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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수필 스크랩 수필스케치 자료
휘목 추천 0 조회 75 16.10.28 01: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을 수필스케치 자료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선산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되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재향’ 선산을 한마디로 명징하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이 기록의 모티브가 ‘선산 장원방’이다. 장원방은 옛 영봉리를 일컫는다.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 완전리 일대를 말한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이 마을에서는 무려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이 중 장원급제자가 7명, 부장원이 2명에 이른다. 선산 중에서도 옛 영봉리를 ‘인재향의 으뜸’으로 꼽는 이유다. 이러한 영봉리를 조선시대에 장원방으로 불렀다.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서당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원방이라는 이름을 공식 문헌에 처음 소개한 이는 이 마을에서 공부한 김종직이다. 영남사림의 영수로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섰던 김종직은 1476년 선산부사로 부임한다. 당시 그는 선산지리도(善山地理圖)를 완성하고 지도 위에 선산을 상징하는 10가지(선산10절, 善山十絶)를 시로 쓴다. 선산10절 중 하나가 바로 옛 영봉리, 장원방이었다.



鄕人從古重膠庠/ 翹楚年年貢舜廊/ 一片城西迎鳳里/ 靑衿猶說壯元坊

마을 사람이 예로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뛰어난 인재들을 해마다 조정에 바치었네/ 성 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 영봉리를/ 학도들은 아직도 장원방이라 말하누나



김종직이 극찬한 장원방은 조선 개국부터 15세기 전반기까지 6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기간에 선산출신 문과 급제자는 총 36명, 이 가운데 12명이 장원방에서 배출됐다.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수는 총 7명인데, 7명 모두가 장원방 출신이다.

조선시대 과거급제는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는 1차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그중 문과가 가장 어려웠다. 문과 급제는 대를 이어 문벌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코스였고, 돈 없고 배경 없는 가난한 시골 선비들에게는 유일한 출세길이었다. 재수와 삼수, 심지어는 한평생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 7~8세 때 서당에 들어가 20~30년은 공부에 매달려야만 급제를 할 수 있었다. 장원이나 부장원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더욱 험난했다. 과거시험을 해마다 시행한 것도 아니었다.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3년에 한번씩 치렀다.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치른 부정기시험이 있었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다. 험난한 과거시험 과정 속에 장원방에서 수많은 급제자가 배출되고 장원·부장원이 잇따라 나온 것은 이 마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공부의 신 15명의 급제자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그는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조선 초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올랐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면서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이자 장원방을 극찬했던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김치의 사위 정지담(鄭之澹)도 장원방 출신으로, 1416년(태종 16) 친시(親試) 을과(乙科) 급제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낸 전가식(田可植)은 조선조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다. 그는 1399년(정종 1)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서 1등을 차지했다. 중앙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관료였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 김성미(金成美)도 빼놓을 수 없다. 1378년(고려 우왕 4) 장원방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시판사를 지낸 김성미는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중앙무대에 나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도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그는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에 올랐다.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집안은 장원방의 명문가로 꼽힌다. 김숙자는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그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문과에 급제했다.

장원방의 최고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급제했다. 아버지 하담은 1402년(태종 2)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을, 사육신으로 이름을 떨친 아들 하위지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을과에 장원급제했다. 하위지는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탓에 동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강지는 1429년(세종 11) 식년시에 급제했고, 하기지는 형 하위지와 같은 해인 1438년(세종 20년) 식년시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급제한 유면(兪勉)은 하담의 장인으로 그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하지만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다 하위지가 처형되면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세조대에 이르러 하위지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면서 장원방에서는 과거급제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선초기 인재향’이라는 명성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장원방의 학풍이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앙무대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과 정신적 가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학풍은 16세기 후반 영남사림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앙무대에 복귀하면서 다시 빛을 발한다. 명맥이 끊겼던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는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배출됐다. 그 명맥을 이은 인재가 김여물(金汝)이다. 그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인재향 장원방’의 옛 영광을 재현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해 순국한 인물로 유명하다.

