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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의 예맥 (한국문인협회홍천지부)
 
 
 
카페 게시글
♡ 소설 스크랩 안개(단편소설)
drdol(돌박사) 추천 0 조회 54 09.03.11 1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소 설 >                            안 개

                                                                석 도 익


  앞에서 풀숲을 헤치며 민첩하게 걸어가는 젊은이의 딱 벌어진 어깨를 보며 등이 약간 구부정한 노인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따라간다.

이름도 다 모를 풀벌레들이 비 오듯이 울다가 이슬 젖은 풀들이 움직이자 그 부근은 조용해지고 지나온 뒤에야 안심이 되는지 다시 울기 시작한다.

사십여 년 전 그날 밤도 그랬다. 풀벌레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면 하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도 어찌 그리 잘 알아차리는지 울음을 그치는 것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조그만 기척에라도 들키는 날에는 사방에 깔려있는 적군의 총알이 심장을 뚫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고 싶다. 그러나 돌아볼 겨를이 없다. 달려야한다. 우선 그들의 유효 사거리 내에서 도망을 쳐야 산다. 초능력의 힘이 솟는 것인지 총알이 관통하여 채 아물지도 않은 다리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아픔도 못 느끼며 달리고 있었다.

허동무! 그녀가 그렇게 불러 달랬다. 이름을 모르니 허동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만길은 그녀의 포로였다. 칡넝쿨 줄기로 손과 발을 결박하여 그들 무리가  은거하고 있는 동굴밖에 구부정하게 남쪽으로 굽은 소나무에 묶어 놓고 장총을 휴대한 한 놈을 보초 세워 놓았다.

대장인 듯한 험상궂게 생긴 놈이 윽박지르며 군대에 관한 정보를 캐물었으나 총도 제대로 쏘지 못했던 일등병이 뭘 알아야 말을 하지 않겠는가?  흠씬 두들겨 맞고 이리 옮겨져 이제 처형당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신세이니 하늘만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잘 모르겠다. 숱한 낮과 밤을 산 속에서 헤매고 다녔으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달은 뜨지 않았으나 유리같이 맑은 까만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뿌려져 별빛에도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인데 서서히 밤안개가 저  아래 계곡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앞에서 감시하던 녀석이 몇 발작 앞으로 나가 풀숲에다 소변을 보고 몸을 떨더니 그냥 퍽! 하고 쓰러진다. 이윽고 숲 속에서 검은 물체가 재게 움직여 만길에게로 기여서 다가왔다.

“쉿! 조용”

“...”

김동무!  나 야요“

가까이 기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허 동무였다. 그는 만길이 등뒤로 돌아가서 귀에 대고 소리 죽여 말하며 칡 줄기 포승을 풀기 시작했다.

“김동무 내말 잘 들으시라요. 이 길로 산을 내려가 서리 저 강을 건너 도망치시라요. 여기 있으면 죽습네다. 나는 김동무를 살리려고 한 것이 이리 되었시오”

“허동무는 어쩌려고?”

“나는 걱정 마시라요 김동무가 포승을 돌에 부벼서리 끊고 보초를 죽이고 나 꺼정 때려 ?혀  찌르구 서리 달아난 것으로 하믄됩네다”

그녀는 죽은 보초의 장총에서 대검을 빼내 보초를 다시 더 찌르고 피 묻은 칼과 돌망치를 주워 가지고 와서 풀어낸 칡 줄기를 돌에 문지르고 있었다.

“김동무 이 칼로 나를 찌르라요. 아주 죽지만 않게시리”

“어떻게...”

“어서!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시요”

“나는 못하겠소”

“그래 가지고 어찌 살아 가갓소, 그럼 어서 그냥 가시라요 제발 살아서 고향으로 가기요”

그녀는 만길의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가파른 언덕을 구르다시피 밀려나는 바람에 그녀의 마지막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질긴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난 줄 알았다

그때의 그런 이별과 지금의 저 젊은이를 보내는 마음은 별빛과 밤 안개, 이슬 젖은 풀 섶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가 어찌 그리 같을까 생각하며 젊은이의 뒤를 따라가며 만길은 생각하고 있었다.

비호같이 움직이면서도 사방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걸어가던 젊은이는 걸음을 멈추고 멀리까지 두리번거려 살피고는 뒤따라오는 만길을 바라본다.

“아바이 이제 여기서 좀 쉬었다  헤어져야 합네다”

이곳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산줄기의 중턱쯤 되는 곳으로 산등선에는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묘지가 세기가 있는 곳이다.

젊은이는 잔디가 비교적 잘 자란 묘지로 가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무었인가를 치우더니 손짓으로 부른다,

“이리 오시라요”

만길은 움찔 놀랐다. 그 묘지는 다름 아닌 아버지 묘지었기 때문이다. 묘지 봉분 옆으로 구멍이 파여져 있었다. 젊은이는 만길을 그 안으로 들어가라 한다.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니 묘지 안은 두 사람이 겨우 앉아 있을만한 공간으로 비트가 만들어 있었다.

