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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시작할때는 내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다 털어놓으려고 하였으나 지극히 사생활에 관한 영역은 털어놓기가 망설여진다. 밤새도록 글을 썼다가 지우고 그러다가 다시 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지우고 말았다. 그냥 내 가슴속에 묻어두고 말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여기서는 내 인생사의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고 넘어간다. 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시기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어렵게 수료하였다. 학위논문을 써야했지만 업무도 바쁘고 가정적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어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지도교수가 자꾸 독려를 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논문심사 청구 마감일까지 반 정도밖에 쓰지 못하였으나 지도교수의 배려로 일단 심사를 청구하고 심사를 받으면서 논문을 완성시켜나갔다. 석사학위논문제목은 “조선시대의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이다. 헌법이 전공인데 우리 헌법의 뿌리에 관심이 많은 지도교수의 뜻에 따라 법학 논문치고는 좀 특이한 방향의 글을 썼다. 논문심사는 약간의 보완을 거쳐 어렵지 않게 통과되었고 1996년 여름학기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1997년 초 뜻하지 않은 일로 창원에서 진영으로 이사하였다. 한편 승진에 대해서는 애초에 마음을 접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으나 매번 인사시기에 나보다 경력이 뒤진 사람들이 먼저 승진해서 나가는 것을 보면 남 보기 부끄럽기도 하고 감정이 매우 상하였다. 7급으로 입문하여 14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승진이 안 되고 있으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을 비우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도교육청 총무과 인사계에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승진시켜달라고 얘기하였다. 그런데 승진후보자명부 순위가 까맣게 밀려있었다. 지역교육청에서 근평이 좋지 않게 올라온다는 뜻의 얘기가 있었다. 내가 마산교육청에 있으면서 누구에게든지 근평 잘 봐달라고 사정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서열대로는 해주리란 기대는 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마산교육청 근무초기부터 윗사람들의 눈 밖에 나기는 했으나 일을 성실히 한 것은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 말을 안 한다고 해서 근평을 엉망으로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근평순위를 놓고 동료 직원간에 상호 반목질시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은데 거기에 나까지 가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승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기로 1998년 1월 인사에서 가지 말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관내 팔룡초등학교로 나왔다. 초등학교로 나오면서 가장 걱정한 것이 비자금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범위까지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다행히 교장이 정직한 분이라서 좋았다. 교장은 나와 함께 밥을 먹으면 먼저 돈을 내고 자기가 두 번사면 나에게는 한번 사라고 하였다. 그리고 월정액 업무추진비도 혼자서 쓰지 않고 교감, 그리고 서무과장인 나와 나누었다. 자신에게 지급한 장거리 출장여비가 많다고 생각되면 자진하여 반납하였다. 업자와 계약함에 있어 비밀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상급기관이나 내빈들에게 꼭 인사를 하려는 것이 한 가지 흠이었다. 나는 개인이 착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계로 하여 현실적 관행을 묵인하기로 하고 교장을 돕는 의미에서 비자금도 만들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실에 순응하려는 이러한 생각은 6급승진후 청백리동호회를 발견하고 나서 원칙주의로 회귀하였다. 나와 고민을 함께하는 동지가 있다는 생각에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팔룡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교단지원을 위하여 애를 썼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원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과분한 대우를 받았다. 약 8개월이 지난 9월 어느 날 교육청 H계장으로부터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고 내가 승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때 오기로 승진시켜줘도 안하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간사한 인간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공직생활 15년 만에 처음 맞은 승진소식에 매우 기뻤다. 여러 사람의 도움과 당시 도교육청 인사담당자의 배려로 생각하며 그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1998년 10월 1일자로 승진하여 김해에 있는 영운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진영에서 김해시내로 또 이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가정적으로는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또 밀어닥쳤다. 인생이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것도 재미없는 일이겠지만, 오직 성실 하나로 열심히 잘해보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환난이 닥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나는 나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여차하면 세상을 떠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신문을 펼치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국립창원대학교 대학원 신입생 모집광고 중 ‘법학박사과정 신설’이라는 항목이 눈에 번쩍 띄었다. 죽으려고 맘먹으면 뭔 짓을 못하겠는가? 사정이 어려웠지만 박사한번 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응시원서에 첨부해야하는 추천서를 받기위해 석사과정 때의 지도교수를 찾았을 때, 그분은 의외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응시를 만류하였다. 꼭 하려면 다음해에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미 입학할 사람이 내정되어있는 듯한 암시를 하였다. 그래도 한 번 원서를 내고 싶어 하는 나의 태도를 보고 지도교수는 어쩔 수 없이 추천서를 써주기는 하였지만 안 될 것이 뻔하였기에 표정은 밝지 않았고, 나 역시 마음이 떨떠름하였다. 지도교수는 자신이 추천서를 써준 제자가 떨어져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4명 정원에 10여명이 응시하였다. 이력을 보니 모두가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현 국회의원), 법무사, 법원사무관, 고시학원장, 기업체 이사 등 등, 그 중 내가 가장 초라해 보였다. 거기에 나와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공부한 젊은 친구 하나는 아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쓰고 응시를 하여 지도교수를 더욱 난처하게 하였다. 아무리 잘해도 나와 그 친구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형방법은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하였다. 차라리 필기시험으로 한다면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겠는데 서류심사와 면접으로 한다니 별로 내세울게 없는 나는 자신이 없었다. 서류심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증서는 무엇이든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육부장관 상이라도 하나 받아놓는 건데...” 준다는 상도 마다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것이 후회되었다. 7급 때 교육감상 하나 받아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것도 야영장에 근무할 때 싫다는 걸 상급자가 나에게 억지로 떠맡긴 것이었다. 새삼 그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하도 낼만한 것이 없어서 부끄럽지만 교육감상장과 군대있을 때 받은 사단장 상장 그리고 대학 장학증서 몇 장을 복사해서 제출하였다. 면접을 실시할 때 심사위원 교수들은 대체로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며칠 후 지도교수로부터 합격이라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심사결과 나는 5등이라서 탈락의 위기에 있었는데, 교수들의 만장일치로 행정학과 정원을 1명줄이고 법학과 정원을 1명 늘여 나를 구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박사과정에 합격하고 대학원공부를 위해 영운초등에 발령 받은 지 1년 만에 김해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내신을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