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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가16000시초23T혼돈
법률(노모스) 대 카오스(χάος, Khaos)
-- 2023 10 03 {가16000시초23T카오스}
플라톤(전427-전347)은 아테네가 멸망하고 난 뒤에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성립해야 할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훌륭한 인간들이 사는 도시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론이라 불리는 폴리테이아편도 썼고, 이런 나라가 세계 또는 세상에서 어떻게 생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여 우주 발생론이라 불릴 티마이오스편도 썼다. 이 두 편은 서양철학사의 흐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그가 말년에, 그래도 현실에서 도시국가를 위해 법률(노모이 Νομοί)을 쓰면서, 국가란 제도에서 구성원들이 능력과 기능을 발휘하여, 필요와 편리에 맞는 체제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 속에 플라톤이 바랐던 나라는 성립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기원전 350여년 경의 도시국가가 그 이후에도 그런 방식으로 체제와 제도를 가질 수 있는 방식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나라의 성립시대는 생산력과 생산연관이 그 시절의 도구와 생산방식에 맞게 성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도구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에 따른 국가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은 거의 2천년이 지나야 체계와 제도에 대한 여러 방식들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입어서 법률편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없을 정도였다.
소크라테스는 왜 법률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절에 중요한 화두 또는 테제는 국가가 아니라 다른 문제였을 것이다. 나로서는 소크라테스가 그가 살았던 당대의 화두를 영혼의 생성과 전개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본다. 다이몬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당대에는 동방제국들과 전쟁, 그리고 그리스반도 안에서 20여년에 걸친 펠로포네소스 전쟁의 시기였다. 전쟁은 제도를 강화하고 인간을 제도의 부속기계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겪게 되면,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전쟁은 승패가 다반사라, 이기는 경우에 거대한 이익(약탈과 수탈)이 있고, 지게 되면 죽음으로 항거하거나 노예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들을 겪는 것은 상층이나 시민이나 마찬가지여서, 각자의 생명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음 이후의 담론들은 시민들 각각이 이런 삶의 분절을 절실하게 느끼는 경우에서 일 것이다. 전쟁의 담론은 고대 신화든, 동방의 제국이든, 상층의 지배방식에 있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 지배에는 힘이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모든 물자와 인구를 동원해서 상대를 누르고 승리하는 방식만이 전쟁의 미덕, 즉 정복자의 미덕이라 했을 것이다. 자유? 그것은 이긴 자의 놀이일 뿐이다. 시민사회에서도 이긴 자와 진 자의 구별이 전쟁처럼 유비적일 때, 이긴 자의 덕목에 대해, 그 놀이에서 도대체 무엇이 힘인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이 스스로 깨우치면서, 도시국가를 이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시민들과 특히 청년들에게 물음을 던지면서, 누구나 스스로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도 열여덟 정도에서 소크라테스를 알았을 것이라 한다. 그 소크라테스가 당대에서 제도 속의 중요 인물도 아니었고, 체제를 옹호하거나 여론을 장악하던 극작가나 연설가도 아니었다. 극작가들이 시민의 교육과 도시국가의 여론을 좌지우지 하던 시절에, 청년에게 삶과 실천을 깨우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고 하겠지만, 개인이든 국가이든 삶의 과정과 제도의 활성화에는 젊은이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중요시한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당대의 지식인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작품 구름(전423)에서 소크라테스(전469-399)를 “쇠파리”라고 조롱했던 글을 쓴 것은 플라톤의 나이 셋일 때였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새들(전414)이란 작품에서 우주 생성에 대한 전승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플라톤의 나이 열넷 이었다. 플라톤이 우연히 소크라테스를 만난 때는 전409년경이라 전해지는데 열여덟 전후일 것이라 한다. 불교에서 사미계를 받든, 서구에서 수도원에 입문하든, 거의 이런 나이이다. 아마도 플라톤은 출품할 희곡 대본을 두루마리에 써서 말아 들고서 경연장으로 가다가, 소크라테스가 거리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모임의 뒤편에서 구경하듯이 듣다가, 이런 신들에 연관된 희곡을 쓸게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전향했다고 한다. 열여덟. 그는 그 이후에 거의 10여년을 소크라테스를 따랐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폴리스 성채 안에서보다 데모스 곳곳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문답과 토론을 전개했을 것이고, 플라톤은 그 언저리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의 이야기를 먼저 들은 선배와 노장들의 이야기도 뒷풀이로도 들었을 것이다. 