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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 |
28일 새벽 北 전차 서울 돈암동 진입 |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6월27일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됐다.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났고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
2. 정부수립이후 여러번의 정치 파동을 일으켜 영구집권을 꾀했다
일명 부산 정치파동을 불리는 1952년의 발체개헌과 1954년의 일명 사사오입개헌에 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사건만을 놓고 그 행위 자체를 분석하여 비판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그 당시의 국내 상황과 국제상황,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 중심제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완전한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우선 정부 수립이 급하므로 정부를 수립한 후 헌법은 적당한 시기에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정부수립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제헌과정에서 한민당은 강력하게 내각책임제를 주장했으나 이박사에 의해 대통령중심제로 결정되었고 대통령 선출권은 의회가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한민당은 내각제 구상을 통해 전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무총리가 실권을 가진 후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는 이른바 이박사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세력이었습니다.
실제로 농지개혁 당시 한민당은 지주중심 농지개혁 방안을 주장했으나 이승만 박사는 이를 좌절시킵니다. 그 후로도 한민당을 비롯한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반이승만 박사 투쟁을 전개하여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1949년 2월10일 한민당이 중심이 되고 대한국민당의 일부(신익희)와 대동청년단(지청천)이 참가하는 형태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내각제로의 개헌운동을 펼칩니다.
김운태교수는 "해방후 한국을 지배하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여운형의) 건국동맹도 아니고 (김구의) 한국독립당도 아닌 한국민주당이었으니 이것은 국내혁명세력도 아니고 해외혁명세력도 아닌 바로 일제시 이래의 국내토착세력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해외혁명세력을 업고 국내혁명세력을 타도하였으며 다음에는 이대통령을 업고 림정을 타도하였다. 그리고는 최종으로 완전고립된 이대통령마저 제거하려던 단계에서 이대통령의 비상한 투쟁으로 초기 한민당세력이 둘로 분열하여 하나는 자유당이 되었고 하나는 민국당으로 되었다. " 고 언급합니다. 여기서 비상한 투쟁이란 전 한민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야당인 민국당의 1950년의 내각제 개헌기도를 좌절시킨 것을 말합니다.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당주의 내지는 무당주의를 표방해온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에 대해서는 철저히 견제했으나 국회와의 관계, 인재부족 등으로 인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인물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원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민국당은 49년 봄이 되면서 12부중 7개부처를 장악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의 실권까지 장악해 사실상 남한 최대의 권력그룹 으로 부상했지요. 이 무렵의 상황을 김운태교수는 "민국당은 자당본위의 정책주장이 실패할 시에는 그 실책의 주인을 정부수반에 돌렸으며 반이대통령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때부터 야당을 비롯해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이승만을 독재자 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하에서 1950년 1월27일 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심의과정에서 국회 사상 최초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3월14일 표결이 진행돼 출석의원 1백79명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로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는 과반수 미달로 실패했습니다. 이런 국내적 상황들과 미국과의 관계에 의해 일명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집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이틀 후인 30일 이승만 박사는 비밀리에 한국군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림으로써 소련을 비롯한 북한의 야욕을 견제하되 과잉행동으로 제3차대전을 유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트루먼의 세계전략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여 다시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그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유엔군과 미국측은 휴전을 생각합니다. 이때 이승만 박사는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필요하다면 UN군에서 탙퇴하여 독자적 군작전을 수행하겠다며 강력한 휴전반대 운동을 전개합니다. 미국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죠.
이 부분은 이한우의 '거대한 생애 90년 리승만'에서 인용합니다.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승만과 미국의 대립 이라는 구도에서 보아야 한다. 시간적으로도 52년 5-6월 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되고 최소한 1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측면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그 대립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재선을 생각한 이승만과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차제에 미국에 대해 고분고분한 지도자 로 교체하려는 미국이 정면으로 대결한 것이다.
당시 미국이 이승만을 거추장스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휴전반대 였다.
