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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功과 執念으로 쌓아올린 金子塔 |
이 동 훈 Lee, Donghoon |
편집자註 본란은 이동훈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전시와 대전문화방송이 '제1회 대전시와 이동훈미술상'을 제정하여 실시함에 있어, 고 이동훈의 제자이자 동 미술상의 운영위원인 화가 송진세씨가 본지를 방문하여 스승의 '예술과 생애' 대한 기고와 함께 필자에게 평문을 의뢰해 왔기에 그 자료를 검토한 결과 새 조명의 의미를 느껴 이동훈의 생성과 작품세계를 역사적으로 바로잡고 객관적인 평가를 통한 재조명을 위해 특집으로 엮었다. 특히 스승에 대한 올바른 재평가를 갈망하는 제자의 충정에 감명을 받았으며, 자료수집에 적극 지원한 송진세씨의 열의에 감사를 드린다. |
이번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대전시와 대전문화방송은 '제1회 이동훈 미술상'을 회화, 조각, 공예 등 3개 장르의 수상후보자를 선정하여 오는 10월 22일 시상한다. 옛말에 '스승만 한 제자'가 없다는 속설은 이젠 지난 세기의 古事가 되었다. 정신은 스승의 가르침을 쫓되 예술의 세계에서만은 스승을 능가하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나올수록 그나라 미술은 발전하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 만이 그 나라의 문화예술이 세계질서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한국미술의 가장 큰 약점은 독창성과 자기언어의 창조가 아니라, 선진국에 유학하여 모방과 아류를 배우고, 만드는 타성과 습속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적인 작가가 탄생되지 못하는 취약점과 문화의 후진성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런 나라가 된 것이다. 세계의 畵聖들은 한 세기 동안에 한 두 명이 거론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배워왔다. 세계에서 100대작가의 반열에 낀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유사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동훈은 올해 타계 꼭 100주년을 맞고 있지만 그가 미술사적 인물인가는 앞으로 꼭 100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인 미술사가나 세계의 사가들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세기의 세계의 화성들은 따로 미술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연구한 화가들은 별로 없다. 한마디로 당시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공인을 받고 있는 박수근 같은 경우도 역설적인 얘기가 될진 모르지만 만일 그가 보통학교 출신이 아니고 일본이나 프랑스 등에 유학을 했다면 결코 오늘의 박수근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른바 앵무새나 아류가 나올 수 있는 계연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가까운 일본에도 사까모도한지로(坂本繁之郞)라고 하는 정부가 지정한 국보급 화가가 있다. 그는 초등학교가 최고의 학벌이다. 그와 동창인 미야모도시게루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에 유학했다. 평생 사까모도에게 라이벌로 도전을 했지만 사까모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타계를 했다. 그림으로서의 세계적인 명인은 학문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래적으로 천부적인 혜안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라는 추정이 가능할지 모른다. 사족이지만 창작미협의 정신적 지도자 고 유경채는 사생을 위해 스케치를 할 때는 자신이 현재 서 있는 포스트에서 180도 뒤로 돌아 하늘을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한다고 했다. 이른바 하늘의 무한한 공간이 스케치북이요, 찬라적으로 작가의 시각에 이미지로 각인된 모든 현상들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서라고 필자에게 역설한 적이 있다. 그의 국전 수상작 <폐림지 근방> <신촌고지대 사람들> 등은 모두가 수작이요, 양식에서 세계적인 명화가 될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으로 선회하면서 구상적 요소의 작업이 중단되어 무척 아쉽게 생각했다. 예술가가 추상이나 구상이나 한가지 패턴에만 매달리는 것은 유독 우리나라에만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