젊은이는 밖에서 입구를 위장해놓고 따라 들어와서 다시 안에서 입구를 막고 돌아  앉는다. 묘지 속은 두 사람의 숨결로 가득하다. 산 자가 묘지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빛 하나 없는 어둠이 죽은 자로 만들어 놓는 듯 하다.

“아바이 이곳에서 이틀이나 지냇시오 여기도 놈들이 쫙 깔렸댓시오”

“....”

“내레 조금 있다가 떠날테니끼니 아바이는 여기 계시다가 아침에 내려가시라요. 송이 따러 왔다고 하시라요".

“이놈아 이 묘소가 누구의 묘인지 알고나 이리했니?”

만길은 이제사 겨우 입을 열 수가 있었다.

“누구의 묘인지 알아서 뭐하갓시오?”

“정말 기구하구나, 이 묘소가 너의 할아버지란다 허참!

“뭐라 했시오 할아바이 산소라했소?”

“그래 그렇단다.”

“아바이 걱정마시라요. 시체쪽은 파지 않았시오 바루 밑에 관이 있을겁네다”

“너의 할아버지께서 네놈이 보고 싶었던 게로구나. 세상에 이런일이...”

“그보다 아바이 시간이 없시오 이번에 나온 동무들은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시오 나는 어떡하든 살아서 가야합네다. 어마이를 위해서 아니 조국통일을 위해서리”

“그래 살아야지...”

“어마이는 조선에 영웅입네다. 나는 아바이가 조국해방전사의 위대한 영웅이신 2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김상진 상좌의 아들로 알고 자랐고 그렇게 살아 왔시오. 어마이는 나를 위해서리 모든 것을 숨기시고 살아오신 겁네다”

“그래 내가 아버지란 사실을 어찌 알았니?”

“참 내래 이름이 김정길 입네다. 어마이가 허정숙 아바이가 김만길 그래서리 정길이라 지었다고 그럽데다. 마침 가짜 아바이도 김가니 끼니 제대로 성은 ?은겁네다.

“정길아!”

만길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길 없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진 잠수함 침투사건 때문에 모두 불안에 떨고 있고 군경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는 준 전시상황아래서 밤중에 자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젊은이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6,25 때 허정숙이란 여자를 아느냐고 묻고는 다짜고짜 자기가 아들이라며 여기까지 동행하여 온 것이다. 만길은 아들의 이름을 한번 입속에 넣어 불러보았으나 만감이 교차하여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는다.

“우리 어마이는 대단한 분이십네다. 그 전투상황에서도 아바이를 살리시고 나꺼정 낳아 키우시고 출세시킨 분이니 끼니... 어마이도 왼쪽다리를 절름거리십네다. 내래 전장때 다친거라 생각했댔시오 내래 정보국 부국장이되고 남조선 일을 하고있을 당시 어마이가 병이 나셨댔시오, 당신의 병이 위중한 줄 알고 그때 서리 모든걸 말씀하십데다.”

“그래 네 어머니는 지금...?”

사십 여 년 전 그토록 야멸차게 강인하던 그녀가 어렴풋 생각난다.

“지금은 ?찬습네다 겅강하십네다. 아주”

“그래...”

“아바이를 그렇게 탈출시키고 어마이는 칼로 자신의 다리를 찌르고 돌에 머리를 부딧쳐 정신을 잃은 것으로 연극을 하구서리 자신이 잡아온 포로를 놓?다고 되려 그들을 혼냈답네다.”

그녀가 만석에게 칼로 찔러달라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진다.

“그 뒤 어마이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는 당시 사단장인 김상진 상좌와 눈이 맞은 것 같이하여 김상좌의 아들로 나를 만든겁네다. 마침 김상좌는 철원전투에서 전사하고 휴전이 되자 어마이는 정무국의 높은 자리에서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우리모자는 떵떵거리며 살았댔시오“.

“대단한 분이구나”

“어마이는 그래도 여잡네다. 전장에서 아바이를 만나 나눈 정분을 운명같이 간직하고 한평생을 가슴으로 살아오신 겁네다. 오직 조국이 통일이 되기를 학수고대하며 말입네다. 내래 남조선 공작업무를 담당하게되자 어마이는 아바이 함자와 고향을 알려주며 알아 보라 누누이 이야기 합데다, 내래 가슴에 한이 된 어마이를 위해서리 남조선 연락망을 통해서 아바이 동향을 알고 있었더랬시오.

“허참!”

“이번에 내려올 때 내래 일부러 왔시오 작전지휘를 직접 한다고 하고 서리 그러나 내 목적은 아바이를 만나고 가서리 어마이께 전해드리려는 마지막이 될 효도로 생각 했습네다”

“그래 꼭 가야만 하겠나 완전히 포위된 상태일텐데...?”

