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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3:4, 마 1:6>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요한의 영성, 예수님의 영성, 신약과 구약의 영성, 엘리야의 영성
1. 말씀배경
▶ 사람들은 배부르고 살찌면 하나님을 등한시하고 멀리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1:20]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우리가 축복을 많이 받아 풍족할수록 오늘 말씀의 세례요한의 모습처럼 거룩함, 경검함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도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계속 풍족함에 빠져 있으면 바벨론의 영성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가난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음녀가 다스리는 세상 바벨론도 가난해서 종말을 맞이하는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8:16]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금은 보석으로 꾸미고 화려한 곳에 살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많은 것을 누리게 되면서 거룩함, 경건함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영성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영성, 광야 영성이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각종 더러운 영들이 활개를 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래서 바벨론과 같은 시대에, 그런 환경에 살더라도 광야의 영성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영성입니다.
우리들은 ① 예수님의 영성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잔치도 해야 합니다. ② 그러나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세례요한의 영성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믿음도 예수님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필요한 것은 세례요한의 영성입니다.
[마가복음 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을 잃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의 영성으로 금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만을 강조하다가 보니까 심판의 기준인 율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세례요한의 영성은 어떤 영성입니까?
1) 그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의 영성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영성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영성이며, “주의 길을 준비하고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의 영성입니다 (말 3:1, 4:5, 사 40:3).
그는 실제로 초림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주의 백성으로 준비하게 했습니 (눅 1:17)
그의 제자까지 내 준것입니다. 안드레와 사도요한은 그의 제자였습니다.
→ 이를 위하여 그가 물 세례를 베풀어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로 나아가게 합니다.
→ 오늘날 우리들도 세례요한의 영성이 있어야 자기도 회개하고,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의 길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켜 재림에 있을 심판을 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그의 영성은 회개의 영성입니다.
→ 오늘날 회개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축복만 받을려고 하고 있고, 받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영성이 사라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교회에서 모두 “복”만을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해산하는 고통이 이름같이 멸망이 다가오는데 말입니다 (살 5:3)
유럽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영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 세례요한의 대표적인 영성은 광야, 빈들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① 빈들에서 오래동안 살았습니다. 언제부터 광야와 같은 빈들에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척박한 빈들에서 산 것입니다.
[누가복음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② 그가 하나님의 말씀도 빈들에서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③ 그리고 실제로 유대광야에서 말씀을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인 것입니다”(마 3:3, 막 1:3, 눅 3:4, 요 1:23)
그는 요단강 근처에서 세례는 베풀었지만 예루살렘과 같은 화려한 도시에서 외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이 부유한 곳에, 화려한 곳에, 큰 곳에서 사역하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회개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 요한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광야로 나오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세례요한과 같은 광야의 영성을 가질 필요한 것입니다.
▶ 분명히 광야와 같은 빈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부족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가 먹고 입는 것을 보면 광야나 빈들에서 얻을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가복음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낙타털 옷 하나 걸치고 가죽 띠를 두르면 그것이 평생 옷이요 이불입니다.
광야에서 가끔 얻을 수 있는 석청도 있지만 그것 매일 먹을 수 있나요? 없으니 메뚜기가 그의 주 양식인 것입니다. 거의 메뚜기만 잡아 먹고 살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 지금은 농약으로 인하여 거의 사라졌지만, 어릴 때에는 시골에 메뚜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튀겨서 먹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먹는 것, 입는 것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것입니다.
가공된 것이 없이 자연 그대로 이리 저리해서 먹고 입고 있는 것입니다.
왜, 메뚜기만 주시냐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꿈란 공동체 사람들, 에센에파의 사람들처럼 경건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경건하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많은 말로만의 경건입니다. 마음은 고사하고 모양새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도 까마귀와 백합화 예를 들으면서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신앙의 성숙, 경건을 위해서는 삶이 조금은 단순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치장하세요, 거저 우리들의 생각이 복잡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게 나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이시면 됩니다. 중심을 보시잖아요
마치 마치 제단을 쌓을 때에 다듬지 않은 돌로 여호와의 제단을 쌓는 영성과 같습니다 (신 27:6)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냥 단순해집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저희교회가 점심으로 비빔밥을 하고 있는데 굉장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씩을 해와서 교회에서 비비는 것입니다. 각자의 기름부으심, 영성이 함께 어우러져 대산교회가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훈련입니다. 연합하는 훈련이요, 순종하는 훈련이요, 그리고 단순해지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메뚜기만 있더라도 감사하고 먹는 것입니다. 감자 하나 삶아서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교제를 위함 식사입니다.
잘 먹고 못 먹고 재정을 아끼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3) 또 세례요한은 나실인의 영성을 가졌습니다.
[누가복음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나실인은 머리를 깍지 않는 것도 포함되지만, 세례요한은 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그는 포도주, 독주를 마시지 않는 나실인인 것입니다.
이것은 포도주와 독주는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므로, 세상의 쾌락을 따르지 않는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의 술에 취하여 사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고 사는 자인 것입니다.
나실인(히, 나지르, 성별된, 봉헌된, 구별된)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 분리하다, 성별하다, 봉헌하다의 뜻인 “나자르”에서 왔습니다.
뭔가 괘락의 세상으로부터,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도심에서는 나실인이 삶이 불가능하니까, 분리되어 나간 것입니다.
