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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 심리학 비판에 대한 반박
존 투비(John Tooby), 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
July 7,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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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Letter to the Editor of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on Stephen Jay Gould's "Darwinian Fundamentalism"(June 12, 1997) and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June 26, 1997) (http://cogweb.ucla.edu/Debate/CEP_Gould.html)
굴드의 글: Darwinian Fundamentalism(http://www.nybooks.com/articles/1151),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http://cogweb.ucla.edu/Debate/Gould.html)
세계적인 진화 생물학자들 중 한 명인 존 메이너드 스미스(John Maynard Smith)는 최근에 NYRB[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에 대한 날카롭게 대립하는 평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뛰어난 에세이들 때문에 그는 생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탁월한 진화 이론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가 그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해 본 진화 생물학자들은 그의 생각들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신경 쓸 가치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창조론자들에 맞선 싸움에서 우리 편에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Because of the excellence of his essays, he has come to be seen by non-biologists as the preeminent evolutionary theorist. In contrast, the evolutionary biologists with whom I have discussed his work tend to see him as a man whose ideas are so confused as to be hardly worth bothering with, but as one who should not be publicly criticized because he is at least on our side against the creationists.)”(NYRB, Nov. 30th 1995, p. 46). 굴드가 전문적인 진화 생물학자들의 공동체에서 누리는 실제 지위가 마침내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 지금 그가 느낄 명백한 고통으로부터 누구도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No one can take any pleasure in the evident pain Gould is experiencing now that his actual standing within the community of professional evolutionary biologists is finally becoming more widely known). 만약 여기에 걸려 있는 문제가 단지 한 인간의 자존심뿐이라면 예의상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If what was a stake was solely one man's self-regard, common decency would preclude comment).[1]
하지만 메이너드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굴드는 “생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진화 이론의 양상(state)에 대해 광범위하게 잘못된 상을 제시하고 있다” – 또는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가 굴드와 그의 동맹자들의 작은 집단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 그들은 “[생물학의] 지도적인 주창자들의 견해를 상당히 눈에 띄게 왜곡하고 있다.”[2] 굴드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름 없는(anonymous)” 또는 “조그만 파벌(a tiny coterie)”이란 식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일류 진화 생물학자들이 고압적인 굴드가 지적 세계에 쏟아 넣은 혼란들의 뒤엉킴을 교정하려는 헛된 시도에 참여했다.[3] 굴드가 어떤 비판의 대상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진화 생물학에 대한 믿을 수 있고 균형 잡힌 권위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제대로 알고 있는 전문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진화 생물학은 때로는 인간 복지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분야들 – 의학, 신경과학, 심리학, 정신의학, 인지 과학, 분자 생물학과 그 외의 여러 가지 – 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분야들의 많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인 굴드를 믿고서 자신의 분야에 대한 안내를 구하고 있어서, 굴드의 “꾸준한 왜곡”의 누적 효과 때문에 이런 분과들의 지도적인 과학자들 절대 다수가 진화 생물학이 지난 30년 동안 이룬 빠른 일련의 진전들을 배우고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 이런 진전들이 생물의학적, 행동적, 그리고 사회적 과학들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굴드가 지난 20년 넘게 적극적으로 만들어 놓은 신화들과 전도(轉倒, inversion)들이 이런 분야들의 진보를 상당히 지체시켰으며 이것은 인간에게 미칠 결과를 생각할 때 전혀 축복할 일이 아니다.
과학이 권위나 다수에 의해 진보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생물학자들은 예컨대 그의 대진화에 대한 이단적인 사변들(heterodox macroevolutionary speculations)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그런 사변들 때문에 굴드는 흥미를 끌고 있으며 때로는 정말로 가치 있는 논의들을 촉발하기도 했다).[4] 생물학자들에게 있어 중심적인 문제점은 굴드가 진화 생물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 영역의 실제 동의된 상태(consensus state)와도 일차 문헌(primary literature)의 명백한 의미와도 너무나 근본적이며 터무니 없게 달라서 증거들 자체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불일치의 정도를 전달할 쉬운 길이 없다는 점이다. 굴드는 자신의 글에서 새로운 어떤 것을 개척했으며 이것은 과학학(science studies, 과학의 역사나 과학과 사회의 관계 등에 대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연구할 가치가 분명히 있는 어떤 것 – 반그라이스적(anti-Gricean)[5] 과학 – 이다.
말하는 사람이 발화를 맥락이 되는 담화에 대응하도록, 관련 있도록, 그리고 (대개는) 진실되도록 의도했다고 듣는 사람이 암묵적으로 가정할 때에만 발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라이스(Grice)는 주장했다. 굴드의 글은 그라이스의 이런 가정들을 어겨서 이용해 먹는 눈부신 수사적(rhetorical) 책략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굴드의 많은 반그라이스적 책략들 중 하나는 뻔한 진리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어대며(예를 들어, “하지만 진화의 나머지 모두는 ... 유기체의 좋은 설계(good design)를 만드는 선택(selection, 자연 선택)의 힘으로부터 단순히 외삽(extraplotaion)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6] 또는 – 우리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예를 들어 보자면 – “나는 내가 속한 성별의 구성원들[남성들]이 아기를 돌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순전히 영리한 여성들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적대자들이나 어떤 중요한 동의된 의견(consensus)이 어느 정도 완화된 형태더라도 그 뻔한 진리의 반대가 되는, 말도 안 되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고 듣고 있는 멀쩡한 사람을 암묵적으로 설득하려고 드는 것이다. 이런 시리즈에서 굴드는 ‘하지만-나는-해가-진짜로-동쪽에서-뜬다고-말하고-있는-겁니다’라는 식의 책략을 파과병적으로(hebephrenically)[7] 사용하고 있다.
