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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하나님의 성호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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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마3:3,막1:3,눅3:4). (2) 길 (요14:6,히10:20). (3) 신 (고후3:17-18). (4) 흘 (민 24:17,창49:10). (5) 곶 (애2:1).
(6) 예수 (마1:21,25). (7) 감독 (벧전2:25). (8) 구주 (눅2:11,행13:23,욥19:25,사63:8). (9) 인자 (마8:20,요1:51,히2:6,단7:31). (10) 임금 (행5:31).
(11) 생명 (요14:6,11:25,골3:4). (12) 말씀 (요1:1,묵19:13). (13) 반석 (고전10:4,민20:11). (14) 참빛 (요1:9,8:12). (15) 부활 (요11:22).
(16) 진리 (요14:6). (17) 기묘 (사9:6). (18) 모사 (사9:6). (19) 목자 (벧전2:25). (20) 사도 (히3:1).
(21) 실로 (창49:10). (22) 산돌 (벧전2:4). (23) 아멘 (묵1:7,3:14). (24) 남편 (사54:5). (25) 분수 (슥13:1).
(26) 가지 (슥3:8,6:12,사11:1,렘23:5). (27) 유대왕 (마2:2,눅23:3). (28) 돋는 해 (눅1:78). (29) 선지자 (눅24:19,신18:15,18). (30) 독생자 (요1:14,18).
(31) 메시야 (요1:41). (32) 양의 문 (요10:7). (33) 집의 터 (고전 3:11). (34) 후 아담 (고전 15:45). (35) 중보자 (딤전2:5,12:24).
(36) 재판장 (딤후4:8). (37) 하나님 (히10:37). (38) 이긴 자 (히2:15). (39) 오실자 (히10:37). (40) 산 소망 (벧전1:3).
(41) 대언자 (요1 2:1). (42) 새벽별 (계22:16,민24:17,사42:1). (43) 섭정자 (단9:25). (44) 택한 종 (마12:17,사42:1). (45) 임마누엘 (마1:23,갈7:14).
(46) 그리스도 (마1:23,갈7:14). (47) 구원의 문 (요10:9). (48) 선한 목자 (요10:11,히3:20,시23:1). (49) 본되신 자 (요13:15,롬15:5,벧전2:21-23). (50) 포도나무 (요15:1).
(51) 생명의 주 (행3:15). (52) 만유의 주 (행10:36) (53) 영광의 주 (고전2:8). (54) 청결한 자 (히1:3). (55) 대제사장 (히3:1,4:14,5:1,6:20,7:24).
(56) 만유의 주 (계 17:14, 19:19). (57) 만왕의 왕 (계17:14,19:16). (58) 영광의 왕 (시24:7-8). (59) 평강의 왕 (사9:6). (60) 시험한 돌 (사28:16).
(61) 우리의 의 (렘23:6). (62) 그 왕 다윗 (렘30:9,호3:5). (63) 겸손한 왕 (슥9:6). (64) 의로운 해 (말4:2). (65) 다윗의 자손 9마9:27,21:9,22:42,45).
(66) 거룩하신 자 (눅4:34,행3:14,요1 2:20). (67) 이스라엘 왕 (요1:49). (68) 생명의 양식 (요6:35,38:51). (69) 거룩한 아들 (행4:27). (70) 구언하실 자 (롬11:26,사59:20).
(71) 교회의 머리 (엡4:15,5:23). (72) 크신 하나님 (딛2:13). (73) 승천하신 자 (히4:14). (74) 언약의 보증 (히7:22). (75) 믿음의 주인 (히12:2).
(76) 보배로운 돌 (벧전 2:4-6). (77) 신실한 증거 (계1:5). (78) 처음과 나중 (계1:17,2:8,21:6,22:13). (79) 진실하신 이 (계3:14). (80) 창조의 근원 (계3:14).
(81) 다윗의 뿌리 (계5:5,22:16). (82) 여호와의 종 (사42:1,19,52:13,12:17). (83) 여호와의 팔 (사53:1) (84) 언약의 사자 (말3:11). (85) 하나님의 아들 (마3:17,막1:11,눅3:22.요1:49).
(86) 안식일의 주인 (마12:8). (87) 우리 유월절 양 (고전 5:7,출12:). (88) 하나님의 형상 (고후4:4,히1:3). (89) 장인의 버린돌 (벧전 2:7,시118:2). (90) 알파와 오메가 (계1:17,2:18,21:6,22:13).