서양미술의 종주국인 유럽에서는 별로 양식상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위에서 상술한 말들이 작가 이동훈에게는 현실적으로 상반되는 결과를 낳게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대전시와 대전문화방송이 '제1회 이동훈 미술상' 안내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표제작품 <정물화>는 꽃 그림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프랑스의 모 현역화가(90대초반-프랑스대사관이 국내 초대전을 가진바 있음)와 기법과 양식, 그리고 분위기가 너무나 닮아 있어 필자에게는 가슴이 찡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도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동훈이 먼저 살다간 선배화가이기 때문에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후손들이 작품세계의 특징과 예술성을 재발굴함으로써 자칫 묻혀 버릴법한 선배화가들을 빛을 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책무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 이동훈은 의주공립농업학교와 평북사범학교를 나와 일본의 구마오까(熊岡)에 유학하여 유화를 수학했으며, 도오다시게오(遠田運雄) 스승에게 4년간 사사를 했다. 일본에 유학한 선배화가들을 싸잡아 친일작가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문제는 그의 작품의 성향과 양식상의 문제다. 세계미술시장에서 명화나 예술성이 뛰어난 미술품을 놓고 친일작가이기 때문에 유명작가의 반열에 낄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일제에 동조하고 협력을 한 것은 한국인의 정서와 감정일 뿐, 적극적인 확신범만이 친일작가 일 뿐이지 결코 총칼에 의하여 부역을 한 화가는 친일작가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이동훈은 일제치하에서 1급훈도 정교사일 뿐이지 학교의 관리자나 책임자, 장학관 등 인사상의 승진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고사하고 해방 후에 지방대 등에서 교수로서의 초빙을 받았지만 일제사양을 했고, 훗날 서울과 대전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기면서부터 시간강사, 초빙교수 등을 수락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수많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스승이 된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타고난 천직일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그것이 작가에게는 천국이었다.
그는 1930년대의 한국 최초의 화가 고희동, 이종우, 라혜석 등을 비롯한 도상봉, 이병규, 송병돈, 장발, 오지호, 김인승, 박득순 이마동, 이인성,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손응성, 장리석 등과 교유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작가로 하여금 이렇듯 유명인들과 함께 한국화단을 주도케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평자의 시각에서는 그의 예술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는 경향이 비쳐지기도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판단의 기준이 평자의 정실이나 편견에 의한 것이라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오,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요, 위해 행위를 하는 결과가 된다
李東勳의 作品世界
이동훈의 작품세계는 그가 추구하는 정신적 주제와 예술의 양식에서 독자적인 자기언어를 만들어 낸 화가라고 말 할 수 있다. 몇 가지 특징과 기법상의 방법론 등을 분석을 해 보면, 아카데믹한 예리한 선묘가 아닌 둔탁하면서도 질박한 線條, 활달하면서도 경쾌한 붓 작업, 피사체의 포괄적인 시계에 포커스를 맞춘다던지, 합리적인 공간의 분할과 물상의 포치, 황토 빛과 다갈색의 한국의 빛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주제로서의 인간주의 추구 등이 작가의 사상이자 조형의 철학이 아니었나 싶다.
대표작 몇 점만을 들어 설명을 가해 보면 그의 작품은 꾸밈이나 가식이 없는 한국의 서정, 혹은 과장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목가적인 분위기에 향토색 짙은 순박하고 정감 있는 풍경들이 적공을 쌓듯 하나하나 화폭을 물들이고 있다. 작품 <계룡산 추경> <능내의 가을> <강변의 목장> <유성의 가을> 등은 수목 등 덩어리진 형상들이 풍요롭게 화면을 수놓고 있으며 작가만의 어법으로 꼽을만하다. 기법상의 맥락이 같은 톤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산성풍경> <보리고개> 등은 56년과 70년대의 작품으로 근 15년 동안의 텀에 많은 변화와 함께 세련미를 더해 주는 승화되어 가는 경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어촌의 광장>과 <충무항>은 선착장이나 어촌의 항포구를 그리고 있는데 조감도나 모형의 도형을 그려놓은 듯 반듯하고 평면기법의 구도를 시도하려는 현대감각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예술의 가능성이 70년대 들어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작품 <정물>과 <샤보덴이 있는 정물> 등은 화분과 백자 항아리, 탁자 위의 책자와 과일 등 많은 물상들이 밀도감 있게 화면을 이상적으로 메꾸고 있다. 물상의 등신비를 꼼꼼하게 따져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화면은 다갈색조와 등황 등 한국의 오방색 빛깔이 수놓아지고 있으며, 한국성에 발현에 의도적인 배려를 하고 있는 듯 싶다.