엄청나게 인기 있는 작가로서 굴드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극히 소수만이 원래 출처를 실제로 들추어 볼 것이며 나머지 모두는 따뜻한 인정으로 넘치고 믿을 만해 보이는 그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신뢰할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가 무슨 주장을 하든 폭로될 가능성이 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절연(insulation)을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이용한다. 대화 중 한쪽 편이 하는 말만 듣게 되는 사람들(굴드의 독자들 중 그의 이야기에만 노출된 99% 정도) 모두는 예컨대 굴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그라이스적 의미에서 말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자동적으로 그 대화의 다른 쪽 편이 한 말이 어떨 것인지를 재구성해낸다. 문학과 실제 삶은, 듣는 사람들이 대화 중에서 자기 쪽 편[비양심적인 사람]이 한 말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그 상황을 이용해서 대화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상을 그리는 경우들로 가득 차 있다.[8] “더러운 뇌물을 가지고 나가!”라고 상원의원이 외쳤다고 가정해 보자. 보고 있는 사람들은 상원의원의 상대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서 굳이 더 따지고 들 필요도 없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과학에는 일차 문헌(primary literature)이라고 불리는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대화 중에 다른 쪽 편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실제로 알 수 있다. 배경이 되는 문헌(background literature)을 보면 굴드가 그린 상은 네커 입방체(Necker cube)[9]처럼 뒤집히며 그의 에세이들은 진리에 대한 조심스럽고 자비로운(charitable) 추구라기보다는 자기 권력 확장(self-aggrandizement)이라는 목적을 위해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소극장임이 드러난다. 굴드는 최근에 격렬한 글에서 [진화 심리학 관련] 일차 문헌들을 비판하는 척 했다. 우리는 일차 문헌이라는 “감시 카메라”를 되감아서 그의 비판적인 주장들과 비교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그런 주장들은 무엇인가? 굴드는 자신이 “자연 선택은 수정(modification, 진화)의 주요 수단이기는 하지만 유일한(exclusive) 수단은 아니”라고 보는, 다윈처럼 탁월하게 지각 있는 다원주의자(pluralist)라고 단언한다. 그는 자신의 (말뿐인lip-service) 다원주의를 “비타협적인” 그리고 “광적인” 반대편 – “진화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한 모든 것”을 선택(선택은 그의 표적들[진화 심리학자들]에게는 대량 멸종에서부터 조용한 뉴클레오티드 치환nucleotide substitutions에 이르기까지 “유기적 다양성의 모든 현상”에 대한 “사실상 배타적인”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때문이라고 보는, “엄격한” “교조적인” (그리고 순전히 [굴드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교리 – 과 대비한다. 이제 그는 (놀랍게도) 진화 생물학자들 앞에서 우리 분야의 일련의 자명하고 진부한 이야기들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전통적인” 진화 생물학자들과 진화 심리학자들의 과학적 작업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거의 또는 전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암시하거나(예를 들어, “전통적 이론에 대한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나의 세 번째 교정”...) 그 잘난 ‘하지만-해가-동쪽에서-어쩌구’하는 식의 형태로 단언한다. 그는 진화 심리학의 “방법론을 반박한다”고 주장하며 대담하게도 “이 새로운 기술(art)의 신봉자들은 진화론적 설명을 자연 선택의 작동과 그 결과 생기는 (개인의 번식 성공을 위한) 적응으로 제한한다”고 단언한다. 특히, 영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굴드가 특별히 우리가 (비록 아마도 회고적인 팡글로스주의자들retrospective panglossians일지는 모르지만) 팡글로스적 범적응주의자들(panglossian panadaptationists)[10]이며, 진화에 대한 중립 이론들(neutral theories)을 우리의 연구에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며, 부산물(byproduct) 가설들을 결코 고려하지도 검증하지도 않으며, 부산물이나 제한들(constraints)[11]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유기체의 설계(design, 마치 설계된 것 같은 구조)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모르며, 진화에서 상황 의존성이 널리 있는 것에 현혹되며(are befuddled by the pervasiveness of contingency in evolution), “검증할 수 없는” 따라서 “비과학적인” 사후적 임시 변통의 그럴 듯한 이야기(post hoc just so stories)를 만들어내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주장들을 일차 문헌에 비추어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굴드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에서 공격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 