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산신점→갈곶리→백토현→가곡1리 신가곡→봉남리 아곡마을→봉남리→진위향교→새뚝거리주막→마산리 수촌→작은 흰치고개(염봉재)→백현원→큰 흰치고개→덕암산→내리 암말방향→능말→최경 묘→원릉군 원균 사당→원릉군 원균 묘→내리저수지→운터말→대마거리→도일천→볼보자동차→팔룡저수지→칠원동 서낭재→칠원1동 갈원→칠원3동 쇠물뿌리마을→상서재(통복천 건너)→용이동 용죽택지개발지구→비전동 배다리방죽→동부공원→굿모닝병원→소사동 SK뷰 아파트→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소사원 터 및 미륵당→소사교→소사벌→안성천 아교(애구다리)→가룡(성환읍) |
●구간 별 이야기
<차례> 1.춘향이가 걸어간 삼남대로 2.독립운동마을 야막리 3.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신가곡마을 4.진위관아와 진위주막 5.선비정신의 요람 진위향교 6.평택평야의 젓줄 진위천 7.백현원과 맹사성 8.소골마을과 풀무골 전설 9.덕암산과 부락산 10.인물화의 대사 최경 묘 11.원릉군 원균 묘 12.갈원과 옥관자정 13.삼남대로의 관문 소사원과 미륵당 14.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 15.소사벌대첩과 청일전쟁 16.안성천과 평택노을 |
1.춘향이가 걸어간 삼남대로
●구간 : 진위면 갈곶리(이방원)-진위면 봉남리-송북동 동막(백현원)-큰 흰치고개-칠원1동(갈원)-비전1동(배다리)-소사1동(소사원)-안성천(아교)
조선후기 한글소설 춘향전에도 삼남대로가 나온다. 한양으로 올라갔던 이몽룡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춘향이를 구하여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삼남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평택지역의 민중들은 이 대목을 읽고 삼남대로 평택구간에 ‘춘향이 길’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진위면 봉남리 봉남교, 죽백3동 재빼기, 소사동 소사교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이 풍광을 즐기고 사랑을 나누며 노닐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음은 춘향전의 삼남대로 대목이다.
전라도로 내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지나, 동자개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정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 돌아들어, 팔달문 내달아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 김제역 말 갈아타고, 덕정, 원터, 광정, 활원, 모로원, 새술막, 공주 금강 휘뜩 지나... 여산관 숙소하고, 삼례역졸 분부하고... 전주 들러 한벽루 구경하고... 임실... 남원
2.독립운동의 산실 야막리
●구간 : 오산-진위면 갈곶리-진위면 야막리-진위면 가곡리(신가곡)-진위면 봉남리(진위주막)
야막리는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도 수록된 전통 있는 마을이다. 본래 들판에 마을이 형성되어 ‘들막’이라고 불렀던 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야막(野幕)’이 되었다. 근대 이후에는 천도교를 받아들여 천도교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평택, 화성 일대의 천도교인들은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 그리고 각종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야막리의 천도교인들도 민족의 위기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1일에는 야막리 사람 박창훈이 야막리와 봉남리 주민 500여 명을 선동하여 봉남리로 진격하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26년에는 박내일(朴乃一)이 마을 안에 북진청년회(北進靑年會)를 창립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박규희는 일제강점기 평택지역의 진보적 사회운동단체였던 수진농민조합 창립에 앞장섰으며 초대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그 뒤 수진농민조합은 고덕지부와 양감지부 설립, 진압협동조합 설립, 소작문제 개입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다.
3.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신가곡마을
●구간 : 진위면 야막리 -진위면 가곡1리(신가곡) - 진위면 봉남리
조선후기 무봉산 일대는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터전이었다. 경주 이씨는 이성무의 증손 백사 이항복 이후 정승과 판서를 두루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명문가의 특권에만 머무르지 않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이회영, 이시영 비롯한 6형제 모두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의열단과 한국광복군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가곡리 신가곡 일대는 이회영의 둘째 형이었던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의 터전이다.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내며 억만금의 재산을 축적하였고, 이 재산이 양자 이석영에게 상속되어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 때 신가곡 일대의 토지도 매매되어 독립운동자금이 되었다. 현재 마을 안에는 이석영의 조부 이계조의 묘와 경주 이씨 재실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경주이씨천(慶州李氏阡)’이라고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다.
