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리뷰
대지의 시, 법열의 시(The Poem Ecstasy)
-정동수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천년의시작, 2022)
-문인선 『땅땅 땅』 (작가마을, 2022)
전 구|문학평론가
백남준, 야곱의 사다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창세기 28:10)
야곱의 사다리(층계)는 이 불모의 땅에서부터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가파른 높이를 보여준다. 이 가파른 경사도란 실제적 기울기가 아니라, 아마득한 상상적 비탈로서 육신을 벗고 영혼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초월적 도달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지에 사는 인간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다리 너머의 천상을 그리는데, 야곱의 사다리란 구원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표상하며 현실과 천상이 이어져 있다는 흐릿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표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천사들이 지상과 초월적 세계 사이를 마냥 “오르내리”고 있다. 이들은 지상에 내리지도 않고 천상에 오르지도 않은, 단지 걸쳐있는 상태로서 운동하며, 마치 영원히 이를 수 없는 영겁회귀의 공간을 재현하는 듯 보인다.
백남준은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라는 레이저 아트 작품을 설치했다.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언어 활용능력도 원활치 않았지만, 반대급부로서 예술혼은 더욱 강렬해졌다. 높이 8m 분수에 레이저 광선을 쏘아 만든 야곱의 사다리는 대지와 천상을 이어주는 레이저 징검다리처럼, 백남준의 영혼과 정신이 허공을 “오르내리”며 마치 춤추는 듯 보인다.
백남준의 어질러진 책상을 본다. 무질서하게 공구가 흩어져 있고, 작은 철제의자에 앉은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부품을 조립하고 전선을 잘라냈을 것이다. 백남준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고 또 외과 의사처럼 냉철하였다. 무기체의 결합이라는 그의 단순하고 집요한 작업은, 작품의 전위적 형식과 비교하면 다분히 인간적으로 보인다. 가령 과학은 인간의 꿈을 투사하는 기재여서, 타임머신이란 소멸한 시간에 대한 갈망의 표상이고, 첨단의 기계는 항시 인간의 신체를 연장하지 않았던가. 백남준은 부서진 회로와 전선, 트랜스포머에서 인간의 혈관과 살점, 심장을 발견하였다. 시초始初에 단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을 일으켜 다세포 생물로 진화했듯이, 백남준의 손끝에서 생명의 율동이 확산하였다. 그는 무기체의 결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말하고자 하여, 삶의 고통, 지옥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리듬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손으로 기판을 꾹꾹 누르고, 부품을 조립하면서 창조의 행위가 이루어졌다. 신이 백남준을 만들었고, 그는 다시 기계 생명을 만들어냈다. 첨단의 영혼이 예술가의 손에서 피어난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의 최전선最戰線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전쟁의 야만성과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횡횡하며 또한 자연파괴, 비인간주의, 전체주의가 유행하는 지금은 시취屍臭를 풍기는 암울한 상황이어서, 매 순간 절절한 생존의 문제에 맞부닥치고 있다. 썩지도 않을 시대에 손을 내밀어 어색한 안부를 묻는다. 지금을 사는 일은 매우 괴로운 사태이건만, 이 해괴망측한 시대를 기록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러운 제례祭禮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시를 짓고 시를 산다. 죽음 속에서 삶의 시를 쓴다. 그래서 절망의 시대를 밝히고 있는 두 권의 시집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먼저 정동수의 시는 대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읽고 있으며, 문인선의 시는 분개의 힘을 통하여 무한대로 확산하는 시간의 운동성을 쫓고 있다.
백남준이 기계성을 통하여 야곱의 사다리를 쌓아 올렸듯이, 시인은 말의 결합을 통해서 삶의 구원을 찾는다. 야곱의 사다리는 비참한 대지의 세계와, 절대자가 운용하는 천상의 세계를 매개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말은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더 높은 현상으로 견인하고자 한다. 말이 우리를 직접 살릴 수는 없지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시감을 보여주기에, 인간의 말은 현실과 천상의 사이에서 오로지 율동한다. 그리하여 시는 인간의 일이고, 또 신의 일이기도 하다.