미국은 실제로 에버레디 작전 이라 해서 이승만 제거작전을 수립해두기까지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재선구상을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한 것은 국회 내의 민국당이나 야당세력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민국당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UN군 산하에 있는 한국군 고위장성들을 통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이미 미군을 등에 업은 군부의 쿠테타 조짐도 포착됩니다. 결국 이때의 군부 쿠테타 모의 세력들이 5.16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됩니다. 미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지요. 심지어는 이박사를 감금하고 유엔군정을 펼치는 구상도 했었지만 전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이박사를 제거할 수 없었고, 또 당시 이박사와 같이 국민을 일치단결시켜 전쟁을 이끌어 갈만한 마땅한 지도자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계획은 좌절되고, 결국은 이박사의 의도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조건하에 휴전이 성립되게 됩니다.
반면 국회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박사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미국의 비호와 암묵아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했지만 실패했고, 당시 대통령 선출권은 국회에 있으므로 이박사는 출마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을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므로 이박사는 직접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생각에 제헌 당시 유보했던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이 행사하는 직접선거 방식으로 개헌을 시도하게 된 것이지요. 전쟁중인 장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당시 한창 전쟁 와중인 1952년도에 민국당을 위주로 한 야당의원들은 국익보다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이승만 박사를 내몰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미국도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초헌법적이며 위헌적인 조치를 취해 정적들로부터 독재자라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 미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멀리도 말고 1940년 3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있습니다. 위기의 정국에는 때론 초헌법적인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던 것이 오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있었던 사실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헌법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위기상황에는 헌법수호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초헌법적인 조치를 취해 국가의 위기 상황을 먼저 종료시켰던 것입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이 무엇입니까? 바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이 벌여 놓은 경제정책을 자신이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3선 개헌과, 그 후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나 똑같은 정치적 행보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지 이승만 대통령만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친북좌파들의 함정이 있으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박정희 정권의 과도 상당히 크게 작용합니다.
사사오입개헌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안보에 대한 걱정은 일부 해결했으나 아직 일본과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박사는 정계 은퇴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이박사가 아니면 자유당의 재집권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유당에서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박사의 출마를 종용했고 초대대통령에 한해 종신집권제를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이박사 입장에서는 대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번 더 연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36억불의 보상을 청구했습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을 겪었으므로 그것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라고 했죠. 그동안 우리 국민이 겪은 고초와 국내 자원의 방출, 그리고 우리 국민을 전쟁터로 총알받이로 내몰아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한 것 등에 비하면 그것도 작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의 국력이 아직 그마만한 금액을 지불할 만큼의 능력이 되지 않았고, 또한 너무 빨리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할 경우 아직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잔존하고 있는 식민지 백성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완급을 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박사만큼 반일정신이 투철한 분도 많지 않았지만. 특히 일본이 제일 두려워하고 껄끄러워 했던 존재가 이박사였기 때문에 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래서 이박사는 대일 관계에서 우리가 최대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한 후 청구권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명' 이승만 라인' 즉 '평화선'이 선포되기도 했죠. 그러므로 이승만 박사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영구집권을 획책했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80을 넘긴 고령에 전쟁을 겪으며 노쇠해졌고, 주위의 <인의 장막>으로 인해 국민 여론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비록 이승만 대통령은 모르는 상태에서 저질저 졌다하더라도 전쟁기간 중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는 이미 자유당을 완전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과 더불어 민심이반이 왔던 것이죠.
3. 315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의거로 말미암아 이승만 박사의 모든 업적이 묻히게 되는 불행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대 정 · 부통령 선거가 바로 3.15선거였는데 당시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박사,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씨가 출마합니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씨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만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조병옥씨는 미국에서 타계하고 맙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 단일 후보로 선거 결과에 관계 없이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입장에서는 부정선거를 치를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문제는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씨였습니다.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장면씨와의 대결에 자신이 없게된 것이지요.
