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4. ‘일가삼효(一家三孝)’, 만촌동 옥천전씨 삼효자비각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며칠 전, 대구향교 장의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 효목네거리 인근에 있는 ‘삼효자비각’에 대한 문의였다. 망우공원으로 운동하러 갈 때마다 비각 앞을 지나는데 어떤 비각인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만촌동 옥천전씨(沃川全氏) ‘3효자비각’에 대한 이야기다.
효자 3형제를 기리는 3효자비각(三孝子碑閣)
효목네거리 지하차도 만촌동 방향 진출입로 동쪽, 만촌1동 치안센터 옆에 작은 전통 건축물이 하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건물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지 않은 한, 이 앞을 아무리 지나다녀도 좀체 눈에 띄지 않는 건물이다. 건물의 정체는 만촌동 옥천전씨 ‘삼효자비각’이다. 조선시대 만촌동에는 크게 세 성씨가 세거했다. 옥천전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달성하씨(達城夏氏), 달성서씨가 뒤를 이었다. 조선 후기 만촌동 옥천전씨 문중에서 효자 3형제가 났다. 화정(花亭) 전창항(全昌恒·1687-1741), 만정(晩汀) 전창익(全昌益·1689-1756), 경묵재(敬黙齋) 전창정(全昌鼎·1700-1780)이다. 이들 전씨 3형제 효행 스토리는 조선 후기 발간된 대구부읍지, ‘전씨 3효자 기적비문’, 3형제 행적을 기록한 행장(行狀) 등에 자세히 나타난다. 3형제 효행 스토리를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3형제는 조선 숙종-영조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고, 자라서는 경학과 예학에 밝았다. 어버이에게 질환이 있을 때는 3형제가 함께 하늘에 기도했고, 상분[嘗糞·변을 맛봄]과 단지주혈[斷指注血·손가락을 그어 피를 드림]을 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1자 전창항은 아버지 상 때 슬픔이 너무 지나쳐 3년 상을 마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2자 전창익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는데 나이가 들어 어머니 묘 아래에 풍수암(風樹菴)이란 여막을 짓고 다시 3년 여묘살이를 했으며, 계모 상 때도 3년 여묘를 했다. 또한 10세 때 사당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사당에 뛰어들어 조상 신주를 안고 나온 일도 있었다. 3자 전창정은 학문을 하는 두 형을 대신해 집안 살림과 가족을 돌봤고, 아버지 상 때는 여묘살이를 하는 두 형을 대신해 노모를 지극정성 돌봤다.
이러한 3형제의 효행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 이기진(李箕鎭)[재임기간·1738-1739]에게 전해졌다. 이기진은 이들의 효행 사실을 확인 후 조정에 보고했고, 임금의 명으로 3형제에게 조세·부역 등을 면제하는 복호(復戶)의 명이 내렸다. 특히 장남 전창항은 사후 호조 좌랑에 증직되는 특명이 있었다.
지금의 3효자비는 오래된 것은 아니다. 청도 출신 유학자로 기호학맥(畿湖學脈)을 이은 인암(忍庵) 박효수(朴孝秀·1906-1996) 선생이 찬한 비문을 참고하면 1980년에 조성됐다. 3효자의 후손들이 선조의 효행 사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세상에 효행을 장려하기 위해 비와 비각을 조성했다. 3효자비각은 낮은 적벽돌 담장 안에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에 단청이 칠해져 있으며, 사방 벽은 모두 홍살벽이다. 비각 내부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삼효자비가 있다. 전면에는 ‘전씨삼효자기적비(全氏三孝子紀蹟碑)’, 후면에는 삼효자 효행 내력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복호, 추증, 면천, 사면
만촌동 옥천전씨 3효자는 조정으로부터 효자로 인정받아 복호와 추증의 포상을 받았다. ‘복호(復戶)’는 충신·효자·열녀 등에 대해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는 포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들, 손자 대대로 복호가 이어지는 예도 있다. ‘추증(追贈)·증직(贈職)’은 죽은 후에 관직을 더해주는 포상이다. 종2품 이상 고관의 경우에는 ‘3대 추증’이라고 해 본인은 물론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까지 관직이 더해졌다. 이외 면천(免賤), 사면(赦免)도 있다. 면천은 천민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천민에서 양민으로 신분 상승이 되는 것이며, 사면은 죄인에게 죄를 용서하는 포상이다.
충신·효자·열녀로서 복호·추증·면천·사면 등의 포상을 받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고을민→수령→관찰사→예조→임금’에 이르는 까다로운 청원 절차를 모두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충신·효자·열녀에 대한 포상으로 가장 높은 등급이 ‘정려(旌閭)’다. 정려는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명으로 정려[홍살문]가 내려졌고, 일제강점기 때는 ‘유림향약본소(儒林鄕約本所)’에서 발급한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이 정려를 대신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오륜행실중간소(五倫行實重刊所)’가 ‘유림향약본소’의 역할을 대신했다. 참고로 정려는 정표자의 집 대문 앞에 세운 ‘정문(旌門)’과 마을 앞에 세운 ‘정려’를 함께 이르는 표현이다.
정려각(旌閭閣) 유형
정려각은 크게 ‘목조형 정려각·대문형 정려각·석조형 정려각’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 중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 목조형 정려각이다. 낮은 담장 안에 기와지붕을 얹은 정면·측면 각 1칸 규모의 작은 목조건축물이다. 대문형 정려각은 대문 상부에 홍살과 함께 정려 사실을 새긴 정려 편액이 설치된 유형이다. 대구지역에서는 북구 도남동의 ‘유화당 정효각’이 대구 유일의 대문형 정려각이다. 석조형 정려각은 돌로 만든 정려각이다. 두 개의 돌기둥 위에 돌지붕을 얹고 그 사이에 돌로 만든 석판 형태의 정려 편액을 끼우거나, 아니면 비석을 세웠다. 석조형 정려각은 조선 후기 고종 이후 유행한 정려각 유형으로 목조 정려각에 비해 설치 및 유지관리가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대구에서는 가창면 행정리에 있는 ‘송병규 효자비각’과 근래 조성한 북구 도남동 ‘덕산이씨 창렬각’을 예로 들 수 있다. 현재 대구에는 30여 기의 정려각이 있다.
에필로그
만촌동 3효자비각은 효자비각은 맞지만 효자 정려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정으로부터 받은 증직과 복호의 명은 확인이 되지만 효자 정려의 명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3효자비문 명(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세상은 쇠잔하고 인륜은 무너지니 누가 그 귀함을 알겠는가/우뚝하게 솟은 비석에는 그 행적이 모두 실려 있도다/누구인들 자식이 아니겠으며 누구인들 형제가 없겠는가/후세에도 본받을 만하며 영세토록 견주어 볼 것이로다.
3효자비각은 대로변에 있다. 하지만 안내판이 없다 보니 일반인들은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알 수가 없다. 안내판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