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속에 약동하는 인생>에 대한 일고찰
이상호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
禪은 실천실수를 통하여 본래면목을 구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붓다로부터 전승되어 온 정통적인 禪사상에 입각하여 간화선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그 주요 수행법인 좌선과 호흡법에 대하여 그 핵심 사상과 구체적인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책의 내용을 따라서 하나씩 실천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좌선을 몸에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중요한 부분은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하였다.
비록 전통적인 선어록(禪語錄)의 다양한 전문 용어들이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문 수행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 쓰고 있다.
또한 간화선 혹은 좌선이라고 하면 일단 어렵고, 딱딱하고, 고통스러운 수행법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벗어나 일반 재가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좌선의 참된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이 일부 전문 수행자들만 행할 수 있다는 오해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즉, 일상생활 속의 참선 수행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른 스승을 찾아서 꾸준히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법은 호흡법을 수반하는 좌선과 공안참구, 그리고 입실하여 참문하고 점검받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과정과 방법을 상세히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일관적인 흐름이다. 특히 다른 간화선 관련 서적과 비교되는 특징이 있는데, 호흡법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흡법에 따른 생리적 현상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육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수행법을 여러 차례 소개하는데, 이는 저자인 종달 노사님의 오랜 좌선 경험에서 실제 체험적으로 검증된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좌선법이 소개되고 있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견성 ․ 공안 참구법 등에 대해서 전통적인 수행법에 입각하여 현대적인 개념으로 알기 쉬우면서도 매우 독특하게 정의하고 있다. 사실 이 책대로 만 한다면 간화선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실참(實參)에서 공안을 뚫고 헤쳐 나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판 간화선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간화선 수행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항목별로 분류하여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학문적인 서적은 아니지만, 다양하고 정확한 전거(典據)를 들면서, 수십 년 간 간화선 지도 경험의 풍부한 경륜을 담고 있기에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보기 드문 책이다. 따라서 한번 보고 말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재독하면서 선수행의 전체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둔다면 실제로 바른 스승을 만나 간화선 수행의 지도를 받게 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현재 나와 있는 간화선 관련 서적들만 해도 대체로 옛 선사들의 어록을 통하여 진리의 경지를 펼치거나 혹은 선종(禪宗)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간화선 사상을 대상화 시켜서 연구한 학문적인 글들은 많지만, 이 책처럼 실참실수(實參實修)를 행할 때 가져야 할 전반적인 지식과 중요한 핵심,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히 진리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과 방편들을 자세히 밝히고 있으므로 결국 진리체험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저술되기 전이나 그 이후인 지금까지도 이에 필적할 만한 저술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반복되는 내용들이 있으나, 그것은 이 책의 단점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빠뜨리지 않고 거듭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간화선 수행의 핵심과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확한 수행법을 마음속 깊이 새길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된다.
궁극적으로 간화선 수행은 실천실수(實踐實修)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에 이 책만으로는 간화선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실천실수에 앞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간화선의 지도 혹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자이신 종달 이희익 노사님은 송나라 당시 임제종의 정통 수행법을 몸소 익히시고, 그 법맥을 이어받으신 간화선의 종사(宗師)이시니, 그 분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약동하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禪속에 약동하는 인생』이라는 책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분의 삶은 오직 禪속에서만 일생을 보내셨고, 그 분의 인생자체가 곧 禪이었음을 몸소 보여주셨기에 禪과 일상생활의 삶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이 책을 통하여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책 내용 중에는 간간이 현재 한국의 간화선 수행법과 비교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이 책의 저술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통찰이 엿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으며, 더불어 간화선의 체계적인 수행법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간화선의 국제화를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 책은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총 10장으로 되어 있고, 끝부분에 부록으로 좌선법회의 용어와 출․재가 선객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전부 10장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장에서 6장까지는 선 입문자(禪入門者)를 위하여 전반적인 선사상(禪思想)에 대한 고찰과 禪의 실천실수(實踐實修)에 필요한 호흡법 및 좌선 수행의 방법 등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7장부터 제10장까지는 간화선과 관련된 부분이 강조된다. 여러 전거(典據)를 들어 공안(公案)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간화선 사상 및 수행 방법 등에 대하여 상세히 일러주고 있다.
다음에서 구체적으로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여 소개한다.
제1장 禪이란 무엇인가?
禪은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禪이란 쟈나의 음(音)을 그대로 번역하여 선나(禪那)라고 쓰고 이를 한역하여 정려(靜慮)라고 한다. 정려란 고요히 생각한다는 말로 풀이된다. 禪은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다. 이를 체득(體得)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른 학문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며, 그 체득에 이르는 동안을 고행(苦行)이라고 한다.
부처님에 의하여 널리 전해진 禪의 가르침은 중국의 후한(AD 25~220) 때에 불교와 함께 이론적 禪사상의 일부가 전해졌다. 그리고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양대(梁代 ; 502~557)에 제28대 달마대사(菩提達磨; ?~495)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禪의 가르침을 선종(禪宗) 또는 불심종(佛心宗)이라고 일컫는다.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고, 그 가르침은 우리 한반도에 전래하여 현재 조계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는 북미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불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선종의 입장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표방한다. 깨침의 심경은 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으며. 각자가 체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선종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종파에서 볼 수 없는 생산활동을 주안(主眼)의 하나로 하여 일상생활의 일 가운데 진리를 배운다는 것이다. 정중(靜中)의 공부보다 동중(動中)의 공부가 훨씬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조혜능은 좌선을 ‘외계의 일체 선악의 경계에 향하여 심념(心念)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坐)라 하고 내면의 자성(自性)을 봐서 동(動)치 않음을 禪이라 한다’라고 정의했다.