4.진위관아와 진위주막
●구간 : 진위면 가곡1리(신가곡) -진위면 봉남리(진위현 읍치) -진위향교
진위면 봉남리는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邑治)다. 진위현은 조선 초기에 충청도에 속하였다가 태조7년(1398) 경기도로 옮겼다. 처음에는 진위면과 서탄면 일부에 불과했던 작은 고을이었지만 세종 6년(1424) 중앙동, 이충동 일대의 송장부곡(松莊部曲), 서탄면의 천장부곡(川莊部曲), 오산경계의 청호역과 부산을 통합하고, 세종 15년(1433)에는 원평동, 신평동, 통복동, 비전동, 고덕면 일대를 지배하였던 영신현(永新縣)을 통합하면서 고을의 규모가 커졌다. 갑오, 을미개혁 때 진위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으로 통합 진위군의 중심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을 중심으로 근대도시가 발달하고 군청(郡廳)이 평택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쇠퇴하였고 1938년 10월 진위군의 명칭이 ‘평택군’으로 바뀌면서 평택군 북면 면소재지가 되었다. 1949년에는 평택지역 대표마을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북면을 진위면으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른다. 봉남리의 진위관아 터는 진위면사무소와 진위초등학교 동쪽 부지다. 관아의 동쪽에는 객사가 있었고, 동쪽 1천 미터 밖에는 진위향교가 있었다. 또 관아의 남쪽에는 진위읍내장과 주막거리가 있었다. ‘진위주막’은 삼남대로의 요지이고 수원에서 한나절 거리여서 많은 여행자들이 쉬어갔다.
5.진위고을 선비들의 요람 진위향교
향교는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지방에 관학(官學)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인종 5년(1127)이지만 본격적으로 유학교육을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진위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병자호란(1636) 때 완전히 불에 탔다. 호란 뒤 불에 타는 과정에서 건져 낸 위패만 초가집에 보관했다가 1644년(인조 22) 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중수하여 모셨다. 1660년(현종 1) 현령 송박이 대청을 다시 지었으며, 1839(헌종 5)에는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하였고, 1987년 동, 서재를 중건하였으며, 2007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진위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27명의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에는 여러 개의 향교중수기가 걸려 있다. 정원은 30명이며 교생들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향교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정원이 정해졌으며,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전적을 지급받아 운영되었다. 교관은 본래 국가에서 문과급제자 가운데 파견하도록 하였는데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 지방의 명망 있는 학자 가운데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진위향교의 정원은 30명으로 양인 이상이면 입학이 가능하였다. 수업연한은 약 15세에서 40세까지였지만 향시에 합격하거나 사유가 발생하면 나갈 수 있었다. 진위향교는 병자호란 때 병화를 입으면서 소실되어 강학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19세기 중엽 명륜당이 중수된 후에도 지방유림들의 여론을 모으는 구실만 하였을 뿐 교육적 기능은 되살아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마저도 1895년 갑오개혁 후 근대적 학제가 실시되면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지역 유림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만 역할하였다. 현재 음력 8월 상정(上丁)일에 석전제가 거행되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향을 올린다.
진위천
평택지역은 예로부터 들이 넓고 하천이 발달하였다. 큰 하천으로는 안성천과 진위천이 있고, 오산천, 황구지천, 도대천, 통복천, 소사천 등 34개의 하천이 뒤를 잇는다.
안성천은 조선시대에 구간에 따라 홍경천, 한천, 남천, 대천으로 불렸다. 길이는 66.4㎞, 유역면적 1,699,60㎞이다. 안성천에는 한천, 청룡천, 유천, 천안시의 입장천, 성환천, 평택시의 통복천, 도일천, 교포천, 대반천, 충청도의 둔포천 등 19개의 지류가 있다.
진위천은 조선시대에 장호천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위천으로 바꾸었다. 지류로는 오산천, 황구지천을 비롯하여 지산천, 산하천, 관리천, 서정천, 구천 등 14개가 있다. 오산천은 조선시대 토현천이라고 불렀으며, 황구지천은 내천으로 불렀다. 오산천은 광교산에서 오산을 거쳐 흐르다가 서탄면 회화리 부근에서 진위천과 합류한다. 황구지천도 수원과 화성을 거쳐 흐르다가 서탄면 황구지리 앞에서 진위천과 합류한다.