우리들의 눈으로, 귀로 얼마나 나쁜 정보들이 들어옵니까? 그것이 나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의 이기들을 조금은 멀리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오늘 말씀이 세례요한의 영성 만을 가져야한다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영성과 함께 이런 세례요한의 영성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함께 필요하고, 율법과 복음이 함께 필요하고,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함께 필요하고, 잔치와 금식이 함께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자연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도 이 두 영성을 함께 가지고 있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요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3:14-15]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이 모든 의가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적 의와 신약적 의, 세례요한의 의, 예수님의 의를 말합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룹니다. 세례요한과 관련해서는 물 세례입니다.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는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물 세례, 성령 세례를 함께 받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을 주님께서는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바탕에는 구약적 영성, 세례요한의 영성, 율법적인 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율법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구약영성, 세례요한의 영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안식일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더 이상 구약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구약 영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약영성에 녹아져 있다고 보야야 합니다.
→ 또 예수님의 영성을 볼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자세히 보면, 신구약 영성입니다.
정의는 구약영성입니다. 의로 심판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신약영성입니다. 긍휼은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인 긍휼을 중심으로 좌우에 의를 이루는 신구약 영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도 신.구약 영성, 세례요한의 영성과 예수님의 영성이 함께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에 도시, 성읍에서만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잔치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전했지만, 오히려 많은 시간을 먹을 것이 부족한 광야나 빈들, 산에서 보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가복음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오늘날 기도하시기 위하여 산에 가고, 밤을 보내시기 위해서도 산으로 간 것입니다. 따뜻한 여관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 잘 때가 없으면 들에서 산에서 자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이삭을 짤라 먹기도 합니다.
음식을 위하여 옷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 예수님은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도 광야, 빈들에서 행해진 기적 입니다.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마가복음 8: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빈들이고 광야이니까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잘 기적이 안 나타나는데, 열악한 선교지에서는 치유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굳이 그런 빈들이나 광야로 나아갔을까요?
세례요한의 영성, 구약의 영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복잡하고 화려한 곳에서는 말씀을 잘 먹을 수 없습니다. 그 곳에는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역사했던 세상의 영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영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광야나 빈들로 예수님께서 오라고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 따라간 것입니다. 멀리서 왔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가는 사흘씩이나 말입니다. 집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8:1-3]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여러분들은 말씀을 찾아 빈들로 사흘씩 찾아 갑니까?
매일은 아니지만 빈들과 광야를 때로는 찾아가는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인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왔는데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화 있을진저“입니다. 그러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마 23:1-36). 예수님은 사랑의 영성과 심판의 영성을 함께 가지고 잇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이 두가지, 공의와 사랑의 영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지중해 해안길로 가면 일주일도 안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굳이 광야, 시내산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까요?
광야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말씀을 받아야 하고, 영적 군사로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군인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힘이 아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겸손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광야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풍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 단순한 것들입니다.
오래 동안 같은 만나를 먹어야 하는 곳입니다. 옷도 분명히 짐승의 가죽으로 해 입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영성을 추구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이 생활을 못견디는 것입니다.
→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음식 때문에, 거친 길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특히 탐욕을 품는 썩여 있는 자들이 그랬습니다.
[민 11:4-6]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이런 불평하는 ”썩여 사는 인종들“ 오늘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생활 싫다고 소리치고 풍족한 곳들만 찾아다닙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엄청난 메추라기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두 큐빗, 열 호멜)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이 탐욕의 무덤 “기브롯 핫다와”가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잊은 것입니다.
→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갈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음식과 길로 인하여 불평을 합니다.
[민수기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을 떠나 홍해길을 따라 우회하는 중에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여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21:4]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광야의 길을 가다가 보면 인생의 길이 험합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민 21: 4-9)
그들은 광야훈련을 통과하지 못하고 잇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가까운세렛시내를 건너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신 2:14).
→ 예수를 믿는 것이 항상 꽃길 만 걷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66편에서는 “불과 물을 통과하니 풍부한 곳에 들어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시편 66:12]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반드시 광야의 영적 시즌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쭉정이는 다 날라가거나 타버리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타작마당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은을 단련하는 것 같이 단련하시고,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어려움 짐이 우리 허리에 매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우리들의 머리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시 66:10-12)
▶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아라비아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갈 1:17)
이때에 광야의 영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광야 거기서 계시로 말씀들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처럼 말입니다. 성경 13권을 기록할 수 있었던 힘이 그런 훈련 때문입니다.
▶ 다윗도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울을 통하여 광야로 피해다니는 혹독한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십 황무지, 마온 황무지, 엔게디 황무지, 바란광야, 해와 망명 훈련까지 받습니다. 모두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죽음과 같은 광야입니다.
▶ 제가 5개월 동안 이 교회 내에서 지내는 것도 이 영성을 쌓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도원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천사의 말대로 잉태하고 5개월 동안 숨어지내는 말씀을 제가 받은 것입니다 (눅 1:24).
[누가복음 1: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맺는 말>
계시록에 보면, 구원받은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계 15:3)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계 1:2,9,6:9,20:4).
확실히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두 영성이 필요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계 11장 마지막 때에 나타날 두 증인의 모습도 모세와 엘리야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물이 피가 되는 영성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특히 구약적 영성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어려운 광야, 빈들과 같은 곳에 있습니까? 아니면 화려한 도시속에 빠져 있습니까?
광야, 빈들이 오히려 더 소망이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에 빠져 있다면 더 위험합니다. 빨리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건함과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바벨론 영성에서 빠져 나와아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계 18:4)
그렇지 않으면 바벨론이 불탈 때에 함께 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영성과 세례요한의 영성, 두 날개를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