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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에 갇힌 조영은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다행히 소지품들을 방안에 넣어주었으므로, 보따리를 뒤져 책을 꺼냈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삼일신고>와 다물 임금의 <행심록>, 해모수 임금의 <삼극팔괘무학>, 그리고 경교의 경전 몇 권이었다.
그는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십자사 경승 고양원 대덕과 여미아가 준 시들을 다시 꺼내 훑어보았다. 지난 번, 유혹과 협박을 겸한 무 태후의 요청으로 인해, 진퇴유곡에 빠져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시들을 읽다가 문득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았는가?
武 境 渺 深 難 苛 思 무경묘심난가사
眞 寶 神 光 不 可 遮 진보신광불가차
失 色 一 道 滾 滾 走 실색일도곤곤주
燃 戀 洗 世 牧 丹 花 연연세세목단화
아득하다 무예의 길 애써 찾기 어렵고
참 보배의 신광이여 가릴 것이 없어라
크게 놀라 한길로만 강물처럼 내달으니
그리움을 불태워 세속 씻자 모란화야
“그리움을 불태워 세속 씻자 모란화야. 고운님, 고운님 목 놓아 부르며··· 나는 꽃의 왕, 너는 왕의 꽃······.”
조영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구를 읊조리다가 문득 부친 고중상에게로 의념이 미쳤다.
‘난 여기 당나라 감옥 안에 붙잡혀 있는데, 부황께서는 동모산 아래서 무얼 하고 계실까? 나에게 발해군과 고리군 등 고려 고토의 다물을 맡기셨는데, 장차 무얼 어찌 해야 하는가?’
‘이루하와 여미아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래저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고운님, 고운님, 우리 고려백성이 들꽃이라면, 임의 동산에서 모란화처럼 피어날 때는 언제이옵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다.
“고양원 대덕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의 동산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이 세상엔 고려백성의 동산은 없단 말입니까?”
“고려백성의 동산이 있어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면 그 곳도 역시 임의 동산이 아닙니까?”
“당나라라고 하는 이곳의 황궁은 도산검림刀山劍林 같고 아귀지옥 같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난리인 것 같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하늘 상제시여, 고려백성의 동산, 평화로운 신神의 동산을 우리에게도 주소서.”
열흘이 넘도록 이루하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자, 고려여관의 이기창은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이기창은 심복 하인을 자기 방으로 은밀하게 불렀다.
“이보게. 며칠이 지나면 그 고조영이라는 자가 출옥할 터인데, 이루하는 감감무소식이니, 그 안에 결단내야겠어. 그래, 이루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집안에 틀어박혀 통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전에 지시한 약물은 준비되어 있겠지?”
“네.”
“지난번에는 우리가 너무 멍청했네. 그 여미아라는 계집애가 그토록 빼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는 줄은 까마득히 몰랐어. 이번만큼은 실수하지 않겠지?”
“준비는 완벽합니다.”
“그럼 우리가 먼저 그녀들을 초대해야겠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이곳으로 와서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하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보다는 때를 기다리며 정공법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는지요?”
“자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어. 고조영이 출옥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네. 그 안에······.”
뒷말은 눈짓으로 대신했다.
“만일 그녀들이 나리께 몸을 굽힌 후에도,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면 뒷일이 염려······?”
“그네들이 일단 내게 바치고 나면, 마음도 달라지게 되어 있네. 그리고 이 일의 성공 여부는 장차 우리 가문의 장래와도 깊은 관계가 있어. 알겠는가?”
“네?”
종이 의문스런 표정을 짓자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게. 그녀의 부친 이진영 대인은 송막도독이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이기창은 무태후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날 당장 이기창은 이루하의 집으로 사자를 보냈다.
이루하의 집에서 돌아온 하인이 복명했다.
“초대를 고맙게 생각한답니다. 단, 사흘 후에 가겠답니다.”
“사흘 후라면, 고조영이 출옥하는 날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가 옥에서 나오면, 아마도 함께 올 모양입니다.”
