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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소리가 갑자기 들려오고 있었다. 거리를 메우고 있던 차와 인력거의 물결이 앙편으로 쫙 갈라졌다. 행인들의 시선이 모두 사이렌이 들려오는 쪽으로 쏠렸다. 홍철도 인력거를 세우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헌병 오토바이 두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보기드문 세단차 한 대가 따르고 있었다. 홍철은 그 차가 앞을 지날 때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차 속을 쏘아보았다. 차 속 뒷좌석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뚱뚱한 노인이 젊은 청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청년은 비서인 것 같았다. 노인의 금테안경이 햇빛을 받아 번쩍했다. 저 노인이 황가이군. 홍철은 커브를 돌아 사라지는 차를 노려보았다. 황운(黃運)은 원래가 조선인이었다. 젊었을 때 조선에서 연초 소매업을 하다가 일찌기 중국으로 건너와 산동성(山東省)의 청도(靑島)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연초 사업을 벌였는데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사업수단이 좋았는지 사업이 크게 번창하여 순식간에 대부호가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인 만큼 민족의식이니 하는 것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사업 유지를 위해서 친일행위를 밥먹듯이 하고 있었다. 항일 지하조직에서는 그에게 몇번 독립자금을 부탁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거절하곤 했다. 그러던 차 이번에는 황가가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오늘 그것이 사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황가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달려간 것은 비행기 헌납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중격에서 황가를 제거하라는 지령이 내려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 같은 민족으로서 독립자금을 대주지 않는 것은 하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친일행위를 함으로써 항일전선에 해를 끼치고 민족을 배반하는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하라는 지령이 내려온 것이다. 윤홍철은 인력거를 끌고 오송(吳淞)비행장 쪽으로 달려갔다. 인력거꾼으로 생활비를 벌고 한편 위장생활도 하고 있는 그는 이제 이 방면에 아주 익숙해져 매우 빨리 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들어 몸이 갑자기 쇠약해지는 바람에 달리는데 무리가 있었다. 비행장에 닿았을 때 그는 숨이 턱에 차고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가 단독으로 황가를 죽여야 한다고 결심한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동지들이 더이상 희생을 바라지 않고 있었고. 거기다가 고행으로부터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던 터라 그는 거의 자학적인 기분에 젖어 이번 일을 단독으로 거행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비행장 한쪽은 개방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홍철은 인력거를 한편에 세워두고 비행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벌써 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갔다. 앞 줄에서 연단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어 보였다. 시력이 약한 그로서는 황가의 머리만이 희끄무레하게 보일 뿐, 자세한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총신이 짧은 육혈포로 황가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폭탄이 있다면 황가뿐만 아니라 일본군 장성들까지도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준비된 폭탄도 없었고, 요즈음은 그것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일본군이 앞을 차단하고 있어서 달려나갈 수도 없었다. 경비는 삼엄했다. 연단 앞에는 황가가 헌납한 비행기가 서 있었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이크를 통해 황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일본말 솜씨는 능숙했다. 홍철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돌아섰다. 시내로 들어온 그는 하루종일 인력거를 끌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해에서 제일 큰 호텔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아갔다. 캡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전혀 딴 사람으로 보였다. 반 시간쯤 후 그는 호텔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프론트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경비는 어떤가?" 홍철은 유창한 일어로 물었다. 청년은 어리둥절에사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오셨는가요?" "임마, 묻는 말에 대답해. 경비는 잘 돼 있어?" 청년은 홍철이 내민 증명을 힐끗 들여다 보았다. 사진과 함께 헌병(憲兵_이라는 붉은 글자가 중간에 크게 찍혀 있었다. 청년은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경비는 잘 돼 있습니다." "어떻게 잘 돼 있다는 거야?" "형사가 와 있습니다." "몇 명이나?" "한 사람 와 있습니다." "임마, 형사 하나 가지고 무슨 경비를 한다는 거야. 영감이 갈 때까진 여긴 특별 경비다. 수상한 놈이 나타나면 나한테 보고해. 영감이 묵는 방은 몇 호실이야?" "5층 1호실입니다." "잘 감시해.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넌 모가지다." "네, 알겠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굽신했다. 홍철은 돌아서다 말고 다시 말했다. "내가 여기 왔다는 말은 누구한테도 하지 마. 형사한테도 하지 마. 국비리에 이중 경비를 해야 하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영감은 와 있나?" "아직 안 왔습니다. 연회에 참석하신 모양입니다." "영감 방은 잠겨 있나?" "네, 바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2호실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거기엔 누가 있나?" "형사 혼자서 지키고 있습니다." 홍철은 주위를 휘둘러보고 나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가 헌병으로 가장한 것은 형사와 부딪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형사는 헌병에게 눌리게 마련이었다. 그는 남경로 뒷골목의 왕선생을 찾아갔다. "탈주한 학도병이 하나 나타난 모양입니다." 왕선생이 말했다. 홍철은 고개를 끄덕했다. "함께 일하겠다고 하던가요?" "그런 모양입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쿠리 집에 있답니다." "내일쯤 만나지요. 오늘은 바쁘니까." 홍철은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쯤 후에 엊저녁에 만났던 파리한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도 양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얼굴 표정이 긴장되어 있었다. "사실은 이번 일을 혼자 해볼까 했는데 손이 모자라 안 되겠소." 그들은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혼자 그런 일을 하시겠다니.....