뒷풀이의 이야기가 플라톤의 전기 작품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노땅과 선배들의 뒷담화에서도 알듯 모를듯 한 이야기들은 그 기원과 근거에 대해, 아테네에 널려있던 서적상에서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탐구해야 했을 것이고, 스물여덟 아홉에 플라톤은 나름으로 어떤 체계를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들었던 10여년의 이런 저런 꼭지들을 체계 있는 덩어리로 만든다는 것은 요즘 표현으로 국가 박사논문을 쓰는 것일 진데, 그러나 전399년 소크라테스의 독배 이후, 지난 번에 피해를 입은 민주파가 귀족들의 참주파에 대해 숙청을 할 때, 귀족 집안이었던 플라톤은 이를 피해 메가라로 잠시 피신했다가, 이집트로 여행을 했었다고 한다. 그 이집트 역사의 속내에는 아테네보다 깊은 역사와 전승들뿐만이 아니라, 지식 체계와 지혜 탐구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상상해도 좋을 정도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혼자서라도 가야할 길이 있음을 알고서 평생을 깊은 탐구에 전념했을 것이고, 그의 총체적 사유가 인류의 유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플라톤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극작가들도 개인의 도덕적 덕목으로 ‘훌륭타’를 논의 주제로 삼았다. 동양에서 군자라고 하거나 불교에서 아라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삶의 터전에서 훌륭타라고 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목표로서 성인이 되거나 보살이 되는 것이듯이, 서양에서도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 또는 현자가 되는 것이 훌륭타이다. 여기에 종교가 끼어들면서 복자 또는 성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훌륭타라는 덕목이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 또는 영토 안에서 삶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기에 도시국가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도시와 더불어 성 밖에서 삶도 편안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연관 또는 조화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하늘과 땅 사이에 통일성이 있다는 선전제 하에서, 세상(우주라고 하든 세계라고 하든)에서 통일성, 그리고 인간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을 찾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대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활동인 “자연의 통일성”이 당연히 있다고 여겼다. 유일 신앙은 나중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자연이 아니라 추리의 극한으로서 하나의 통일성이 먼저 있다고 여겼는데, 이는 인간의 사고에서 자기의 안정성과 편안을 (이기적이기 까지는 아니라도) 먼저 염두에 두었기에 통일성을 인간이 부여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제일성과 신의 제일성은 로마시대 이후 거의 칸트(1722-1804)까지도 대립적이었지만, 크리스토스 라는 관념을 성립시킨 후, 천 팔백여년 동안에, 신의 제일성이 우월하다는 맹목적 독단에 우매하고 경건한 신앙심을 덧붙여서 이어져 왔다. 이는 제도와 삶이라는 주제와 다른 것으로, 사유체계의 기원적인 문제제기로서 자연과 신의 대립을 보여주는데, 지금까지도 국가와 제국을 상위에 두는 자들은 신이 먼저임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자들이다. 삶과 자연 대제도와 신이라는 두 갈래는 그리스 사유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사고이다. 삶과 제도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사유의 확장과 확장된 사유 터전(위상)을 한꺼번에 생각해 보자고 하는 쪽이 플라톤이라 한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시대에, 기원전 4세기경에, 사유터전이 인간의 경험적 사실들 모두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시대는 오관(기능으로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기관으로서 안이비설신: 眼耳鼻舌身)을 통한 종합이었을 것인데, 이 종합을, 의식이라 하든 영혼이라 하든,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로 통합을 믿고서 여기서부터, 인간의 사유는 체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 도시국가, 천지의 우주를 하나로 엮을 체계를 세우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천지의 조화와 균형에 맞는 도시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여긴 철학자인 플라톤은 말년에 법률편을 써서, 통치기구, 기구를 움직이는 여러 기구들, 시민들의 생산, 생활, 교육뿐만이 아니라, 축제와 법률 위반자의 처분 등에서 질서 유지 등을 세세하게 서술하였다. 이런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하고 이 책을 썼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은 이미 아테네는 무너졌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왜 세상은 가장 훌륭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전투와 지배의 방식으로 세계를 다루어야만 할까? 그런 고민의 부류는 국가체계와 그 체계에 맞는 질서가 완전하게 먼저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세상 또는 체제들은 그런 완전한 질서를 따르지 않았고 또한 않고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기심일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왜 질서가 먼저 있느냐? 질서가 있다는 그 질서는 어떤 것인가? 나아가 우리로서는, 한반도의 질서는 무엇인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까? 라는 질문과도 유비 또는 알레고리가 있다.