“어허! 그럴 순 없지. 내가 초대한 건 이루하인데.”
“하지만 상관없지 않습니까? 고조영이야 대충 처리해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오! 역시 자네는 영리해.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오히려 그가 함께 온다면 더욱 좋겠네.”
출옥하기 전날 밤이었으나, 조영은 참담한 심사에 빠져 침울해 있었다. 한 달이 이토록 긴 줄은 난생 처음으로 알았다.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이루하와 여미아는 단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접근이 차단되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태평공주 이영월만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를 면회하러 왔을 뿐이다. 이영월은 그를 만나러 올 때마다 맛있는 음식도 가져오고 바깥소식도 들려주었다. 둘은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곤 했다.
이루하가 이다조 장군의 둘째 아우 이기창과 맞선을 본 일은, 이영월을 통해서 들은 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간수는 그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루하가 이기창과 혼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조영이 이루하와 함께 장래를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루하와 여미아가 그의 곁을 떠나 이다조 장군의 가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의외지변意外之變이었으며 그의 하늘을 샛노랗게 물들이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황량한 벌판의 헐벗고 외로운 나그네가 극심한 추위와 비바람, 눈보라에 노출된 것과 같았으며, 망망대해의 배 한 척이 거대한 풍랑을 만나 건곤일척의 사투를 벌이는 것과 흡사했다.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으나 가슴은 좀처럼 평온해지지 않았다. 책도 여미아의 시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승 고양원이 가르쳐준 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호흡 기도를 해 보았으나 잡념 때문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았다.
모든 걸 다 잊고 잠에 빠지려 했으나, 야색은 짙어가도 기나긴 불면의 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조영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어차피 남남이 아니던가. 내가 언제 이루하와 인연 맺고 여미아를 만났는가?’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녀들을 잊어버리기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을 때, 간수가 와서 사물을 챙기라고 일렀다.
이른 아침, 조영이 감옥의 바깥문에 당도했을 때 여러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태평공주 이영월의 밝게 웃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뜻 밖에도 그의 조부 고승과 십자사의 경승 고양원 대덕도 아직 귀향하지 않고 그를 맞으러 왔다.
그들 외에도 이루하와 여미아가 예의 그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를 그 자리에 나타냈다.
조영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와 대덕님은 어찌해서 아직까지 여기에 계십니까?”
조영이 의아해 물으니, 고양원이 대답했다.
“조영 공자의 거취에 대한 폐하의 하명을 듣고 돌아가기로 했네.”
조영이 옥에 갇히기 전 태후는 그가 출옥할 때 새로운 명을 내리겠다고 말했었다. 그녀의 명에 따라 조영의 신상에 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그들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나서 귀향하기로 한 것이다.
조영은 잇따라 태평공주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동안 저를 돌보아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뭘요. 제가 한 게 뭘 있다고?”
태평공주가 쑥스러워하며 그녀답지 않게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마지막으로 조영은 이루하와 여미아에게도 사의를 나타냈다.
“두 분께서 끝까지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두 분이 제게 베풀어주신 호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루하는 조영의 말에서 이별을 고하는 듯한 좀 이상한 어감을 감지하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태평공주 마마께 비하면 베풀어드린 것이 거의 없는데, 별 말씀을 다하세요. 공자께서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출감하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이루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낮에 오찬을 함께 할 수 없을까요? 고려여관의 이기창 소장주小莊主가 저와 공자님을 오찬에 초대했습니다.”
조영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좀 불편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사양했다.
“아, 그랬습니까? 고마운 분이군요. 하지만, 저는 태평공주 마마를 따라가서 폐하의 명을 받아야 할 몸입니다. 제 대신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조영이 이루하와 여미아에게 머리 숙여 겸허하게 절했다.