수원과 화성시를 거쳐 서해로 흐르는 발안천은 총 연장 30km로 평택시 청북면과 포승읍 북쪽지역에 영향을 끼친다. 본래는 바닷물이 유입되어 청북면과 포승읍 일대에 영향을 주었지만, 1974년 5월 포승읍 원정리와 화성시 우정면 이화리 사이에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되고 남양호가 조성되면서 바닷물 유입이 끊겨 나루와 포구는 폐항되었고 경작지는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택지역의 하천으로는 바닷물이 유입되었다. 바닷물은 사리 때 밀물이 밀려들면 안성천으로는 안성시 공도읍까지 유입되었고, 진위천은 한 때 진위면 은산리, 갈곶리까지 들어가다가 나중에는 서탄면 회화리 부근까지 들어갔다.
안성천과 진위천변에는 나루와 포구가 많았다. 안성천의 주요 나루, 포구로는 평택시 군문동의 군물포(군문포), 통복동 신대동의 신덕포, 화포, 삽교포, 팽성읍 석봉리의 원봉나루, 대추리의 곤지진, 노양리의 경양포(계양), 현덕면의 신흥포, 구진, 계두진이 있었다. 또 진위천에는 고덕면 궁리의 이포진과 다라고비진, 동청리의 동청포, 서탄면 황구지리의 항곶포, 진위면 갈곶리의 갈곶포, 청북면 토진리의 톷나루가 있었다. 아산만의 가장 큰 나루는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이었고, 그밖에도 신전포, 한나루가 있었다. 발안천변의 가장 큰 나루는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현곡리의 신포였고, 그밖에도 포승읍 홍원리 홍원마장의 말을 실어 날랐던 자오포, 호구포가 있었다.
나루, 포구에는 서해안의 소금과 어물, 해산물이 들어와 거래되었고, 세금으로 걷은 세곡이 실려 나가기도 하였다. 고덕면의 해창, 팽성읍의 경양창, 청북면의 옹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해창(海倉)이었다. 또 만호리의 대진은 삼국시대에는 대중국 교역항으로 큰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전후에는 충청도 내포지역을 연결하는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현덕면의 신흥포, 구진, 계두진, 팽성읍의 경양포는 아산만 하구의 수로교통 및 어항(漁港)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백현원과 맹사성
조선시대 평택에는 한양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갈 수 있는 삼남대로와 한양에서 온양을 거쳐 충남 보령의 충청수영까지 이어진 충청대로가 지났습니다. 큰길은 교통의 편리함도 있었지만 전쟁의 피해가 컸고, 왕과 대신들의 잦은 왕래로 백성들이 수탈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송북동 동막 옆에는 조선시대 백현원이라는 국영주막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세종 때의 명재상 맹사성에 관한 옛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맹사성의 집은 아산시 배방면에 있었습니다. 일명 ‘맹사성 고택’ 또는 ‘맹씨행단’으로 알려졌지요. 이 집은 본래 고려 말 최영장군의 것이었는데, 장군께서 맹사성의 비범함을 보고 손자사위로 삼으면서 물려줬다고 하더군요. 같은 시대의 황희 정승도 그렇지만 맹정승도 소탈하고 청렴한 재상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이 분은 먼 길을 여행할 때에도 시동 한 명만 앞세우고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호를 ‘오래된 부처님’이라는 뜻이 담긴 “고불(古佛)”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정승은 고향에 갈 때 주로 충청대로를 이용했습니다. 때때로 날이 저물면 객사(客舍)나 역원(驛院)에서 머물기도 했지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정승은 축지법에 능하여 한양을 하루 길로 다녔는데, 매일 아침마다 검은 소를 타고 송북동 우곡(소골)마을을 지나 독곡동 오리골을 거쳐갔습니다. 오리골의 토호는 조선 초부터 이곳에서 살아 온 단양 우씨였습니다. 이들은 “매일 아침 어떤 해괴한 노인이 검은 소를 타고 우리 마을을 지나는데 참 재수 없는 일이다, 하인을 시켜 그 이유를 묻고 다니지 못하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맹정승이 오리골을 지나자 우씨 집안에서는 얼른 하인을 시켜 쫓아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쫓아가도 축지법을 쓰는 맹정승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맹정승은 뒤에 누가 쫓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도일동 감주거리에서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왜 쫓아오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은 “단양 우씨 집안에서 아침마다 불길하게 검은 소를 타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고했습니다. 토호들의 오만함에 화가 난 맹정승은 “맹골 맹정승이 까막소를 타고 한양 좀 다녔기로 웬 참견이냐”고 호통을 쳐서 하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자신 때문에 백성들이 불편함을 겪은 것은 관인(官人)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부터는 오리골 길을 버리고 옆 동네인 오룡동 길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이 밖에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공당문답’도 백현원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송북동 소골마을과 풀무골 전설