結 論
이동훈의 작품세계를 요약을 하면 필선의 의식적인 왜곡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계곡과 들, 산야 등을 보면 때묻지 않은 원초적인 처녀림, 순수한 한국인의 환타지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무척 노력을 해 온 화가임을 읽을 수 있고, 정신적으로 그만큼 작가가 오염되지 않고 생애를 깨끗하고 순수하게 살다가 세상을 등진 작가였음을 그의 작품을 통하여 느낄 수가 있다. 이제 작가 이동훈은 이승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과 생애는 우리와 함께 오래 오래 살아갈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동훈 작품의 실체와 예술성을 심층 분석하는 작업들이 시작되어야 하리라고 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이 해야할 역사적 과제가 아닌가 싶다.
李東勳 畵伯의 人生과 藝術世界
송진세 / 오지호·이인성 미술상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양화 심사위원장
1. 이동훈의 誕生과 生涯, 그리고 社會變遷 李東勳은 1903년(음)10월 25일 평북 태천군 원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단양(丹陽)인 선친 李鳳九의 5남매 중 위로 누님을 한 분 두고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이봉구는 일찍이 개화기의 사회상에 눈을 떠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라도 고흥군수를 지냈다. 그는 명문의 가정의 아들로 성장하면서 조행탁이(操行卓異)하고 훤칠한 체구와 청고한 면모로 영매하여 현달할 인재로 기대되었다. 암울했던 일정시대에 조혼으로 가정을 꾸리면서 학업에 종사한 그는 의주공립농업학교와 평북사범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구마오가(熊岡)에서 서양화를 수학하고, 도오다 시게오(遠田運雄) 스승으로부터 4년간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서양미술을 師事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부염 등이 악화되어 귀국을 서둘렀다. 1924년 신의주에서 교육계에 훈도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그 후 서울, 대전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1945년에는 8.15 광복과 함께 대전공업학교(현 국립 한밭대학교), 1947년 국립대전사범학교(후 충남고등학교, 공주교육대학교로 통합)에서 1호 1급으로 근무하였으며, 1969년 미술교육자로서의 45년간의 길을 마감하고 정년퇴임 하였다. |
이동훈은 196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 출강하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984년 뜻하지 아니한 제자의 방문전화를 받고 반가워 출영을 나가서, 화단을 산책하다가 빙판 위에서 낙상, 골절상을 입고 입원가료 중 합병증으로 그 해 5월 25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훈은 유성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천안공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
그는 체구가 당당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선이 굵고, 호방한 남아다운 면모와 의지가 굳고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천성이 허세를 모르는 올곧은 인품을 지녔으며, 검소한 생활과 겸손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인간 李東勳은 강한 인상과는 반대로 외유내강한 따뜻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으며, 천한 세상과는 타협을 싫어하는 진솔하고 정직한 인물이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철저하면서도 선악에 대한 好否가 분명한 그는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고사를 했으며, 장학관, 교장 등에 임명하려 했지만 끝내 관리자의 보직을 싫어했으며, 오직 그림에만 매달려 한가지에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로지 충청의 향토적 풍광에 빠져 소와 계룡산, 강과 언덕을 아끼면서 사생하고 화폭에 담았으며, 지지지행(知至, 知行)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인지했으면 철저한 행동으로 실천하는' 예술가이자 미술 교육자였다. 2. 