"무시기 소리야요? 나에게 다른 말은 하지 마시라요 나도 다른 말은 안하갓시오. 살아 돌아가게 되믄 어마이께 아바이 만난 이야기를 하고 이번 침투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국통일을 위하여 더 죽도록 일할겁네다."

“괜찮겠니?”

지금 이 아들이라는 정길이에게 어떻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지 그는 답답하기만 하다.

“걱정 마시라요 내레 다 생각이 있으니끼니 그리구서리 아바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요 내래 어두워서 아바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서두 정말 가슴이 벅참네다. 어마이도 좋아하실껍네다, 어마이를 잊지 마시라요.”

“왜왔어? 이렇게 왔다갈걸 이 위험한 길을...”

만길은 손을 더듬어 정길이 손을 ?아 꼭 쥐어본다. 든든하고 믿음직한 손이다. 거친 손바닥이 따사롭다.

“아바이 지금 어마이 생각 납네까?”

“그럼”

비트의 비좁은 공간 그들의 이야기 소리는 묘지 안에서 삭아지고 붙어 앉은 체온이 따듯하게 전해지며 가슴이 가슴으로 더워지고 두 사람의 숨결이 촉촉하게 눈 섶에 이슬로 맺힌다.


만길이네는 강릉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있었다. 그때로서는 드물게 만길이는 서울에가서 유학하는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와 한가하게 경포대 모래사장을 순이와 걷고 있었다. 순이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있는 예쁘고 귀여운 소녀로 만길이 내려오면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오빠! 언제 왔어”

“응 그제”

"오빠! 대학생은 방학을 일찍 하네 언제가?“

“응 팔월 말에”

“대학생은 좋겠다.”

“너는”

“나도 좋지. 오빠가 오래 있게 되니까, 그런데 오빠 요즈음 이상해 전쟁이 날거래 정말이야?”

“누가 그래 전쟁이 그렇게 쉽게 터져?  아니야”

“만약에 전쟁이 나면 나는 오빠 따라 갈꺼야”

“누가 너를 데리고 가 나는 군대에 가서 싸워야하는데”

“난 몰라”

내일을 예측 못하는 그들은 이런 대화로 넘실대는 여름의 파도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일출의 찬란한 햇살과 일몰의 붉은 노을을 기대하다가 모든 것을 뒤바꾸어놓은 유월 이십오일을 맞이했다.

경포대에서 일출을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진 어제 밤이 순이를 본 마지막이 되고 새벽에 들려오는 포탄의 굉음을 들었다.

벌써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역전에서 간신히 몸을 실은 열차는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사코 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만류를 금방 다녀온다고 진정시키고 서울에 온 만길이는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다.

학교에 들어서니 많은 학우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군대에 가야 된다. 그리고 싸워야한다고 하며 어차피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면 이대로 우리가 자원해서 가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시시각각 급박해지는 전황 속에서 그들은 교무처에 마련된 지원서에 서명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하숙집 주인 내외도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향의 부모와 순이 생각에 잠도 설치고 다음날 아침에 학교로 가니 벌써 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러 학우들과 트럭에 나누어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거리에는 우왕좌왕 바쁜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룬 거리를 빠져 나와 몇 시간을 달려 군용천막 막사가 있는 연병장에 내린 일행은 즉시 간단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곧바로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련에 들어갔다.

며칠간의 기본훈련을 받았다. 훈련이래야 제식훈련과 몇 발의 사격연습을 했을 뿐이다.

매일 수많은 전사자가 생김으로서 그 보충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즉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밤에만 이동하여 만길은 바다 가 멀리보이는 동부전선 전투부대에 배속되었다. 낮에는 참호를 파고 전투를 대비하다가 밤이면 격전을 벌려 고지하나를 빼앗고 빼앗기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전세는 우리가 불리해 연일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여 사수하다 다시 후퇴를 반복하고 있었고 연일 보충되는 장병들은 그야말로 총도 제대로 쏠 줄을 몰라 쩔쩔매는 신병이 분대에 반은 넘어섰다.

만길이 소속한 부대의 분대도 며칠 전 만해도 일곱 명이나 되었는데 이제는 신병하나 보충 받고도 다섯 명이 분대를 이루어 작전을 해야만 한다. 전사자에 비하여 보충병이 딸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미 서울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처내려오는 적군의 사기는 충천했고 멋모르고 일요일을 즐기던 우리 군은 2차 대전 때의 고물 무기와 훈련 부족한 병력으로 막아내자니 밀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일찌감치 수도서울을 포기하고 도망친 정부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는지 부산에 보따리를 풀고 이제는 더 이상 후퇴하지 말라고, 죽어도  그 진지에서 저지하다 죽어야한다는 절대사수의 명령을 하달했다

만길은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어느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간혈적으로 가까이서 들려오는 포성과 이제는 애들 병정놀이 딱총같이 들리는 소총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자신이 죽어 묻힐지도 모를 참호를 파고 있었다.