김여물 이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1738년(영조 14)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조정의 제반사를 능숙하게 처리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선산읍성 낙남루의 상량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3. 지금 장원방에는…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던 장원방은 지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이 마을 출신 인재들과 관련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이고 그들이 공부했던 곳도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효행이 지극했던 김치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렸던 정문(旌門)은 문헌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김치가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었던 사당도 마찬가지다. 단계 하위지가 공부했던 독서당(讀書堂)과 그가 수양대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한때 낙향해 거처했던 공북헌(拱北軒)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선산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길을 이웃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원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현재 선산중학교 뒤편에 남아있다.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담벼락에 끼여 위태롭게 서있다.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 한켠에 15명의 과거급제자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장원방의 옛 명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원로들은 장원방을 구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은호 전 구미문화원 원장은 “선산 장원방은 인재향 구미를 상징하는 곳이다.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장원방을 지속적으로 재조명하고 사라진 문화재를 복원해 구미를 대표할 수 있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동선비)

 

1.농암 이현보(1467 - 1555)
  

본관 영천, 호 농암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의 벼슬과 검열을 거쳐 150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서연관의 비행을 공박하여 안동으로 귀양 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지평에 복직, 밀양·안동의 부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1523년(중종 18) 성주목사 때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를 하사받았고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542년 호조참판, 이듬해 상호군이 되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15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가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전하며, 예안의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2.탁정청 김유(1491 - 1555)
  

김유(1491~1555)는 조선시대 식생활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요리서인 '수운잡방'의 저자이다. 자는 유지, 호는 탁청정이며, 1491년(성종 22) 광산김씨 예안파의 파조인 김효로와 그의 부인 양성이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주로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거주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김유는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부녀자들의 관심사였던 요리서를 저술할 만큼 실용과 탐미를 적절히 조화해 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3.퇴계 이황(1501 - 1570)
  

본관 진성. 초명 서홍. 자 경호. 초자 계호. 호 퇴계· 도옹·퇴도·청량산인. 시호 문순. 경상북도 예안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부정자·박사·호조좌랑 등을 거쳐 1539년 수찬 · 정언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으로 문학 · 교감 등을 겸직, 장령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이 되고 응교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기 이원으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 것은 7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기대승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사후인 1574년에 도산서원이 창설되었고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의 단암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4.송암 권호문(1532 - 1587)
  

본관은 안동. 자는 장중, 호는 송암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 아래에 무민재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 김성일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내시교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소는 청성서원 뒤편 언덕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에 제향 되었다. 
 
5.학봉 김성일(1538 - 1593)
  

학봉 김성일은 1538년(중종 33)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아버지 김진과 어머니 정부인 여흥민씨 사이의 4째 아들로 태어났다.
  

1543년 여섯 살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소수서원, 계상서당, 도산서원 등에서 퇴계에게 서경과 역학계몽,  주자서절요 등 성리학적 학문을 전수받고, 퇴계학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568년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35세에 단종과 사육신을 왕과 충신으로 복위시켰으며, 40세에 명나라  외교사절로 다녀와 당시 중국과 외국의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41세에 홍문관 교리, 42세에 사헌부 장령이 되어 부정과 부패를 바로 잡고, 46세에 사간,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갔다.   1588년에 종부시첨정을 제수받았으며 52세 되던 해인 1590년 3월 황윤길과 함께 일본 통신사 행렬에 부사로 참여하여 일본을 방문한 후 다음 해 2월 부산에 귀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학봉은 경상우병사를 제수받고 경상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왜란 소식을 접한 후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의령의 곽재우, 진주의 김시민 등의 장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왜국과의 전투에 임하였다.
  

그리고 진주 대첩을 이끌어냈다. 내부의 갈등과 왜군과의 대비책으로 건강을 몹시 해친 학봉은 1593년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선되었고 1607년 사림이 임천서원에 향사 되었다.
 

6.서애 류성룡(1542 - 1607)
  

본관 풍산. 자 이현. 호 서애. 시호 문충. 의성  출생. 이황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 경상 ·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안동의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 등이, 편서에 '황화집', '정충록' 등이 있다. 


7.대산 이상정(1711 - 1781)
  

이상정은 목은 이색(1328-1398년)의 14대손으로 1717년(숙종37년) 고향인 안동 일직현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산이며, 본은 한산이다.
  