(91) 만물의 지으신 자 (요1:3,22:13). (92)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계5:6). (93) 미리 알게 하는자 (계5:5). (94) 유대 지파의 사자 (계5:5). (95) 영생하신 아버지 (사9:6).
(96) 전능하신 하나님 (사9:6). (97) 지극히 높으신 자 (단 7:25). (98) 여호와의 짝된자 (슥 13:7). (99) 하늘로써 내려온자 (요3:13). (100) 집 모퉁이 요긴한 돌 (엡2:20).
(101) 하나님의 영광 (히1:3). (102) 거룩하게 하시는 자 (히13:12). (103) 죽음에서 먼저 사신자 (계1:5). (104)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미5:2). (105) 여호와의 기뻐하는 자 (사42:1,마3:17).
(106)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계3:7). (107) 아름다운 소식 전하는 자 (사5:27). (108)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 (롬9:5). (109)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을 잡은 이 (계2:12). (110) 일곱 신과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가지신 이 (계2:1).
(111)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주장하는 이(계2:1). (112) 눈이 불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으신 이 (계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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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성호 26가지 |
1) 야훼(Yahweh), 여호와(Jehova)자존하시는 자 - ‘나는 - 이다’라는 뜻. 자존자요, 영존자(중국어 번역) ‘나는 - 이다’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 분 자신을 떠나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는 분임을 가리킨다. 이 이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의 떡’이요, ‘빛’이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시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는 적절한 이름이다. (출3:14-15참조, 창12:8, 13:4, 26:25 출6:3, 20:2, 33:19, 34:5-7, 시68:4, 76:1, 렘31:31-34, 요8:24,28,58 (원문참조)) -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창22:8-14) - 여호와는 나의 기(旗)이시다.(출17:15) - 여호와는 평강이시다.(삿6:24) - 만군(군대들)의 여호와(삼상1:3, 17:45, 시24:10, 46:7,11) - 너희를 거룩케하시는 하나님(출31:13)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23:1) - 여호와 우리의 의(義)(렘23:6, 33:16) -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렘51:56) - 치시는 여호와(겔7:9) - 여호와는 거기 계시다(겔48:35) - 치료하시는 여호와(출15:26) -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삿5:3, 사117:6) - 주, 주인, 여호와대신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출4:10-12, 수7:8-11) - 전능하신 하나님(복수형) (창1:1,26-27, 3:5, 31:13, 신5:9, 6:4, 시5:7, 86:15, 100:3) - 지극히 높으신 분, 문자적으로는 아주 강력한 전능자의 의미함 (창14:18, 민24:16, 사14:13-14) - 감찰하시는 전능자(창16:13) - 모든 것을 충족케 하시는 하나님. 엘(El)은 강한자, 능한 자를 뜻하고, 샤다이(Shaddai)는 유방,가슴, 곧 모든 것을 충족케함을 뜻한다. 유방은 젖을 내며, 젖은 물과 무기질과 많은 비타민과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충족케하는 공급이다(창17:1-20) - 영원하신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사40:28) -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창33:20) - 여호와 구원자, 이 이름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이름으로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이름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름이다. (마16:13-16, 요6:42, 행2:36, 딛2:13, 벧후1:11)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사8:8,10, 마1:23) -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 부은 자 (마16:13-16, 요1:41, 20:31, 행2:36, 롬6:23, 딛2:13, 벧후1:11) - 주(主), 주인(눅1:46, 행2:36, 유4) - 구주,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눅1:41, 2:11) -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말하는 보통명사 (눅1:47, 요20:28, 딛2:13, 벧후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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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성호의 호칭들 |
하나님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과 성도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그리스도인들)은 보통 하시드,카도쉬,캇디쉬,하기오스, 성도(聖徒) 혹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여러가지 이름
야훼:Yahweh(인명) [히] (Yahweh) [영] Yahweh, Jahweh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고유명사. 그러나 이 형태로는 성서에 보여져 있지 않고, 다만 연구적인 책이나 신학서에 보여지는 표기로 되고 있었는데,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취하고 있다.이 신명(神名)을 나타내는 네 개의 히브리어 문자 [ hwhy (YHWH)]는 모두 자음으로서, 이것이 원래 어떻게 발음되던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를 피하여, [주(아도나이) yn;doa} (adonay)]로 발음해 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YHWH와 아도나이가 혼동되어, 여호와라는 발음이 생겼는데, 이것은 오독(誤讀)으로서 [야훼]로 발음하는 편이 옳은 것으로 정정되었다. RSV는 이것을 [Lord(主)]로 하고 있다.