이 좌선의 목적은 원래 가지고 있는 진실한 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것이 좌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좌선은 잊어버린 자기를 되찾아 꿋꿋한 자주성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흔들리지 않는 배짱으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길이기 때문에 현대처럼 좌선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는 없다.
제2장 坐禪은 왜 하려는가?
좌선(坐禪)이란 파도치듯이 일어나는 잡념을 가라앉혀 모든 아집 또는 분별심을 씻어 버리고 마음속에 또 하나의 깨끗한 마음이 있음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득실(得失) ․ 이해(利害) ․ 자타(自他)를 초월하여 순진한 인간성이 빛나게 되며, 스스로 따뜻한 윤리가 나타난다. 특정한 장소나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아랫배에 힘을 주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좌선의 시작이며 끝이다. 다시 말하면 자고, 깨고, 먹고, 일하는 그 자체가 모두 좌선의 입장이다.
선인(先人)들은 禪하는 방법으로 조신(調身) ․ 조식(調息) ․ 조심(調心)을 강조했다. 먼저 몸을 단정히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선의 요체(要諦)라는 것이다. 조신(調身)할 때는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하여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랫배(氣海丹田)에 힘이 들어가도록 쑥 내민다. 조식(調息)은 부처님의 호흡법인 아나파타사띠의 호흡법을 따르는데, 자연스럽게 깊이 들이마시고 고요히 내뿜는 것이다. 조심(調心)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무잡한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특히. 마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호흡이다. 호흡이 고르지 않으면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호흡이 안정된다. 잡념이 사라져 머릿속을 고요히 하려면 역시 하복부에 힘을 주어야 함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호흡이 고르고 마음이 안정되면 이로써 좌선이 익숙해지고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된다. 수식관(數息觀) ․ 수식관(隨息觀) ․ 아우관 등의 호흡법이 익숙해지면 바른 스승을 택하여 직접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주어진 공안을 가지고 직접 면대하여 그 공안의 경계를 제시하며 지도를 받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결과부좌하고 자세를 똑바로 가지고 깨침을 얻었을 때, '모든 인간은 존엄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 망상이 너무 많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되새기거나 혹은 한 문제에 얽매이기 때문에 그 인격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진실한 자기를 되찾아 영원한 생명을 구하여 하루살이 같은 평생을 인생의 전체로 알지 말고, 적극적인 참다운 인생의 본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두 좌선에 힘써야 한다.
제3장 禪의 本旨
선종(禪宗)은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종파로서, 불교의 정수(精髓)를 그의 창시자인 석가세존으로부터 상전(相傳)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사색적 신비주의라고 한다. 고도로 사색적이며 동시에 규율이 엄격한 훈련을 행한다. 오랫동안 훈련을 쌓아 이 체계에 통찰을 얻은 사람만이 그의 궁극적 의의가 표시되고 또 실증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론적 해석을 싫어하는데, 다만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는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즉 禪은 개인적 경험으로 일관한다. 개인적 배경이 없다면 진리를 완전히 전할 수가 없다. 모든 개념의 기초는 단순하고 거짓이 없는 경험인즉, 禪은 그 기초 경험에 최대의 힘을 기울인다. 좌선은 만사를 버리고 한 마음으로 집중시켜 기초적 경험인 정신적 통찰을 얻기 위하여 행해지는 선객(禪客)들의 조직적 훈련이다.
또한 禪은 자연그대로이다. 자연그대로에서 어떤 기적이나 가피능력 등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소치밖에 안 된다. 그리고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라고 일축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심심미묘(深深微妙)의 실행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禪은 단순 직절하고 실제주의인 까닭에 일상생활과의 교섭이 밀접하다.
평소 사물에 대하여 명료하고 확실한 이해를 얻으려면 그에는 반드시 개인적 경험이 필요하며, 이 경험에 최대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 禪이다. 그렇기에 좌포 위에 앉아서 또는 실내(室內)에서 스승의 점검을 받으며 천칠백 공안을 보아나가는 것도 이 경험을 얻기 위함이다. 이 공안을 볼 때에 이론으로서는 통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그것에 체당(體當)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공안의 줄거리의 중심점을 잡아서 그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천 칠백 공안의 중심점은 '無' 하나로 통한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은 공안을 내세우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천 가지, 만 가지 차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세존께서 새벽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깨쳤다함은 곧 사상(事象)을 사상대로 보았다는 뜻이므로 결국 깨친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뭉쳐 그 하나라는 것도 없는 경지에서 사상(事象)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만상을 부정해서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긍정이 된다는 말과 같다. 이를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마음속에 ‘무(無)’자(字)를 새기고 24시간 ‘무(無)’자!, ‘무(無)’자!, ‘무(無)’자! 하는 것이다. 즉 ‘무(無)’자에 전 정신을 집중시키고, 집중한 때 ‘무(無)’라는 자도 없으려니와 나 자신도 없어진다. 그것은 곧 사물과 늘 한 몸이 되어 그 사물에 대해 충실해진다는 말이며, 긍정과 부정의 대우(對偶)를 돌파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禪은 사물과 한 몸이 되는 훈련이라고 한다. 그 한 몸은 또한 절대적 긍정이다. 절대적 긍정은 긍정과 부정과의 대우를 피하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나아가서 반대되는 것과 완전히 일치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차별 즉 평 등, 현상 즉 본체를 말한다. 그래서 차별 즉 평등으로서 마치 물을 여의고 파도가 없으며 파도를 여의고 물이 없는 것과 같이, 차별을 여읜 평등이 없고, 평등을 여읜 차별이 없다. 차별 그대로가 평등이고 평등 그대로가 차별이다.