“김 일등병님 우리 살수 있습니꺼?”

이틀 전에 배속된 어리게 보이는 배 이등병이 참호를 파며 근심스런 얼굴로 만길에게 묻는다.

“글세 운이 좋으면... 나도 내 옆에 전우가 셋이나 죽는 것을 보며 아직 살아 있잖아”

“지는 꼭 살아가야 합니더, 어무이 한 분밖에 안게십니더”

배 이등병은 참호를 파다말고 먼 하늘을 바라본다. 석양빛에 비친 그의 눈가에는 물기가 번진다.

“살아야지 우리모두 자! 그러기 위해선 호구덩이를 깊게 파야한다”

지난번 전투에서 만길이는 마침 파기 좋은 땅이라 깊게 판 덕으로 무수히 날라오는 총알과 포탄을 피할 수 있었고 바로 옆에 지 상등병은 암반이 나오자 대충 파고 말았는데 적의공격을 받자 얼굴에 총알을 받고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한걸 보았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계곡 밑에서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금새 어둠으로 덮어버린다.

“김 일등병님! 강병장님은 지난번 전투에서 팔을 관통한 총상으로 후방병원으로 후송되었다던데 좋겠지요 부상당한 것도 그치요?”

말없이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장치하고 있던 홍 이등병이 나직한 말로 차라리 그게 부럽다는 듯이 말한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는지 도 모르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무엇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어가야 하는가?

고요한 정적이 무섭도록 산야를 짓누른다. 간간이 들리던 포성도 멎어있고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태풍전야 같이 모든 것이 멈추어 있다. 무서운 예감이 든다. 이런 밤이면 으레 대공세를 퍼붓는 전투를 경험했음으로 긴장된다.

만길이 여러번 경험한 전투에서도 자신이 총을 쏘아 적군을 사살한 적은 없을 것이다. 쌍방의 불꽃이 튀는 사격에서 그는 매번 적군을 보지도 않고 남이 쏘면 따라서 앞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그때마다 옆에 전우들의 죽음을 보고 살아있다는 게 이상하여 자신의 몸을 살펴보는 것으로 몸서리 쳤을 뿐이었다.

달도 전쟁이 무서워서 뜨지 않은 칠흙 같은 어둠이 땅에만 내려 깔리고 맑은 하늘에는 무수한 별빛으로 조명되어 옆 사람의 윤곽을 볼 수는 있었다.

깜빡깜빡 잠이 온다. 어머니가 보이고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리고 보니 학교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온 후 안 돌아오는 아들걱정을 얼마나 하고 계실까? 난리통에 변이라도 당하시지 않았는지 내가 살려고 정신없다보니 생각 못했었다.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지 모를 일이다. 순이가 생각난다. 해맑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잘 있는지... 만길이 꿈속같이 감미로운 숨결을 누르며 깜빡 잠든 사이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며 총소리가 옆에서 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피용~”꽝~“ 콩볶는 소리라고 했던가?  사람을 겨냥해 날아가고 날아와 터지는 살상용 총탄이 조명탄이 터져 고공에서 낙하하는 순간부터 비오듯 교차한다.

적은 이미 코앞까지 와서 고지를 향해 돌격하고 있는 모양이다. 따발총이 불을 뿜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악~어무 ~이....”

옆에서 사격을 하고 있던 홍 이등병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만길이 돌려다 보니 그는 쓰러져 움직이지 못한다. 정통으로 놈들의 총탄을 맞은 모양이다.

“윽!~”

또 옆에 있던 배 이등병이 쓰러진다.

“왜? 맞았나!?”

만길은 두 사람이 양옆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자 맥이 풀려 총을 놓아 버리고 배일등병을 일으켜 보았다.

“배 이등병 정신 차려!”

“난 죽으면 안됩니더 어무이! 나좀 살려주세...요. 김일등병..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복부에서 피가 뻗쳐 나와 만길의 가슴을 적신다. 피가 따듯함을 느끼는 순간 배 이등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목을 떨구고 말았다.

한 호구덩이에 세 명이 있다가 두 사람이 죽어서 누우니 만길이 앉을 곳마저 없어 엉거추춤하며 다시 총을 찾아 앞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한발만 나가고 소총은 다시 총알을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다. 다시 탄창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만길의 탄환은 이미 떨어졌다. 그는 여기저기 뒤지다 홍 이등병의 기관총으로 가서 방아쇠를 당겼으나 그것도 대여섯 발  밖에는 나가지 않고 장착한 총알이 떨어졌다. 만길은   홍 이등병이 가로 메고 있는 탄띠를 벗기려다 문득 그가 한말이 생각났다.

부상을 당하면 후송을 간다던 그의 말, 만석은 살고 싶었다. 살아서 고향에 가고 싶다. 지금 죽지 않았더라도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란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이 상황에서 살 수 있는 길이란 부상을 당하여 후송 가는 길뿐이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 이등병의 총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에 총구를 대고 한참을 망설이는데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지며 번쩍 섬광이 인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았다 싶었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리가 몹시 아프고 춥다고 느끼며 정신이 들었을 때 날은 이미 허옇게 먼동이 트고 있는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간나새끼들 많이도 죽었지비”

“날래 날래 살피라요. 동무들!”