여호와:Jehovah(인명) [히](yehowah) [영] Jehovah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고유명사(출 6:3기타 빈출). 모세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알려져 있었는데(창 4:26), 특히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는 계시와 은혜의 하나님, 언약과 구원의 하나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그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를 언약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구원자이시라는 점을 보여주신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다(출 6:7,7:5).이 이름은 구약에 가장 많이 씌여져 있고, 이 이름에 대하여 다른 모든 이름은 2차적이다.
쾰러 바움가르트너(Koehler-Baumgar-tner)의 사전에 의하면, 이 이름는 구약에 6,823회 씌어져 있다. 이에 대해 창조자, 지배자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엘로힘]은 2,550회로서 이에 비하면 2배반 이상의 빈도이다. 그리고 구약성서에 여호와의 이름이 보여지지 않는 것은<<에스더서>>, <<전도서>>, <<아가서>>의 3서뿐이다. 이 여호와는 본래는 [야훼](야웨)로 발음 하던 것이 종교개혁 이후부터 널리 유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대인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된다는 명령을 굳게 지켜, 신명을 부르는 대신[주 yn:doa(donay)=(主)] 즉 [아도나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16세기부터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 hwhy(YHWA)]과 아도나이의 모음이 혼동되어, [여호와]라는 발음이 생겨졌다.
최근에는 칠십인역이 이것을 [큐리오스Kuvrio](主)로 역하고 있는대로, [주]로 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되어, RSV는 Lord(主), 특히대문자만을 쓰고 있다.
아도나이:Adonai [히](adonay)=[主] [영] Adonai 신명(神名) 여호와(야훼) 를 직접 부르기를 두려워한 유대교인들이(출 20:7,신 5:11), 그 대신[아도나이]라 부른데서 온 것.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은 [여호와](야훼)라는 문자마저 쓰기를 아주 두려워 하여, 이것을 붓으로 기록하는 일 마저 주저하고, 낭독 때에는 [여호와](야훼)의 글자를 종들이 그 주인에 대해 존칭으로서 부르는 [아도나이]로 불렀다(원뜻은 [우리주]로, 히브리어 [아돈(主)]의 복수). 이것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마침내 그들 자신중에서 [야훼](여호와)라는 신명(神名)의 발음이 잊어진 것에 의해서도 분명하다. [아도나이]라는 호칭에 의해 야훼의 초월성을 확인하는 이 관용적 호칭을 칠십인역은 그대로 계승하여, [야훼]를 [큐리오스 Kuvrio ](Kurios 主)로 역했다.
여호와 이레:The Lord will provide - 준비하시는 하나님 [히](yhowah yirrh) [영] The Lord will provide 모리아산의 별명. 뜻은 [여호와께서 보심]. 또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때, 하나님께서 그 대신 양을 준비해 주신데서, 아브라함은그 산을 [여호와 이레]라 이름했다(창 22:14). RSV는 이 뜻을 취하여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으로 하고 있다.
여호와 닛시:Jehovah Nissi - 승리가 되시는 하나님 [히] [句](yhowah nissi) [영] Jehovah Nissi(KJV), The Lord is my banner(RSV) 뜻은 [여호와는 나의 기]. 아말렉 사람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세가 세운 제단에 붙인 이름(출 17:15). 여기에는 승리를 주신 여호와에 대한 확신이 표시되어 있다.
여호와 라파 - "치료의 하나님"(Healing God)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애굽기 15장 26절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살면 질병의 고통도 극복하고 치유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여호와 샬롬:Jehovah Shalom - 평강의 하나님 (Jehovah Shalom)「여호와는 평강이라」 기드온이 여호와로부터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고무의 말씀을 받았을 때쌓은 제단 이름이다(삿 6:24). 이 이야기가 쓰여졌을 때는 아마 그 제단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 - 함께하시는 하나님 (Jehovahshammah)「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에스겔이 성전과 예루살렘의 이상적 재건을 예언하고 결론한 것이 이 여호와삼마이다(겔 48:35).