이루하는 조영이 태평공주를 입에 올리자 속으로 몹시 불쾌했으나 역시 아무런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잘 알겠어요. 공자께서는 대당의 낙양성에서 전도양양하신데, 저 같은 변방의 아녀자가 앞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조영은 더 이상이 대꾸하지 않고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태평공주를 따라 나섰다. 전에 머물던 황궁 밖의 숙소로 돌아온 조영은 오랜 만에 목욕재계하고 하나님께 삼배를 올린 후 <삼일신고>과 경교의 경전을 읽었다. 얼굴과 의복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고친 후 사시巳時(오전 10시 전후)가 넘어 태평공주와 함께 자신전으로 무 태후를 알현하러 갔다.
무 태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엷은 자색 휘장 뒤에 앉아 태평공주와 조영을 맞았다. 조영과 공주가 문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 태후가 물었다.
“그래, 한 달 간의 영어囹圄 생활이 어떠했는가?”
“마마의 돌보심으로 평안했사옵니다.”
“계속해서 옥중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내 명을 따르고 싶은가?”
조영이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무 태후가 밝히 말했다.
“오늘의 석방은 가석방이네. 조정의 고관을 폭행한 죄는 종신형을 받을 수도 있는 중죄에 상당하네. 하지만 한 달 만에 출소시킨 것은 그대가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일세. 공을 세워, 죄를 속하라는 뜻이네.”
“마마의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자네는 나의 시위 장수네. 내가 출근하기 직전 나의 침전인 장생전長生殿의 대문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조당朝堂까지 나를 호위하고 내가 중간에 어딜 가거나 퇴근할 때까지, 특별 하명下命이 없는 한 나를 수행하면 되네. 내 말대로 하겠는가?”
낙양궁은 북궁 혹은 북성과, 남궁 즉 남성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북궁에는 황제와 황제의 가속 및 여인들, 그리고 태후가 거주했다. 남궁은 조당으로서 문무백관이 정사를 보는 곳이다.
조영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종신형을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는 데야 어찌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더구나 경승 고양원 대덕은 사람이 어느 곳에 살고 누구를 섬기든 그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환꽃 동산이고 모란꽃 동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폐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조영이 허리 숙여 절하자 무태후가 한 가지 주의를 당부했다.
“북성北城은 원래 금궁禁宮이라 남자가 출입하기 곤란한 곳이니, 북궁에 들어갈 때는 각별히 몸 조심해야 하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대 혼자 이 중책을 감당하라는 건 아니네. 그대와 함께 이진충의 가신장인 이해고가 이 일을 맡을 거네. 이교대로 하루걸러 한 번씩 주간에만 나를 호위하면 되네.”
무태후의 입가의 회심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영은 그 미소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
조영과 태평공주 이영월, 이루하, 여미아, 네 남녀가 숭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도중 무후군을 만난 일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조영이 투옥당하고 출옥한 후 지금까지의 모든 그림은, 무태후의 붓끝에서 나온 일목요연한 솜씨였음을 조영이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매사가 혼란스럽게 엉클어져 보이고 불가측不可測해도 사실은 누군가의 치밀한 안배가 그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계획을 벗어나 의외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 시각 이루하와 여미아는 채비를 갖추고 성 밖의 고려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씨, 아무래도 제 마음이 좀 불안합니다. 조심해야 하겠어요.”
도중에 여미아가 자신의 여주인에게 속삭였다.
“큰 일이 나면 뭐 얼마나 큰 일이 나겠느냐?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
이루하의 말투에서 그녀의 심정을 엿본 여미아가 이루하를 위로했다.
“아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니다. 조영인가 뭔가 하는 자는 출세에 눈이 멀어 태평공주를 따라가는 것, 너도 뻔히 두 눈 뜨고 보지 않았느냐?”
“조영 공자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폐하의 명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한 달 내내 우리와의 만남을 거절하고 한 달이 지나 우리와 해후하고도 외인을 보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대한 것을 네가 잊었느냐? 우리에게서 마음이 아주 떠났단 말이다.”
