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 : 19 - 28절
“보고와 금식의 능력”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 옷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스데반이 죽임당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히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이제는 이방인의 선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했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죽을 뻔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런 것과 사울이 죽을 뻔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아오는 돌을 겨우 피하고 나서도 죽을 뻔했다는 표현을 사용을 하지만 바울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판단을 해서 성 밖에 내다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죽을 뻔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했던 바울이 어떻게 멀쩡하게 다시 살아나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성경을 통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난 바울이 멈추지 않고 더베라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을 죽이려고 선동을 했던 사람들이 이고니온과 안디옥 사람들이었는데 그곳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면서 1차 전도 여행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본문 내용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27절에 보면 우리가 계속해서 보게 될 패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표현은 보고 했다고 되어 있지만 서로 나누었다는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누면서 공감하고 도전을 받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그런 시간을 대충, 형식적으로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28절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보고의 형식이었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나누는 일이 너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교도 급하지만 오래 머물면서 함께 교감을 했던 것입니다.
이 패턴이 2,3,4차에도 계속 되고 있는데 한 주간 성도들이 다른 공간 안에서 주를 위해 살았던 흔적에 대해서 서로 보고하고 나누는 것이 예배를 한 번 더 드리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을 했는지, 적용을 하며 살다가 승리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 부분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서로 오래 머물면서 나누어야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건강한 영적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지 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알아온 시간은 많은데 영적으로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속빈 강정 같은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간접 경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누군가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경험될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는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이 경험했던 일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주부만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이고, 직장 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서로 보고하고 나누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더 풍부해 질 것이기 때문에 서로 바쁘겠지만 오래 교제하면서 함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쁜 시간 속에서 살고 있고 매우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이런 모습이 사치스러운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만들고 건강한 영적 교제를 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보여 줬던 기도의 모습인데 특별히 많은 기도 중에 금식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는데 있어서 특별히 금식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세우고 돌아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제일 처음에 금식 기도를 했던 사람은 모세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사십주야를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는 금식 기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에 속죄일, 매년 7월 10일이 속죄일이었는데 유대인들이라면 이 하루는 금식을 통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의식을 해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금식에 대한 훈련을 받다가 사사 시대에는 금식 기도를 통해 엄청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와 온 이스라엘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1차, 2차 전쟁에서는 베냐민 지파가 승리를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벧엘로 올라와서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며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금식 기도 때문에 3차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둬서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금식 기도 후에 처음으로 나타난 금식 기도가 이 기도입니다.
금식 기도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참 대단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1 ,2차 전쟁에서는 패배를 했는데 금식 기도를 하고 전쟁을 했더니 승리를 하였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습게 생각하고 넘어갈 기도의 모습이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이런 비슷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는데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링컨 대통령이 1863년 4월 30일에 금식 기도일을 전 국민에게 선포를 하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금식하면서 기도드리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다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후에 온 국민이 금식 기도를 했고 그러고 나서 게트지버그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모든 적들을 격퇴시키는 놀라운 전쟁의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쟁의 분위기가 북군쪽으로 기울기 시작을 해서 결국은 노예 해방을 이루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금식 기도는 굉장히 능력 있는 기도이고 큰 은혜가 있는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육체적인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꼽시계라는 말도 있듯이 때만 되면 육신의 정욕에 따라 배에서 신호가 오기 때문에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실패의 경험 때문에 또 그렇게 될까봐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금식 기도의 능력을 사실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유혹도 능히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0일씩, 일주일씩 금식 기도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지만 하루나 한 끼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 금식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분명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고 금식 기도의 위력이 이처럼 대단한데 금식 기도에 대한 믿음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도 철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 기도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또 잘못된 금식 기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를 보면 먹을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은데 금식하는 분들에게는 이것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아질수록, 맛있는 음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금식 기도는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금식 기도에 대한 편견부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 기도를 통해 민족을 구하는 엄청난 은혜를 경험했고, 다니엘도 금식 기도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했고, 심판 일보직전의 니느웨 성도 요나가 전한 복음을 듣고서는 금식 기도를 하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금식 기도의 능력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 잡혀 14년 징역을 받고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교도소를 목회지로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는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살인자였으며 너무나 난폭해 교도소의 간수들까지도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교도소에서는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은 그를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만이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고는 힘겨운 중노동을 하면서도 금식하면서 그 살인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힘든 일 때문에 죄수들이 모두 지쳐서 곯아떨어졌을 때도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다른 때와 같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려 가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뒤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어 뒤돌았습니다. 자기가 위하여 기도하던 죄수였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노려보면서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젊은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이오." "무엇을 위해 기도하지?" 목사님은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소." 목사님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자신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가슴은 녹아내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소문은 교도소 전체로 퍼져 나갔고 드디어 교도소 소장도 듣게 되었습니다. 소장은 그 목사님을 호출했습니다. 어떻게 그 살인자를 변화시켰느냐는 물음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나는 그를 위해서 기도를 했을 뿐이고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소장이 말했습니다. "좋소, 나는 신 따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렇지만 내가 목격한 이런 변화는 환영이오. 그러니 당신은 다른 사람들도 변화되도록 하시오. 앞으로는 이를 위해 더 힘쓰도록 일하기 쉬운 식당에서 일하시오." 그 교도소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지만 젊은 목사님 때문에 교도소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면서 교도소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교도소 당국도 젊은 목사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그 목사님은 소련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도소로 옮겨졌습니다. 교도소장은 만일 그곳에서도 다른 교도소에서처럼 변화가 일어나면 조기에 석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 그 목사님은 아내에게 고통스러운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모쪼록 자신의 결정을 이해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도소에서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교도소 당국이 석방하겠다다는 결정을 목사님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기도 제목이 있는 경우는 금식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금식 기도를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는 분들이 계시는데 금식 기도의 능력과 은혜를 믿으시고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항상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