西歐美術 도입기의 활동과 李東勳의 藝術世界 李東勳(1903~1984)은 서양미술의 도입기에 몇 안 되는 서양화가로 牧歌的이고, 향토적, 抒情的 자연을 소재로 한 차원 높은 회화 세계를 개척한 작가이기도 하다. 비운의 시대에 일본 동경 구마오가(熊岡)에 유학하였으며 작가이며 스승인 도오다 시게오(遠田運雄)에게서 체계적인 서양미술에 대해서 4년간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師事 받았다. 그러나 피부염증이 악화되어 더 이상 수학을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1928년 처음 鮮展에 입선한 후 1940년까지 '풍경' '봄이 가까이 오다' '압록강 기슭' '강변풍경' '서대문밖 풍경' '좌상' '창밖 전망' '신록의 언덕' 등을 출품하여 한국인으로서 재료와 구급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입선을 따내는 쾌거를 올렸다. 그는 이 무렵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파리에 처음 유학한 이종우(홍대 초대 학부장, 학장), 라혜석(최초에 동경과 파리에 유학한 여류화가), 도상봉(예술원회원·심사위원장), 이병규(심사위원장), 송병돈(서울대 교수), 장 발(서울대 미대학장), 오지호(조선대 미대 창설자·예술원회원), 이마동(홍대 미대학장·미협이사장), 김인승(이화여대 미대학장·목우회회장), 박득순(서울대 교수·미협초대이사장), 박영선(서라벌-중대-예대미술과 창설자). 이인성(최연소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 수상자), 김환기(홍대교수), 장욱진(서울대 교수), 이중섭(천재화가), 손응성(사실주의 유명작가), 장리석(중대교수, 구상전회장) 등과 교유하면서 서화협회 등에서 미술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
해방 후부터 국전 창설 당시 제1,2회에 특선과 '牧場의 아침'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그는 동 국전의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국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1958년에는 세계미술의 흐름에 자극받아 구상미술의 새로운 태동을 위한 木友會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창작생활과 함께 미술교육계에 몸담아 활동하였다. 그는 꾸준히 차원 높은 작품활동이 높이 평가되어 시·도 문화상, 미술공로상, 녹조소성훈장, 대한민국문화포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으며, 작고 후에는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1986년 국가에서는 화집발간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李東勳회고전>이 개최되었으며, 그 1년 전에는 대전일보 주최로 화집발간과 <李東勳유작전>이 대전문화원 미술관 전관에서 열렸다. 1989년에는 제자들이 주최하여 5주기 기념 <李東勳畵伯 追慕展>이 열렸으며, 여기에는 김원(홍대 대학원장), 박득순(서울대·영남대 교수, 초대 신미술회회장), 이종무(홍대교수·미협이사장·예술원회원), 장리석(대통령상 수상자·중대교수·구상전 회장), 유경채(예술원회장·제1회 국전대통령상·서울대교수), 김형구(세종대교수), 강태성(9대통령상수상·이화여대 학장), 김숙진(홍대·세종대 교수), 이남규(공주대·원광대 교수), 최종태(서울대교수, 예술원회원), 이인영(국전 국회의장상 수상자·한남대 교수), 이지휘(계명대 학장), 민경갑(예술원회원·원광대 교수), 이종수(이화여대 교수), 류희영(대통령상 수상·이화여대 교수) 등이 추모 출품하였다. |
그는 서울의 명문대에 지망하는 재직학교 외의 학생에게도 데생지도를 아끼지 않았으며, 주요 대학의 미술대학장, 미협회장, 심사위원, 운영위원, 교수, 예술원회원을 비롯한 원로 중진작가를 숱하게 양성했으며, 현재도 그 제자들이 원로, 중진으로서 작품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李東勳은 어둡고 비참했던 사회현상 속에서 고뇌를 딛고 일어선 예술의 입지전적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했으며, 후학들로부터 존경받는 미술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고향을 멀리 두고 이역천리 낯선 땅에서 절대적인 고독의 경지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개척정신과 그 나름의 강인함을 통하여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회화세계 구축에 성공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자연과 묵시적인 교감을 하고 심금을 울려준 외연의 세계를 내면의 세계에서 수렴하고 재창조 될 때 또 다른 승화된 창조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체험의 미학을 통하여 터득한 그는 한국의 서정과 향취를 농밀하게 화폭에 담는 중후한 색채의 체험과 실천의 표상이 된 것이다. 