이런 발언의 이면에는 태평공주의 장난이 있었다. 태평공주는 조영이 옥중에 있는 동안, 하녀를 통해 이루하와 여미아에게 조영이 그녀들과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하며, 그녀들을 속이고 그녀들의 다가옴을 차단했던 것이다.
여미아와 이루하는 진즉 태평공주의 속임수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조영이 출소 후 이별의 뜻을 나타내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미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의 오찬은 어쩐지 꺼림칙해요. 의외의 불길한 일을 당할까 염려돼요.”
“감히 벌건 대낮에 그 자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이루하가 여미아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반문하며 덧붙였다.
“만일을 염려해 이해고 장군을 함께 모시고 가기로 했다. 그 분이 우릴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거라.”
그들이 장하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오니, 키가 무척 크고 허리에 장검을 찬 한 젊은이가 위풍당당하게 서서 그들에게 예를 차렸다.
“아씨, 이제 오십니까? 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 이 장군이시군요. 폐를 끼쳐 죄송해요.”
여미아의 인사말이다.
“아, 아닙니다.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이해고는 여미아에게도 깍듯이 대했다.
낙양성 장하문 밖까지 고려여관의 사환들이 나와 그들을 호송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환들은 극진한 애정과 정성으로 그들을 특별 호화 마차에 모시고 여관으로 향했다.
도중에서 사환들은 그들을 마치 제왕처럼 대우했다. 고려여관 삼백 보 바깥에 다다르니, 이기창이 친히 마중을 나와 손님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말고삐를 잡고 마부석에 앉아서 마차를 어거했다.
이번에는 일반손님들이 드나드는 주루나 객실이 아닌, 아주 조용하고 아늑한 전각의 방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아마도 이곳은 특별한 신분의 빈객들을 대접하는 집인 듯했다. 외형은 전형적인 고려식 기와지붕 및 치장에다 실내의 장식들은 고려귀족들의 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넓고 아늑한 방안은 채광이 잘 되어 매우 환했으며, 대낮인데도 장식용 촛불들이 켜져 있었다.
실내에는 이미 상이 걸게 차려져 있었고 상보가 덮여 있었다. 주인이 권하는 대로 세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이기창과 이해고가 마주 바라보고 좌정하고, 이해고 옆 상석에는 이루하가 자리를 잡았다. 여미아는 이루하 뒤에 한 발 떨어져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외부에 대한 감각이 매우 예민한 여미아는 후각을 통해 들어오는 촛불 냄새가 예사롭지 않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루하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은 참 운치가 있고 멋을 아시는 분 같습니다. 대낮에 촛불을 켜 놓으시다니.”
“소중한 빈객들을 위한 저의 예의로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기창이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이해고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일전의 무술대회에서 이해고 장군의 무예를 보고 저는 장군을 크게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뭘요, 저의 어리석은 재주를 비웃지나 않으셨으면 다행입니다.”
“천만에, 천만에요. 저는 무림의 영웅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부끄러워 감히 장군을 초청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친히 왕림해 주시니, 이 자리가 한없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들이 오고간 후, 일행은 식사에 들어갔다. 여미아는 촛불에 신경을 쓰며 뒤에서 자기 몫으로 놓인 음식을 먹고 있었다. 미식가들이라면 무척 좋아할, 하나같이 보기 드물고 매우 진귀한 식단이었다.
식사 후 이해고에게는 주전鑄錢 일민一緡이 주어지고 이루하에게는 아름답고 기다란 금빛 함이 선사되었다. 여종인 여미아에게까지 보석 박힌 귀걸이 한 쌍이 주어졌다.
“어서 열어보세요. 보잘 것 없지만.”
이기창의 권유에 이루하가 함을 열어보니, 거기엔 무지갯빛 찬란한 단도가 들어 있었다. 칼집에는 보석이 박혀있는데,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칼집을 열어보세요.”
이루하가 조심스럽게 칼을 들어 집을 빼어보니, 아름다운 은빛이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일견하기에 보기 드문 명도名刀였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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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 1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