14세에 외조부인 밀암 이재로부터 사사받으며 퇴계학문을 소개받게  된다. 그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게 된다. 그는 1735년(영조10) 25세 때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한다.
  

1739년(영조14) 선생께서 29세 되던 해에 연원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740년(영조15)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일직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몰입한다.
  

1748년(영조23)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 상변통고’와 ‘약중편’을 편찬하였다. 
 
8.석주 이상룡(1858 - 1932)
  

호 석주. 일명 상희·계원. 경북 안동 출생이다.
  

1905년 김동삼·유인식 등과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로 망명, 지린성 류허현에서 양기탁 · 이시영 등과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9.육사 이원록(1904 - 1944)
  

호 육사. 본명 원록 또는 원삼, 활. 경북 안동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20002월 이육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한 뒤 이듬해 1월 기념관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200211월 착공하여 2004731일 개관하였다.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7683m²의 터에 건물면적 582m²,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문학관에서는 매년 이육사 탄생을 기려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육사 백일장, 문학캠프, 육사의 밤, 기념 세미나, 시인의 육필전 등을 열고 있다. 전시관에는 시집, 연구논저와 비평문, ·박사 학위 논문, 관련자료 및 단행본, 영상자료, 사진자료 등이 비치되어 있다. 이육사의 생가와 작품, 관련 자료들을 한곳에 모아놓아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주요시설은 문학관 2, 생가 모형, 3개 마당, 육사 동상, 시비, 잔디광장, 오솔길, 청포도 밭, 청포도 샘터 등이다. 문학관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해 놓았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안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생활 모습 등을 재현해 놓았다. ()체험 시설도 갖춰 놓았는데, 헤드폰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육사의 시를 눈과 귀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이밖에 2층은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육사의 시를 직접 등사기로 인쇄해 가져갈 수 있는 탁본 체험 코너, 육사가 어린 시절 뛰놀던 들판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상(時想)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봉정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1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 ‘()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4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

 

<하회마을>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 류씨(柳氏)의 집성촌이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경북 양동 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을 통해 이들 마을의 주거 건축물과, 정자, 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 그리고 전통적 주거 문화가 조선 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하회 마을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독특한 문화를 이어 온 독특한 곳이다.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독특한 지형을 갖고 있다. ‘하회(河回)’라는 이름도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흐른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라고 전한다.

<병산서원>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선조5)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광해군 12)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인조 9)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철종 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기행수필 한 편>

- 병산서원에서 -

살림집의 아름다움이 생활에서 시작한다면, 서원의 아름다움은 선학과 후학의 격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편하게만 지은 한옥이 좋은 집일 수 없듯이 격식에만 매달려서는 좋은 서원이 되지 못한다. 격식을 허물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짓기가 쉽지 않지만,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은 이런 점에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격식을 지키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담아낸 서원 건축의 백미를 만나 보자.

병산서원에 도착하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름치마를 펼쳐 놓은 듯한 병산(屛山)이다. 맨 처음 인간에게 건축을 가르친 것은 자연이다. 인류 초기 움집의 둥근 모양은 자연에서 제일 흔하게 만나는 디자인이다. 해도 달도 나무의 그루터기도 모두 둥글다. 둥지를 만드는 새와 곤충은 비록 미물이지만, 건축 역사에서만큼은 인간의 선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축에서 자연은 늘 중요하다. 이는 동서양 모두에 해당되는 말로, 서양 건축의 화려한 출발점인 그리스 신전에서도 자연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양의 대표적 건축가인 가우디(Antoni Gaud? i Cornet)도 자연에서 건축의 모티프를 찾고는 했다. 하지만 서양의 건축물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연을 표방하여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가우디의 자연 건축 역시 그리스·로마·중세를 거치며 화려했던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반면 우리 전통 건축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때로는 슬며시 자연이 되어 버려 어디까지가 건축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사람들이 서원을 제쳐 두고 서원 앞에 우뚝 솟은 병산이 낙동강으로 눈을 툭툭 털어 내는 모습에 빠져든다 해도 그것이 병산서원의 건축미를 가볍게 하지는 않는다. 자연 속에 녹아든 병산서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건물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보여 준다. 병산을 두르고 선 병산서원은 인공과 자연이 만나는 최적의 접점을 찾아냈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건축적 감동을 선사한다.

