가서 진
찰을 받고 지금은 한달 간격으로 가서 검사 받고 약을 타 온다. 면역 억제제는 오전 10시와 밤 10시에 정시에 복
용한다.그리고 혈당 조절과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음식을 매우 조심하고 있다. 상황 때문에 아내의 한쪽 눈이 실
명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러나 실명 된 눈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술을 예약해 논 상태다.
하지만 이정도만 회복 되어도 얼마나 좋은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로써는 넘기 어려운 큰 산을 넘은 기분
이다. 이 산같은 장애물은 우리 힘으로는 넘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원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 했던
것이다. 이 난관을 무사히 극복 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가족들과 이웃들, 온 정성을 다해 수술을
성공 시켜주신 의료진, 수술비를 지원해주신 한국 심장재단 여러분, 모든 분 들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 드립
니다. 지금은 아내가 한쪽눈이 실명 되긴 하였지만, 가끔 싱크대 앞에서 그릇을 씻으며 노래하는 아내의 소리를
들을때면 제 마음은 참으로 뿌듯해 집니다. 앞으로도 많은 장애들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
어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손 잡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담이 우리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대 하면서 이만 졸필을
줄입니다.
2003년 05월 06일
남편 강오섭
아내 박한순 드림
첫댓글 투병 일기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이 가득 하기를 두손 모아 기도 합니다...
가슴 한켠에 퀑해 지는 이유는 뭘까요? 그저 고개 숙여 기도 할 따름입니다.앞으론 좋은 일만 생기게 축복을 주소서!
감사합니다 남편 강오섭님 그리고 너무나 훌륭합니다 우리 친구들를 대표해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글를 카페에 올려놓고 잠시 시간을 내어 저녘을 먹으면서 친구의건강한 모습을 보니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참으로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박한순동창의 투병기에서 남편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알았습니다 한순동창의 부부애가 넘 좋아서 꼭 쾌차하리라 믿고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쾌유를 빌께요...! 한순아 건강한 모습으로 꼭 다음 모임때 만나......!
고맙습니다. 가슴 절절한 내용앞에 그저 눈물 한방울 훌쩍이고 말았습니다. 강오섭님 감사하니다. 강오섭 박한순 멋쟁이 화이팅!
남편되신 강오섭님.수고 많으셨읍니다.부부애가 아니라면 어느누가 이 큰 아픔을 같이 나눌수 있겠습니까?너무나도 장하신 남편께 고맙다고 말씁드리고 싶어요.그리고 한순이 친구!큰 아픔을 딛고 일어선 만큼 더욱 건강하기를 바라고,앞으로의 삶이 더욱 행복해 지기를 기도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