► 위치 : 송북동 우곡
송북동 우곡(牛谷)은 소(蘇)씨 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소골입니다. 소골 마을 뒤 부락산 자락에는 풀무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때는 공민왕이 다스리던 고려 말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친원파와 권문세족을 척결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신돈이라는 젊은 승려를 기용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신돈은 당시 연줄에 얽매이지 않은 청렴한 승려였지만 갈수록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며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하지만 대신들은 신돈의 권력이 무서워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소골에는 소(蘇) 정승이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정승은 학문이 높고 강직하여 주변의 신망을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신돈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만 없다고 판단하고 동지들을 모아서 신돈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정승은 부락산 서쪽 골짜기에 ‘풀무간(대장간)’을 만들어 칼과 창을 만들고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출정할 때가 왔다고 판단되자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말하기를 “아버님, 벼 한 말을 찧어 쌀 한 말이 나올 때에 출병하여야 성공할 것이니 그리 해 보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평소 며느리의 총명함을 알고 있던 소정승은 “어찌 벼 한 말이 쌀 한 말이 될 수 있으랴마는 네 마음을 받아들여 그리하겠다.”라고 말하고는 하인을 시켜 벼 한 말을 찧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잘 익은 곡식을 넉넉하게 담아서 절구에 찧어도 9되 7홉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소정승은 며느리를 불러 “보아라, 네 말대로 하였다마는 어찌 벼 한 말이 쌀 한 말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괜한 말로 군중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말거라.”라고 엄히 꾸중하고는 수주(수원)를 향해 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소 정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관군의 기습으로 수주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소(蘇)씨 가문은 삼족을 멸하는 화를 당하였습니다.”
덕암산과 부락산
평택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서쪽 낮은 지형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큰 산이 없고 구릉과 평야가 발달하였다. 대체로 북동쪽으로는 구릉이 발달하였고 서남쪽으로는 평야가 발달하였다. 평택지역의 산들은 최고 200미터에서 최저 10미터까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무봉산. 덕암산, 백운산, 팔용산, 태봉산, 부락산, 오봉산, 고등산, 마안산, 자미산, 비파산, 무성산을 꼽을 수 있다.
무봉산(208.6m)은 평택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무봉산 앞의 부산(123m)은 조선시대 진위현의 진산(晉山)이었다. 조선시대 무봉산과 부산에는 진위현의 성황사, 사직단, 여단이 있었고,v 현재는 무봉산청소년수련원과 만기사가 있다.
덕암산(해발 164.5m), 팔용산(122.2m), 태봉산(158.2m), 백운산(192m)도 중요한 산이다. 부락산과 덕암산 자락은 조선시대 평택지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수백 년 이상 된 동족마을과 유력 가문의 묘역, 다양한 문화유산이 숨겨 있고 삼남대로로 덕암산과 태봉산을 지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봉 정도전 유적, 원균장군 유적, 경주 이씨 유적, 진위향교도 위에 열거한 산기슭에 있다.