2. 정동수,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웃었다
마취총을 맞으면 백발백중 더는 골목의 자유를
누비지 못한다면 소방 구조대원은 죽음과 삶을 재단하듯 말했다
순간, 어딘가에 늘 도취되어 있던 나는
나의 시는 멈춰 있는 심장이었다
기사회생해서 돌아오면
삶에서 기사회생하여 죽음으로 되돌아갔다
좀 살아 봐서 아는데
사는 일이란 참 소태 씹는 맛이지,
가슴에 표적을 그리고
표적으로 살아왔었어,
목줄을 벗어던진 표적은 이미 바람이었다
야성의 눈빛에 빛 속에서 빛났다
나는 개의 눈빛이 빛나고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나도록 협조했다
목덜미라도 물리면 야성의 눈빛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마취총이 바람을 뚫고 지나갔다
마당엔 목줄에 묶인 개 두 마리와 내가
골목의 자유를 향하여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 전문
정동수는 지치지도 않고 끝내 사랑을 부르짖는 시인이다. 가령 “나는 고여 있는 감정을 흔들어 놓기 위해 신이 발명해 놓은/사랑을 빌려 왔고 이것은 생의 마지막 기도였다”(19면), 그리고 “살아서 견디자/끝이 오려니 그 끝을 살아서 맞자/이 개 같은 사랑도/한 접시의 기쁨도”(63면) 라며 사랑을 외친다. 아니 사랑을 향해 울부짖는다. 사랑이란 죽음의 대지 위에 피는 열매와 같아서, 시의 전반에 흐르는 죽음의 기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피를 기억하는 꽃들을 먹고/전장의 시간을 흐르고 있”(34면)는 죽음은, “몸에 꼭 붙어 있어 두려움이 되길”(31면) 바라며, “개의 식욕같은 빗줄기가 빠르게 공중을 삼키고 있어”(36면) “떠나지 못하고 들썩이다 만 나뭇잎/부식된 가을만 짙어지고 있습니다”(66면) 등의 스산한 표현이 죽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성경의 어느 구절을 들여다보자면 예수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복음 11:44)는 기적의 순간을 살필 수 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라자로(Lazarus)는 말씀을 통해서 되살아난다. 라자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행, 저승에서 이승으로의 이행, 땅속에서 땅 위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기적의 상징이다. 죽은 이의 부활이라는 사건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라자로의 기적에서는 공간에서의 공간으로의 운동, 시간에서 시간으로의 운동이라는 그 초월적 변동의 양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라자로는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극적인 방식과 형태로 운동하면서, 생로병사라는 운명과 자연현상에 맞부닥친 기이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시는 개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웃었다’라는 제목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시에서 죽음과 삶에 걸쳐있는 운동성이란 “삶에서 기사회생하여 죽음으로 되돌아갔다”, “목덜미라도 물리면 야성의 눈빛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마당엔 목줄에 묶인 개 두 마리와 내가/골목의 자유를 향하여 버둥거리고 있었다” 등 여러 대목에서 나타난다. 수사적으로는 상반된 이미지가 충돌하는 이러한 모순형용의 표현을 통해 “야성의 눈빛이 빛 속에서 빛났다”, “나의 시는 멈춰 있는 심장이었다” 빛나는 문구를 길어 올리고 있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랴” 신들이 물었다/“당신의 이름을 주시오” 사람들의 외침에 신들은/신의 자리에서 마침내 풀려났다”(38면),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맞물려 있을 것만 같은 저 끝은/죽음마저 졸음처럼 가벼울 듯합니다/저 끝은 끝이어서 한 세계의 시작이어서 아득도 합니다”(49면)처럼, 세계의 묵시론적 서술을 통해 다른 지평을 도출해내는 성찰을 단연 놀라운 것이다.
내리는 비에 툭툭, 사과의 몸집 불리는 소리 들립니다
말랐던 도랑의 모래 속 때를 기다리던 다슬기 슬쩍
고개 내밀어 봅니다
젖어야 살아 내는 것들이 나뿐인 줄 알았습니다
마당의 먹감 이파리도 활짝 펼쳤습니다
발끝으로 한기 같은
그리움 차오릅니다
숲과 골짜기와 그 너머에도 비는 내리겠지요
툭툭, 그리움 불거지는 소리 들리겠지요
당신은 언제 내릴까요
때를 기다려 고개 내밀 날 또
언제일까요
-「숲과 골짜기와 그 너머 있는」 전문
시인이 흙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대지에 대한 존경이라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가령 “귀에 익은/자글자글 알 굴리는 소리”(26면), “가끔 삶이 무료해질 때/빈 밥그릇을 핥는 개의 혓바닥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어/궁핍의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지 모르니까”(64면) “발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을/청둥오리는 오래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94면) 같은 표현은 그가 대상들의 바깥과 바탕을 세밀하게 어루만지고 있음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에 스며들어있는 정적靜寂, 그 고요의 무게를 읽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담기에, 감각적인 표현이라는 말이 채 부족하게 느껴진다. 감각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힘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그래서 “사과의 몸집 불리는 소리”같은, “툭툭”의 감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감자알만 한 돌을 호미로 툭툭 두드리며”(17면) 시인은 대지 위에 얽혀있는 생명의 연대와 유대의 관계를 어루만지는데, 대지의 바탕을 메우고 있는 이 오묘한 무게를 “물의 날개를 보았습니다/생강꽃 노란 알처럼 피어난 숲을 향하였습니다”(16면)라고, 또 “저마다 무게로/기우뚱하는 저녁”(43면)으로도 표현하며, “밀려드는 물살이 새의 졸음을 흔들어 깨우고/물가로 떠내려온 나무는 형체를 잃었습니다”(54면) 등 대지의 윤곽을 따라 그리는 애정이 어린 손길에서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시인이 진술하고 있는 대지의 바탕을 메우고 있는 작은 소리들이 사랑의 본질은 아닐까. 시인은 적막과 허무의 세계를 딛고 일어서, 그 바탕에 있는 연대와 유대의 관계들을 “툭툭” 묘사해 나간다. 따라서 죽음의 세계를 딛고 나서, 대지의 바탕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울었다.