또는 어떤 것의 주요한 전형들임이 명확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단지 우리(시먼스Symons, 데일리Daly & 윌슨Wilson, 버스Buss, 셰퍼드Shepard, 핑커Pinker,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12])가 진화 심리학의 등장과 가장 자주 연결되는 연구자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1) 그가 우리의 책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을 두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서 공격을 위해 명시적으로 인용했으며(그리고 사실 이것이 대중적이지 않은 글을 그가 인용한 유일한 예다) (2) 우리의 추론 연구(reasoning work)가 열변을 토하는 그의 두 편의 글 전체에서 굴드가 유일하게 특정적으로 논의한, 진화 심리학의 실제 연구라는 점 때문이라는 것을 굴드는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심리학계와 인류학계뿐 아니라 진화 생물학계에서 훈련 받고 발표한(published)[13] 과학자로서 우리는 굴드가 역시 표적으로 삼고 있는 진화 생물학자들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 굴드가 진화 심리학자들, 적응론자들(adaptationists, 적응주의자들), 또는 진화 생물학자들에 대해 한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서도 진실일 것이며 우리의 연구는 굴드의 본질적인 정확성에 대한 검증 사례로서의 역할을 상당히 잘 할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다룰 쟁점은 굴드가 자신의 적대자들의 입장에 대해 묘사한 것이 이해할 만한 과장인가(예컨대, 그의 의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라고 말하려는 것일 뿐인데 우리가 적응론적 원리들을 배타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하는 것), 아니면 그것은 과장을 뛰어넘어서 앞뒤가 안 맞게 틀렸는가(예컨대, 양배추cabbages를 내연관계concubinage와 혼동하는 것), 그것도 아니면 실로 때로는 진실의 반대에 도달하려는 열망 때문에 완전한 오류조차도 초월했는가(예컨대, 달의 궤도가 지구의 핵 안에 있다고 보는 것) 여부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굴드의 첫 번째 구체적인 문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우리가 실험적으로 연구한[14] 인지적 전문화들(specializations, 전문화된 모듈들)의 기능을 “부정(infidelity, 간통)과 다른 형태의 속임수(prevarication)를 적발하는 능력”이라고 제안했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는 대성공이다(This is scores as completely wrong): 우리는 그것이 부정이나 속임수(deception)를 적발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제안하지 않았으며 속임수와 부정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대신 그것은 상호적 협동(reciprocal cooperation)의 상황에서 순응과 비순응의 사례들에 대해 추론하는 인지 능력의 향상이다. 이런 정도의 학술적 부정확성은 생물학을 다루든 심리학을 다루든 굴드에게는 완전히 표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진실의 완전히 역전된 거울상이 아니라 형편 없는 오류(예컨대, 호기 카마이클Hoagy Carmichael을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15]과 혼동하는 것)일 뿐임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일차 문헌은 초다윈주의(ultra-Darwinism)에 대한 그의 청구 명세서(bill of particulars)에 대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나? 굴드가 우리의 추론 실험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언급한 장(chapter)을 실제로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소수의 독자들은 우리가 인간 추론에 대한 적응 가설뿐 아니라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부산물 가설들도 검증했다는 것(부산물 가설들은 진화 심리학과 생물학의 다른 “적응론적” 연구에서 일상적으로 유도되고 검증되며 우리의 실증적 논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을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실로, (굴드가 인용한 것들을 포함하여) 글자 그대로 우리의 어떤 심리학 논문을 펼쳐 보더라도 진화적 결과의 다른 결정 요인들(“돌연변이, 재조합recombination, 유전적 히치하이킹hitch-hiking, 대립적인 다면발현antagonistic pleiotropy, 공학적 제한들engineering constraints, 대립적인 공진화”와 기타 등등, 기타 등등)과 함께 적응들, 부산물들, 중립적 부동(neutral drift)이나 우연에 의해 생긴 특성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논의를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한 설명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가려낼 길이 없다고 보는 굴드가 선호하는 반경험적(anti-empirical, 반실증적) 입장에 만족하는 대신 우리의 논문들은 우연, 부산물, 그리고 선택의 효과들을 반증 가능하도록 구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경험적, 개념적 방법들의 전체 범위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보인다.