엘로힘:Elohim(인명) [히](eleph) [神] [영] Elohim 셈어의 [신(神)을 가리키는 최고의 말 [엘 laE (el)]의 복수형.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복수형으로 씌어지고, 신신 중의 일신,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야웨)를 나타내고 있다.일신격(一神格)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이러한 복수형을 쓰는 것은 달리도 예가 있는 것으로, 고대동방에서는 공동체의 대표자(그것이 인간이건, 신이건)를 복수로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다.이런 복수는, 숫적다수보다도 오히려 힘과 탁월성 존엄의 복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생각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금지 되어 있는 히브리인은(출 20:7),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는 대신에 이 엘로힘을 썼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기록한 문서를[엘로힘 문서](E)라하여, 창세기 이하 5서 또는 6서의 편찬의 중요 자료가 되었다는 설도 되고 있다.
엘 샷다이(엘 샤다이):God Almighty(인명)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히](el shadday) [영] God Almighty 신명(神名)의 하나. 전능의 하나님으로서 역되어 7회 나온다(창 17:1,28:3,35:11,43:14, 48:3,출 6:3,겔 10:5).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역은 70인역(Septuaginta)의 이해에 기초한 것으로,인간의 약함과 대비되는 일이 많은 실재의 용법에서 가장 타당한 것으로 되고 있다. [샤다이]로만 씌어져 있는 데도 많다. (민 24:4,16,룻 1:20,21,시 68:14,91:1,사 13:6,겔 1:24,욜 1:15,기타 욥기에는 31회).
신명기 1:6,12에서는, 샤다이가 인명(人名)에 포함되어 있다.출 6:3의 해석은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는데, 이 절에서의 히브리어의 용법은, 하나님은이전에는 그 자신을 힘과 은혜의 행위에 의해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 큰 능력의 신)으로서 계시해오셨으나, 이제 이 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전국민을 구원해 내시는 놀라운 행위에 의해언약을 계속 지키시는 여호와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뜻으로 씌어져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H.콜-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말해져 있는 것은, 여호와라는신명이 지금까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든가, 또는 교시(敎示)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신명에 대하여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특별한 의미를, 하나님은 계시하신 것이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El-Elohe-Israel - 이스라엘의 하나님 [히] [句](elelohe yisrael) [영] El-Elohe-Israel 원어의 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엘] 야곱이 세겜에 세운 제단의 명칭(창 33:20). 무사히 귀국하게 된 은혜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 성도(聖徒):Saint 와 성도의 여러가지 이름
[영] Saint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시 85:8기타), 신약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신자를 가리키는 용어(골 1:2기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통틀어, 그하나님과의 관련이 항구적이건, 일시적이건, 거룩한 것으로 여겼다. 선민 이스라엘은 그런데서 거룩했다(레 19:2,20:7). 또한 주 하나님께 가까이서 섬기는 제사장(레 21:6), 레위인(민8:17이하), 또는 선지자(왕하 4:9)도 거룩했다. 하나님과의 관련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도 [성도]로 불리웠다(시 30:4기타).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도]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크리스챤 형제와 동의어이다(골 1:2). 성도는 주 예수께 대해서는 [제자], 동신(同信)의 친구나 무리에 대해서는 [형제]이다. 특히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는 에베소서에서는 [모든 성도]란 말이 거듭되고 있다(엡 1:15,18,6:18). 사도신경에서는 이뜻 깊은 말이 [성도가 서로 교제함을 믿는다]로 표현되어 있다. [성도]로 역된 원어의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시드 ; (chasid)] 히브리어 형용사로, 뜻은 [경건한]인데, 거의 명사로 씌어지고, [성도](Saint)로 역된다. 이말은 [자비한 자](삼하 22:26), [경건한 자] (시 4:3,12:1,32:6기타)로도 역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 [名] ds,j, (chesed)](mercy)의 개념에 기초한 경건에 강조가 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씌어진다(삼상 2:9[거룩한], 대하 6:41[성도], 시 30:4,37:28,50:5기타빈출, 잠 2:8). 시 85:8에서 보아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동의어이고, 그것은 인격의 우수함으로가 아니라(모든 백성이 반드시 다 경건치는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를 받은 자라는 점에 강조가 두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인용에서는 국민 중에 특히 경건한 사람을 가리켜 [성도]로 부르고 있고, 이 경우에는 도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마카비시대에는 유다의 헬레니즘화 세력에 저항한 경건한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I 마카 2:42, sunagwghv @Asidaivwn, 일군의 경건한 사람), 시 116:15,149:1,5,9의 [성도]는 이뜻으로 씌어져 있다.