고향의 어딘가에서 보았음직한 산야와 강과 물을 그는 제2의 고향인 충청도에 와서도 친숙하고 따뜻한 삶을 만끽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든 잔상과 편린들이 모두가 그의 작품의 주제요,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리라. 한국적인 정취에 흠뻑 밴 그의 작품세계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이동훈의 작품세계는 그를 사랑하는 미술인 선후배와 제자들, 그리고 한국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우리와 함께 역사 속에 오래 오래 살아 갈 것이다. 회상컨데 그는 어려운 시대에 물감을 구할 수 없어 수은과 안료, 아주까리 기름이나 호두기름 등으로 우둔하고 두툼한 마티엘 등 3차원적 채색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등 고행의 길을 걸었다. 바르고 또 바르고 붓맥질은 두께를 더하고 향정이 깊게 쌓여 중후성과 굵은 선은 복잡다난한 형상의 잡선을 통합하여 重厚雄建한 가운데 質致深厚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세계는 찰라적인 것이 아닌 장기적으로 다져진 자율적 실천노력으로 얻어낸 인내의 소산이다. 그는 진실한 삶, 진실한 예술인으로 극도의 이기주의적이고 속물적인 세상의 난맥상을 경계하는 등 일신영달의 유행을 멀리하고 시간성에 구애없이 새로운 차원의 새로운 思惟를 회화적 언어로 승화시키는데 참 고뇌의 길을 걸었든 숙명의 藝術人이었다. 이동훈은 새로운 형태의 중후한 채색을 겹겹이 중첩시켜 그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새로운 발색, 신비의 토속미, 공간분할과 형태의 미학 등 새로운 조형이론을 만들어낸 그의 예술은 호방하고 활달한 굵고 투터운 필선에서 그 성가는 더욱 빛나고 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세계, 유명을 달리 하는 순간까지 예술세계에 애정과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그는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생명 없는 마른 마포의 평면 위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한 시대의 창작품을 완성해 가면서 구도자적 삶을 말없이 실천했던 작가 이동훈은 이제 이승을 등지고 떠났다. 한국미술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증인이요, 미술가인 그는 비록 몸은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갔지만 그의 예술과 생애, 그리고 교훈은 우리들 후학들과 그리고 오래도록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李東勳 年譜 1903~1984 * 1903 음력 10월 25일 평안북도 태천군 원면에서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후에 고흥군수를 지낸 이봉구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남. 본관은 단양 * 1919(16세) 5월 25일 두 살 위인 선우 형과 결혼 * 1920(17세) 4월 1일 의주 공립농업학교 입학, 7월 25일 장남 현군 출생 * 1923(20세) 3월 22일 의주 공립농업학교 졸업, 4월 1일 평북사범학교 강습과 입학 * 1924(21세) 3월 24일 평북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3월 31일부터 평북 용암포 보통학교에서 '훈도'로 잠시 근무한 후 신의주 보통학교로 옮* 1935년 8월 31일까지 근무 * 1928(25세)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풍경> * 1929(26세) 차남 홍균 출생 * 1931(28세) 3남 수균 출생,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봄이 가까워 오다> * 1932(29세) 12월 20일부터 1935년 8월 31일까지 일본 동경 구마오가 회화도장에서 서양화 수강,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강변풍경> * 1935(32세) 서울로 이사하여 9월 1일부터 1941년 7월 31일까지 6년간 서울 죽첨국민학교에서 '훈도'로 근무 * 1936(33세) 4월 1일부터 1940년 5월 1일까지 서울에서 도오다시게오씨에게 4년간 사사,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서대문밖 풍경> * 1937(34세)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좌상> * 1939(36세)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창밖 전망> * 1940(37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신록의 언덕> * 1941(38세) 8월 1일부터 1945년 4월 20일까지 서울 미동국민학교에서 4년간 '훈도'로 근무 * 1945(42세) 대전으로 이사하여 4월 21일부터 1947년 10월 31일까지 대전공업대학에서 2년간 '교유'로 근무, 이후 대전을 중심으로 계룡산, 갑사, 농촌풍경 등의 작품을 많이 남김. 