“풍부한” 중립성 이론(theory of neutralism)[16]에 대한 우리의 “결실 없는(sterile)”, “불모화하는(impoverished)” 무시에 대해서는 어떤가? 기생 생물에 의한 [선택] 압력이 성의 진화와 유전적 다형성(polymorphism)의 유지에 기여했다고 제안한 우리의 1982년 논문에서 우리는 우연에 의했을 때와 기생 생물에 의한 비율-의존적 [선택] 압력 때문이었을 때의 대립유전자들의 분포에 대한 대비되는 예측을 평가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진화의 중립론적 이론들을 사용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예컨대 마구잡이 걷기(random walk)와 부산물 영 가설들(null hypotheses, 귀무 가설들)뿐 아니라 분자 시계(molecular clocks)를 이용하거나 중립성(neutralism)을 연구에서 일상적으로 다른 식으로 적용하는 다른 적응론적 생물학자와 전혀 다르지 않게 연구해왔으며 지금도 다르지 않다. 몇 년 후에 우리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적 발견들 – (1) 그레이의 해부학 교과서식의(Gray's Anatomy-style) 종-전형적(species-typical) 인간 설계(design)와 (2) 인간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들의 커다란 저수지(reservoirs)가 있다는 르원틴(Lewontin)과 다른 사람들의 발견 – 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다형성과 기생에 대한 이런 이론들을 다른 선택론적 그리고 비선택론적 발견들과 통합하였다. 그 논문에서 우리는 “거의 모든 유전적인(heritable) 심리적 차이들은 그 자체로는 복잡한 심리적 적응인 것 같지 않다. 대신 그것들 거의 모두는 ... 기생 생물에 의해 생화학적인 개체성이 [자연] 선택된 것의 부수물(concomitants)과 같은 진화적 부산물”이거나 “유전적 잡음(noise)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으며 이어서 “적응적인 차이들(가장 [외연이] 작은 범주), (b) 부적응적인(maladaptive) 차이들, 그리고 (c) 사실상 중립적인 차이들(가장 [외연이] 큰 범주)”중 어느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유용함을 연구자들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우리는 (정신약리학자들, 정신의학자들, 행동 유전학자들, 성격 심리학자들 등의 흥미를 끄는) 수천의 흥미로운 심리적 현상들이 적응이 아니라 적응들의 부산물이거나 부정적인 돌연변이들(negative mutations)의 부산물이거나 기무라(Kimura)의 이론에서 분석된 중립적인 유전적 변이들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역사적 상황 의존성(historical contingency)에 관해서 말하자면, 유전체 안의 갈등(intragenomic conflict)의 원리들을 유도하려고 시도한 우리의 1981년 논문에서 우리는 “유전체 안의 일련의 특정한 사건들(particular sequence of intragenomic events)을 고려하면 생태적 상황들만 고려했을 때에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요 형질 집합들(trait sets)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진화 과정에 불안정성, 상호작용성, 역사성을 부여한다”라고 썼다. 최적화(optimality)에 대한 팡글로스적 믿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갈등과 그 부산물이 왜 유전적 체제가 “그렇게도 최적화되지 않은 일탈들도 가득 차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른 두 개의 잘못된 비난을 목록에서 지워 없애는 것[다른 두 개의 비난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별도로) 이 논문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증에 대한 굴드의 태도와 현대 진화 생물학의 명석하고 믿을 만한 본토의 목소리(native voice)인 도킨스(Dawkins)에게 오명을 씌우려는 그의 캠페인 둘 모두에 빛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굴드는 도킨스에게 독설을 퍼부었는데 그 표면적인 이유는 도킨스가 (굴드의 바보 만들기에 따르면in Gould's present lame rendering) “유전자가 유전자의 통제를 받는 수동적 몸(유기체) 안에서 번식의 성공을 위해 분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내 생각에는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바보 같은, 다윈의 진정으로 급진적 의도에 대한 희화화인 초다윈주의적(hyper-Darwinian)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킨스의 서술]이 바보 같이 들릴 지도 모르고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 이 세월 동안 굴드에게는 자연계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듯하다. 이것이 바로 에버하트(Eberhardt)와 우리가 유전체 내의 갈등에 대한 대응 논문들(parallel papers)에서 한 것이다. 우리는 개체 선택과 구분되는 유전자 선택의 존재에 대한 도킨스/윌리엄스(Williams)의 견해로부터 나오는 명확한 예측들을 유도했으며 그것을 수십 개의 잘 기록된 현상들을 바탕으로 입증했다. 그런 초기 논문들을 굴드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후 17년 동안 Science, Nature, Evolution과 다른 학술지에 실린 허스트(Hurst), 해밀턴, 헤이그(Haig), 스키너(Skinner), 워런(Werren) 그리고 수십 명의 다른 사람들의 논문들이 유전체 내의 갈등에 대한 그런 예측들과 새로운 예측들을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거대한 증거들을 제공했다. 이런 발표의 홍수를 보았다면 정직하고 학술적인 영혼은 도킨스가 멋지게 입증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며 좀 더 부끄러운 영혼이라면 적어도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그라이스주의자는 최근의 글에서도 과거의 비판들을 수정 없이 그냥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청중에게 자연계가 이 주제에 대해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다고 잘못 알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능력 있는 현대 진화 생물학자라면 누구도, 선택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다윈주의적 최고선”을 나타내기 위해 굴드처럼 “개인의 번식 성공(personal reproductive success)”이라는 표현이나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유전체 내의 갈등이라는 현상이 그 개념을 아래로부터 해체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적어도 1964년에 나온 해밀턴의 고전적 논문 이후로는 만약 친족의 번식을 충분히 촉진할 수 있다면 개체의 번식 성공(individual reproductive success)을 줄이는 방향을 [자연] 선택이 선호할 것임을 생물학자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굴드의 글은 전체적으로 현대 이론들, 구분들, 도구들tools[17]에 대한 어떤 명백한 인지도 너무나 자주 결여하고 있어서 생물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지난 30년 동안 “땡땡이(cutting class)” 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럴 듯한(just so)” 이야기라는 전도(inversion): 굴드는 지도적인 연구자들이 행하고 있는 적응론적 프로그램(adaptationist program, 적응주의적 기획)이 본질적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설계 특성들의 과거의 기능들에 대한 상상으로 이루어진 사후적 임시 변통의 반증 불가능한 이야기 만들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유명한 주장을 다시 한번 퍼뜨린다. 