팔용산은 안성시 원곡면과 평택시 도일동의 경계이고, 진위면 마산리의 태봉산은 예로부터 삼남대로 작은흰치고개가 넘었던 험로였다. 마산리 주민들은 정월 대보름 산위에 올라 망월을 하였으며, 장날이면 산을 넘어 서정리장과 평택장을 보러 다녔다. 백운산은 안성시 공도면 반제리와 월곡동 사이의 산이다. 월곡동과 죽백동, 청룡동과 죽백초등학교는 1983년 안성시에서 평택시로 편입된 지역으로 백운산도 이 때 편입되었다. 백운산 정상에는 정월대보름 월곡동 주민들이 망월을 하였으며, 산 아래에는 행천도예가 있어 매 년 5월에 혼불제를 거행한다. 백운산 아래 월곡동 관동마을에는 조선시대 관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락산(負樂山, 148m)은 송탄의 주봉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락산(負樂山), 조락산(鳥落山), 불악산(佛樂山), 요악산(仸樂山) 등 다양하게 불려졌다. 부락산 아래 동령마을은 고려시대 이래 송장부곡의 중심이고, 이충마을은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가 남아 있어 ‘이충(二忠)’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부락산 북쪽 우곡(소골) 마을에는 영조4년(1728) 무신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진주 소씨 가문의 전설과 묘역이 있으며, 부락산과 덕암산 사이로는 삼남대로의 험로 흰치고개가 넘어갔다. 이밖에도 작은 산으로는 칠원동의 산지봉, 이산매산 등이 있지만 규모가 매우 작다.
6.화가 최경 묘
최경은 평택과 연고가 있는 사람 가운데 국사교과서에 언급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최경의 고향은 경기도 안산이다. 실록에도 ‘안산의 염부(鹽夫)의 아들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소금 굽는 상민의 아들이었던 최경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비범한 재주를 보였다. 때때로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는데 솜씨가 놀라워 칭송이 자자했다. 세간의 입소문 덕분에 도화서에 들어간 최경은 피나는 수련을 달게 받아들였다. 실력이 쌓일수록 견문도 넓어져서 나중에는 신분의 벽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 싶은 야망도 품게 되었다.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인물화에 남다른 재주를 지녔던 것도 어쩌면 신분상승의 욕구와 관련 있을 것이다.
도화원에서 인물화에 뛰어난 화가쯤으로 치부되던 최경에게 우연히 정치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건 천운이라고 할 만큼 우연한 기회였다. 최경이 그린 인물화 중에는 세조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지 못하고 사망한 의경세자의 영정이 있었다. 의경세자가 사망하자 영정은 장남 월산대군에게로 넘어가서 사저(私邸)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며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成宗)이 월산대군의 사저에 들렀다가 영정을 보게 되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인수대비 손에서 외롭게 자란 성종에게 처음 대하는 아버지의 영정은 놀라움과 감동이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성종은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뒤로 최경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였을지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경은 1485년(성종 15) 절충 장군(折衝將軍) 사과(司果)라는 벼슬에 올랐다. 절충장군은 무관직이지만 당상관 벼슬이었다. 당상(堂上)은 고위관리의 기준으로 어전에서 임금과 무릎을 맞대고 정치를 논의할 수 있는 지위를 말한다. 하찮은 상민출신에다가 도화원 출신의 화원에게 당상을 제수하는 것은 당시의 통념과 법도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실록에도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도 오르지 못한 대단한 지위’라고 기록하여 얼마나 파격적인 인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최경이 당상에 오른 것은 성종의 특별한 애호였다.
최경이 평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생애 말년으로 짐작된다. 그는 큰아들 최유림을 진주 소씨 가문과 혼인시켰는데 그 인연으로 입향하였다. 후손들도 번창해서 큰아들 최유림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1455년 좌익원종공신에 오르더니 나중에는 이시애의 난에서 적장 김말손을 사로잡아 거듭 공신(功臣)이 되었다. 최유림의 음덕으로 손자 최윤신도 관직에 올랐으며, 증손자 최자반은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독곡동 오좌울 입구에 모정을 짓고 사림의 저명한 학자 최수성, 조광조, 김안국 등과 교유하여 이름을 높였다. 최경이 죽자 나라에서는 순충보조공신으로 병조판서에 추증하였고, 수성군에 봉했으며 안양(安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과 함께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원 출신의 화가이며 평택지역 수성 최씨의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최경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편이다. 평택시민 대부분이 최경의 묘가 도일동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선생님 한 분은 이와 같은 현실을 놀라워했다. 우리의 무지로 역사적 인물이 기억되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다.(2011)