 

백 년 만의 폭설로 세상은 온통 소란스럽지만, 병산서원은 세상을 잊은 선비처럼 천연덕스럽다. 서원 앞에 군락을 이룬 배롱나무 역시 온통 눈꽃을 피우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선현을 모시는 서원에 안성맞춤인 나무다. 관리인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특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류성룡과 함께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신 곳이 병산서원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스물네 살에 벼슬을 시작하여 우의정까지 오른 류성룡은 국난을 내다보고 정읍 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한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으로 인식되어 여인이 머무는 안채 마당에는 심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게는 속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선비 정신을 의미했다. 이 나무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원을 든든하게 지켜 온 병산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서원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에서 왔다고 한다.

성리학의 비조인 주자(朱子, 1130~1200)의 스승 유자휘(劉子?, 1101~1147)의 호가 병산(屛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병산서원의 명칭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류성룡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원을 짓는 까닭은 두 가지다.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사당에 모신 스승의 제사를 지내는 것. 그래서 서원 공간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 영역과 제사를 모시는 사당 영역이다. 서원 밖에서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외삼문(外三門), 강당에서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삼문(內三門)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그리고 여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인의 영역이 덧붙는다. 병산서원의 경우, 서비스 시설을 포함한 강당 영역은 고려 시대부터 유지되던 풍산 류씨 가문의 풍악서당이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세워졌지만,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에 다시 지어졌다. 사당 영역은 류성룡이 죽은 뒤 그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이 1614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지어 류성룡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조성되었다. 이후 만대루까지 들어서고 부대시설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병산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철종 때인 1863년 사액서원(왕이 현판과 특혜를 주어 지정한 서원)이 되고,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눈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사람을 맞이한다. 서원에 다가갈수록 산머리는 기와를 타고 자꾸 건물 뒤로 내려가려고만 한다. 서원 쪽으로 다가가자 서원 뒤 산머리가 발걸음에 리듬을 맞추듯 조금씩 지붕 아래로 내려서더니 아예 지붕 뒤로 숨어 버리고 산머리를 좇던 눈발만이 분주하다. 산머리를 놓치고 내려서던 시선이 대문(외삼문)의 현판을 잡는다. 復禮門(복례문).‘예를 다시 갖추는 문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는 공자의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자는인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한다.‘나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이라는 말이다. 예는 인을 품고 있다. 복장을 추스르며 마음까지 단속하던 옛 선비의 기풍이 느껴진다. 전통 건축이라고 해도 종류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에는 차이가 있다. 살림집의 아름다움이 생활에서 시작한다면, 서원의 아름다움은 선학과 후학의 격식에서 출발한다. 복례(復禮)는 안팎으로 갖추어야 할 이 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편하게만 지은 집이 좋은 한옥일 수 없듯, 격식에만 매달려서는 좋은 서원일 수 없다. 격식을 허물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짓기가 쉽지 않지만, 병산서원은 이 점에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예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복례(復禮)는 예에 인()의 마음이 담겼음을 뜻한다. 복례문은 소실점 효과를 만들어 묘한 건축적 감응을 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바로 병산서원의 슈퍼스타 만대루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마음도 사로잡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좁은 문을 지나 나타나는 만대루가 워낙 커서 사람을 순간 당황하게 하지만, 이는 자연스럽게 건축적인 효과로 이어진다. 만대루를 받친 기둥이 만든 사각 프레임으로 시선이 모여, 놀란 눈길이 차분히 계단을 올라 강당을 향하게 한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의 답답함과 누 밑의 좁은 통로는 만대루가 주는 감동을 예비하는 장치다. 좁은 누 밑 계단을 지나 만대루에 오르면 사방이 터지면서 주변 풍경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건물이 창조해 낸 틀 속에서 재해석된 자연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은 산세가 좌우로 잦아들며 시야를 끝없이 확장시키더니 건물 속으로 들어서는 낙동강과 함께 다양한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어디쯤 해가 있을까?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그린 것처럼, 만대루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 낸다.