이것은 실제 연구를 정확히 뒤집어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뇌와 인지 구조(architecture)에 대해 너무나 조금밖에 모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연구자들이 몹시 원하는 것은 다른 식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조직 – 즉 아직 관찰되지 않은 설계 특성들 – 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도록 실험을 설계하도록 도울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 도구들이다. 현대의 선택론적(selectionist) 이론들은 이런 이론들 없이는 아무도 찾아볼 생각도 못했을 미지의 설계 특성들과 메커니즘들을 미리 풍부하고 특정적으로 예측하는 데 쓰이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이론들이 실증적인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강한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 추론 능력(faculty)에는 (협동, 위협, 위험 회피와 기타 등등을 위한) 다수의 이질적인, 진화한,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회로들의 집합이 포함된다고 보는 우리의 이단적인 견해가 물론 틀렸다고 판명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의 진화론적 기능론(functionalism)이 (예측된 기능적 차원들을 따라서 나타나는 신경적 해리neural dissociations – 이것은 굴드가 진화 심리학자들이 제공할 수 없다고 보는 바로 종류의 예측이다 – 를 포함하여) 인간 추론에 대한, 다른 식으로는 누구도 예측하거나 검증할 생각도 못했던 일련의 예측들로 이어졌으며 그리하여 다른 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발견들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에서 지적했듯이, “어떤 사실에 대한 어떤 이론의 설명은 만약 그 사실이 그 이론에 의해 예측되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사실이 알려진 이유가 바로 그 이론 때문이라면 ... 사후적 임시 변통이라고 볼 수 없다.” 심지어 적응론자가 어떤 알려진 현상에서 출발할 때조차도 기능에 대한 가설들은 설계의 미지의 연구되지 않은 측면에 대해 예측하는 데 이용된다. 실로, 화난 조지 윌리엄스와 랜돌프 네스(Randy Nesse)가, 현대 진화론적 원리들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연구에 이용하자고 의학 공동체에 호소하는 고전적 논문[18]에서, 널리 믿고 있는 이 도시 전설(urban legend)에 대항하기 위한 시도로 학술지 Evolution의 단 한 호(volume)에 보고된 새로운 적응론적 발견들의 목록을 만들기까지 했지만 전설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응론자들이 굴드가 좋아하는 부동(drift)이나 역사적 상황 의존성(historical contingency) 같은 것보다 선택론적 이론들을 더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도그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예측 능력 때문이다. 이렇게 손에 만질 수 있을 듯이 명백한 점을 서술해야만 한다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구잡이 걷기나 역사적 상황 의존성은 어떤 종의 경우에도 알려지지 않은 설계 특성들에 대한 빡빡하거나(tight)[19] 유용한 사전적인(prior) 예측들로 이어지지 않는다(We are embarrassed to be forced, Gould-style, to state such a palpably obvious thing, but random walks and historical contingency do not, for the most part, make tight or useful prior predictions about the unknown design features of any single species).[20]
마침내 이것은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굴드의 왜곡 문제 – 가장 반그라이스적 형태로 제시된다 – 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EEA[즉, 인간이 진화한 환경][21]에 대한 적응적 이야기의 정합성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핵심 정보를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에서 분명히 했듯이, 진화 심리학의 목적은 굴드가 주장하듯이 과거에 대한 “적응적 이야기의 정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현대 인간의 설계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유용한 예측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조상들의 세계에 대해 충분히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굴드의 주장은 그가 자신의 삶을 과거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22]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멋지게 드러낸다. 어쨌든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