7.원릉군 원균 묘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교서
■위치 : 평택시 도일동 480
■지정 : 선무공신교서(보물 제1133호) 사당(향토유적 제1호)
원균(元均, 1540~1597)은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의 장남으로 도일동 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했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에는 조산만호와 부령부사를 거치며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당대에 명성이 높아 임진왜란 두 달 전에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생하자 적의 규모에 놀라 경상좌수영이 궤멸하고 장졸들이 도망가는 가운데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연합함대를 구축한 뒤에는 당포, 당항포, 옥포, 한산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1597년에는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을 능멸한 죄로 처벌받아 백의종군하면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하지만 조정의 무리한 명령을 받고 부산포를 공격하다가 가덕도와 칠전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전사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1등 공신에 책봉되고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경기도기념물 제57호인 묘(墓)는 원균이 전사할 때 애마가 천릿길을 달려 물고 온 신발과 담뱃대로 썼다. 애마는 고향 집에 유품을 내려놓고 길게 운 뒤 죽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옛 집터를 울음밭이라 부르고 묘 아래에는 애마총이 있다. 또 갓골에서 여의실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는 향토유적 1호 사당이 있으며, 선무공신 교서는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8.갈원과 옥관자정
칠원1동(갈원)은 조선시대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역원(驛院)이었던 갈원이 있던 마을입니다. 지금 칠원1동은 쌍용자동차와 동광아파트가 들어서고 마을이 변형되어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지만 해방 후까지만 해도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주막거리였습니다. 이 마을에는 옥관자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옥관자정은 본래 옥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들의 목을 적셔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옥수정이 옥관자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고 난 뒤였습니다. 조선 후기 인조 때 이괄의 반란으로 한양이 점령당하자 임금은 공주로 피난갔습니다. 한양에서 공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평택지방을 지나야했습니다.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반란군에게 쫓기는 입장이다 보니 쉴 사이 없이 허겁지겁 달려야 했고, 칠원동 옥수정에 이르자 무척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관원에게 물을 떠오라고 하니 관원이 옥수정의 물을 떠서 올렸습니다. “시장(배고품)이 반찬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갈증이 심한 상태에서 마시는 물은 무척 맛이 있었습니다. 왕은 물맛에 감동하여 정3품 이상 당상관(최고급 관료)의 상징인 둥근 옥관자를 하사하였습니다. 그 뒤로 옥수정은 옥관자정이 되었습니다
소사원의 모정에서[素沙院茅亭] /김종직
이른 새벽에 진창길을 건너가니 / 凌晨渡泥潦
띠집이 평평한 들을 눌러 있는데 / 茅宇壓平原
기러기 오리는 하늘 멀리 날고 / 雁鶩兼天遠
물쑥들은 땅을 파랗게 덮고 있네 / 蔞蒿蓋地繁
분분히 달리는 건 삼도의 역말이요 / 紛紛三道馹
띄엄띄엄 있는 건 두어 집 마을일세 / 點點數家村
남주의 나그네 머리 돌려 생각하니 / 回首南州客
그 회포를 쉽게 논하지 못하겠네 / 情懷未易論 (점필제집 시집 제1권)
칠원1동 원칠원 마을은 삼남대로 갈원(葛院)이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원(院)은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을 위해 두었기 때문에 숙박과 식사, 음료가 필수적이었다. 옥관자정은 갈원에 있었던 우물로 본래 이름은 옥수정이었다. 이 우물을 옥관자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께서 남행을 하던 중 갈원에서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 임금은 몹시 목이 말라 곁에 있는 관원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관원은 주막 옆에 있던 옥수정의 물을 떠다 바쳤다. 신하가 떠온 물을 맛있게 마신 왕은 달고 시원한 물맛에 감탄하며 당상관이 패용할 수 있는 옥관자를 우물에 하사했다. 그 뒤로 옥수정을 옥관자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9.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
