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잔혹한 가상의 태풍 피해 시나리오
‘시나리오로 본 우리나라 미래 재난 전망’ 보고서 속 풍수해
2023.08.18 09:00 권예슬 리포터
▲ 우주에서 관측한 제6호 태풍 ‘카눈’이 지그재그로 북진하는 독특한 이동 경로 ⓒNASA Earth Observatory
제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1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재난‧사고 유형 중 가장 위험하다고 종합적으로 평가된 5가지 재난(풍수해, 폭염, 감염병, 미세먼지, 산업 재해)에 대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재난 시나리오를 작성해 공개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상상해보고, 재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과거 주요 사례, 뉴스 등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그중 풍수해 시나리오는 상상이라기보다는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풍수해 시나리오: 기후변화가 슈퍼 태풍을 수도권으로 불러들였다
▲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우리 사회를 위협할 가장 위험한 재난 중 하나로 풍수해를 꼽았다.
더욱이 풍수해는 기후변화로 인해 점점 더 강하게 인류를 위협할 것으로 예상됐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입추가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는 202X년 9월 초. 중심 최대풍속이 초속 54m 이상인 초강력 태풍이 한반도 쪽으로 북상했다. 한반도 남서해상에 이례적으로 형성된 고수온으로 인해 태풍은 그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서해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윽고 방향을 틀어 수도권역으로 상륙했다. 더욱이 대기권 상층에 형성된 블로킹 기상현상으로 인해 태풍은 더 이상 북동진하지 못하고 수도권 상공에 수일 동안 정체되었다. 북쪽에 형성된 찬 공기와 태풍이 가져온 따뜻한 공기가 부딪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시간당 120㎜의 강수가 쏟아져 내렸다.
호우 시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도로변 빗물받이들에 각종 낙엽과 쓰레기, 심지어는 일부러 막아놓은 고무판으로 인해 빗물을 배수하지 못해 도심에 빗물이 흘러넘쳤다. 도심 지하철 방수벽을 넘어 강수가 폭포처럼 지하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 지하철 수십여 곳이 침수되었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승객들은 역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파트와 고층빌딩에서는 건물 내 전기시설이 있는 지하실이 침수되어 전기로 가동되는 건물의 주요 기능들이 마비됐다.
인명피해는 하천 주변 저지대와 산 아래에 위치한 크고 작은 주택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지하나 반지하 주택 대부분이 침수됐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도 물리 차올라 급히 차를 빼러 내려간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해 변을 당했다. 지하차도에서도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낙후된 도심 저지대 지역에서 특히 피해가 커졌다.
▲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공개한 미래 재난 시나리오는 기후변화로 인해 슈퍼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그렸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기록적인 폭우는 지반을 약해지게 만들어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고 엄청난 양의 토석류가 순식간에 주택과 차량을 휩쓸었다. 수십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지만, 흘러내린 토사량이 워낙 많아 구조작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낙후된 구도심에서는 강풍에 의한 피해도 심하게 발생했다. 폐공장의 지붕이 뜯겨나가 거리에 날아다녔다
태풍이 천천히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제 수도권 상공에서는 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풍이 한강 상류를 따라 움직이면서 비를 뿌려대고 한강 상류 댐들이 홍수 조절량 확보를 위해 계속 방류하고 있어 한강 본류의 수위가 멈추지 않고 상승하고 있다. 겨우 최악의 호우가 지나갔지만, 이제는 한강 범람을 우려하면서 제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상상보다는 현실에 가까운 시나리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제시한 시나리오는 공상과학영화처럼 느껴지지는 않고, 현실의 뉴스처럼 다가온다.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도 시나리오와 유사하다. 2100년이 되면 우리나라를 지나는 태풍이 지금보다 4배 이상 많아질 것이라는 분석,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2배 증가하면 3등급 이상의 강한 태풍이 1.5배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 등이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태풍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1990녀대 초반까진 대부분 북위 30° 아래에서 슈퍼 태풍의 위력이 줄었지만, 최근에는 북위 36°까지 세력을 유지하는 추세다. 북위 33~38°에 있는 우리나라도 슈퍼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종의 태풍 방어막인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태풍이 극지방으로 더 다가오고 있다. 제트기류는 중~고위도 지역에서 발생하는 좁고 빠른 공기의 흐름이다. 태풍이 제트기류를 만나면 모양이 무너지면서 약화된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극지방의 기온이 높아지고, 이로 인해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태풍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다.
▲ 인도양과 태평양에 걸친 웜풀 지역. 해면 온도가 28℃ 이상으로 연중 유지되는 이 지역은 1900~1980년에
대비해 1981~2018년에는 2배 이상 넓은 면적이 매년 확장되고 있다. 지도에서 색이 어두운 부분은 더 높은
온도를 의미한다. ⓒNOAA Climate.gov
게다가 태풍의 고향인 ‘웜풀(Warm Pool)’의 변화도 심상치 않다. 지구에 축적된 열에너지는 대부분 해양에 흡수된다. 태풍을 비롯한 열대성 저기압이 만들어지는 열대 해수 수온 역시 온도 상승을 피하지 못한다. 인도양과 태평양에 걸쳐있으며 해표면 수온이 연중 28℃ 이상인 웜풀은 최근 들어 면적이 빠르게 확장되는 추세다. 1900~2018년 동안 웜풀은 평균적으로 매년 23만㎢씩 면적을 확대했는데, 최근 몇십 년 동안(1981~2018년)에는 그 두 배 정도인 40만㎢ 만큼씩 넓어지고 있다.
미국해양대기청(NOAA) 연구진은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벌어지는 웜풀의 빠른 면적 변화는 열대 지역 날시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며 “매든 줄리안 진동(20~70일 주기로 열대 지역 강수 구역이 변동하는 현상) 등 전 지구적 영향을 주는 대기 순환에 영향을 줘 미국에 폭염, 눈보라 같은 극한 기상현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