건축적으로 만대루는 강당의 앞마당이 확장된 모양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건물 기둥이 모두 둥근기둥이어서 앞마당 자체가 기둥에 둘러싸인 건축적 이미지를 획득한다. 병산의 깎아지른 절벽과 둥근기둥이 만드는 이미지는 학자보다는 예술가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당시 유학자들은 병산을 앞에 두고 두리기둥으로 세운 서원의 마당을 신선 세계로 상정하고 그 세계를 만대루까지 확장한 것은 아닐까?

()에 대한 첫 기록으로 꼽히는 중국의 사기(史記)에서는 누가 만들어진 배경으로 신선(神仙) 사상을 꼽고 있다. 신선을 꿈꾸던 유학자들의 마음은 서애의 스승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도산서당에서 퇴계가 쓴 글을 모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는 자신이 꿈꾸던 생활 속에 녹아든 노장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다. 그 뉘앙스가 강당의 마당과 만대루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만대루(晩對樓)'달을 기다리는 곳' 정도로 해석하면, 그 의미가 훨씬 강렬하다. 표표히 떨어지는 달빛을 건지는 선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디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소실점을 좇아서 생각 없이 좁은 문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갑자기 나타나는 커다란 만대루에 압도당하고 만다. 다시 누마루 밑을 지나 만대루에 오르면 갑자기 터진 시야가 주는 극적인 공간 변화로 인해 커다란 건축적 감동을 받게 된다.

 

마당 너머 입교당(立敎堂)이라는 이름표를 단 강당 건물도 흥미롭다. 교실과 교무실에 해당하는 이 건물은 방 사이에 대청이 있고, 기단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계단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그래서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면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는 구조다. 비움과 채움의 매트릭스. 이를 유교의 음양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굳이 유학일 필요는 없다. 한옥에 구들을 들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궁이고 대청이고 마당이다. 이리하여 아궁이가 비움이면 계단은 채움이 되고, 방이 채움이면 대청은 비움이 된다. 나아가 건물이 채움이라면 마당은 비움이 되는 것이다. 한옥에서 채움과 비움은 하나의 쌍이다. 구들을 양민이 발전시켜 온 점을 돌이켜 보면, 비움과 채움의 미학은 관념에서 출발한 철학이 아니라 민초들의 생활이 낳은 생활 철학이다. 조선 양반들의 상징적인 건축물에 스며든 민초의 생활 미학을 읽어 내는 것도 병산서원을 보는 재미다.

 

마당 좌우에 자리한 홍매화와 청매화가 모두 신선처럼 흰 옷을 입고 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강당으로 가는 동안 신선의 호위라도 받는 기분이다. 조선 시대라면 서원의 중심 계단을 이렇게 편하게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왕에 누리는 호사이니 잠깐 엉덩이를 들여 대청에 앉는다. 왼쪽에 있는 방 명성재(明誠齋)는 서원의 교장실이고, 오른쪽의 경의재(敬義齋)는 교무실에 해당된다. 교장이 대청에 앉았을 만한 자리를 찾아 앉아 본다. 대청 중앙 안쪽에 자리를 잡고 보는 경치는 만대루에 올라가 보는 풍광과는 또 다른 건축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입교당의 기둥으로 다시 한 번 분절된 자연의 풍광은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최적의 접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병산서원의 건축미가 입교당 앞마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행과 도란거리며 바라보는 뒷마당의 다감한 모습은 만대루가 만드는 이미지와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유학의 중심 공간인 입교당은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면서 민중의 생활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장실에 해당하는 명성재에 앉아 창과 문을 모두 열어 놓으면 병산서원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재와 서재의 학생들은 움직이기 전에 명성재의 문부터 살폈을 것이다.