놈들의 목소리다. 간밤의 전투에서 우리 아군은 패하고 저들이 고지를 점령한 모양이다. 그들은 전리품을 수거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조를 이루어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만길의 가슴은 아품은 어디 가고 간이 졸아 붙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라 다시 엎어져 죽은 척 했다.

이윽고 두어 놈의 발소리가 가까이 들리더니 멈추어 서며

“여기도 세 놈이나 뻗었습네”

“이 간나 새끼들이 우리 해방군을 얼마나 죽게했음”

한놈이 참호속에 들어서서 홍 이등병을 밟고 서서 두 사람사이 위에 엎어져있는 만길을 발로 뒤집으려는데 움직였던 모양이다.

“동무! 이보라요, 이쫑간나 살아 있지비”

그와 동시 뒤집어놓은 만석이 눈을 뜨자 그는 총을 들이대며 방아쇠를 당기려하자 뒤쫓아온 사람의 앙칼진 소리가 새벽을 뚫는다.

“동무! 뭐시기요”

“군의관동무! 국방군 새끼하나가 살아 있습네다”

“잠깐!”

앞으로 밀치고 나와 내려다보는 사람은 여자 군관이었다.

“일으켜 세우라요”

“군관동무 죽이지 않습네까?‘

“동무들은 시키는 대로하오 포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오? 데리고 따라오기요”

여자군관이 앞장서고 인민군 둘이 만길이 양팔을 끌다시피하여 그들의 막사로 데려갔다.

만길이 자신의 손으로 쏜 총알이 왼쪽 다리의 장단지를 뚫었고 피는 흘러 온통 응고되어 있었으며 움직일 때마다 심한 통증과 피가 다시 흘러 신발에 고여 질퍽거렸다.

천막 안에는 부상자로 즐비하다.

“아니 국방군 아임네”

부상자를 치료하던 의무병들이 일제히 바라본다 원한서린 눈동자들이다.

“수고했소! 동무들은 가보시기요”

전투병을 보낸 여군관은 만길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여기누워! 상처좀봅세”

명령과 나긋함이 함께 이어진다.

“별거아닌 상처임네 총알이 알아서리 살만 뚫고 지나갔습네다.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잃은 겁네, 국방군은 다 이리 약하오?”

“....”

“일단은 산 놈이니 치료는 해줍세“

그녀는 바지를 째고 약을 바른 후 붕대로 감았다. 당장 죽인다해도 상처를 치료해주는 적군의 마음씨가 고마워 상처가  금방 나을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 만석은 그 여자군관이 소속한 적군의 포로가 되여 언제 총살시킬지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갖은 고문과 욕설을 받았으나 만길이 군대의 상황을 알 턱이 없으니 저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필요 없는 짐이라 언제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쪽지리에 어두운 그들에게 간간이 지명정도 이야기 해주는 것으로 필요를 인정받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결박되어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조국을 배신하고 자해하여 살려고 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그날 그날을 보내는데 자주 보게되는 그 여자군의관의 겉으로는 억세지만 감추어둔 듯한 따듯한 눈빛을 바라보는 나약함밖에 없었다.

전세는 역전되어 그들이 연일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미 제국주의 놈들이 인천에 상륙했다고 한다. 아군도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북진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만길이 포로로 끌려 다니는 부대도 태백산 준령을 따라 대관령까지 후퇴하던 어느 날 밤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과 국군의 공격으로 부대는 전열을 잃고 흩어져 혼비백산 후퇴하기 바쁘다.

여군관이 이끄는 의무 부대가 선발대가 되어 부상병을 민간인을 동원한 소달구지나 부상병끼리 서로 부축해서 도보로 이동했는데 다행히 여군관은 만길에게 부상병을 부축해 가는 일을 시킨 것이다.

그들은 포로인 만길이 다리가 불편해서 도망은 못 갈 것이란 점과 저들의 말을 잘 따라주어서 조금은 안심한 눈치다. 전투병 몇 명이 경계를 하며 낮에는 산으로 행군하고 밤에는 마을길로 행군하여 북으로  북으로 걸었다.

앞에도 이미 퇴로가 막혔다는 소식에 그들은 후속전투부대가 올 때까지 머물 수밖에 없어 천막을 치고 부상자를 치료하며 야영을 하던 날  낮에 머리 위를 정찰기가 돌고 가더니 한밤에 비29전투기 두 대가 날아와 폭격하는 바람에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만길은 밖으로 나와서 엎드려있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하여  탈출을 시도했다. 화염에 휩싸인 막사를 뒤로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불편한 다리가 제대로 내달려주지 않았다. 뒤뚱거리며 뛰다가 무엇에 또 걸려 넘어졌다.  죽은 사람에 걸려 넘어진 것 같아 겁에 질려 일어나 다시 뛰어가려는데 죽은 듯 하던 사람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권총을 겨누며 소리친다.

