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
김승후
이제 막 3년이 지났다. 누구보다 낮에 일하고 싶었다. 밤은 어둠에 익숙한 자들의 세상이었다. 두 번의 비상벨을 눌러야 했던 편의점 야간 근무. 다치지 않고 살해당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새벽은 또, 자주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남성혐오증이라도 걸리라는 듯 이따금 씩 버버리멘의 출현도 있었다. 오늘처럼 피곤한 날은 낮에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나아가서 부모님이 그날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평범한 누구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았더라면 입시학원을 계속 다니고 어떤 대학에 가야 할지 고민했을지 몰랐다.
*
집에 자주 놀러 온 이모는 ‘서주야, 너 그거 아니? 옛날에 (서주우유)라고 있었어. 네가 살결도 뽀얗고 해서 우유라고 불렀었지’ 이모는 교복 시절의 나를 보고 종종 이름에 얽힌 재미 없는 이야기를 읊어 댔다. 아버지가 퇴근할 때쯤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 같았다. 아니, 일어나는 시늉을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었다. 마치, ‘뭘 벌써가? 저녁 먹고 가. 네 형부 곧 오는데 얼굴 보고 가야지’하는 엄마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주저앉았다. 서주의 심기는 불편했다. ‘이모, 이모부가 안 기다려?’ 아직 어려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고 있는 조카의 질문에 당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모는 굳이 아빠를 보고 가야 한다며 궁색하게 말했다. 서주는 안다. 닫힌 문밖에서 들리는 이모의 울음 섞인 말. 반응하는 엄마의 말소리와 내용들을….
이모는 엄마 보다 다섯 살 아래 동생이다. 그녀는 결혼한 지 5년째지만 남편은 건달이었다.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툭하면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가는 이유는 그랬다. ‘여자가 바가지를 너무 긁어 짜증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남자를 만났을까? 처음엔 몰랐다고 치자. 안 후엔 왜 계속 부부로 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주의 부모처럼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게 마땅하고 그렇지 못할 바엔 갈라서는 게 맞지 않는가? 이모는 바보 멍청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 사고 후에 이모가 얼마나 영악한지 알기 전까지.
장례를 치르고 보험회사 사람이 나왔다. 후견인인지 뭔지를 세우는 일에 그들은 처음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서주 곁에 머물렀다. 그때 자기가 중학생이 아니고 고등학생이었다면. 조부모 한 사람이라도 치매에 걸리거나 요양원에 있지 않고 총기 있게 곁에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그들은 서주에게 닥친 불행을 재앙으로 엮어갔다. 밥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이모는 집으로 들어왔고 따라 들어온 이모부는 무슨 일인지 바삐 다녔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서주에게 더없이 다정하게 굴었다. 친구 관계도 물어 왔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물었다. 자기들에게 애가 생기지 않으니 서주를 딸로 여길 거라고 말했다. 뭐든 되고 싶으면 다 될 수 있다고 큰 소리로 떠드는 이모부가 믿기 힘들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들은 며칠 동안 무언가를 자꾸 사들였다. 그러면서 서주가 유학 갈 학교를 유럽에서 알아본다고 했다. 그들이 없는 2주 동안 서주는 두려웠다. 그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길 버린 거라면. 2년 같은 2주가 지난 뒤, 그들이 어울리지도 않는 선그라스를 끼고 현관문에 서 있던 날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다.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고 아무 쓸모없는 걱정들을 한 것이다. 차라리 그들 부부가 비행기 사고로 죽기라도 했다면 나았을지 몰랐다. 그들이 말했던 유학 어쩌고 하는 말들은, 파리가 어떻고 로마가 어떻고 지인과 전화로 쏟아내는 이모의 수다로 묻혀 버렸다.
사기꾼들! 서주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잠이 쏟아졌다. 유난히 흰 피부. 그래서 뾰루지 하나도 금방 거슬리는 얼굴 피부. 서주는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씻어야 해. 아까보다 훨씬 머리가 무거웠다. 빌어먹을 두통. 양 손가락을 구부려 머리를 쥐고 욕실로 들어갔다. 클렌징폼을 짜내 얼굴에 문지르고 물을 틀어 여러 번 헹구어 냈다.
피부 노화는 이십 대 중반부터 시작된다는 화장품 영업사원이 말했다. 서주는 고가의 화장품에 관심을 보였다. 이모는 다가와 영업사원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넌 애가 왜 그러니? 저런 사람들 수법 몰라?”
영업사원이 나가자 이모는 이어서 서주를 비난했다. 지금 저런 물건 사고 그럴 때가 아니라고, 돈을 벌어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이모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십 대를 넘어 서른 즈음까지 그녀가 벌여 놓은 식당에서 일했다. 처음보다 경기가 나빠졌다며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모 부부가 보여준 계약서에 ‘성 서주’로 되어 있었다. ‘네가 여기 사장이야 우린 그냥 직원이나 마찬가지라니까’ 그들은 일이 끝난 시간 맥주잔을 기울이며 거듭 말했다. 하지만 서주는 그들이 앞서, 함께 살던 아파트를 팔아치우고 상가를 분양받았다고 했을 때, 왜 상의하지 않았는지 따졌었다. 불쾌하다고도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아파트에서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파트는 더 이상 오르지 않을 거고 내 놓아도 팔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의’에 대해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그들의 변명이 하도 강력해서 따지는 걸 놓쳤다. 하지만 다시 압박을 가하기 위해 서주는 주변 부동산에 알아봤다. 매물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고 한 말은 맞았다. 그들의 말을 믿어 보는 게 낫다고. 그들에게 양심이란 것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 지은 아파트 상가를 분양받아 식당을 차렸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할 머리는 안 되었는지 흔한 고깃집이었다. 상가 명의가 ‘성 서주’만 아니었다면 서주는 무엇이라도 자기의 길을 갔을 거였다.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쯤 패션 계통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지 않았을까. 식당을 차리고 개업 발에 몸이 녹초가 되어 스러질 때 ‘네가 사장이다’라는 말로 죽도록 일할 명분을 주었다. 그들이 말하는 체인점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집세를 줄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게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몇 번의 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세차게 흔드는 문소리에 눈을 떴을 때 홀 끝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서주와 DNA가 섞인 여자와 여자의 남편은 이중 계약서를 만들고 서주를 기만했다. 전화를 수없이 두 사람에게 걸어 봤지만 이미 해지 된 후였다. 은행에 대출도 있었고 그것은 훗날 서주 앞으로 청구되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무력한 자신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았다면. 조금만 꼼꼼히 살폈다면 짐작하고 남았다. 무엇이 자신의 눈을 가렸는지 생각에 빠지자 생각은 자꾸 생각을 생산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랐다.
“엄마, 나 납치 됐어. 무서워”
서주는 전화기에 대고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