이때의 부통령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대신할 직책이었고, 또 이승만 박사가 고령인 관계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부통령은 반드시 자유당에서 당선시켜야 자유당의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선거였죠.
이에 자유당에서는 이기붕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합니다.
그러나 이미 경무대 비서진에도 이기붕씨 측근이 들어와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박사는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입니다. 그래서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이박사는 3.15부정선거 개입은 물론이고 부정선거 획책여부도 몰랐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비록 수하들이 저질렀다 하더라도 당시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년간의 세계대전보다 더 끔찍한 전화를 겪고 난 이박사는 더욱 노쇠해 졌고, 카리스마의 상실로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구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스스로 하야함으로써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고 헌정을 중단시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3.15부정선거 사건을 접한 후 이승만 박사의 입장은 前 한국해광개발 사장이었던 이원순씨가 1965년 집필한 '인간 이승만'에서 관련 부분을 발췌해 올려드립니다. (397-373)조금 길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유당 정권 말기 국무회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각각 열렸다. 화요일의 국무회의는 이승만 주재로 경무대에서, 금요일의 국무회의는 수석국무위원의 주재로 중앙청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수석위원은 외무장관이었으나 궐석이었으므로 서열에 따라 내무장관 홍진기가 주재했다. 4.19의 1주일 전인 12일 화요일, 마산사건이 터진 이후였으므로 국내 정세가 소란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경무대에서 열렸다.
오전 9시 이승만은 경무대 북쪽에 위치한 소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대개 애견 해피와 스카티를 동반하지만 국무회의에만은 애견을 동반치 않는 것이 상례였다. 소회의실에는 책상도 없이 의자만 놓인 채 내무장관 홍진기를 비롯하여 전 각료와 유창준 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보통 날은 지난 주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장관들의 보고가 있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상례를 깨뜨리고 이승만이 말을 먼저 꺼냈다. 표정은 아주 굳고 금방 짜증을 낼 것 같은 얼굴이엇다. 그의 첫마디는 반문(反問)에 가가운 것이었다.
「마산사건은 정부가 무엇을 잘못해서 일어났다는 말이 있고, 또 오늘까지 진정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보고가 없어? 선거관계에서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
이에 대해 홍내무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어제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직 모르나 피살된 학생의 눈에서 총탄이 나왔으며, 행방불명이 3명이나 되고, 도립병원에서 시체를 해부하고 원인을 조사중인데 왜 시체를 버렸느냐고 900명 가량의 군중이 서장을 나오라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에서 공포를 쏘았습니다 … . 총포를 사용하지 말라 지시했더니 경관의 피해가 많다 합니다. 선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야당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있으나 선동하면 오열이 편승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사진을 찍고 있고 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진상을 조사하겠습니다.」
「맨처음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일어났는가?」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근본 원인을 무척 알고 싶어했다. 문교장관 최재유가 답변했다.
「학생이 대구에서도 데모를 했습니다. 배후가 있어 아이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들이 경고를 하며 못 나가도록 막고, 배후관계를 밝히고자 담화문을 내었습니다. 학교에서 어디까지나 자치적으로 단속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시종 굳은 표정으로 노기를 띠고 말하였다.
「마산 · 대구에서 하는 일이 누가 하는 운동이며 누가 책임을 질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그 원인을 알았으면, 그것을 정당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자 홍내무가 대답했다.
「까닭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번 선거를 잘못해서 생긴 것이냐? 선거를 잘못해서 된 것이냐? 내가 좀더 알고 싶어 … .」
대통령은 핵심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홍내무는 설명을 계속했다.