서원에서 격이 제일 높은 곳은 입교당 뒤편의 사당이지만 주변을 장악하고 감상하기에는 이곳 입교당의 대청 자리가 으뜸이다. 병산서원은 입교당 대청에 앉은 이의 시선을 고집한다. 건물은 철저하게 입교당의 교장 자리를 중심으로 지어져, 그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서원 전체를 장악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구심력은 시선의 흐름을 무한히 밖으로 보내며 건축적인 원심력을 만들어 낸다. 원심력에 이끌려 시선이 밖으로 흐르자 마당을 오가는 몇몇 유생의 조심스러운 발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입교당 앞 학생들이 머무는 동재와 서재의 모양은 닮은 듯 다르다. 문살의 수가 다르고 툇마루 벽 모습도 다르다. 왼쪽이 격이 높으니 동재에 상급생이 머물렀을 것이다. 동재는 담장과 나란히 짓느라 약간 비뚤어졌지만 눈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입교당과 직각으로 짓는 격을 고집했다면 지형에 맞춰 쌓은 담장과 균형이 맞지 않아 보기에 불편했을 것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한옥의 건축 방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한옥의 자유분방함이 낳은 우리 건축의 매력이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원래 나무로 되어 운치가 있었지만, 현재는 단조로운 돌계단이어서 안타깝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은 보통 사당과 한 담장 안에 있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사당과 전사청이 담장으로 나뉘어 있다. 사당-전사청-주소는 길을 하나로 잇는 것이 편하다. 주소(廚所, 부엌)에서 음식을 하여 전사청에 주면 여기서 제사상을 차려 사당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사청에서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자연 지형에 맞추어 짓는 대신 편리함을 양보한 모양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병산서원 전체의 흐름에 닿아 있다.

 

다음으로 꼭 봐야 할 곳이 살림집인 주소다. 외관상 사대부의 안채 정도로 보이는 주소는 하인들의 공간으로 강당 영역에 바투 붙어 있다. 강당 영역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조석을 책임진 곳이기 때문이다. 서원에 딸린 노비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병산서원 어느 곳도 볼 수 없다. 생활하면서 만대루를 볼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서원 전체의 관계에서 보면 분명 소외된 공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자유로운 공간이다. 서원 건물들 모두 강당인 입교당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는 중앙 집권적 배치지만 주소에서만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언뜻 보면 소외된 공간이지만, 훨씬 인간적인 곳이고 여기에서 보는 풍광도 대단하다. 대문을 열어 놓고 대청에 앉으니, 마당에 흩날리는 눈발이 문밖의 설경과 어우러져 만대루나 강당에서 보는 풍경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주소 앞에 있는 뒷간의 담장은 달팽이 모양으로 아기자기하다. 슬쩍 들어가 앉아 보고 싶을 정도다. 공연히 요의를 느끼며 안으로 들어가니 하얀 눈이 덮여 차마 그 깨끗함을 더럽힐 자신이 없다. 볼만한 뒷간이 또 하나 있다. 서원의 대문(외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담장 끝에 있는데, 이 화장실도 꽤나 운치가 있다. 변을 보는 자리를 사람 눈처럼 타원형으로 디자인해, 홀로 된 공간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저 혼자임에도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 영원히 변하지 않을 가르침 하나를 마음에 담아 문을 나선다.

서원을 떠나기 전 다시 만대루에 오른다. 만대루에 올라 눈발과 함께 떨어지던 한낮의 햇살을 추억한다. 이미 아까의 그 풍경이 아니다. 서산으로 방향을 잡은 해가 낙동강을 자극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만대루에 번진 석양빛이 아쉬운 듯 마음을 잡는다. 하지만 이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어둠이 내려 위태로운 고개를 넘는다. 서애가 넘던 그 고개다. 언덕 위로 위태롭게 올라서는 사이 해는 넘어가고, 병산서원은 자연 속으로 암전한다. 오호! 만대루여!

 

아무리 바빠도 부용대에 올라가 하회마을을 보면 좋겠다. 병산서원에서 멀지도 않고, 강이 마을을 감싼 독특한 하회마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부용대 아래에는 옥연정사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애가 낙향하여 머물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옥연정사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건물이지만, 강과 어우러지는 경관도 빼어나다. 하회마을 안에는 서애가 삼십 대 중반 잠시 머물던 원지정사가 있다. 옥연정사와 원지정사, 두 건물 모두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원지정사의 누각 연좌루(燕座樓)에서 바라보는 부용대 역시 일품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마주한 병산을 연상시켜 연좌루를 작은 만대루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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