2. [카-도-쉬 ; (qadosh)] 역시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로서, 기본개념은 [여호와 (야웨)예배를 위해 성별된 자]이고, 이스라엘에 대해 씌어져 있다(신 33:3,시 16:3,34:9,단 8:24거룩한 백성).
3. [캇디쉬 (qaddish)] 아람어 형용사로서, [거룩한 자]를 뜻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the saints of the Most High)라는 표현에 의해, 신앙을 위해 건투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다(단 7:18-27).
4. [하기오스 (hagios) pl.] 칠십인역이 히브리어 [카-도-쉬]의 역에쓴 헬라어 형용사로서, 사람에 대해 씌어진 때는 명사로서 취급되고, [성도]로 역(마 27:52,행 9:13기타 빈출). 신약성서에 62회인용되어 있는데, 마 27:52에 있어서의 신약 이전의 성도를 가리키는 이외는, 모두 그리스도 신자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그것은 오순절 이후이다(행 9:13,32,41,26:10,롬 1:7기타 빈출, 고전 1:2기타, 고후 1:1기타, 헵 1:1기타, 빌 1:1기타, 골 1:2기타, 살전 3:13,살후 1:10,딤전 5:10,몬 1:5,7,히 6:10기타, 유 1:3,계 5:8기타 빈출). 성도는 그 신분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갖는 자로서(롬 1:7), 덕 높은 사람을 부르는 동양의 [성인]과는 다르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인겨에 합치 한다는 관념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엡 5:3). 이같이 하여 이 명사는 충성의 사상에 이어져 있다(엡 1:1,골 1:2). 이 다음의 발전 단계는 계시로거에 보여져, 거기서는 성도를 특징짓는 주께 대한 성별이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사단적 박해(계 13:7,14:12)가 와도 순교에 까지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계 16:6,17:6).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도]는 모든 믿는 자를 가리키고 있다(행 9:13,41,26:10,롬 1:7,고후 1:1,13:12,엡 1:1,3:8).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에 의해 [세상](죄와 죽음의 법)에서 분리되고, 성별된자란 뜻으로서, 교회 즉 선미 중에 넣어진 자로서 이 이름이 주어져 있다. [성 베드로](Saint Peter), [성 바울](Saint Paul), [성 요한](Saint John)에서 보는 존칭으로서 saint가 사도나 복음기자에 대해 씌어지게 된 것은, 기원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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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의 칭호는 마태복음 4:3, 4:6, 마8:29, 마14:33, 마16:16, 마26:63, 마27:54, 마가복음 3:11, 5:7, 9:7, 15:39, 누가복음1:35, 눅4:41, 눅8:28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마태에 있어서 예수는 그가 출생한 이래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마3:1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고백은 마14:33과 27:54과 같이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서 신앙 고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메시야와 동일시되어 불려지기도 하였다(마26:63).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마3:11, 마5:7)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태어날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질 것을 말하고 있다(눅1:35).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눅4:3).
