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 출신 사마의는 조조 이래 위나라에 벼슬하여 249년에는 승상이 되고 이후 그의 아들 사마사·사마소 등이 사실상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마소는 촉한을 토멸한 공로로 진(晋)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염은 265년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西晋 왕조를 세웠다.
무제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나, 점점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도 다투어 사치와 부를 마치 무슨 경쟁이라도 벌이듯 과시하였다.
특히 천하의 부호 석숭과 왕개의 사치 싸움은 당시의 부패상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국정은 점점 문란해지고 제실의 울타리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여 마침내는 영가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을 부르고, 영가의 난이 서진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중국 북부에서 五胡十六國 時代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이미 중국 내륙에 많은 이주민을 보내고 있던 유목민족은 무력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산서지방의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북한을 세웠다. 그의 아들 유총이 311년 낙양을 함락시키고 영가의 난을 계기로 서진의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어 장안에서 즉위했던 민제도 316년 북한의 유요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서진은 52년만에 멸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는 건업(남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의 오호십육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동진·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이 기원 316년에 멸망하자 서진의 일족인 사마예는 317년 건업을 건강으로 개명하고 이 곳을 수도로 동진을 세웠다. 사마예는 동진의 관중이라 불리는 왕도의 도움으로 강남 지방 호족들을 복종시켜 동진의 기반을 튼튼히 해 나갔다.
동진 정권이 수립된 후 6년째에 동진의 중신 왕돈이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공략·함락시키고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동진의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에 심한 분노를 느껴 발병하여 죽고 그 후 왕돈의 난은 평정되었다.
동진 정권의 권력에는 북방에서 내려 온 호족 왕씨와 강남지방의 호족세력이 2대 지주를 이루었는데 약 1백년 동안은 왕씨 일족과 그 뒤를 이은 유씨, 사씨, 환씨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동진은 끝내 중국 북부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383년에는 비수의 대전에서 전진왕 부견의 대군을 연파함으로써 양자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동진은 말기에 이르러 南朝 송(宋)을 세운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북부에서는 흉노·선비·갈·저·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오호 십육국이라 부른다.
이들 이민족은 일찍이 후한 말·삼국시대에 이미 중국 북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다가 서진 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304년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산서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의 아들 유총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 중국 북부는 분열 상태에 빠져 오호 십육국이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진이 한 때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으나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에게 패함으로써 통일의 꿈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족의 척발씨가 세운 북위가 점점 강력해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함으로써 오호 십육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중국 북부는 북위가 통일하고 중국 남부는 송의 유유가 통일함으로써 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