다시 말하면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이것이 禪의 전체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상(事象)은 구체적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변이(變移)하고 있으므로 무(無)이고 변이하면서 본래는 전혀 변화하지 않으므로 공(空)이다. 그러므로 禪의 경지에서는 평등일여(平等一如)이다. 그러나 현상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만 해서 이를 공(空) 또는 무(無)라고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현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도 부인치 못할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부정하여 그를 다시 긍정함으로써 절대적 긍정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일상생활 주변에서 주관적 입장을 탈피하여 선의 근본사상을 구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현상계를 보고 하나 하나 지적하지만 그 현상계의 하나하나가 자기와 한 몸이 될 때, 즉 그 하나라는 것도 없고 자기도 없다는 것을 체험할 때 차별이니 평등이니 하는 관념도 없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차별적 사상(事象)이 없다. 그래서 禪에서는 늘 사상(事象)이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禪의 정신이 가장 활발히 유행한 신라 시대에 우리 민족의 가장 우수한 문화재들이 조성되고, 그 여력으로 고려 중엽까지 세계적인 문화재의 하나인 고려자기가 발달 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한 몸이 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훈련은 가르칠래야 가르칠 수 없고 남의 것을 본뜰래야 본뜰 수도 없다. 그래서 禪은 실천실수(實踐實修)라고 한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도 부처를 만나면 부처와 한 몸 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 일상생활에서 어느 하나도 사물과 한 몸이 되지 않는 일이라곤 없다. 다만 범부로서는 그를 인득(認得) 못할 따름이다. 결국 인득(認得)하면 부처이고, 인득(認得) 못하면 범부이다.
제4장 禪의 體認
禪은 사물과 한 몸 되는데 주력한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평등(平等)의 입장이다. 초월한 입장에서는 불타(佛陀)아닌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禪이 목적하는 바는 '불타'에 있다. 이는 사물의 실상을 깨달은 불타의 절대 평등관으로부터 유래된 사상으로써 범부의 입장에서는 평등일여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차별적 사유로부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그러므로 차별관에 시종일관(始從一貫)하여 진리를 등진 생활에 몰두하는 범부로 하여금 전향시키는 것이 불타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 평등의 세계는 차별을 여읜 평등의 세계가 아니다. 차별 즉 평등의 세계다. 그러므로 자기 맡은 바 그 일에 충실하여 다른 것을 돌보지 않고 정진하면 된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 반영시키는 것에 관한 것인데, 이 경지에 이르려면 禪을 통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길이다. 禪에는 공안을 사용하는 방법에 있으며, 그 수는 천칠백여 가지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자(無字)'다. 이것도 종파에 따라서 다르다. 하나의 공안에 온마음을 집중시켜 가면서 천칠백여 공안을 섭렵한다. 비록 공안의 숫자는 많지만 그 원리는 같다.
그 수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 칠백 한 사람의 행리(行履)가 수록되어 있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공안이 이 숫자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일상생활 가운데 공안이 아닌 것이 없다. 참선자(參禪者)들을 위하여 공정(公定)의 법칙 즉 고덕(古德) 스님들이 인정한 이법(理法)이라는 의미에서 공(公)이고 이법에 따라 정진하면 반드시 선지(禪旨)에 이를 수 있다는 뜻에서 안(案)이라고 한다.
공안이 석가세존 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며, 공인되기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의 육대(六代) 법손인 임제선사(臨濟義玄; ?~867) 때로 보고 있다. 공안에는 의문점이 있으며 그 의문점을 풀어내는 것이 禪 공부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적 이론도 아니고 체험하여 스스로 인생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禪인 것이다.
'장소의 논리와 호응의 원리'란 말이 있다. 즉 세계는 우리를 부르고, 역사는 우리를 부르고, 사회는 우리를 부른다. 그에 대하여 우리는 정당하게 처세한다. 역사에 대답하고, 사회에 대답하고, 세계에 대답하는 우리의 행위가 충국사의 부름에 대현이가 대답한 "예!"이다. 대현이 "예!"하고 대답할 때 그와 하나가 되면 "예!"가 없어진다. 이런 경우를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도 하고 초월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중생제도라는 것도 요(要)는 만유의 장소(場所)를 얻게 함에 지나지 않는다. 즉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고, 하늘은 높고, 땅은 낮고, 산은 치솟고, 물은 흐르고 하는 것이 모두 장소를 얻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아난아!"하고 부르니 아난은 "예!"하고 대답한 것이 호응의 원리다.
선종(禪宗)의 종지를 규명하기 위하여 공안을 들어야 하고, 그 공안과 한 몸이 된 때를 견성(見性) ․ 각오(覺悟)라고도 하며, 깨침이라고도 한다. 매사에 이런 경지라면 사회생활에 적극성을 지니게 된다.
선은 일단 멈춘다. 소위 무아(無我)와 멸사(滅私)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무아와 멸사의 경지는 사물과 한 몸이 될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禪처럼 쉬운 일도 없다. 그리고 쉬운 것이 진리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멀리 구하고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멀어지고 어려워만 진다. 자고, 깨고, 먹고, 일하는 것이 전부가 진리의 당체다. 이렇게 보면 진리란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가리킨데 지나지 않는다. 말은 쉬우나 그 진리의 당체를 정면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이 문제다.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면 역시 오랜 시일을 두고 좌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공안을 들고 간단없이 참구(參究)할 일이다. 그 비결은 흥미를 붙이는 것이다. 애쓴 보람으로 인가(認可)를 받으면 그 기분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소위 법열(法悅)을 느낀다. 이 재미로 공안을 하나하나 봐 나가는 동안 자연히 법리(法理)도 체득되어 끊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자유자재한 멋쟁이가 된다.