“ 꼼짝말앗!”

만길은 엉겁결에 두 손을 들면서 그가 여군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 야요, 국군포로”

그는 알았다는 듯이 경계를 흐트리며 비틀비틀 일어난다.

“다른 동무들은...”

총을 겨눈 채 빠른 소리로 생존자를 묻는다.

“잘 모르지만 다 죽은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내래 괜찬습네다. 동무는 다치지 아니했소?”

그는 정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도 다친 데는 없소”

“다행입네 걸을 수 있으면 빨리 갑세다 앞장서기요”

그녀는 권총을 총집에 넣으며 뒤에 서서 앞으로 가라고 한다. 그것이 만석에게는 명령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걸을 때마다 자해한 상처가 쑤시기는 했으나 걸을만하였다. 캄캄한 밤길 산기슭을 돌아 무작정 걸었다.

만길은 아군이 어느 쪽 방향에 있는지 제발 지금 가는 앞에 아군이 있었으면 하고 그녀는 인민군 본대가 있을 거라는 서로 다른 기대로  만길을 앞에 세우고 대여섯 걸음 뒤에서 따라가고 있다.

얼마쯤 걸었을까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새벽 찬 공기를 타고 화약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냄새가 오히려 상쾌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만길은 잔인하게 살상을 한 화약냄새가 좋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배가 고프다.

“동무 저 아래 집이 보이지 아니하오?”

어둠이 거친 안개 속에 조그만 마을이 언 듯 보인다

“마을이 있소, 저기 내려가 밥 좀 얻어봅시다.”

만길이 돌아보며 말하자 그녀도 만길을 마주 바라보는데 반대하지는 않는 것 같아 아래로 내려가 마을 어귀로 들어갔다.

이 마을에서도 전쟁이 있었는지 양측 군인과 민간인의 시체가 길옆과 풀숲에 나둥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을은 모두 다섯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첫 번째 집에 소리 죽여 숨어들었다. 그녀는 뒤에서 권총을 겨누어 사방을 경계하며 거리를 좁혀 따라왔다.

열려진 방문 앞에는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있을 것이라 직감하고 방문 앞으로 다가가자 심한 악취가 풍긴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모두 가족 같은 사람들이 세 명이나 죽어 누워 있는데 얼굴은 이미 부패하여 썩어가고 있었다. 역한 냄새와 구더기들이 굼실거리는 것을 보는 순간 둘은 얼굴을 가리고 뛰어  나오고 말았다.

혹시나 하며 다음 집을 가 보았으나 그 집도 예외가 아니다. 피난민인지 피난을 가지 못한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인지 모르나 돌림전염병에 걸려 모두 죽은 것 같았다.

그래도 먹을만한 것이 없나하여 여러 집을 뒤져보았으나 부엌에나 곡간에도 낟알이라곤 없었다.  숫하게 지나간 피난민 과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모두 분탕질하고 지나간 뒤인 것 같았다. 마지막 한집에 기대를 걸고 들어가려는 순간 마루 밑에서 무언가를 물고 뜯던 개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널려진 시체에서 어느 부분을 물어다놓고 뜯고있는 중이었는데  어두운 마루 밑에서 으르렁거리는 개 눈은 이미 가축이 아니라 맹수의 눈으로 음산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둘은 동시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데 방문이 비시시 열리며 세 살쯤 된 사내  아이가 내다보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보니 반가웠다.

“안에 누구 있니?‘

아이가 놀라지 않게 만길이 다가가며 부드럽고 나직하게 물어보았으나 아이는 여윈 얼굴에 휭하게 들어간 눈으로 초점 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석과 그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문 앞으로 가서 아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다 서로 얼굴을 돌려 마주보고 멍청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는 이불이 덮여 있었고 아이가 빠져 나온 옆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누워있었으나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지 꽤나 오래인 듯 부패되어 있었으며 이불이 걷혀진 사이로 아이가 방금 전까지 빨은  것 같은 젖은 꼭지가 뭉그러져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죽은 어미의 젖을 빨며 지금껏 살고있는 아이, 이 아이를 어찌할 수 있을까?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뒤돌아 산을 향했다.

“저 아이 불쌍해서리 어찌하오?”

“참! 기막힌 노릇이요. 이제 굶어죽겠지...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썩어 가는 젖을 빨면서....”

“그만 하기요, 가슴이 아품네다”

그녀는 눈시울을 적시며 고개를 마구 흔든다.

그날은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온통 그 아이 생각하며 말없이 무조건 걷기만 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를 가야하는지도 모르며 북으로 가는지 남으로 향하고 있는지 방향감각도 잊어버리고 걸었다. 다행이 저녁나절에 산기슭에  심어놓은 임자 없는 무밭에서 주먹만한 무를 뽑아먹었다. 이제사 살 것 같았다.