그러다가 화나 입으시면 저희들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돌아가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전 홀몸이니까 어떻게 돼도 상관 없습니다." "홀몸이간 나도 마찬가지여. 아까 소식이 들어왔는데 내 집 사람은 이미 죽은 모양이오. 그리고 내 딸애는 정신대에 끌려가고......" 청년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들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몹시 무거워 보였다. 뒷골목에 자리잡은 허술한 식당에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느리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거사에 대해 세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은 홍철을 말리고 싶었지만 홍철의 결의가 굳은 것을 알고 그것을 포기했다. 한 시간쯤 뒤에 그들은 호텔로 갔다. 홍철이 안으로 들어서자 프론트 청년이 그에게 눈짓을 했다. "오셨습니다." 청년이 말했다. 홍철은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에 닿자 홍철은 동지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담배나 한대 피우고 나서 시작하지." 긴장을 풀기 위해 그들은 담배를 꺼내 피웠다. 그들은 말없이 불빛이 휘황한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리에서 외롭게 흘러온 지난 날들이 문득 생각되었기 때문일까. 동화될래야 될 수 없는 거리임을 홍철은 몇번씩이나 느끼곤 했었다. 도시 저쪽 어둠이 배어 있는 하늘을 그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고향 마을과 집이 생각나고, 이어서 아내와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나마 팔을 뻗어 그들을 껴안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왔다. 2호실 문은 잠겨 있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누구요?"하고 날카로운 일본말이 튀어나왔다. "문 좀 여시오." 홍철도 날카롭게 응수했다. "신분을 밝히시오." "열어보면 알거 아니야." 홍철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이윽고 문이 열렸다. 형사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와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어디서 오셨는가요?" 젊은 청년이 물었다. "당신이 비서야?" 홍철은 거칠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홍철은 형사를 쏘아보았다. 형사는 좀 질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나운 눈매가 뚫어지게 이쪽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홍철은 비서에게 증명을 내밀었다. 형사가 고개를 빼고 증명을 들여다 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야?" 홍철은 턱으로 형사를 가리켰다. "고등계 미다 형삽니다." 비서가 소개를 했다. "아, 그래." 홍철이 손을 내밀자 미다 형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면서 두 손으로 악수를 했다. 그리고 홍철의 뒤에 서 있는 청년을 힐끗 바라보았다. "특별 경비가 필요해서 왔는데......이런 일은 지리하고 귀찮단 말이야. 경비가 이렇게 허술해서 어디 되겠소." "죄송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형사는 연방 고개를 숙였다. 홍철은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영감님은 지금 계신가?" "네, 주무시고 계십니다." 비서가 대답했다. "좀 만나야겠는데......" "지금은 곤란합니다." "왜?" 홍철은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형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대단히 미안하지만......그 증명을 다시 좀 볼 수 없을까요?" "뭐라고?" 홍철은 형사의 눈초리에서 의혹의 빛을 보는 순간 권총을 빼어들었다. 형사가 비서의 몸을 방패삼아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거의 반사적으로 피한 날쌘 몸짓에 홍철은 당황했다. 그가 옆방으로 뛰어들자 청년대원이 형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남녀가 앉아 있는 것이 홍철의 눈에 비쳐들었다. 촉수가 약한 붉은 조명등 때문에 상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흑발을 풀어헤친 여자의 풍만한 육체가 남자에게 돌진했다. 흰 머리의 사내가 머리를 흔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홍철의 육혈포가 불을 뿜었다. "이 민족의 반역자야!" 세 발의 총성이 방안을 뒤흔들었다. 옆방에서도 연달아 총성이 터졌다. 홍철이 뛰쳐나가면서 보니 청년대원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형사도 총에 맞았는지 방바닥 위를 기고 있었다. 비서는 구석에 서서 벌벌 떨고 있었다. 홍철은 청년대원을 껴안았다. 목에 총을 맞은 청년은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홍철은 청년을 흔들어대다가 일어섰다. 모든 것은 1분도 채 안 되어 일어난 일들이었다. 밖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홍철은 비통한 얼굴로 청년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그 손에 쥐어져 있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갔다. 총소리에 놀란 손님들이 복도에 몰려나와 있었다. 보이 두 명이 막 들어서려는 것을 홍철은 막았다. "난 헌병이다. 다른 사람들 못 들어가게 일체 출입 금지시켜! 그리고 경찰에 빨리 연락해! 전화 어딨어?" "저기 있습니다." 보이가 복도 끝을 가리켰다. "빨리 경찰에 전화해, 임마!" "네, 알겠습니다." 보이는 허둥지둥 뛰어가자 홍철도 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도중에 그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뒤가 당겼지만 그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침착해야 한다는 것이 이런 일을 할 때마다 그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대로 그는 행동했다. 비상계단을 내려가자 그는 바로 인력거를 집어탔다. 출발하면서 뒤돌아보니 아무도 따라오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인력거를 호텔 정문 앞으로 통과하게 했다. 이미 호텔 입구는 차단되어 있었고 경찰이 몰려들고 있었다. 도중에 그는 인력거를 내려 아지트 쪽으로 걸어갔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 속은 멍한 상태였다. 지하실에 들어서자 비로소 자기 혼자 살아 돌아온데 대한 죄책감이 가슴을 깊이 찔렀다. 그것은 고통이 되어 온몸을 갈갈이 찢는 것 같았다. 그는 책상에 엎드려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어떻게 동지들을 대해야 할지 부끄럽기만 했다. 아침이 되자 신문을 본 동지들이 몰려들었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눈치를 챈 청년 하나가 물었다. "난 괜찮아. 권동지가 그만......" 그는 말을 잊지 못한 채 눈물을 뿌렸다. 청년들도 더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울먹였다. 홍철은 한참 후에 신문을 펴보았다. 신문에는 어제의 사건이 크게 보도되어 있었는데 황가는 가슴과 복부에 부상을 입었을 뿐 목숨은 살아 있었다. 사망자는 일인 형사와 청년대원, 그리고 황가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젊은 중국 여자, 이렇게 세 명이었다. 황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홍철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다. "면목 없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수치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는 꼭 황가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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