요(要)는 떠오르는 잡념 망상을 하복부의 힘으로 해소시켜라 한다. 그러니까 우선 하복부의 힘을 길러야 하며, 그 방법으로 수식관(數息觀)을 사용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소위 법열을 느끼게 되고, 그 경지를 경천동지라고 표현한다.
부처님께서 좌선할 때 가장 중점을 둔 호흡법은 안반수식법(安般守息法)이다. 이 호흡법은 『불설안반수식경』에 근거를 둔 것으로써 식수(息數), 상수(相隨), 지(止), 관(觀), 환(還), 정(淨)으로 전개되어 간다. 가장 기본적이며 구체적인 방식은 삼키는 숨을 짧게 하고 뿜는 숨은 의식적으로 길게 하여 이완과 긴장의 조화를 이루면서, 하복부(氣海丹田)에 힘을 길러 정신통일을 기한다.
제5장 禪은 佛法의 總本山
선종(禪宗)은 좌선을 중심으로 삼학(三學; 계(戒), 정(定), 혜(慧) 육도(六度;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 불법의 전체를 원만히 갖추어 정전(正傳)되고 있다. 단,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좌선이니 만큼 시간과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서 수시로 행하기를 권장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이 붓다가 가르치신 의칙(儀則)이다. 즉 행주좌와에 의식(儀式)이 있고 마음가짐이 있어서 그에 존귀한 묘덕(妙德)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좌선수행을 통하여 이를 체득함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좌선수행과 증과(證果)를 구별하여서는 안 된다. 즉 수행이 쌓여서 비로소 깨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깨쳐 있기 때문이다. 단지 흙에 묻힌 옥(玉)도 갈아야 광채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제6장 佛祖正傳의 坐禪
이 장에서는 우선 원시불교 사상의 근간인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제(四諦), 중도(中道) 등과 좌선 수행법의 관계를 설명한다.
팔정도(八正道)1는 실천이 관건이므로 이 실천을 위하여 좌선수행이 필요하다. 십이인연(十二因緣)은 현상의 세계가 원인(原因) ․ 결과(結果)의 상의상존(相依相存)의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하는데, 만약 우리들 자신이 과거의 원인에 구속되고 결정되어 있어서 그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면 위 팔정도를 실천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속박되지 않고 살 수 있는 초월이 필요하며 이 초월은 좌선수행을 통하여 사상(四象)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제(四諦)는 팔정도와 같은 이상(理想)과 십이인연과 같은 현실의 인과론을 모두 아울러 다시 현실적인 실천에 의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가 고프면 먹고 고단하면 자는 이 사실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치는 좌선 수행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다.
중도(中道)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간, 이상과 인과 관계의 중간에 살고 있는 현재의 순간을 인득(認得)하고 이 순간을 일보일보(一步一步)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하여 좌선수행에 힘쓰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숭고한 흐름 속에, 말 없는 흐름 속에, 모양 없는 흐름 속에 몰입하고 있다. 흐름과 동시에 쉬지 않고 지금도 정진하고 있다. 원래 그 흐름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를 버리려고 하여도 버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미(迷)에 허덕인다는 이야기다. 석가세존도 우리와 같이 처음에는 범부(凡夫)였으나, 그 범부의 때를 활짝 벗어 버릴 수 있는 묘술(妙術)을 얻어서 대성인(大聖人)을 이루었다. 이 묘술을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라고 한다. 자수용삼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은 단좌참선(端坐三昧), 소위 좌선이다. 이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모습도 없는 미묘난사의(微妙難思議)의 흐름 속에 들어가 흐름과 한 몸이 되어 광명의 세계를 전개할 수가 있다.
부처에서 부처로 전(傳)하여 정사(正師)인 선지식(禪知識)의 지도를 얻어 좌선에 친근할 수 있다함은 실로 고마운 승연(勝緣)이 아닐 수 없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한 시간도 좋고 10분도 좋고 5분도 좋다. 한 치(寸) 앉으면 한 치 부처고, 두 치 앉으면 두 치 부처라고 했다. 다리를 틀고 입을 다물고 마음 편안하게 앉으면 된다.
불법에는 염불(念佛), 독경(讀經), 사경(寫經) 등 여러 가지 방편이 있지만, 좌선이야말로 불법의 정문(正門)이다. 석가세존께서 좌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염불(念佛), 독경(讀經) 등의 방편들은 정신을 통일할 뿐이지만, 좌선은 통일만 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로 풀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뭉치는 것과 푸는 것의 한계를 두는 것이 아니다. 여기 좌선의 묘취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선은 깨침에 이르는 인연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하면 좌선은 깨치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이미 깨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깨치고 있는 것인가 하면 배고프면 먹고, 곤하면 자는 것이 그것이다. 불법은 이외에 다른 별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이를 정말로 수용(收用)하려면 좌선을 해야 한다.
불교정전(佛敎正傳)의 좌선은 누가 하든지 몇 분간 하던지 간에 거기에는 천지를 광명의 세계로 전환하는 공덕력(功德力)이 나타난다. 좌선을 닦는 본인은 희열을 체인(體認)하고 있으나, 자기가 하는 좌선의 공덕력이 천지를 광명 세계에 전환하고 있다는 위대한 공덕력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공덕력은 나타나고 있다. 만약 좌선하는 것과 불가사의한 공덕력을 얻는데 구분을 두고서 수행은 먼저고 증(證;깨침)은 뒤라고 한다면, 즉 수행하고 있으면 깨침(證)이 온다고 생각하고 수행 중에는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이 있는 데는 수행은 이미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다시 말하면 좌선과 깨침을 두 갈래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이야기다. 좌선하려고 마음을 일으켰을 때 이미 깨달음은 둥글게 나타나고 있다.