단풍을 곱게 물들이느라 서늘한 바람이 산허리를 뒤집고 다닌다. 엷어지는 햇살마저 거두어가고 어둠이 내리자 추워진다.

다행히 바위벼랑 밑에 조그마한 동굴이 있어 낙엽을 모아다 깔고 앉으니 아늑하다.

낮에는 잘 안 들리던 포성이 밤이 되자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풀벌레가 울고 별빛이 흐르는 변함없는 밤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만길은 총구 앞에 포로가 아니었다. 그녀와의 거리도 가까이 있었고 그녀도 자신의 포로가 도망치거나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굳이 자신이 포로라고 의식하는 것은 그녀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동무가 안에서 자시기요 몸도 불편한데...”

그녀는 안쪽에 낙엽을 몰아준다.”

“괜찬소”

“김동무! 동무는 나의 포롭네다. 시키는 대로  하시라요”  

그녀는 만길이의 성을 붙여서 말하며 굳이 포로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진정이 아닌 것 같았다,

만길이가 안쪽에 눕고 여군관은 동굴앞쪽에 비스듬히 눕는다. 별빛이 스며들어 오뚝한 그녀의 콧날이 보인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에 큰 눈망울과 균형 잡힌 몸매는 군복까지 어울리는 팔등신에 가까운 여자다. 다만 퉁명하고 억센 이북 사투리와 전쟁으로 무디어진 감정 탓인지 나긋한 여성의 맛을 찾을 수 없을 뿐이다.

며칠만에 제대로 누운 만길은 휴지가 물에 풀어지듯이 녹초가 되어 깜빡 잠든 사이 무수한 꿈을 꾸었다. 낮에 본 시체가 살아나고 그 아이와 개가 미친 듯 쫓아와 쫓기다가 어머니를 만나 꾸지람을 들었는가  하면 순이가 자기에게 안겨 울고 있는 울음  소리에 놀라 깼다.

눈을 떠보니 그녀는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가끔 봉긋하게 부풀은 앞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그녀는 울고있었다.

만길은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아까보다 떨림이 더해졌다. 만길이 잠에서 깬 것을 의식해 참으려는 것이 오히려 더 북받치는 모양이다.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결코 그녀를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측은한  마음에서다.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부르르 몸을 떨며 울음을 참는다. 만길은 어떻게 하든 위로를 해주어야 한다는 보호본능으로 그녀의 머리 밑으로 손을 넣어 팔베개를 하고서 팔을 걷어 들였다. 반듯하게 누웠던 그녀의 몸은 얼굴과 함께 만길이 쪽으로 돌아누워지며 맞닿았다.

“어디 아픕니까?”

“....”

만길의 떨리는 물음에 그녀는 말이 없다.

그들이 느끼는 긴 침묵 속에 숨소리만 박자를 잃고 고조되고 있었다.

남자의 숨죽인 입술이 여자의 뺨에 기어오른다. 짭짤하다. 여인의 땀 냄새인가 아니면 눈물인가 바다 냄새가 난다.

부푼 젖무덤의 두근거림과 따듯함이 남자의 가슴을 뒤흔든다.

남 군의 수색대 다섯 명이 지형정찰을 한다. 목단 꽃 쌍 고지를 정찰하고 서서히 내려와 평원을 지나 계곡으로 접어든다.

“아~”

메아리가 울린다. 수색대의 선제공략이 적을 제압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상황은 뒤바뀌어 포로가 고지를 점령하고 승자가 포로가 되어 애원한다. 숨막히는 공방전이 계속되자 메마른 솔밭 숲 속에 촉촉하게 이슬이 내리고 굳은 땅을 들치고 탐스러운 송이버섯하나 힘차게 솟아오른다.

향긋한 솔 향기 가득 몰아 바다로 흐르니 잠자던 바다가 일렁이는데 하얀 조가비의 꿈을 들으며 산은 바다 속으로 깊게 침몰하고 바다는 무섭게 .파도가 친다. 방파제를 넘나든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솔 향기와 어울려 밤 안개 속으로 숨겨지고 있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시간, 사랑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일 뿐이다. 그들의 전쟁이었다. 낮에는 총을 가진 여자의 포로가 되고 밤에는 여자가 기꺼이 남자의 포로가 되어주는 날들이 험준한 준령을 누비며 계속 되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바람이 찾지 못하는 곳에서 낙옆을 이불로 하늘을 지붕 삼아 서로의 몸을 엉겨 열을 만들며 둘을 섞어버렸다.

우리 나라는 좋은 땅이었다. 칡뿌리 풀뿌리 나무껍질 머루 등을 먹으며 살수 있었다.

“김만길 동무는 고향이 어딥네까?”

여자가 궁금하던 것을 물은 것은 꽤 오랜 날들을 지낸 후였다.