「야당에서 선거결과에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평은 데모로 호소할 것이 아니고 대법원에 호소하여 판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선거무효 소송 등을 할 수 있는데, 극한 투쟁을 모파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동 증거는 없으나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열이 시민을 사주하는 것 같은데 불응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약간 데모가 있었으나 시민이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대비는 있어야 하겠으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야당의 지지는 늘고 있지 않고 군 · 경 · 관이 이에 동조하지 않고 있으니 데모는 염려 마십시오.」
「모든 형편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정치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그 문화나 그 자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사람들과 다른 것은 의지가 없는 까닭이야. 나부터 모든 것이 기가 막히고 또한 기가 막힌 소리들 뿐이야.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정당이라는 것이 속에 악심(惡心)만 가지고 해서는 부서지고 말아. 이대로 두면 악습이 더 심할 것이야. 임자들 가지고 민주주의 해 나갈 수 없어. 또 더 나은 생각이 없을 거야. 내 예기가 과도한 말이면 책망해 주시오. 싸움만 하는 불안정한 정국이니 무관심해도 그것이 그것이 아니야. 필리핀의 예를 다 봐도 무슨 정당, 무슨 정당 다 버리고 다시 해보자고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생명을 결단내는데 어디 견디겠어?」
4월 15일 금요일엔 홍내무 주재로 중앙청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다. 회의는 사소한 심의에 앞서 상황보고가 있었다. 그 다음에 착잡한 심정으로 최치환 공보가 긴급동의를 냈다.
「의장, 3.15선거 결과를 두고 만 한 달, 오늘에 이르기가지 부정선거라 해서 전국 각처에서 데모가 일어나는데 위로는 대통령의 귀를 가리고 또 국민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이 내각이 그 무슨 면목으로 역사 앞에 대하겠습니까? 나는 여기에서 세세한 토론을 하지 않고 즉각 내각이 총사직할 것을 정식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마침내 4월 19일 화요일을 맞아 예정대로 오전 9시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이승만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도 예를 깨뜨리고 이승만이 먼저 발언하였는데 그의 표정이 매우 엄숙했다.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난중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날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 같어. 좋게 내주려고 해.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무슨 까닭인지, 여러분이 생각해 봐. 뭣인지 까닭을 알아야 해결할 것이 아니야? 급한 때일수록 속에 있는 얘기나 들은 대로의 얘기를 해봐야 해, 우리가 알아야 돼, 학생이나 사인이나 공인이나를 막론하고 다같이 할 얘기는 터놓고 해봐야 해.」
이 말에 홍내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각하, 모든 것은 선거기관에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제 고대가 데모를 했고 의사당 앞에서도 1,500명이 데모를 했습니다. 슬로건은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입니다. 법에 의하지 않고 야당에서 선동하고 있습니다. 부정선거 여부는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리면 됩니다. 야당이 학생이나 그 당원에게 진정하도록 호소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마산사건은 미대사관측에서 불순분자가 조종했다고도 하는데 우리 군경은 뭣을 하고 있는 거냐?」
여기에 대한 답변은 아무도 없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다시 홍내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몇 대학에서 또 데모를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뭣이(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찾아내야 한다!」
이승만은 노기서린 어조로 말했다. 이야말로 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식답변이었다.
「선거 때문에 국민들 속에 불평이 퍼져 있습니다.」홍내무의 말에 그는 소리쳤다.
「백성들이 서울이나 지방에서 선거 잘못했다고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 . 중간에 뭣이 있는 거야? 하루라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야. 사람들의 생각이 격렬해 가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운 데 덮어놓고 결단 내려고 하는 얘기가 바야흐로 있다지?」
「죄송합니다, 각하. 학생들에게 호소해서 진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국민 없는 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최문교의 말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국무원에서도 뭣을 작성해서 해야지, 그대로 있을 것이오? 우리 사람들이 마산사건이 처음이지?」
「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마산사건이고 또 그 원인이 부정선거라는 것입니다.」
「부정선거가 뭐야? 내가 말라고 하면 그들도 정당한 그 뭣을 가지고 얘기할 것 아니요?」
이 말에 홍내부가 말했다.
