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답(答)하신 신부님
- 故 김승훈 신부님 영전에-
詩人 이봉래 안셀모
(시흥동 성당 전 꾸리아 단장)
<그래 잘해봐요>
언제나 미소로 답(答)하시던
빛나던 당신의 말씀은
이제는 가슴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이 시간.
명례원 언덕길을 오르며
우리는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억압과 고통이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의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의 사제로
당신의 몸을 추스를 겨를조차 없이
매향리에서, 노근리에서, 임진각에서
성모님과 함께
한 평생 당신의 길을 가셨던
푸른 시절의 그 모습을 말입니다
파티마 성모님과 함께
5월과 10월이면
언제나처럼
당신의 자리에 서서
민족화해와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해
온몸으로 기도하셨고
(아니, 매일 꿈속에서도)
자유의 종(鐘)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크나 큰 아쉬움을 남기시고
아버지 나라에 오르신 신부님.
신당동 보좌 신부님 시절
<연탄 가스 신부님>으로
20여일 만에 깨어나
덤으로 사제의 길을 사신다고,
당신께서는 다아신다며
주님의 뜻을 따라
언제나 미소로
때로는 억압받고
힘없는 억울한 이들의
대변자로, 수호 천사로
소리 높여 양심을 울리시던
민주 정의의 사제였던
그 분 이셨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한
갈 수 없던 고향을
성모님께 의탁하시며
실향민의 애환마저 주님께 봉헌하시면서
밤마다 고향 땅에 돌아가
고통 받고 자유 잃은 동족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아픔을 같이 하시던
우리 이웃의 사랑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심고
민주와 정의의 꽃을 피워 올리신
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나라에 올라가심을
주님을 뵈옵는 기쁨으로
아쉬움으로, 슬픔으로
한편, 조금만 더 계셔 주셨더라면..
하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
부디 주님의 나라에서
천상군단 천사들과
모든 성인 성녀들과 함께
찬란히 빛나는 영광을 누리소서
-- 2003년 9월 4일 (마음이 아프던 날 밤에)--
http://dkstpfah99/kii.co.kr
<김 승 훈 마티아 신부님 약력>
1939년 7월 6일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출생
1953년 8월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음
1962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졸업
1962년 12월 21일 사제서품
1962년 12월 22일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1964년 2월 서울 성신고등학교 라틴어 교사
1965년 ~ 66년 혜화동성당·아현동성당 보좌신부를 지냄
1966년 ~ 96년 동두천·신림동·동대문·홍제동·왕십리·
여의도동·시흥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냄
1976년 ~ 89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미사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으로 고초를 당함. 이후 방림방적·동일방직·청계피복노조 등 7, 80년대 노동자·민중 투쟁 지원
1979년 ~ 80년 YWCA위장결혼식 사건,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등 각종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7년 5월 18일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6월항쟁의 도화선을 당김
1987년 ~ 2003년 박종철기념사업회 회장, 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최종길교수고문치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민주개혁국민연합 감사, 노동일보 종교계 담당이사 등을 지냄
2003년 9월 2일 지병인 간암으로 선종
노동·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 추서. 저서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회고록, 1999)
※ 지난 9월2일은 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 아버지품으로 돌아가신지 4주기 되었습니다.
제가 그 신부님께 세례받고
또 세례받기 1년전에 참나무통 맑은 소주로 세례명까지 지어주셧던 민주정의의 사제였습니다.
그 신부님을 늦게나마 다시 한번 추모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