“강릉이요. 정동진”

“내 이름은 허정숙 이야요”

묻지도 않는데 그녀는 그렇게 라도 자신을 알려야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를 허동무라고 부르시라요”

“그러지요”

그렇게 살을 섞으며 사선을 넘어 동고 동락 하면서도 포로취급 하는 것 같아 퉁명스럽게  받았다

사실은 누가 포로고 누가 압송하는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둘이 이렇게 무작정 가다가 어느 한쪽 군에 발각되면 아군인자가 압송자가 되고 적군인자는 자동 포로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둘은 이미 사람 같지 않고 산짐승에 가까워져가던 어느 날 허정숙의 부대를 만나게 되어 그녀는 북괴군의 군의관이고 만길은  계속 포로가 되었다.

묘지 안은 두 사람의 온기와 땅의 습기로 탁하지만 따듯했다. 만길은 젊은이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때 산에서 헤맬 때 너를 임신했던 것이구나?”

“아바이는 어마이를 사랑하지 않았구만요”

“아니지 몸 가는데 마음도 가더구나. 탈출해 오면서 많은 갈등을 했었단다.”

“지금은 아주 잊었지 않습네까?‘

“너의 어머니께는 죄를 지었구나”

“우리 어마이는 그케 생각 않슴네다. 자나깨나 아바이 생각하는 것 같습데다. 결혼한번 하지 않고 사셨으니 끼니 대단하신 분입네다”

“그래 꼭 가야만 하겠니?”

“당연히 가야합네다. 어마이가 기다리십네다 내 안사람과 아이들도 있지 않습네까?.그리고 내 조국은 저쪽입네다.”

“그렇겠지... 언제나 통일이 되려나...”

“이제 내래 가봐야 되갓시오”

정길이 비트 안에 숨겨놓았던 무기와 장비를 챙겨 비트 밖으로 나오고 만길도 따라나왔다. 별빛이 차게 빛나고 소슬한 바람이 산아래서 올라온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와 닭울음소리가 들린다.

“안녕히 계시라요. 통일되믄 만나게 되갓지요”

“그래 잘 가거라 몸조심하고 참! 여기 절이나 드리고 가라 할아버지께...”

정길이 두어 거름 가다 돌아서 자신이 숨기 위하여 비트를 판 무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엎드려 절을 한다.

“참 기구하구나. 너의 할아버지가 너를 알고 있었나보다.”

“....”

정길이는 말을 하려다 말고 만길을 바라보고 있다. 좀은 여위었으나 훤칠한 키에 구렛나루가 검게나있어 더욱 건장해 보였으며 광채가 나는 눈은 젖어있는 듯하다.

“그래 어서 가라! 무사히 가거라, 어머니에게 전해다오,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만길의 마지막말이 물기에 뭉개져 버린다.

“아바이! 잘있으시라요.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라요. 통일을 꼭 시키고 말갓시오. 기다리시라요.”

정길이는 민첩한 발걸음으로 멀어져 가고있다.

만길은 그저 멍청하게 아들이 가는 것을 바라 보고있다. 안개 속으로 사라져간 그가 아들이라고 불쑥 나타났다, 떠나는 젊은이 그것도 반 백년이 흐른 기억저편의 아픈 상처를 헤집고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자란 생면부지의 중년남자가 북에서 내려와 온 나라를 들끓게 한 무장공비로 삼엄한 경계망 속을 뚫고 찾아왔다, 다시 북으로 향하는 그를 보내고있다.

안개가 온 산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자신이 포로에서 탈출하던 날도 이와 같았다고 기억하며 자신을 보내주던 그녀를 떠올린다.

‘그래 잘 가라 무사하게. 나도 너를 보낼 수밖에는 없구나. 너를 자수시켜 너를 살리고 자유를 찾아주고 같이 행복하게 살자고 회유했어야 마땅하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네가 맹목적이더라도 사나이로서 무었인가를 위하여 믿고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있는 너에게  나는 오히려 부끄러웠단다. 나는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내 손으로 내 다리를 쏘아 포로가 된 한심한 아버지였다. 그 전쟁에서 나라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내게 수여된 무공훈장과 국가유공자라고 연금까지 꼬박꼬박 타먹으며 거들먹거리며 살아온 내가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그것 때문에 반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왔단다."

만길은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쇠붙이의 감촉이 느껴진다. 오늘 무장공비 침투상황보고 회의에 참석할 때 자랑스럽게 앞가슴에 달고 갔던 화랑무공훈장이다.

그는 그것을 꺼내 힘껏 던져버렸다.

“윙” 소리를 내며 작은 금속조각은 안개 속으로 날아간다. 한평생을 짓누르던 짐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하다

텅 빈 논에 허수아비같이 서있던 만길은 탈곡하여 허부석한 볏단처럼 힘없이 아버지 묘지 앞에 엎어졌다.

그는 묘지에 잔디를 움켜쥐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거두어지며 어두움 속에 묻혀졌던 물체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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