좌선할 때 모든 생각을 버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온종일 행(行)하여도 행(行)한 자취를 남기지 않고 밤새도록 생각하고도 그 그림자를 비추지 않고서, 보는 것 듣는 것 등과 한 몸이 되어 한 치의 간격도 없는 소식이다.
좌선을 바르게 닦는다면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이 밝고,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흰 눈이 쌓인다. 티끌하나 움직이지 않고 나뭇잎 하나 건드리지 않고 천지간의 모든 것 그대로 각자가 생생한 삶을 영위하여 어김이 없다.
그러므로 선종(禪宗)은 삼학(三學) ․ 육도(六度) 등 불법의 전체를 좌선에 둥그렇게 갖추어 정전(正傳)하고 있다.
제7장 禪의 公案
이 책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 공안에 관련된 장이고, 그 다음이 좌선 실수에 관련된 제6장이다. 그만큼 이 책은 좌선과 공안을 중심으로 하는 간화선 수행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총부(總府)인 禪은 불교의 시작과 함께 그 기원을 같이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공안의 성립은 훨씬 후대에 중국에 와서 형성된 것이다. 선종(禪宗)의 개조로 추존하고 있는 달마시대(?~528)부터 오조홍인(五祖弘忍; 594~674)에 이르기까지도 좌선을 중점적으로 닦고 따로 공안(公案)으로 학인을 접득하는 데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로 제자 쪽에서 의심나는 점들에 대해 여쭈고 이에 대해 스승의 지시를 받는 정도였다.(현재 우리나라에서 이 방법을 쓰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대사에 이르러 선종의 획기적 발달과 함께 제자에 대한 접득(接得) 수단으로 공안과 비슷한 것을 주어서 그를 참구케 했지만 후대에 와서 쓰인 공안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선 <육조단경>을 재독 음미하기를 권한다.
한편, 선종은 이론이나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무엇보다 실지로 수행하는 실천실수(實踐實修)가 종지라는데 그 특색이 있다. 곧 자기 심지의 구명(究明) 즉,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경계를 연마하여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발견함에 있다. 여기서 공안은 '깨우침'에 이르게 하는 한 방법이자 동시에 수단으로써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일으켜 그 의문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착안을 둔다.
공안은 옛날 선종의 조사스님들이 정(定)한 법문(法文)으로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법문에 의하여 때에 응하고 중생의 기연(機緣)에 촉(觸)하여 자유자재로 제시하는 공법(公法)이다. 그 말은 황벽(?~850) 선사 때부터 쓰인 듯하다. 다른 말로 여러 가지가 있다. 고칙(古則), 일칙(一則) 혹은 그냥 칙(則)이라고도 하며, 화칙(和則), 화기칙(話機則)이라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간단히 화(話) 또는 화두(話頭)라고 하며, 이때 두(頭)자에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문화(問話) 혹은 설화(說話) 일착자(一着子), 향상(向上)의 일착(一着)이라고도 한다. 관렬자(關捩子)라고도 하는데, 이는 공안에 일종의 허수아비와 같은 것이 있으므로 이에 얽매어서는 공안의 참뜻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경덕전등록>에 따르면 공안은 1,701개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자체의 원리 원칙에 있어서는 모두 같지만, 그를 내 놓은 사람의 도력(道力) ․ 지식(知識) ․ 성품(性品) ․ 자질(資質) ․ 환경 그리고 활용면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 이 말은 즉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모두 공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공안은 부정과 긍정, 그리고 다시 총합적 입장에서 수시로 그 두 태도를 운용하는 방면이 있다. 그와 같은 모순 혹은 불합리도 돌보지 않고 이를 연속해 나가는 사이에 우리들의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자연히 통일되어 본능과 이성이 융합되고 소극성과 적극성이 조화를 이루어 천진(天眞)한 생명의 빛이 나타난다.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이 견성은 주객의 조별적 대경(對境)이나 모든 대립적 의식을 근절하지 못하는 한 이룰 수 없다. 시비(是非) ․ 선악(善惡) ․ 미오(迷悟) ․ 범성(凡聖) 그리고 극락과 지옥 ․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 등 모든 조별적 견해를 일소하여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 그 심경에 이르도록 가부좌 틀고 하복부에 힘을 주면서 공안의 해결에 전력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좌선 수행이다. 수행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서 소오(小悟)에 만족하지 말고 중단없이 꾸준히 계속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때 공안에 대한 의심 또는 의단(疑團)이 가장 선행조건이다. 의심하면서 악전고투하여 그 고민이 타개되고 새로운 생명이 약동칠 때 바로 그것이 '깨침'이다.
공안을 타파하려면 그 공안과 한 몸이 되라고 가르친다. 즉 ‘무(無)’자가 공안이라면 그 ‘무(無)’자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 한 몸이 되는 훈련은 좌포 위에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주야(晝夜)의 간격 없이 자나 깨나 혹은 대화를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간에 어느 때, 어떤 곳이든 이 ‘무(無)’자에 참(參)하여 무자삼매(無字三昧)가 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자동차를 운전하며 ‘무(無)’자를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 사고를 일으킬 것이다. ‘무(無)’자와 한 몸 되는 훈련의 힘으로, 운전할 때 운전하는 것과 한 몸이 되라는 말이다. 그렇게 애쓰고 몇 달, 몇 년 걸려서 겨우 ‘무(無)’자를 봤다고 하지만 그것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다음의 공안을 보여서 살을 붙이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총칭한다. 만약 한 공안으로 대오철저하다면 그가 일시에 다 트일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니 일일이 보아 나가는 간화선이 발달하여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체로 1,701칙의 공안은 모두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다. 어떤 때는 체(體)를 가리키고 어떤 때는 용(用)을 가리키고 어떤 때는 체용(體用)을 한 구(句)에서 나타내는 때도 있다. 결국에는 하나라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일심(一心)이란 우리들 개개인의 분별하고 취사증애(取捨憎愛)하는 일심이 아니라, 이 우주 간에 꽉 찬 광대무변의 일심을 말한다.