과거에 대한 추론적 재구성을 위해 실제로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에 대한 중요한 것들 수천 가지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 중 많은 것들이 심리학 (또는 예컨대 의학) 연구를 안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젖을 먹였으며, 두 성별이 있었으며, 사냥을 했으며, 채집을 했으며, 짝을 선택했으며, 도구를 사용했으며, 색감이 있었으며,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렸으며, 잡아 먹히기도 했으며,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도 했으며, 부상을 당하면 무기력해졌으며, 해로운 열성 유전자(deleterious recessives)가 있어서 남매끼리 짝짓기를 하면 근교약세(inbreeding depression)에 빠질 수 있었으며, 서로 싸웠으며, 고양이과 동물, 뱀, 그리고 식물의 독이 있는 생태 환경에서 살았으며, 기타 등등. 우리 조상들이 운동 기하학(kinematic geometry)의 원리가 물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은 명백하다(로저 셰퍼드Roger Shepard는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신물리학psychophysics의 진화적 기초에 대한 이론을 만들 수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이것 덕분에 그는 미국 과학 훈장National Medal of Science을 받았다). 사람과(科) 동물(hominids)은 눈이 있으며, 흥미를 끄는 것을 쳐다보며, 자신이 쳐다보는 것에 대한 정보를 흡수하기 때문에 시선의 방향이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이먼 배런-코언(Simon Baron-Cohen)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세계에 대한 이 명백한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 섬세하고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정교화했으며 이것은 일련의 중요한 인지적, 발달적, 신경적 현상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상 세계의 많은 특징들 중 우리가 모르는 것들은 실험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없는 반면 조상 세계의 확실하지는 않지만 있었을 법한 특징들로부터도 가치 있는 실험 가설들(experimental hypotheses)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점도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의 다원주의 결핍에 대해, 중립성(neutralism)에 대해, 선택론적 이야기들로의 제한에 대해, 부산물 가설을 고려하거나 검증하는 것의 실패에 대해, 유전자 선택론에 대해, 사후적 임시 변통적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해 굴드가 단순한 과장을 훨씬 뛰어 넘어서, 터무니 없는 오류조차도 뛰어 넘어서 그가 좋아하는 소굴 – 진실의 즐거운, 버림받은, 체계적인, 법석대는 전도(inversions)의 땅 – 로 달음질했음이 입증되었다. 그는 무지를 핑계로 댈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는 [진화 심리학에 대한] 대표성이 없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전형적인 사례로서 골랐으며,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 논제들(grounds)을 그가 고르고 열거했으며, 그가 심지어 이런 쟁점들이 공정하게 판단될 수 있는 텍스트들을 고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점들은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에서는 최소한으로만 언급한, 유전체 내의 갈등 – 물론 지난 십 년 동안 교과서나 학술지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다 – 을 제외하면 그가 인용한 출처[23]에서 명확하게 검토되었다). 그리고 대진화를 제외하면 이것들은 그가 경력을 쌓았던 테마들이기도 하며 따라서 그에게 특별한 전문 지식이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문제들에서 그가 이다지도 심하게 틀렸다면 어떤 근거로 그에게 덜 익숙한 문제에 대해 권위자로서, 또는 요점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혼란에 빠진 보고자로서라도, 신뢰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상황과 관련하여 너무나 유감스러운 점은 굴드가 이번에만 보기 드물게 지나쳤다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이번이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번 사례가 진화 생물학에 대한 그의 습관적인 장대한 왜곡들의 전형적인 표본임을 인정할 것이다. 이번 사례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점은 굴드가 부주의하게도 하나의 일차 텍스트(primary text)를 특정적으로 인용함으로써 검증 가능성에 자신을 노출시켰으며 그것도 서신(letters)을 받는 널리 읽히는 포럼[24]에서 그랬다는 점이다(What is unrepresentative about this case is that Gould exposed himself to the possibility of being tested by a moment of incautious specificity in which he cited one primary text, and did so in a widely read forum that takes letters). 이것은 우리를, 진화 생물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굴드의 뒤집힌 거울상 – 범적응론이라는 전도(panadaptationsim inversion) – 으로 인도한다: 현대 진화 생물학자들은 무비판적으로 과도하게 적응의 탓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라고 주장함으로써 굴드가 유명세를 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 잘 알기 위해 일차 문헌을 보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들은 팡글로스주의라는 비난을 굴드의 권위에 의존하여 널리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믿었다. 1960년대에 시작된, 진화 생물학의 혁명은 바로 과도하게 적응의 탓으로 돌리는 관행에 대한 반발과 거부가 커지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굴드는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것에 대해 독자들은 모를 것이라고 굴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즉, [연구] 공동체로서의 그리고 일련의 이론들로서의 현대 적응론의 등장을 정의한 것은 바로 이 반팡글로스적(anti-panglossian) 혁명이었다.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적응과 자연 선택)』 – 금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진화 생물학 책이라고 묘사되어왔으며 현대 적응론을 정의하는 책이기도 하다 – 에서 조지 윌리엄스는 차례에서 “진화론적 적응은 특별하고 부담스러운(onerous) 개념이어서 불필요하게 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효과가 우연이 아니라 명백히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기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적응이라고 인정되었을 때에도 증거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조직에 그것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요약했다. 이것은 이 책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 일련의 이론적 진전들(포괄적 적응도inclusive fitness 이론, 선택의 단위들에 대한 세공refinements, 적응이 있는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반증 가능한 기준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통해 팡글로스주의, 범적응론, 기능을 애매하게 부여하는 것, 목적론, 그리고 진보[25]를 생물학에서 씻어낸 쪽은 바로 이 적응론 공동체였다. 