대전에서 감격의 8.15 민족해방과 조국광복 맞이함. 12월 오랜 친우인 충무시의 수천당한의원 원장인 김덕황씨를 방문 아름다운 충무시에 매력을 느껴 그 후 충무시 풍경을 많이 남김. * 1946(43세) 개인전 갖고 이후 1969년까지 대전에서 7회 개인전 가짐 * 1947(44세) 11월 1일부터 1963년 2월 7일까지 16년간 대전사범학교에서 교사(1호 1급)로 근무 * 1948(45세) 대한민국 정부수립,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미공보원에서 개인전 * 1949(46세) 12월 5일 제1회 국전 서양화부 특선 <목장의 아침>. 이인성, 박영선씨 등과 친교를 가짐 * 1950(47세) 비극의 6.25동란을 맞고 부산으로 떠남 * 1953(50세) 7월에 휴전성립으로 정부 서울로 환도. 12월 21일 제2회 국전 서양화부 문교부장관상 <목장> * 1954(51세) 제3회 국전 서양화부 입선<낙화암> * 1955(52세) 국전 심사위원회에서 추천작가로 초대됨. 제4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농가와 소>. 10월 6일 충청남도 '교육공로자상' 수상 * 1956(53세) 6월 18일부터 24일까지 제5회 개인전 - 대전시내언론 및 각 예술단체의 후원으로 대전문화원에서 <춘정> 외 22점. 제5회 국전 초대작가 2점 출품 <하일> <옥상일우> * 1957(54세) 제6회 국전 추천작가로 2점 출품 <금련화와 샤보텐> <푸른동�>. 11월 중도일보사에 '미술계의 동태' 기고. 충청남도문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이후 1968년까지 11년간 심사위원 역임 * 1958(55세) 8월 25일 본적을 평북 태천에서 충청남도 대전시 중구 장대동 226번지로 편제하고 충남의 향토작가로 적극 활동하기 시작함. '목우회' 창립에 참여하여 1973년까지 회원으로 작품활동. 제7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계곡>. 11월 28일 충청남도문화상 '미술상' 수상 * 1959(56세) 국전 심사위원회에서 초대작가로 추대됨. 제8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선인장과 꽃> * 1960(57세) 4.19 학생의거 일어남. 1월 1일 '녹조소성훈장' 포상 * 1961(58세) 5.16 군사혁명 일어남. 국전 기구개편에 의하여 추천작가로 추대. 제10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농촌풍경> * 1962(59세) 제11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보리고개>. 1969년 2월까지 6년간 한국미술협회 충남지부장 역임 * 1963(60세)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조장' 포상. 학제 개편에 따라 대전사범학교가 충남고등학교로 개칭되어 1969년 2월까지 6년간 근무. 제12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농촌풍경> * 1964(61세) 제13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제13회 국전 추천작가, 심사위원 출품 <어촌풍경> * 1965(62세) 1월 2일부터 7일까지 개인전 - 대전 '호반다방'에서 전원풍경 외 19점. 제14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제14회 국전 추천작가, 심사위원 출품 <샤버텐꽃 핀 들> * 1966(63세) 2월 25일부터 3월 3일까지 개인전 - 대전문화원에서 계룡산 외 52점. 제15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어촌풍경> * 1967(64세) 제16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만추의 어촌> * 1968(65세) 6월 23일 제1회 동아국제미술전람회 초대작가겸 심사위원 역임. 제17회 국전 <목장> 출품(청와대 소장). 12월 13일 '한국미술교육공로상' 수상 * 1969(66세) 2월 28일 충남고등학교 정년퇴임. 정년퇴임 기념 '이동훈 화력 50주년 기념전' - 대전 예총화랑에서 개최. 강인승, 도상봉, 이마동, 김원 등 40여명 찬조출품.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에 1981년까지 12년간 출강. 