대동법시행기념비
*위치 : 평택시 소사동 140-1
*지정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은 조선 후기 공납제도를 개혁한 것이다. 공납은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제도로 징수상의 문제 때문에 방납의 폐단이 나타났다. 16세기부터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고, 1608년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로 경기도에 시범 실시되었지만 권력층의 반대와 상인들의 농간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 같은 현실에 물고를 튼 것은 김육(金堉, 1580~1658)이었다. 김육은 영의정, 우의정, 예조판서를 지낸 서인세력의 중심인물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의 방법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 있다고 믿었다. 1651년(효종 2) 우의정에 있을 때 김집과 같은 원로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이어 영의정에 올라 전라도에 확대 실시를 준비하다가 사망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는 백성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호서(湖西)에 대동법을 실시하자 ‘백성은 밭에서 일하며 춤을 추었고 삽살개는 아전을 보고도 짓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동법시행기념비는 김육이 죽은 이듬해(1659) 충청도 백성들이 호서에 실시한 대동법에 감사하여 세운 것이다. 비(碑)의 본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이며,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 이민구가 지었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썼다. 본래는 100여 미터 아래 옛 소사원 터에 있었지만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10.소사원과 미륵당
평택시 소사동은 삼남대로의 관문이었다. 마을 앞 소사천으로는 배가 닿았고, 마을을 가로질러 큰 길이 지났다. 인마(人馬)가 왕래하다 보니 장시도 개설되었다. 여행자들의 식당이며 숙소 구실을 하였던 소사원도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던 영의정 김육의 ‘대동균역시혜불망비’도 세워졌다. 정유왜란, 청일전쟁도 소사동에서 전개되었다. 사람의 왕래가 잦고 전쟁이 발생하면 민중들은 고통을 받는다. 혹여 임금이 온양행궁으로 온천욕을 가느라 마을을 지날 때면 도로를 보수하고 접대비용을 마련하느라 등골이 빠졌다. 그래서인지 소사1동 옛 소사원 옆에는 미륵당이 있다. 미륵은 직사각형의 돌방에 모셔져 있는데, 1미터 50센티 정도로 작은 규모지만 소박한 미소가 정겹다. 소사동 미륵은 할아버지 당신(堂神)과 함께 오랫동안 할머니 당신(堂神)으로 모셔졌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당제가 중단되면서 근처의 무속인들이나 신자들에 의해 신앙되고 있다.
11.소사벌대첩
정유재란(1597년)은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이 재침한 사건이다. 재침할 때 일본군의 수는 141,500명이었으며,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으로 삼고,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양호, 마귀를 총병관으로 삼아 55,000명을 파병하였다. 조선군은 3만 명의 군대로 권율을 대구 공산에 권응수를 경주에, 곽재우를 창녕에, 이복남을 나주에, 이시언을 추풍령에 배치하였다.
7월초 일본군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를 총사령관으로 부대를 좌․우군으로 편성하여 하삼도(下三道) 일대를 공격하였다. 왜군의 우군(右軍)은 대장 모리(毛利秀元)를 중심으로 휘하에 가토와 구로다 등을 배치하였고, 좌군(左軍)은 대장 우키다를 중심으로 고니시와 시마즈 등으로 편성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목적은 분명했다.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일본 국내정세의 불안정, 히데요시의 건강악화로 인한 후계구도의 불안정이 발생하면서 재침을 통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바꿔 강화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고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1597년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명령서에도, 전라도지역은 반드시 공략하되 충청도와 경기도는 필요에 따라 공격하며, 공격이 성공한 뒤에는 남해안 연안지역으로 철수하여 분담된 성(城)에 주둔할 것을 지시하고 있어 당시 일본의 의도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남해안을 거쳐 구례를 점령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남원성을 점령한 뒤 좌․우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약탈을 하였고, 우군은 삼남대로를 따라 충청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충청도방면으로 진격한 가토와 구로다의 우군은 9월 초 충청도방어사 박명헌 부대로부터 여산, 은진, 진산에서 공격을 받았으며, 회덕에서는 이시언 부대에게, 고령과 황석산성에서는 정기룡과 조종석 부대의 저항에 부딪쳤다.