킹즈베리는 기독론적인 문서인 마태복음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마태의 예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성서 속에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태복음 17:1-8에 나오는 예수의 변모에 관하여서 예수의 수세이야기와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 17:5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의 유일 무이한 선택된 아들로서 다시 한 번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로서 포도원 비유에서의 농부의 아들을 자기로 알레고리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에 의해 결국 성밖에서 죽어야 하는 포도원주인의 아들을 알레고리 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을 증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역사적-경제적 사실과 많이 부합하는 문서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비유들은 투쟁, 변호, 방어, 공격, 도전 등 주로 논쟁을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21:33-46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짐작하고 비유를 들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증거로서 삼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밭의 노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이사야의 이 텍스트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안의 이 포도비유가 수정되며(죽은 포도원 주인 아들의 죽는 장소에 따라 복음서마다 다른 것은 편집…수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스도가 매달리게 될 장소는 성밖이란 점에서, 그렇게 수정…편집되었다는 것)복음서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혼인잔치 비유는 맥락상으로 살펴 볼 때 예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넘어선다. 전자가 십자가 처형을 예견한다면, 후자는 마태복음 28:18 이하에서 제자들이 받는 위대한 사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마태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비유를 예수에게서 시작해서 마태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구속사에 대한 묘사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 중의 왕은 하나님, 그의 아들은 부활하신 예수, 혼인잔치는 메시아 향연, 초대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종들은 제자들과 교회의 전도사들, 초대에 대한 무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거부,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박해, 군인들의 도시파괴는 예루살렘의 멸망,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차별 없이 초청해 옴은 이방인의 교회영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인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메시아 향연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주로 고백적인 배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진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곧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16:16과 대제사장의 질문이 나오는 26:63에서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메시야라는 칭호는 서로 동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메시야 칭호의 유래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적 출처는 모호한 것이다. 예수가 이미 자신을 그렇게 붙였는가 또는 교회가 비로서 이 칭호를 그에게 부여했는가하는 점은 그 칭호가 어디서 유래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물음에서 중요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출4:22), 그리고 왕으로부터 나타난다. 시편 2:2의 기름 부은자, 7절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이것은 동양적 궁중 문학 양식이다. 물론 유대교는 하나님이 몸으로 낳았다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구약성서의 왕칭호가 예수에게 이전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메시야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가정이 이 시편귀절에 근거하여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교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들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없다는 사실이 그런 가정을 반영해 준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메시야)란 칭호는 마태복음 1:1, 1:16-18, 마2:4, 마16:16, 11:2, 16:20-21, 마22:42, 마23:10, 마26:63, 26:68, 마27:17, 27:22, 마가복음 8:29, 9:41, 누가복음 2:11, 9:20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는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한 차원에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1:1에서 이 칭호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예수 메시야).마1:18, 마16:21도 같은 경우로 원문상 논란이 있으나 ?예수 메시야?가 정확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메시야?라는 칭호가 단순한 이름으로 취급되었다 할지라도 마태복음서에 있어서 이 칭호는 ?예수가 메시야이시다?는 근본적 진리는 늘 함축하여 사용된다.
마태는 기독론적 칭호로서의 메시야란 칭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메시야 그 분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 오시는 이이시며,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구원 또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더 나아가 유대인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규정지으려 했다. 만약에 메시야란 칭호의 사용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로 결과되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 메시야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행동이었다는 것과 메시야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대용어라는 이해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스 콘첼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칭호이긴(막 8:29)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그리스도란 결합에서 단순히 이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단지 형식적인 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 진술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리스도란 의미가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희랍어를 쓰는 세계에서였다. 희랍인들은 메시야 칭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자의 본질을 다른 칭호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원 상으로 볼 때 메시야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적 종말론에 속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구약성서에서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본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구원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구원자에 대한 표상들이 융합되어졌다. 즉 초월적인 존재로 고양되어 졌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묵시문학적 문헌의 대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개념이 침투되어 있는 부분은 이차적 발전단계에 속한다.
인자(人子)
인자(사람의 아들)는 마태복음 8:20, 마9:6, 마10:23, 마11:19, 마12:32, 12:40, 마13:37, 13:41, 마16:13, 16:27-28, 마17:9, 17:12, 17:22, 마19:28, 마20:18, 20:28, 마24:27, 24:30, 24:33, 24:37, 24:39, 24:44, 마25:31, 마26:2, 26:24, 26:45, 26:64, 마가복음 2:10, 2:28, 막8:31, 8:38, 막9:9, 9:12, 9:31, 막10:33, 10:45, 막13:26, 막14:21, 14:41, 14:62, 누가복음 5:24, 6:56, 눅7:34, 눅9:22, 9:26, 9:44, 9:58, 눅11:30, 눅12:8, 12:10, 12:40, 눅17:22, 17:24, 17:26, 17:30, 눅18:8, 18:31-32, 눅19:10, 21:27, 21:36, 눅22:22, 22:48, 22:69, 눅24: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인자라는 칭호는 마태복음서의 기독론적 칭호들 중 매우 중요한 칭호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이론은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칭호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로 마태복음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렇게 분명하다 하여도 인자와 관련된 몇 가지 물음들은 아직도 마태복음서 연구가들 사이에 명쾌한 결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태가 사용한 이 용어의 정확한 용법이 무엇인가? 이 용어는 왜 마태복음 8:20 이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 용어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칭호가 성격상 대중적인 경우는 진정한 한 기독론적 칭호로 작용하고 그 외에는 고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보충적 역할을 함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자는 예수의 사역의 세 구별된 국면을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공적 사역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세째는 그의 재림과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은 이러한 인자의 기능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되어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인자라는 칭호는 소위 예수님의 현지사역과 관련하여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이 인자라는 칭호야말로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합당한 칭호이며, 따라서 아무런 수정이 필요 없는 유일한 칭호란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의 뛰어난 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것이 항상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이것은 예수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여러 칭호들 중 인자칭호는 가장 규범적인 것이 되며, 예수께 대한 다른 칭호들을 재해석하여 하나님께 예수님에 정하신 신적 운명이 고난과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예수를 예수 인자라 칭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인자의 기능이 나사렛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를 매우 분명하게 다윗적 메시야, 왕,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인자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군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흔적이 없다. 그는 인자의 세가지 면을 지상적인 자, 고난받는 자, 묵시적인 자로 이해했다.