「선거는 다시 못합니다. 선거무효 판결로써만 다시 선거할 수 있습니다. 민심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그 방안은 정부가 자유당을 쇄신하는 것이라야 새로운 인상을 줍니다.」
「나는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자리는 처음 보아. 표가 많으니 보통 사람들이 잘 된 것으로 볼 것이야. 그러면 그 다음에 한 일이 뭣이야? 야당이 세력이 있어요? 잘 돼 가는 것이요? 여러분과 일 같이 못해.」
송인상 재무장관이 나섰다.
「일이 잘 되어 나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번에 이승만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야!」
송재무가 이어 말하였다.「극렬한 사람이 소수이긴 하나 방법이 졸렬합니다.」이에 곽의영 체신장관이 말했다.
「자유당과 야당이 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모는 즉시 그치고 정치적인 문제이니 협상을 해야겠어요. 자유당 아닌 사람이 지방에 가서 진정시키는 강연을 하게 하고, 또 공약에 내세운 항목은 우리가 단행하기로 하여 시국을 수습해야 하겠습니다.」
이승만은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말 없이 앉아 있던 김일환 교통장관이 입을 열었다.
「큰일이 있으면 난동이 나기 쉽습니다. 야당도, 자유당도, 국무원도 개편돼야 할 것이라고 당내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자리가 비는 데다가 국무원도 법무 · 외무자리도 비어 있습니다. 선거 당시의 국무위원과 당무위원을 바꿔야 한다고 여론이 강력히 대두되고 더구나 공석이 많아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듣기만 햇다.
이근직 농림장관도 말햇다.
「자유당내에도 불평이 많습니다. 자유당과 정부는 개편을 해야 합니다.」
그제야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없는 얘기를 더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어. 사람은 마음이 정돈된 뒤에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는 법이야. 모든 것이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의 장래가 암담해.」
이런 말이 오고간 뒤 10시 경에 각 보고가 있었으나 이승만은 들은 체 만 체했다.
10시 40분 경에 회의를 끝내고 일어설 때에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것을 결론지어 말하였다.
「여러분이 짐작하지만 정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 분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어서는 안 돼, 심상히 두어서는 안 되며 결단을 내야 돼.」
이것이야말로 3.15의 부정을 몰랐던 노대통령의 비장한 결론이었다. 이어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거듭 다짐했다.
「피를 흘려서는 안 돼, 부정을 보고서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야. 내가 그만두면 돼.」
이승만은 이미 4월 12일부터 하야를 결심하고 있었다. 각료들은 최후의 국무회의를 마치고 중앙청 회의실로 왔으나 10분도 못 돼서 데모대는 중앙청 담을 뛰어 넘었다. 이른바 그의 집권에 가장 휘험한 시각이 닥쳐오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국방장관인 김정열은 이승만에게 하야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일생 중 가장 비극적인 날을 맞아 스스로 하야를 결심한 것이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드디어 하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결코 그는 누구의 권에 의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4월 12일에 사의를 결심했으나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의 결심을 흐려놓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초연히 물러났다.
이 최후의 국무회의 광경을 통해 볼 때 불행하게도 그는 완전히 <인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었음이 드러난다. 일부 국무위원들은 이 인의 장막을 없애기 위해 고심하였으나 당시 경무대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다.
부정선거로 인해서 이승만은 하야를 했지만, 그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 물론 뜻하지 않은 조병옥의 서거로 단독후보나 마찬가지로 된 것이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다가 이기붕의 부통령선거에는 후보가 많았다. 따라서 이기붕이나 그 주위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그런 큰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다 하야와 죽음이라는 결과로 일은 끝났지만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을 세인은 알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3.15선거가 부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이상의 책임을 지고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12년의 집권은 이렇듯 허황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12년에 걸친 집권기를 우리 민족이 비로소 민주주의를 시작한 시기로 재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야당지가 득세를 하고 국정감사와 지방자치의 실시 등 민주주의는 이미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경제부흥과 산업화 및 경제자립을 위한 의욕은 언제나 한미간의 원조를 둘러싼 마찰을 빚어냈고, 그의 일본 자본에 대한 예속 거부는 마침내 자신의 정치적 실각을 초래하게 된 외부적 요인이었다.
