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창
종교와 부부 이야기는 시로 쓰기에 불편한 영역일까?
-시의 영역 확장에 대한 시론
장인수|시인, 본지 편집위원
나는 페이스북 친구가 천여 명을 넘는데 그 중에 절반 이상이 시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도 하는데 절반 이상이 시인이다.
그들 대부분은 SNS에 종교 얘기와 가족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여자 시인은 남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남자 시인은 아내 얘기를 하지 않는다. 거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시로 잘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낸 시집 속에 종교와 아내와 남편을 직접적으로 건드린 시는 거의 없다.
왜일까?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종교가 시의 순수성을 훼손하거나, 시가 종교의 타락에 물들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점점 속세화되고, 속물화되고, 자본주의적 사회시스템에 결합될수록 시와 종교는 점점 멀어질 수도 있다. 절대적 진리, 형이상학, 사후세계,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배타성이 상대적 진리, 감각, 상황 논리를 더 중시하는 문학의 세계와 충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탈종교화의 경향이 강한 현대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시인들은 특정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종교 없음을 은연중 자랑하기도 한다.
종교 용어를 시 작품 안으로 들여올 경우 종교 용어는 교리적 성격을 벗어나 메타포의 성격을 더 크게 함유하는 시어가 되는데 어떤 분들은 시어로 탈바꿈한 종교 용어를 끝까지 종교 용어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럴 경우 시는 종교를 위해 봉사하는 목적성이 강한 신앙시로 귀속될 것이다. 즉 시가 팍 죽어버린다. 실상은 시어로 들어온 종교 용어는 종교적 접근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시의 메타포를 지닌 문학 용어가 되는 것인데 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은 그것을 잘 간파하지 못한다.
나는 은연중에 시 속에 기독교 용어와 불교 용어를 자주 섞어 쓴다. 이번에 나온 시집 『슬픔이 나를 꺼내입는다』에도 종교 용어를 밑바탕에 풀씨처럼 뿌려놓았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성(靈性)이 곧 내 시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용어, 불교 용어, 노장사상(도교) 용어를 거리낌 없이 섞어 쓰다 보니, 신앙심이 돈독한 어떤 분은 나에게 “하나님 한 분이 당신 곁에 늘 있음을 잊지마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선의의 메시지이겠지만 나는 시가 종교를 위해 봉사하는 신앙시를 가급적 쓰지 않겠다는 시작법을 고수한다. 내가 신앙심이 무척 깊어도, 아무리 겸손한 시인일지라도 시인은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고, 창조주에게 대들고 따지는 불경죄를 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의 영역은 신앙을 위해 함부로 봉사하지도 않는다. 시는 그 자체로 신의 영역이다. 시는 그 자체로 시의 영역이다. 시는 신의 영역까지 범한다. 시는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타락시키기도 한다. 때로 시는 불경(不敬)스러운 무례한 역할을 기꺼이 담당한다. 그게 시의 능력이다.
종교의 문명사적 의미는 광대하고, 그에 비해 시인은 언어라는 좁은 영역에 속한 하찮은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고양된 감정과 관찰의 어떤 지점에서 인생의 비의秘意를 체험하는 순간에 시와 종교는 우연처럼 만난다. 결국 시는 어느 순간 신의 영역, 신의 섭리를 만나고, 건드리고, 침범한다. 신神과 시인은 마이다스의 손을 지닌 창조자. 시인은 감히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과 우주의 섭리와 비의秘義를 그의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샤머니즘을 밑바닥 정서로 삼은 김소월, 백석, 서정주, 고정희, 김초혜, 최승자 시인의 시편들이 그러했다. 불교적 사유가 깊게 스민 한용운, 서정주, 김달진, 조지훈, 고은, 홍신선, 오세영, 김지하, 이성선, 최동호, 황지우 시인들의 시들이 그러했다. 서정주는 불교와 샤머니즘을, 김달진은 불교사상과 노장사상을, 조지훈은 불교와 유교 사상을, 고은은 불교와 민초 의식을, 김지하는 불교와 동학을, 홍신선과 오세영은 서정시와 불교의 선적 감각을 결합...... 정지용으로부터 시작되어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천상병, 정호승, 고진하에 이르는 개신교적인 시편들이 그러했다. 구상, 김남조, 성찬경, 김종철 시인에 이르는 가톨릭적인 시편들이 또한 그러했다. 황동규에서 의해서 시도된 예수와 석가의 만남도 그러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실존과 현상, 찰나와 영원, 인간과 우주를 깊이 탐색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시와 종교는 홀연 만나는 것. 만나서 갈등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것.
시작법에서 또 하나의 불문율이 가족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얘기는 그래도 허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내와 남편 얘기는 거의 하지 않으려 한다.
왜일까? 무슨 이유일까?
팔불출이기에?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윤리적인 검열을 당하기에? 은밀한 사생활이기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가정 불화와 가정 파괴를 유발할 수 있기에?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아내와 남편 얘기를 시로 쓰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부곡思婦曲, 사부곡思夫曲이라는 진부하고 통속적인 시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도 있다. 길거리에서 아내를 우산으로 두들겨 팼다는 김수영의 시는 어떠한가? 비판받아야 할 시인가? 윤리적으로 나쁜 시인가?
부부지간은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가장 먼 사이다. 부부지간은 가장 좋아하는 사이이면서도 가장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이다. 부부지간은 가장 이해심이 깊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가장 낯선 사이다. 남남이 아니지만 남남보다도 더 남남이다. 부부는 가장 윤리적인 관계이지만 가장 폭력적인 관계, 가장 비윤리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부부지간은 가장 평등한 관계이지만 가장 불평등한 관계이다. 토라지면 원수요, 화해하면 친구다.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다. 법적으로 같이 살지만, 법적으로 헤어져 남남이 될 수도 있다. 부부에 대한 소설은 많지만, 부부에 대한 시는 거의 없다. 그만큼 서사적 갈등과 사연과 상황으로 얽힌 관계이기 때문에 시라는 장르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부부의 얘기를 시로 쓰려면 은밀한 사생활의 노출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럴 용기가 없으면 쓸 수가 없다. 나의 이번 시집에서 「아내를 바꿔 입었다」, 「슬픔이 나를 꺼내입는다」, 「만져 봐」, 「3쾌」 등은 아내와 관련된 시다. 하지만 은밀한 사생활 노출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시편들이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죄와 벌」 전문
이런 시가 언제 다시 활발하게 우리 문학사에서 거리낌없이 창작될 수 있을까? 생활에 밀착된 생활시, 일상시를 쓰더라도 아직까지는 부부 얘기를 적나라하게 쓴 시가 거의 없다. 프라이버시의 성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이런 성역도 과감하게 깨질 것이다. 그것이 시의 새로운 진화, 서정성의 영역 확장, 시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해당할 것이다.
장인수|충북 진천 출생으로 2003년 《시인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적멸에 앉다』, 『천방지축 똥꼬발랄』, 『슬픔이 나를 꺼내입는다』 등이 있으며 현재 《사이펀》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