3. 문인선, 땅땅 땅
화성에 달이 뜨고
웜홀
미래와 과거가 평행이 된다 해도
땅땅 땅
미얀마에선 총알이 난무하네
땅땅 땅
사람을 쏘아 자유를 감금하고 민주를 불사르네
아무도 말리지 못하네
유엔도 미국도
말리지 않네 구경만 하네
땅땅 땅
땅에 환장한
물건너 저 도둑 심보들
그때 히로시마 원폭
땅땅 땅 하지 않았을까 퍽퍽 퍽 했을까
아직도 그 근성 버리지 못하고
제 자식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도둑질을 가르치는
양심에 개털 난 저 착시
우리 독도만 보이는지
제 땅이라고 우기네. 오늘도 우기네 땅땅 땅
-「땅땅 땅」 부분
문인선은 가히 속도의 시인으로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아 거침없이 시를 써내려간다. “여의도엔 요상한 악취 같은 게 있다/거짓과 정당화의 반복/무가치한 자산 제로 케이스만 가득하다”(13면), “위협인지 과시인지 북한도/또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고 합니다/땅에서 열차 안에서//어느 바다에 떨어졌을 그 미사일/효험이 없나 봅니다”(35면), “땅에 환장한 저 물 건너 저것들 말입니다/눈만 뜨면 우리 대한의 땅 독도를/자기 땅이라 우기더니”(73면)라며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과 대외적 상황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하여 “화창한 오월의 봄날에/탯줄도 안 끊긴 채 쓰레기통에 버려진 영아/뉴스를 듣는 순간/인간 생명이/쌀독에서 나온 좀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버려지다니”(55면), “이제 이 세상에 더 이상 신은 없다 신이여 죽었든 잠자든 술에 취했든/당신을 믿지 않겠다”(56면)라며 비참한 사회적 사건사고까지 이 시대의 불모성에 관한 단호한 진술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의 시는 재미있다. 줄곧 시원한 만평처럼 넘치는 시적 에너지를 보여주는데, 현실 세계에 대한 묘사가 분명하여 이 시대의 불모성에 관한 분명한 증언을 하고 있다. 시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땅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이 세계의 만화경을 펼쳐 보이기에, 기록사적 의미도 분명하다. 한편 시인은 대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의 의성어인 “땅땅 땅”, “땅에 환장한”, “도둑 심보들”이 탐내는 “땅땅 땅”과, 판사가 두드리는 판사봉의 소리 “땅땅 땅”을 오버랩하여 땅에 관한 가장 입체적인 표정을 만들어내고 만다.
시의 역동적인 속도감은 이미지의 대비적 구도와 열거법, 반복법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부정적인 현실을 탈각하고 죽음의 대지를 되살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검정이 숯을 보고 검다고 하네/숯이 검정을 보고 검다고 하네”(29면), “반도체 일등 국가, 조선도 일등 국가, 자동차가 4강 국가/케이팝, 오징어 게임, 미나리 기생충 다 열거할 수 없구나”(42면), “새소리, 바람소리/물소리 하늘에 구름 흐르는 소리/해와 달, 구름 스치는 소리/꽃피는 소리, 애기 울음소리/소년의 책 읽는 소리,/잘한다 잘한다 칭찬 소리,”(82면)는 표현이 점층적으로 쌓이면서 시원한 비처럼 청량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이상에 관하여도 비교적 분명한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살펴보면 “흙도 향기롭던 조선 땅에서/박꽃처럼 순박하게/초승달처럼 청순하게 자라던 소녀들/신발도 벗겨진 채, 맨발로 끌려갔어요/들에서, 산에서, 개울에서,/더러는 자다가 끌려갔어요/자식을 뺏기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부모/총칼이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걸 보았어요//신이 죽고/하늘도 무너졌어요”(78면) 라는 비극적 역사의 인식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문화와 문명의 가장 최 정 점/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쿠텐베르크보다 백 년이나 앞선/세계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라네”(41면)라며 바람직한 인간상을 “그래, 우리가 뽑을 대통령은 세종대와 같은 사람이어야 해”(17면)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새벽이면 맑은 이슬 내려 먼지 닦아주고/가뭄에는 비도 내려 갈증 씻어주고/밤에는 조용히 내려와 따뜻이 품어주고/낮에는 흐뭇한 미소로 화답도 하잖아”(63면),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맑고 푸른 하늘아래/가족처럼 형제처럼/다 함께 손에 손잡고 뛰고 뒹굴어/이 지구별 전 인류가/오직 한 마음 하나가 되기를/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76면) 라며 부정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시원한 지평을 펼쳐 보인다.
라자루스 증후군((Lazarus syndrome)이란 표현이 있다. 저승에서 살아 돌아온 라자로의 일화에 빗대어 사망 선고를 받은 환자가 깨어나는 경우를 일컫는다. 문인선의 시는 죽은 대지를 일깨우는 단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앞으로도 그의 서사가 그치지 않고 확장적으로 펼쳐져 우리의 땅에 성공적으로 착근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전구
2018년 계간 《사이펀》신인상 문학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