이 공안에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말이 있다. 현성이란 현전성취(現前成就)의 준말로써 이는 현재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평등보편의 변함없는 진리이자, 불(佛)의 모습이 아님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천지자연의 도리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도리로 볼 때 공안이란, 다만 스승의 언구(言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 간에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의 활발한 활동 그 자체가 현성공안이요, 살아있는 공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禪에서는 늘 일상생활이 모두 불법의 당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각 없이 취생몽사하고 있으니,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 무엇인고?'하고 깊이 의심하고 들어가 그 의심을 어디까지나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진짜 공안에 참(參)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정한 형(型)에 고정되어 다만 그 형(型)만 투과(透過)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선림상기전(禪林象器箋)>에 공안은 필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공안을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에 활용하느냐가 문제다. 마음이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를 항상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고, 그날그날의 생활에 다다르지 않아서는 아니된다. 선가(禪家)에서는 그 마음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명백하여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는 것을 일념(一念: 잡념․망상)을 가짐으로 해서 괜히 모든 일을 조작해낸다. 다만 '념(念)'을 쓸어버리는 일에 전념하라. 념(念)을 버리라 함은 좌선(坐禪)하라는 뜻이다. 념(念)을 버리면 본래의 면목이 나타난다.
그 본래면목을 '일물(一物)'이라고도 한다. 그 일물(一物)은 한 법도 없지만 여러 가지 인연에 응하여 어떤 것으로든지 변화한다. 이 영묘(靈妙)하고 불가사의한 일물(一物)을 똑똑히 보아 두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禪의 수행이며, 수행에 쓰는 공안도 필경 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공안의 실제적 가치는 '깨침'을 여는 데 있으므로 그 '깨침'을 열기 위한 수행에 사용했던 것이다.
공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안을 공부해야 한다. 공부한다는 말은 생각한다는 말인데, 그 생각도 이리저리 궁리(窮理)하는 것이 아니고, 여유를 두지 않고 홍두깨 내밀듯이 불쑥 내밀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사리(事理)에 맞지 않은, 즉 공안에 ‘즉(則)’하지 않은 동작을 해서는 무의미하다. 요(要)는, 공안은 그에 ‘즉(則)’하지 않고는 열리지 않는 법이다.
공안을 공부할 때 처음에는 마음을 공안에 집중시켜 그의 해결에 전력을 경주할 일이다.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의문을 품고 덤벼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의심하다가 생각다 못해 생각이 끊어지는 데까지 이르러서 비로소 한 소식을 얻는다.
<선가귀감>에 참선은 모름지기 삼요(三要)를 갖추라고 했다. 1. 대신근(大信根) 2. 대분지(大憤志) 3. 대의정(大疑情)인데,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솥(鼎)의 한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아서 폐물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禪의 특색은 3. 대의정(大疑情)에 있다. 망연히 12시간이고 24시간이고 좌선한다면서 앉아 보았자 별 수 없는 일이다. 그 시간에 쭉 의심을 일으키고 앉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한다.
본참(本參) 화두를 들고 망념 망상과 싸우고, 졸음과 싸우고 동정위순(動靜違順)과 싸우고 시비증애(是非憎愛)와 싸워 그를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 화두라고 할 때, 조주의 ‘무(無)’자(字)나 ‘공수파서두(空手把鋤頭)’라든가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등에 국한 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의문되는 점을 곧 화두로 삼으면 된다. 이것은 참학(參學)의 용심(用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즉 농사짓는 사람은 괭이질을 화두로 삼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데 열중하면 선지(禪指)에 충분히 계합된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출가한 승려가 아닌 일반 사람은 자기 맡은 직업에 충실하여 다른 것을 돌보지 않을 때가 진정한 참학(參學)임을 알면 된다.
사실 사람은 근본 문제에 있어서는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참취(參就)하게끔 되어 있으므로 禪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참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수처작주 입소개진(隨處作主 立所皆眞)'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즉 무얼 하든 간에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제8장 公案과 參禪
공안의 성립은 <벽암록> 서문에 '공안은 당나라 때 창하여 송나라 때 성(盛)하다' 라고 한 것과 같이 당나라 때 선승들이 학인을 지도할 때 임기응변으로 활작략(活作略)하여 제자를 깨침에로 개발케 했다. 그 후 점차 옛 어른들이 개오(開悟)하게 된 기연(機緣), 여러 언행(言行)을 들어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어 그 본뜻을 참구하도록 하여 같은 경계에 이르게끔 하는 풍조가 일어났는데, 송나라에 와서는 착어(著語, 공안을 본 경계에 句를 붙이는 것) 혹은 비판을 붙여서 그것을 집대성시켜 제자들에게 공부케 함으로써 개오(開悟)의 수단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공안을 담고 있는 <무문관>에 의하면, 참선은 조주의 ‘무(無)’자로 시작되어 ‘무(無)’자로 끝을 맺는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만약 ‘무(無)’자에 철저했다면 초관(初關)이니 말후(末後)니 말할 필요가 없다.