경제발전에는 기적이 없는 법이다. 해방 후부터 그의 집권기를 통한 교육의 발전과 동란 후의 경제부흥은 1960년대부터의 경제발전을 기약했던 것이며, 1950년대의 해외유학에서 돌아온 인재들이 이러한 발전의 역군이 된 것이다.
마산사건에 관한 붉은 색으로 된 한 줄 짜리의 이승만 대통령 발언을 유의해 보세요.
당시 마산 사태나 4.19학생의거의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들어납니다.
그러나 당시 이 내용을 알 만한 위치에 있던 자들은 함구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3.15부정 선거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과 4.19의거가 과격 폭력시위로 치닫게 된 배후에 무엇이 있었는지, 자금은 어디에서 유입되었는지 등 의문의 여지가 매우 많지만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이 부분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당시의 미국 외교문서 내지는 정보문서가 공개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쩐 일인지 미국측에서는 4.19 관련한 문서 공개를 요청해도 공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관련자 역시 함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죠.
당시 시위대의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파출소 난입 방화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시경까지 점령을 기도했다고는하는 사실은 5.18광주사태를 보는 듯합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증언자에 의하면 이들의 행동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보건대 결코 우발적인 정의감에 의해 거리로 나선 학생들의 모습도 아니었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시위대가 국민의 공공재산을 방화, 파괴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 사건 역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역사가에 밝혀지겠지요.
4. 4.19 때 학생들에게 발포
사실 지금까지도 4.19 학생의거 당시 최초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은 남태우, 서울경찰국장은 유충열, 유내무부장관은 홍진기씨였는데 이 들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간에는 경무대 경호원이었던 곽영주를 지목하지만 곽영주 역시 최초 발포 명령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곽영주의 처가 육영수 여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남편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억울하다고 항변을 했다는 전언이 있습니다.
결국 4.19부상자들의 폭력적 과격데모에 놀란 국회와 장면 정권은 겁에 질려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자유당 내각들을 처벌하기 위해 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개헌을 하는 악수를 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4차 개헌인 소급입법 개헌이었고 이어 소급입법에 의해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서울시경국장 유충열이 사형에 처해집니다.
결국 장면 정권의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개헌은 훗날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구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참정권을 박탈할 때 장면정권 시대의 개헌문제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되며, 그 후로도 광주사태를 위한 특별법 제정 등 격동기마다 초헌법적인 특별법 제정의 러시를 이루게 되는데 최초로 원인 제공을 하게됩니다. 어쨋든 4.19 의거가 처음에는 학생들이 주동이 된 정의에 입각한 운동으로 시작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시위가 지속되면서 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는 오열들이 잠입하여 폭력사태를 야기했을 것이라는 정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정 자신들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의분에 일어난 운동이었다면 훗날 어떻게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의장석을 점거하고 혁명입법을 추진하라고 하며 오히려 위헌적 법률을 제정하도록 위압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자유민주주의의 잣대로는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시 곁길로 나간 것같습니다만 위 3번 3.15부정선거 관련 설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미 시위대가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게 되자 시위대를 막던 현장 경찰측의 신변 위협에 따른 자연적 발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역시 이 부분도 미국측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 어느정도 윤곽이 들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족할 만한 답변으로는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의하신 여러가지 질문 중 한가지 만으로도 몇십장 분량의 리포트 작성이 필요한 부분들인데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고 했지만 부족한 부분과 미진한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 답변서를 작성하기 위해 근 하루가 소요됬네요. 그 만큼 한가지 사건을 놓고 명쾌하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건을 하나씩 따로 떼어서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국내적, 국제적 관계, 또 이해당사자들과의 관계 등 많은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관찰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이 정도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한가지씩 놓고 더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