이어진 기간 동안 증거에 대한 명백한 기준들을 세움으로써, 엄밀한 가설 검증의 전통을 만듦으로써, 그리고 기능적 설명의 잠재적 후보로 고려할 현상의 범위를 매우 제한적이고 까다롭게 선택함으로써(사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굴드보다 더 제한적이다) 그들은 이 논쟁에서 승리했다. 십여 년 후에 시작한 굴드는 이 비판을 언급(attribution, 선행 연구에 대한 인정) 없이 빌려 썼다. 놀랍게도 굴드는 자신의 비판들에서 윌리엄스의 책과 다른 비슷한 참고문헌들을 아예 인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반그라이스적 조작의 가장 뻔뻔스러운 예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생각을 끌어온 바로 그 공동체에 맞서서 완전히 정반대로 왜곡했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종 선택(species selection)이 적응을 만들어내는 두드러지는 역할을 한다는 이론이 팡글로스적 과대확장일 가능성이 있다며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굴드는 이것을 숨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속 평형(punctuated equilibrium)에 대한 그의 견해의 한 차원으로서 굴드 자신이 지지하는 팡글로스적 과대확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리즈에서 펼친 "대량 멸종 연구가 초다윈주의적(untru-Darwinian) 동의 역시 뒤흔들었다"라는 굴드의 주장은 또 하나의 전도다(누가 그의 전도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체군들 내에서의 대안적인 대립 유전자들 사이의 선택에 대비되는) 종 멸종의 무작위적 상황 의존성은 종 선택론자를 뒤흔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Wonderful Life)』에 대한 서평에서 도킨스가 통렬하게 질문했듯이 “오늘날 높은-수준 선택(higher-level selection)[26]을 가장 두드러지게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위의 내용을 볼 때 왜 굴드가 자신의 글에서 그렇게도 습관적으로 진실을 뒤집는지가 궁금해질 것이다. 굴드의 글의 본성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것을 최근 미국 저술에서 생산된 가장 웅대한 허구(bodies of fiction)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제안하는 바이다. 굴드는 여러 저술 책략들을 멋지게 사용하여 그의 에세이들의 주인공으로서의 허구적 “굴드”를 구성해내며 모든 면에서 포크너(Faulkner)의 야크너퍼토퍼 군(Yoknapatawpha County)[27]만큼이나 상상적이며 그럴 듯한 “진화 생물학”의 세계를 구성해낸다. 굴드의 저술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과학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려는 시도로서 해석한다면 말이 안 된다(예컨대, 왜 그는 그렇게도 많은 연구자들이 실제로 말한 것을 정반대로 왜곡하여 묘사하는가). 하지만 허구적 “굴드”가 영웅적 판타지 모험 – 이 모험을 하는 동안 “굴드”의 존경할 만한 성격이 서서히 드러날 수 있다 – 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된 세계의 필수 구성요소로 이해할 때 초점이 잘 맞는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의 진행 속에서 저자 굴드는 “적응론자들”, “도킨스”와 생체해부 취향의 한심한(soulless) “초환원론자들(hyperreductionists)”, “윌슨”과 불길한 “사회생물학자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 그리고 최근에는 “메이너드 스미스”(“극도로 단순한 교조주의simplistic dogmatism”를 품고 있는), “데닛(Dennett)”, “진화 심리학자들”,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를 포함하는 광신적 "다윈주의적 근본주의자들" 등으로 이루어진 생생한 악당들과 민족지(ethnicities)의 갤러리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주인공 "굴드"는 학식 있는, 섬세한, 마음이 열린, 관용 있는, 재미있는, 적에게도 정중한, 문화적 편견에 지칠 줄 모르고 맞서는, 불굴의 도덕적 용기로 인기 있는 의견을 거슬러 헤엄칠 줄 아는, 다른 이들을 매혹시키는 겉모습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그리고 실로 다윈 이후로 생물학을 가장 멋지게 혁신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무지, 격정, 무관심, 부정 등의 힘에 맞서 인간적인 이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매우 사랑 받는 등장 인물이다(그리고 우리의 가정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and not just in our household). 저자 굴드는, 특히 그가 청중들을 속여서 그가 만들어낸 허구적 표적들을 실제 사람들과 영역들로 혼동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이 모든 것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굴드가 사실 다른 진화 생물학자들보다 더 통찰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의 실제 세계는 굴드가 “굴드”의 영웅성을 수립하기 위해 필요한 즉각적 승리와 극복할 수 있는 도전들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진짜 진화 생물학은 폐지되어야만 했다. 만약 이 폐지의 부산물 또는 삼각소간(spandrel)[28]으로서 한 세대의 과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이 똑같이 잘못 교육받는다면 그것은 [굴드의 입장에서는] 지불해야 할 약간의 비용일 것이다. 그리고 실로 윌리엄스, 해밀턴, 메이너드 스미스와 수십 명의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1964년[29] 이후의 현대 진화 생물학의 전체 체계가 굴드의 여러 책에서는 제외되었다. 이것은 20세기 물리학의 역사에서 양자 역학을 제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굴드의 엄청나며 지속적인 인기에서 우리는 진짜로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굴드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독자들이 “굴드”에게서 인간적인 이성의 구현과 과학적 충동의 가장 나은 열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굴드”가 실로 현대 진화 과학이 더 넓게 사용될 수 있음을 계몽하려고 분투할, 우리가 계속 존경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John Tooby & Leda Cosmides, Co-Directors,
The Center for Evolutionary Psychology
Depts. of Anthropology & Psychology
[1] (옮긴이 주) ‘a stake’는 ‘at stake’의 오자인 듯하다.
[2] (원주 1) Mayr, Ernst 1988 Toward a new philosophy of biology.