그러면 반성하고 성찰하는 인간들이 질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한 질서가 또는 다른 질서들이 있기는 했는가? 고대 그리스의 상식은 신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상식과 양식을 통해서 설명하려고도 해보고, 이를 넘어서 생산양식을 통한 성찰과 숙고 통해서는 달리 말하기도 할 것이다. 고대의 신화 속에서 보면, 헤시오도스(Ἡσίοδος, 전 8세기경)의 신통기/신들의 계보(La Théogonie, Θεογονία)에서 처음에 자연적으로 카오스(χάος Khaos)가, 다음으로 가이아(Γαῖα, Gaia), 타르타로스(Τάρταρος, Tartaros), 에로스(Ἔρως Eros)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왜 카오스가 혼돈이라고 번역되었을까? 그리고 카오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알 수 없지만 이야기의 전승 상, 내용을 구별할 수 없는, 또는 질서 없는 어떤 것이라고 여긴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면 볼 수도 없는 것, 만질 수도 없는 것, 즉 오관을 통해서 알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카오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무질서였을까? 사람들이 모르면 무질서라고 했을 수 있다.
카오스란 그저 있지만 잘 모르는 것, 우리의 표현으로 아나키가 아닐까? 그다음에 세월이 지나 자연, 질료라고는 용어로서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인간이 시초와 먼 과거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시절, 그리고 문자와 글자로 전승하지 못하던 시절에, 아마도 구전으로 유비와 알레고리의 이야기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카오스가 혼돈인지, 공허인지, 구별 없는 내용인지, 질서를 찾을 수 없는 자연(요즘 표현으로 복잡계)인지, 알 수 없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유비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인간이 삶에 대한 노력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학문적으로 잘 배열해 보려고 했던 것이 철학사일 것이다. 한 개인의 영혼도 알 수 없는 것에서 삶의 노력의 과정에서 이름을 부여할 만한 내용과 형식을 갖출 때, 그 이름이 정체성(l’identité, 동일성)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카오스라는 것에서 어떤 질서 또는 어떤 터전의 배치를 생각하였다기보다, 생활에서 경험의 축적을 나름으로 현재하는 사물들을 계통화하고 분류하려 했을 것이다. 계통으로 설명한 것이 헤시오도스시대 쯤에서 나타났을 것이고, 생성으로서 분류하려고 하는데서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탈레스가 나왔을 것이다. 탈레스가 혼자서 그림자로서 피라밑에 오르지 않고서도 높이 잴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시대에서는 산술과 기하의 기본적 질서(순서와 비례)가 정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산술과 기하를 현대의 수학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수학은 오관을 통한 (일반화의) 추리의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가 말하는 추론은 삶의 터전에서 다른 생각들과 함께 논의하는 것이다. 추리는 무한정 나갈 수 없었기에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영역에 무한정 또는 무한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다른 어느 사고에서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전승했으리라. 이들이 경험적 추론보다 시기적으로 한 참 후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비유와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이런 방식은 생활 터전에서 추론의 장이 오랫동안 있었을 경우이다. 이 무에서 창조의 이야기가 알레고리로 설명되었을 것인데도, 비유로 나아가 추리로, 또는 사유로서 추론으로 나아갔을까? 세계의 생성 또는 변화를 하나하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어렵기에 설명하기보다, 어린애에게 이야기하듯이, 퉁쳐서 그래 ‘이렇게 만들어 진거야’라고 하는 것이 편리(유용)했을 것이고, 그 당시 상식으로 그래 우화적으로 ‘그래 맞아’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즉 다른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달리 설명하거나 증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경우에, 퉁쳐서 ‘그래’라고 했을 수도 있다.
