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들(1) - 자신의 죄(롬 7:11)
이 세상에 분통이 터지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속고 사는 것보다 더 분통이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속으면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그렇게 믿었던 사장과 직원과 거래처, 등등 다른 사람에게 속고 사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물건을 샀는데 나중에 속고 산 것을 알게 되면 분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 크게 속고 있으면서도 크게 분노하지도 크게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들을 계속 속이도록 그냥 두면 계속해서 자신을 속여서 나쁜 열매를 거두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교묘하게 속이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먼저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죄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잘못한 것 없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11절을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꼭 일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그것에 합당한 자격증을 갖춰야 합니다. 의사든 기술자든 운전이든 자격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격증을 땁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격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구세주가 필요 없고 예수님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출발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죄를 모르고서는 구원도 모릅니다. 죄를 모르면 예수님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지긋지긋한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진리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죄를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구원받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죄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도 이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속고 물건 값에 속으면 분을 터뜨리면서 정작 죄가 속일 때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에 속고 물건 값에 속았으면서도 속은 줄도 모르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죄가 있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우리가 그분들께 가서 이렇게 말해 봅시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그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구원 받으셔서 영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네, 고맙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고 싶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마시오.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 나는 필요 없소.” 어떤 사람은 더 심한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내가 죄인이라고요? 그 사람, 참 기분 나쁘게 만드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시오?” 이런 사람은 죄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속에 죄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읽어드린 로마서 7장 11절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죄를 그냥 두면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나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들은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그 순간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자기 목숨을 자기 자신이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을 멋지게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은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죽지 않고 살게 됩니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고 살게 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아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깨끗이 씻어주십니다(사 1:18). 그래서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새 찬송 279장, 통일 337장).
“1절.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절.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3절.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4절. 만복 근원 우리 주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아멘.”
죄인임을 알아야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죄가 그대로 있는데 자신은 속아서 죄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삽니다. 이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요 16:7~11).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하는 죄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으셔서 죄를 잘 깨닫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인인 것을 깨닫는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왜 복이라고 했느냐 하면 회개하면 천국이 오기 때문입니다. 생지옥의 삶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어제 햇살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을숙도가 보이는 맞은쪽 강변에서 가덕도를 보는데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날씨가 쾌청해서 더 멀리에 있는 거제도까지 잘 보였습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늘이 깨끗해서 잘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거제도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명하게 잘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공기가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죄가 없다면 천국도 잘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제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거제도를 잘 못 보는 것은 안개가 뿌옇게 가려져 있어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걷히고 맑고 깨끗해지자 선명하게 잘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천국도 죄가 걷히고 나면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제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거제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죄가 안개처럼 가려진 상태로 보기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속여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멘. 죄가 사라지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천국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한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1)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책 마지막 페이지에 말씀하신 것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입니다.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아멘. 죄인인 것을 깨닫고 두루마리를 빨고 회개하는 사람이 천국 삶의 권세를 얻습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치 사도행전 1장 8절과 같은 형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7절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아멘.
죄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 얼마나 많이 죄로부터 속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것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바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이 나옵니다. 이 성의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죄인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온갖 악행을 합니다. 심지어 천사가 멸망시키려 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모든 백성들이 원근각지에서 몰려와서 천사를 욕보이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그들의 성은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려서 진멸 당했습니다(창 19:24).
그러나 이와 반대로 회개를 참으로 잘 한 성이 있었습니다. 니느웨 성입니다.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말하자 국가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재 위에 앉고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과 심지어 짐승까지도 먹지도 않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서 돌이켰습니다. 그러자 40일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니느웨 성이 멀쩡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돌이킨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욘 3:10).
이처럼 죄를 깨닫고 회개하느냐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느냐에 따라 천국과 생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천국의 삶과 지옥의 삶의 이정표는 바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이정표 앞에 서 있습니다. 천국의 삶을 향해서 가느냐 아니면 지옥의 삶을 향해서 가느냐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지혜로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죄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지 못하도록 깨끗하게 회개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참 좋은 천국의 삶을 선택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직까지도 죄를 죄인 줄도 모르고 죄에 속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천국 복음을 전해서 일깨워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