주(主)
주라는 칭호는 마태복음 7:21-22, 마8:2, 8:6, 8:8, 8:25, 마9:28, 마14:28, 14:30, 마15:22, 마16:16, 16:22, 마17:4, 17:15, 17:16, 마18:21, 마19:27, 마20:30, 20:33, 마21:3, 21_19, 마24:42, 마25:11, 25:20, 25:22, 25:24, 25:44, 마26:22, 26:33, 26:35, 마가복음 1:17, 8:29, 막10:28, 막11:3, 막14:31, 누가복음 2:11, 눅5:8, 8:24, 8:45, 눅9:33, 9:49, 9:54, 9:61, 눅10:17, 눅11:1, 눅12:41, 눅13:23, 눅17:37, 눅18:28, 18:41, 눅19:8, 19:25, 눅22:33, 22:38, 22:49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이 칭호는 원시교단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도교에로의 이행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다음 두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이 칭호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이 칭호가 그리스도교에로 들어왔는가? 이미 원시교단에서인가? 또는 헬레니즘 교회에서인가? 이미 원시교단이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까닭은 maranatha라는 부름은 순수히 묵시문학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이다. 교회는 스스로 고대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에 반하여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오실자를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현재 지배하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교단이란 윤곽이 들어 났다. 그 부름은 이제 예수는 주이시다. 이것은 간구가 아니라 환호와 선포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주는 교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각기 뚜렷이라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아들은 본질이오 주는 아들에게 부여된 지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를 부를 때에는 주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 칭호에서 올리워진 자에 대한 관계성의 현재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성서개념과 친밀히 결합돼 있다. 성령은 주의 역사의 현존이다. 주를 부르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 역사 되는 행위이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대개 검증되지 않은 근거들 위에서 마태가 사용하는 주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주 혹은 퀴리오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들어 나는 증거에 따른다면, 이 칭호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태는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지닌 분, 다윗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지닌 주, 인자의 능력을 지닌 주인 것이다. 마태복음 27:63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순전히 전통적인 용법, 영어의 Sir와 동의로서 사용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 물론 이 말은 예수의 칭호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퀴리오스란 말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의미에서 고백적인 칭호이다. 이러한 것의 유일한 예외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저주받는 자들도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마7:21-23, 마25:37) 마태복음에서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기독론의 중심적인 칭호가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인 칭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칭호는 그 칭호 자체를 넘어서 보다 명확한 다른 칭호를 암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은 마태복음 9:27, 마12:23, 마15:22, 마20:30-31, 마21:9, 21:15, 마22:42, 마가복음 10:47-48, 누가복음 18:38-39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를 보면은 귀신들려서 예수께 나아 오는 자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치유와 관련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자손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 호산나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데, 하지만 복음서의 이 구절들을 찾아서 자세히 보면, 그 다음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영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이는 누구냐에 대한 반문으로 사람들은 이는 나사렛사람이 아니냐는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칭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족보는 역사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남게 되는데 바로, 마가복음 10:48-소경 바디매오의 외침이다. 마가복음 11:1- 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 왕국의 도래에 관한 환호가 있다. 이것은 현시 전설 적이다. 한편 마가복음 12:35-17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 콘첼만에 의하면, 이 구절들은 교회공동체의 두 단계 그리스도론을 표현해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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