공안의 의의(意義)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법(正法)을 점검하는 기준이 된다. 즉 체험자의 체험이 과연 정법에 계당(契當)한 禪의 체험인지 그 진위(眞僞)를 점검하는 것이다. 둘째, 공안에 의하여 수행의 나침반 역할로 삼아 스스로 수행의 진로를 결정할 수가 있다. 불법의 세계는 무한히 넓어서 초심자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좋을런지 모르고 방황할 수 있기 때문에, 공안을 주어 이로 말미암아 오욕번뇌를 막아 개오한 세계에 이르게 한다. 셋째, 공안은 논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문자언구(文字言句)를 쓰면서도 문자언구를 여의게 하고, 관념에 의하여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어디까지나 공안의 은력(恩力; 신세․덕택)을 빌어서 그의 공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소위 신심탈락(身心脫落)의 자내증(自內證)이 얻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공안의 공부는 앞서 말한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의 삼요(三要)를 지니고 본참(本參) 화두(話頭)와 더불어 그 네 가지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무진등론(無盡燈論)'에 의하면, 유리(有理: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니 무리(無理: 생각이 끊어져 없어진 때)니 하는 관념을 초월해야 만이 선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역설한다. 즉 ‘무(無)’자 공안을 들었으면 무작정 전 신심(身心)을 들어 ‘무(無)’자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공안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랫배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것과 한 몸이 될 때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데 역점을 둔 일종의 방편이다. 그리하여 그 공안을 투과하게 되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언제든지 쥐고 있을 필요가 없다. 여기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전부가 공안이라는 말도 성립한다. '부처님이나 달마도 아직 수행 중'이라고 하는 까닭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수능엄경>에 의하면 초심자의 경계를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갈 때, 참문(參問)할 스승에 대한 문제가 있다. 즉 자기의 소증(所証)을 증명하기 위하여 명사(明師)에 참(參)할 필요가 있다. 참선(參禪)이라는 것도 스승으로부터 주어진 공안에 대하여 참문(參問)하고, 스스로 단좌공부(端坐工夫)하고 혹은 문답상량(問答相量) 하는 것 즉, 참사문법(參師問法)을 말한다. 이때 사제지간은 참선(參禪) 중 항상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제의 심의기(心意氣)가 일치하지 않으면 참선변도(參禪辯道)는 성립되지 않으며, 사제가 서로 손잡고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원(願)에 채찍질하여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승은 수행자가 먼 길로 드는 것을 막아 준다. 그렇다고 해서 가까운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무(無)’자 공안을 들면 만상이 눈앞에 전개 되어 있는 것을 ‘무(無)’로 처리하도록 한다. 학인이 ‘무(無)’자의 경계를 가지고 스승에게 입실(入室)할 때, 맞으면 허(許)하고 다음 공안을 주고, 맞지 않으면 2년이고 3년이고 되풀이해야 한다. 이때 참선은 중단을 극히 꺼린다. 일단 초발심으로 시작하였으면 대사료필(大事了畢)할 때까지 방심하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것이 참선이다. 마치 우물물을 풀 때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쉬지 않고 푸면 급기야는 바닥이 난다. 이때를 궁즉통(窮卽通)이라고 표현한다.
수행에 매진하는 것은 부처님을 믿음으로써 인생의 본뜻을 실천하려는 까닭이며, 부처님의 생명력을 언제나 생활상에 실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결코 교의(敎義)의 좋고 나쁨이나 신조(信條)의 얕고 깊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교의신조(敎義信條)란 수행의 체험에 매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물 가운데 달, 거울 가운데 그림자와 같이 그다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나 깨나 자기의 일상(日常)이 수행에 친근하고 있는가 어떤가에 문제를 둘 일이다. 그래서 '자기 할 일' 즉, 우리들 일상생활 자체가 모두 불법의 당체요, 그 활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지성(至誠)이 마음에 있다면 꽃을 보면 꽃이 부처의 자세로 보이고,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의 말로 들린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대교의(大敎義)이고 대신조(大信條)이다. 이와 같이 불법에 친근한 본질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다. 만약 좌선하려고 하지 않고, 불도(佛道)를 배우려하지 않으며, 정직하게 믿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불도 수행의 인연이 익지 않은 사람이므로 휴식을 취하면서 인연이 익을 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도 그 사람의 그 때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어렵고 괴롭더라도 이겨나가는 마음이 아쉽다고 하겠다.
제9장 黙照와 看話의 발달
좌선 공부는 묵조선과 간화선의 둘로 크게 나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깨침에 있으며,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어떤 때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심경을 체득하기 위하여 모든 연(緣)을 버리고 밀실(密室)에 들어가 전념으로 좌선하면서, 어떠한 지도나 혹은 선지(禪脂旨)에 대한 설법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앉아 있는 묵조선으로서는 개오(開悟)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특히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이를 통박했던 것이다.
간화선의 발달은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에 이르러 그 윤곽이 확실해지고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25) 선사를 거쳐 대혜 선사에 의하여 기초가 확립되었다.
묵조선이 정(定)을 주로 함에 대하여 간화선은 혜(慧)에 특히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육조혜능이 말한 바와 같이 본래 정(定)과 혜(慧)는 불이(不二)이다.
대혜 선사는 <대혜서>에서 말하기를, 정좌(靜坐)할 때는 일주(一炷)의 향을 사르고 정좌하되,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를 특히 주의하면서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話)를 들라고 한다.
