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회 태극풍수연구회 답산안내(경기. 안산2006년 9월17일)
丙戌年 그 지독한 여름밤, 살인적인 더위도 이제는 서서히 가려나 봅니다.
여려 會員님들 그간 安寧하셨습니까?.
踏山을 앞두고 인사드림니다.
9月 踏山을 한주 늦추게 되어 퍽이나 悚懼하게 생각하며, 이번 踏山은 京畿道 安山으로 定하였습니다.
바다를 매워서 반원공업단지를 만들면서 급진적으로 産業都市化되어서 지금은 安山의 반월공단과 시흥의 시화공단이 발전하여 工業都市로 變하여 옛향취를 地形에서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어가는 지라 이번기회가 아니면 옛자취를 찾기도 어렵다고 생각하여 安山으로 定하였습니다.
安山의 主山인 修理山은 예로부터 地理學者나 地師들이 名山이라고 거론하던 곳이지요. 修理山은 안산시. 군포시. 안양시. 시흥시가 접해있는 산으로 일명 見佛山이라고도 합니다.
安山市는 행정구의 명칭이 단원구와 상록구로서 그 지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安山은 예로부터 文化와 藝術의 都市지요.
安山에서 배출된 學者와 藝術人들이 많은데 실학의 중조라고 하는 星湖 이익선생이 있고, 그중에서 글씨에 능한 강희맹과 강징, 시서화의 삼절로 추앙받던 표암 강세황이 유명하며 특히 단원구라는 행정구의 이름에서 보듯이 김해김씨인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의 대가이며 시서화에도 능한 천재화가인 단원 김홍도를 배출한 고장임니다.
또한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 에서는 청석골이라는 地名을 만들고 채영신과 박동혁이라는 이름으로 각색하여 農村啓蒙과 연애를 주제로하였으나 실제인물인 최용신 선생과 그의 약혼자인 김학준(-1974년)의 삶을 통해서 그려낸 소설로서 최용신 선생은 1931년에 安山에 와서 泉谷[샘골]교회에 강습소를 세워서 일제의 탕압을 무릅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농촌계몽에 힘쓰던 곳으로 그곳을 찾아보는 것도.......
여러 회원님들!
바쁘시리라 생각되지만 꼭 참석하여 爽快하게 푸른 가을 하늘과 햇살을 맞으며 安山에서 風水의 새로운 맛을 찾아봅시다.
그럼 아침에 인사를 나눕시다.
健康하십시요.
<모든 문제는 총무님에게 연락 의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054ㅡ333ㅡ8667. 휴대폰,019ㅡ506ㅡ8666)
가 . 답산 일자 : 2006년 9월 17일
나 . 출발장소 및 시간 : 만촌 E 마트 앞, 아침 8시.
다 . 답산 지역 : 아 래
.....................................................................................................................................................
1. 강징(姜澄,1466-1536)선생 묘 (향토유적 제3호)
위치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16-3
호는 소재(少齋),심재(深齋),본관은 진주, 증 이조판서 이행(利行)의자, 성종25(1494)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별시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연산10(1504) 우부승지로 왕에게 사냥을 삼가 할 것을 말했다.
낙안(樂安)에 유배 연산12(1506)복세암의 의견을 반대하다 투옥,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석방 ,강원 관찰사, 중종3(1508)과 중종16(1521)에 각각 성절사(聖節使)진하사(進賀使)로 명에 다녀왔다.
전주부윤, 경주 부윤을 거쳐 예조참판. 중종이 제작한 병풍의 글씨와 명신(名臣)들의 시문, 홍문관(弘文館)에서 올린 정명도(程明道)의 잠(箴)을 쓰니 당대 명필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 밖에 글씨로` 정 익혜공 난종 신도비명(鄭翼惠公蘭宗神道碑銘),이 있다.
2 . 정언벽(丁彦璧)선생 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7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 나주(羅州) . 자 계홍(季弘) 관찰사 호선(好善)의 아들이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5대 조부이다.
인조22년(1644) 생원(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내고 예문관봉교겸 세자시강원설서(藝文館奉敎兼世子侍講院設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 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헌납 때 왕자 징(徵)의 죄가 논의되자 이를 변호하여 무사케 하였다.
3 . 유석(柳碩)선생 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1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 진주(晋州) . 자 덕보(德甫) . 호 개산(皆山) 사옹원정(司饔院正) 시회(詩會)의 아들로서 조부 격(格)은 정언(正言)을 지냈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인조 3년(1625) 별시문과에 급제, 정자(正字)직에 있을 때 선조의 제7자 곧 인조의 삼촌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모역(謀逆) 사건이 일어나자 무고임을 알고, 한무제(漢武帝)의 포속요(布粟謠)에 비유한 상소를 올려 그를 구출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도망가고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니, 당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였다.
그는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벼슬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4 . 정정옹주(貞正翁主)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산50-40
선조의 후궁 정빈(貞嬪) 홍씨(洪氏)의 소생으로 선조의 아홉번째 딸이다.
선조 37년(1604) 정정 옹주로 봉해지고 광해군 2년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였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강화도에서 증살(蒸殺)되었고 이어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하려 하자 지아비와 더불어 이를 반대하였다.
후에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는 광해군 치하에서 진안위가 정의롭게 처신하였다 하여 통헌대부에 추증하고 정정 옹주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우하였다.
후사가 없어 시동생 영(潁)의 아들 명전(命全)을 양자로 삼았으나 명전도 문과에 급제한지 2년만에 요절하였다.
이후 2년만에 옹주도 타계하니 현종은 정사를 폐하고 장례비용을 후사하였으며 스스로 빈소에 나아가 진안위묘에 합장토록 하였다.
5 .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 묘역
위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55.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은 평안도 운산에서 1681년(숙종7년)부친 이하진(李夏鎭)이 유배 길에 운산에 와 있을 때 태어났다. 이익 선생은 그가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안산군 첨성리(瞻星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라는 지명에서 『星(성)』자를 따라 그의 호를 지었다.
이익선생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 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익선생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천문, 지리, 의학, 재정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곽우록(藿憂錄), 성호문집(星湖文集)을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하였다.
6 . 최용신(崔容信,1909-1935.)묘
위치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농촌 운동가. 본관 경주(慶州) . 누씨고녀(樓氏高女)를 나와 서울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YWCA 농촌사업부에서 경기 화성군 샘골에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부락민의 협조를 얻어 스스로 교사(校舍)를 신축, 매일 10리 길을 걸어다니며 어린이를 가르쳤다.
1934년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였다가 신병으로 귀국, 샘골에서 요양하면서도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던 중, 장중적증(腸重積症)으로 죽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1964년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해 오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채영신은 실제 인물이다. 상록수의 청석골은 현재의 본오동으로 1935년 1월 23일 최용신은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죽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