모르는 자연의 상태를 무질서(카오스)라고 하는 이야기와 무(없음)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서로 달리 말하는 것인데도, 유비적으로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럴 경우에, 어린애에게는 혼잡한 카오스보다, 없다고 여기는 (허무) 무라고 수용하는 편이 더 쉽다. 그래서 후자의 학설의 토대에는 여섯살 꼬마의 이야기와 같다고들 한다. 그래도 사유하는 학문에서 두 경우가 다르다는 것은 철학이라는 용어가 생기면서부터 죽 있어왔다. 하나는 생성하는 자연에서 다른 하는 완전한 체계에서, 설명하고 체계화하려는 두 방식이다. 간단히 하나는 철학으로, 다른 하나는 신학으로 이어왔다.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 문화론의 이야기라는 하는 것은 어린애에게 동의받는 것과 같은 알레고리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스 시대를 지나 로마시대에서부터는 철학이 자연으로부터 질서를 찾는 노력은 그리 쉽지 않아서, 철학이 퉁쳐서 말하는 신학의 통일성에 밀려났다고 할 수 있다. 다섯 살짜리에게 지구가 돈다고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정치경제학자들이 말하듯이 이 둘 사이에 경제적 기반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하나는 부를 집중화하고 일부(왕, 상층)의 사유화를 정당화하고, 다른 하나에서는 자연의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소유 또는 공동체(공산주의)의 관점이 들어있다고 한다. 역사에서 이기적 소수는 신화의 시대에서부터 전쟁 영웅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소유의 욕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소유와 부의 축적이 지배와 통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부 소수의 상층은 잘 알고 있었는데 비해, 공통체의 상부상조에서는 서로 간에 소통의 원활화가 인간의 심성을 널리 이롭게 한다(홍익인간처럼)는 생각을 이어왔고, 훌륭타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여왔다. .
지금도 우리 터전에서 사적 소유의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지배적이고, 이들은 상부상조로서 인민들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산다는 것에는 인색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적 소유가 개인의 삶을 가족과 대를 이어 잘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체제를 만들고, 그 체제의 밖의 인간들은 체제 부적응 또는 낙오자로 분류하여, 차이를 차별로서 대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삷의 방식에서 차이가 인간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누구나 말하고 있지만, 다른 사유, 다른 실천이 사적 소유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자기들을 반대한다고 여겨, 반대자로 몰고 나아가 적대시 하며 게다가 빨갱이 또는 악의 축으로 몬다.
기나긴 지구 시대에서 석기 시대를 중첩하여 철의 시대를, 이들을 중첩하여 1953년 이래로 규소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어느 세기와도 달리 21세기에, 생각보다 많은 영역에서 달리 실천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터전 만들기가 확장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체제 유지의 삶이 먼저인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소통이 아니라, 체제에 예속하는 제도에 함몰되어, 미국과 일본의 체제 하부에 들어가는 제도를 진정한 제도로 망상하고 있다. 이 두 삶의 태도에 대해, 철의 시대에는 세계관의 차이라고 불렀으며 이항대립으로 설명하려 했었다. 규소의 시대에는 생성과 차히를 생산하는 부류들이 여러 갈래로 다발들을 이루고 있는데, 아직은 이 다발들이 백여 년이 체 안 되어 서로의 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으나, 다발의 가지들 각각의 계열들이 살아남고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중이다. 인민은 기본이자 최종심급이다.
세계의 통일은 하나의 사고 체계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계열들이 각각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소통하는 방식에서, 즉 소통의 다변화가 사유 체계를 이루는 터전(카오스, 복잡계)이 형성되고 있다. 단지 허리가 잘린 이 터전만이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체계에 우선을 둔 철기시대의 이항 대립의 사고에 젖어 있어서이다. 이를 타파하는 열여덟의 이야기는 루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플라톤에도 있고, 벩송에도, 들뢰즈에도 있다. 과거에는 공자에게도 있었고 나이 넘어서 이지만 싯달다에게도 소크라테스에게도 있었다. 저항, 항거, 봉기, 혁명에 있다. 반란이니 역적이니 빨갱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들이, 자기의 부당이익을 감추기 위해, 이기주의에 빠진 망상의 악마들인 셈이다.
산다는 것이 먼저이며, 달리 산다는 것을 사유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기존의 배움의 한정성의 조건들을 타파하는데 있다. 한 가지 우리의 허리를 잇는 소통의 가장 근본은 인민이 함께 쓰는 입말, 말투, 말씀이라는 공유면이 있다. 공유면의 두께가 한글 쓴지 오래지 않아서 엷지만, 소통의 길을 만들면 무한정으로 두께를 지닐 것이다. 만에 하나, 이런 길을 뚫는 이가, 진정한 저항가, 혁명가일 것이다.
열여덟은 중첩의 층에서 제일 위에 있다. 늙은이는 세대 상으로 삼층 아래레 있다. 이 아래층은 과거의 1445년의 훈민정음을 잇는 다른 방식을, 다른 입말을 만드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에서 현실적으로 달리 행하기, 달리 만들기를 이룰 것이다.
(56tmi) (56U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