간화선은 옛 어른의 화두(공안)을 보이는 禪이라는 의미로 공안을 스승이 주어서 제자에 보이게 함으로써 제자의 심경(心境)에 일전기(一轉機)를 주어 대오의 묘경에 이르도록 유도한다. 이 공안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첫째는 공안에 의하여 자기의 망상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무(無)’자에 참(參)하면 무자삼매(無字三昧)가 되어 내외타성일편(內外打成一片)의 심경에 도달하여 망상잡념이 없어진다. 내외타성일편이란 무(無)’자와 한 몸이 되어 ‘무(無)’자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즉 전 우주가 없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공안에 향하여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킨다. 대혜 선사가 말한 바와 같이 '조주가 무엇 때문에 무(無)라고 대답했을까?' 이에 대하여 세밀하게 참구하여 철골철수(徹骨徹髓) 의단을 집주(集注)하는 일이다. 크게 의심을 일으켜 '무(無)’자와 하나가 되어서 딴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을 때 발을 구르며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 희열을 禪에서는 법열(法悅)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천칠백여 가지의 공안을 내놓은 사람의 도력(道力)을 비판할 수도 있고, 다음은 변도(辯道: 도업을 성취하는 것)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제10장 禪의 문답과 깨침
禪의 특징 중 하나가 대개 일문일답(一問一答)으로 끝내는 문답(問答)이다. 이 문답은 대화와 다르고 지적(知的)이거나 논리적 혹은 해석적인 것이 아니다. 또 계몽적인 것도 아니고 교훈적인 것도 아니다. 소위 '체당(體當)'이다. 체당이란 몸소 부딪힌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무언가 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속 깊이 뚫고 들어가는 데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때로는 아무런 기변(奇變)이 없는 일상생활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대사실이라는 것이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한다. 배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일상생활 속의 평상심이 선작용(禪作用)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평상심을 제대로 알기까지는 상당한 고행(苦行)이 필요하다.
보통 ‘심(心)’자를 이중(二重)으로 해석하고 있는 때가 많다. 즉 상관적(相關的)인 것과 절대적(絶對的)인 것을 가리킨다. 불즉심(佛卽心) 또는 심즉불(心卽佛)의 심(心)에는 절대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비심비불(非心非佛)의 심(心)과 불(佛)은 상관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둘을 부정하여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하여 그 위에 절대적 긍정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나 절대와 상관과 둘을 대립시키면, ‘절대’도 ‘상관’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심은 상관심을 여의는 것이 아니고, 상관심도 절대심이므로 상관적이 될 수 있기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 비(非)는 대립의 세계에 있고 즉(卽)은 자기동일(自己同一)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대립 그대로 자기동일인 것이 禪의 경험의 논리이므로 절대심에 만상의 세계가 성립하게 된다. 자기동일이란 사물과 한 몸이 될 때 자기를 인식 못하고 동시에 사물도 인식 못하는 경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禪의 진수(眞髓)는 인생 및 세계에 관하여 새로운 관점을 얻으려고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禪의 내면적 생활에 돌입하려면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에 대하여 크게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견지(見地)를 열어서 그로부터 사물을 보면 지금까지의 그 사물이 한층 더 생생하고 깊고 무게가 있어 만족을 준다고 한다. 새로운 관점이란 오늘날까지의 자기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으로서는 일생동안 최대의 정신적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인생 및 세계 전체에 대하여 이때까지의 입장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을 禪에서 '깨침'이라고 한다. 깨침을 연다는 것은 생활 그 자체를 재건(再建)하는 것이다. 이 깨침이란 세존께서 보리나무 밑에서 체험한 ‘아뇩다라사먁삼보리’의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보편지(普遍智)>다. 禪의 문학, 선종(禪宗)의 사원(寺院)등이 없어져도 깨침만 있으면 선의 명맥은 영원히 전해진다. 禪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함에는 꼭 깨침이라는 최후의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禪에서 대오선(待悟禪)이라는 말이 있는데, 깨침을 배척하는 듯이 보이는 데가 있다.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대오선의 중점은 대(待)에 있고 오(悟)에 있지 않다. 이는 학선(學禪)의 기술로서 학선자(學禪者)에 대한 경계다.
깨침의 체험을 시적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의 꽃(華)이 열렸다고 하고 혹은 마음의 움직임이 일시에 발산한다고 말한다. 어떤 뜻이냐 하면 이때까지 방죽의 둑에 갇혀 있었는데 별안간 길이 트여 마음의 기계가 아무런 거침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어서 이때까지 숨어있던 동태(動態)가 자각되었다는 뜻이다. 방해되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천지가 열린다. 즉 활동의 자유성을 체득한다. 그 뜻은 여러 번 재독한다면 자연히 이해가 될 것이다.
불(佛)을 알려면 견성(見性)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性)이 즉 불(佛)이기 때문이다. 견성에 철저하지 않는 한 어떠한 공덕을 쌓아도 소용없다. 뿐만 아니라 생사의 전회(轉廻)를 벗어나지 못한다. 불(佛)은 각자(覺者)라는 뜻이다. 또한 불(佛)은 마음이고, 도(道)고 이 도(道)가 곧 禪이다. 禪이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그것에는 깊은 뜻이 잠겨 있다.
禪은 묵묵히 내성(內省)하여 자아(自我) 즉 자기의 본성(진리)을 발견하는데 주력할 일이다. 사실 인간은 선천적으로는 진짜 그 당체다. 그런데 세속 때가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짜로 전환한다. 이 세속의 때를 벗기면 소위 '견성(見性)'에 이른다. 견성에 이르는 길은 禪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강조해 둔다.
1) 팔정도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定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덕목
군더더기: 종달 이희익 노사 입적 20주기 기념집에 수록되는 이 글에 대해 엮은이(居士 法境)의 견해로는, 이상호 거사께서 종달 노사님의 <선속에 약동하는 인생>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며 그 진가를 있는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어서 더 부언할 이야기가 없다. 다만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견성에 이르는 길은 禪외에 다른 길은 없다’라는 구절에서 ‘禪’은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각자 자기의 수행 전통에 따라 지속적으로 자기성찰하게 되면 깊은 통찰체험으로 이어지며, 누구나 이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며 죽는 날까지 저절로 나눔 실천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라는 뜻으로 새기면 된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카페 구도역정(http://cafe.daum.net/kudoyukjung)으로 스크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