소사벌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으로는 소사벌대첩 외에도, 영조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그리고 1894년에 발생한 청일전쟁이 있다. 소사벌대첩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휴전협상이 결렬되면서 재침한 왜군이 남원성, 전주성을 점령한 뒤 삼남대로를 따라 빠르게 북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왜군이 북상을 시작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조정은 파천(播遷)을 의논하였다. 평양에 주둔하면서 소식을 접한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는 한양으로 달려와 명나라 제독에게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양호의 질책을 받은 제독은 해생, 우백영(牛伯英), 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 등을 불러 기병과 보병 4,000명으로 왜군의 북상을 막도록 명령하였다
소사벌대첩은 1597년 9월 5일에서 6일 사이에 전개되었다. 소사벌대첩에 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도 언급되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 장유의 계곡집 등 개인저작과 문집에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또 전투의 명칭도 소사벌대첩보다는 ‘직산전투’로 부른 것이 많다. 이것은 소사벌이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영통면에 속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투가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소사동 일대와 왜군이 주둔한 직산현 일대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사벌대첩에서 왜군은 가토와 구로다가 이끄는 우군에 좌군의 일부가 합세하였다. 기록을 종합해볼 때 직산일대에 집결한 왜군은 약 6만 명으로 추산되며, 경기도 일대 조․명 연합군은 명나라 제독 마귀가 이끄는 1만 8천 명이 전부였다. 장유(1587~1638)의 계곡집과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명군(明軍)은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이끄는 6천여 명의 왜군(倭軍)을 맞아 1597년 9월 5일 새벽 부총병 해생(解生)이 소사교 아래에 군대를 매복했다가 갑옷을 입힌 원숭이를 말에 태워 적진을 혼란에 빠뜨린 뒤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날 두 나라의 군대는 여섯 번 회전(會戰)하였는데 모두 명군(明軍)이 승리를 거두었고, 다음 날에도 전세를 만회하려고 달려드는 왜군을 재차 대파하였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조금 다른 내용이 기록되었다. 예컨대 ‘1597년 9월 일본군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며 경기지역을 핍박하였는데,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가 이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제독을 불러 싸우지 않는 것을 꾸짖고 기병들을 몰래 선발하여 해생, 우백영(牛伯英), 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로 하여금 직산으로 내려가 물리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명령을 받은 해생 등은 직산의 소사평(벌)에 매복하였다가 적병이 대오를 정렬하기 전에 돌격하였는데 적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가다가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자 해생은 유격장 파새(擺賽)에게 기병 2천명으로 뒤를 쫓게 하여 또 다시 큰 승리를 거뒀다.
12.청일전쟁
경복궁 쿠데타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양력 7월 25일 아산만 입구 풍도를 지나가던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였다. 청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 풍도해전으로 청의 북양함대는 군함1척이 격침되고 병사들과 보급품을 수송하던 영군선박이 침몰하면서 1,200명의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일본은 풍도해전이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기를 원하는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풍도해전으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작전계획에 따라 오오시마가 이끄는 일본여단 4,000명을 삼남대로를 따라 평택(진위)과 성환으로 급파하였다. 청나라도 인천항으로 상륙하였던 부대와, 아산의 백석포와 평택의 군물(문)포로 상륙하여 성환과 아산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합류시켜 일본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평택일대에 주둔한 청․일 양군은 진지구축에 들어갔다. 척후를 유천3동 군두포에 두었던 청군은 망근다리 부근에 망루(망군대)를 세우고 적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삼남대로를 따라 남하하여 소사동과 소사벌에 진을 친 일본군도 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4년 7월 28일 저녁 청․일 양군은 소사벌과 성환부근의 홍경평에서 격돌하였다. 싸움은 밤을 세우고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으며 총성과 대포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야간에 전투가 전개되면서 당시만 해도 간석지와 황무지, 웅덩이가 대부분이었던 소사벌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들도 발생하였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해 헤매던 일본군 일부가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왜몰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도 이때였다. 왜몰보에서 일본군이 빠져 죽을 때 열 대 여섯 살쯤 되는 북치기 소년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여서 후대에 크게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소년이 빠져 죽은 웅덩이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였고, 1번국도 변 홍경마을 입구에 큰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우월성과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유발하기 위해 세웠을 비석은 해방 후 마을 사람들에게 파괴되어 이제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소사벌과 홍경평 일대에서 전개되었던 싸움은 사전준비가 철저하였던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청군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아산방면으로 퇴각하였고, 일본군은 고작 68명의 사상만을 내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지명이 ‘청망평’, 현재 소사벌 또는 홍경평 어디쯤이다.
양력 8월 1일 청․일 양국은 선전포고를 하였다. 청군은 중국본토로부터 북양군을 지원받아 평양을 교두보로 삼았고, 일본군은 산개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양력 9월 15일에 있었던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13,000~15,000명으로 대항하였지만 일본군의 기습작전에 말려 2,000여 명의 전사자와 4,0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는 대패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황해해전에서조차 우세한 전력과 화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양력 10월 말에서 11월 사이에는 만주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2월에서 3월 사이에는 북양군과 북양해군의 요새였던 웨이하이(위해시)까지 점령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12.평택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