[3] (원주 2) 여기에는 에른스트 마이어, 존 메이너드 스미스,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 윌리엄 해밀턴(Bill Hamilton),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에드워드 윌슨(E.O. Wilson), 팀 클러튼-브록(Tim Clutton-Brock), 폴 하비(Paul Harvey), 브라이언 찰스워쓰(Brian Charlesworth), 제리 코인(Jerry Coyne),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존 앨콕(John Alcock), 랜디 쏜힐(Randy Thornhill)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4] (원주 3) 하지만 자신의 대진화적 관점에 대해서조차 굴드가 일관성에 있어서도 경험적 검증에 있어서도 무능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Science에서 Coyne & Charlesworth와 나눈 최근의 논쟁(exchange)를 보라.
[5] (옮긴이 주) 철학자 폴 그라이스(Paul Grice)는 의사소통에 관련된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자신이 믿지 않는 것 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을 말하지 말고,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대화에 관련된 것들을 제대로 전달하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소개는 http://en.wikipedia.org/wiki/Gricean_maxims를 참조하라. ‘anti-Gricean’은 이런 원칙들을 어긴다는 뜻인 듯하다.
[6] (옮긴이 주) 진화가 적응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적응의 부산물들도 만들어낸다는 말인 듯하다.
[7] (옮긴이 주) 파과병(hebephrenia, disorganized schizophrenia)은 정신분열증의 일종으로 조리 없이 단어를 마구 뒤섞어서 말하는 등의 증상을 보인다.
[8] (옮긴이 주) 예컨대 A가 B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C가 A 옆에 있다고 하자. C는 B가 하는 말을 전혀 들을 수 없다. 따라서 A는 B가 하는 말을 의도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
[9] (옮긴이 주) 선으로 그린 입방체(정6면체)를 보고 있으면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Necker_cube를 참조하라.
[10] (옮긴이 주) 볼테르(Voltaire)의 『캉디드(Candide)』에 등장하는 인물인 팡글로스(Pangloss)에서 유래한 말이다. 팡글로스는 코는 안경을 착용하기 편리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진화 생물학에서는 모든 것을 적응이라고 우기는 경향을 지칭하는 굴드의 용어다.
[11] (옮긴이 주) 여러 제한들 때문에 적응은 완벽할 수 없다.
[12] (원주 4) 진화 심리학의 일차 문헌에 대한 안내를 위해서는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reading.html를 보라.
[13] (옮긴이 주) 동료 검토(Peer review, 전문가 심사)를 거쳐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음을 함의한다.
[14] (원주 5) 진화 심리학에 대한 개관은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 중 “The psychological foundations of culture(문화의 심리적 기초)”에서 다루었으며 추론 실험들(reasoning experiments)은 그 책의 “Cognitive adaptations for social exchange(사회적 교환을 위한 인지적 적응들)”이라는 장에서 보고했다. 여기에 논의한 다른 논문들은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의 참고문헌목록에서 찾을 수 있다.
[15] (옮긴이 주) Hoagy Carmichael는 음악가이며 Stokely Carmichael은 흑인 인권 운동가다. http://en.wikipedia.org/wiki/Hoagy_Carmichael과 http://en.wikipedia.org/wiki/Stokely_Carmichael을 참조하라.
[16] (옮긴이 주) 예컨대 Junk DNA는 자연 선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중립적이다.
[17] (옮긴이 주) 이론적, 개념적 도구들을 말하는 듯하다.
[18] (원주 6) George C. Williams and Randolph Nesse, 1991, "The dawn of Darwinian Medicine" in The Quarterly Review of Biology 66: 1-22
[19] (옮긴이 주) 느슨하거나 애매한 예측은 그 만큼 반증되기도 힘들다.
[20] (옮긴이 주) ‘Gould-style’이 이 문장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21] (옮긴이 주) [] 속의 내용은 Cosmides & Tooby가 덧붙임. EEA는 “진화론적으로 적응한 환경(Environment of Evolutionary Adaptedness)”의 약자로 존 보울비(John Bowlby)가 만든 용어다.
[22] (옮긴이 주) 굴드는 고생물학자(paleontologist)다. 만약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고생물학이라는 분야는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23] (옮긴이 주) 『The Adapted Mind(적응된 마음)』.
[24] (옮긴이 주) The New York Review of Books를 말한다.
[25] (옮긴이 주) 조지 윌리엄스는 진화가 진보라는 방향을 향한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26] (옮긴이 주) 개체 선택보다는 개체군 선택이, 개체군 선택보다는 종 선택이 더 높은 수준의 선택이다. 어떤 면에서는 유전자 선택이 가장 낮은 수준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7] (옮긴이 주) Yoknapatawpha County은 William Faulkner의 여러 편의 소설에 나오는 지명이다.
[28] (옮긴이 주) 원래 건축 용어이지만 여기서는 부산물의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굴드와 르원틴이 쓴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1979)」을 참조하라.
[29] (옮긴이 주) 1964년에는 친족 선택을 다룬 해밀턴의 유명한 논문 「The genetical evolution of social behaviour I and II」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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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을게요.
존 투비(John Tooby), 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의 글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