제18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목장풍경> * 1970(67세) 제19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산성풍경> * 1971(68세) 제20회 국전 출품 <강변풍경> * 1972(69세) 제21회 국전 출품 <6월의 농촌> * 1973(70세)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기념 '한국 현역화가 100인전' 출품. 제22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남해안 풍경> * 1974(71세) 6월 15일부터 21일까지 제8회 개인전 - 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화랑에서 계룡산 설경 외 50점. 민족기록화 <새마을 추수> 제작. 제23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제23회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출품 <여름>. '원로작가 초대전' 출품 * 1975(72세) '한국 신미술회' 창립에 참여. 제24회 국전 출품 <해변풍경> * 1976(73세) 6월 문화화랑 개관 전시회 출품. 9월 조형화랑 개관 '서양화 초대전' 출품. 제25회 국전 '초대작가상' 수상 <어촌의 광장>.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제9회 개인전 - '미술회관'에서 <여름> 외 43점. 12월 6일 부인 선우 형 여사 작고 * 1977(74세) 6월부터 8월까지 동남아 및 유럽미술계 시찰 및 사생여행. 12월부터 1978년 2월까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사생여행. 제26회 국전 출품 <해상부락>.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국전 수상작품전' 출품 * 1978(75세) 2월까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사생여행. 제27회 국전 출품 <수상시장>. 정부수립 30주년기념 '미술단체연립전' 출품. 11월 1일부터 13일까지 문화화랑에서 '서양화 1950년대 회고전' 출품 * 1979(76세) 제28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계룡산 추색>. 한국현대미술 '1950년대 서양화전' 출품. 6월 12일부터 18일까지 문화화랑 초대 개인전 * 1980(77세) 제29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계룡산 설경>. 세계장애자의 해 '자서미술전'에 작품 기증 * 1981(78세) 제30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삼송리의 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미술 '81전'. 3월 아람문화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82 현대미술 초대전 출품 * 1982(79세)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83 현대미술 초대전 출품 * 1984(81세) 1월 잔설내린 아침 산책길의 빙판에 낙상, 골절상을 입고 입원가료 중 잠실 진주아파트 자택에서 5월 25일 작고, 충남 유성 선산에 영면. 유족대표 이현균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기증 운동 전개. 이후 최초로 고인의 유작품 전량에 대한 기증의사 표명 * 1985 8월 8일 유작품 171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 10월 19일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추서 * 1985 대전일보사 주최로 작품집 '이동훈 유작전집'을 양장으로 출판하고 대전문화원 전관에서 유작전을 개최. * 1986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동훈 유작전'에 작품 171점에 대한 양장화집과 함께 개최. * 1989 작고 5년 후에 '이동훈 추모 5주년전'에 전국 유명화가 박득순, 장욱진, 장리석, 이종무, 유경채, 김원 등 동료 후학 제자들이 참여하여 추모전 개최. * 2002. 10. 9 탄생 100수에 즈음하여 추모모임이 서울관광호텔에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인 이종무화백을 비롯한 다수가 참여하여 개최. * 2003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이동훈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이동훈 회고전'이 개최되고, 대전미술관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회고전 개최. 또한 '이동훈 미술상' 본상과 큭별상이 제정 시상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