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日本 「임금의 섬」에서 태어난 백제 무령왕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462~523)의 이름은 ‘사마(斯麻)’, ‘섬’이라는 뜻이다.
왜 ‘사마’라고 불렀을까? 그 이유는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의 아주 외딴 섬에서... (작가 스스로가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일본말로 ‘섬’은 ‘시마(島·しま)’이다.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탄생에 얽힌 일화가 실려있다고 한다.
백제 21대 개로왕이 동생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려 하자 곤지는 왕의 여인을 자기에게 줄 것을 청한다.
그녀는 마침 개로왕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개로왕은 “산달이 가까웠으니 만약 가는 도중에 낳게 되거든 아이를 배에 태워 곧장 백제로 보내다오” 당부하면서 동생과 그 여인을 일본에 파견한다.
아마도 일본 총독과 같은 구실이었을까?
그것은 그 무렵 왜는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
배가 일본 큐슈의 쓰쿠시 앞바다 ‘가가라(名羅) 섬’에 이르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세마’(‘사마’와 같은 ‘섬’의 뜻)이라 짓고 얼른 백제로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대로라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야 하는데 「삼국사기」 등엔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 또는 제24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되어있어 계보가 분명치 않다.
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지석(誌石)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摩王>이라 새겨져 있었다.
즉 이 무덤이 무령왕릉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귀여운 석수(石獸)와 동경, 각종 금은 장식 등 2,906점이나 되는 부장품도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무령왕이 쓰던 순금제 관식(冠飾)은 세련된 모양새와 섬세한 세공기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목관 안에는 머리 베개와 발 베개도 놓여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인들은 ‘가가라(名羅) 섬’을 ‘니림세마’(‘임금의 섬)’이라 부른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왕이 태어난 섬이라 그같이 부르고 있다는 기술이다.
‘니림(にりむ)’는 '님'의 우리 옛말 ‘닒’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 섬은 지금도 가가라지마(加唐島)라 불리고 있다.
이 섬은 현해탄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현해탄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가가로노와다’라 불렸다.
여기에서 ‘와다(わだ)’는 우리말 ‘바다’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바뀐 소리이다.
그런데 ‘가가라’는 무슨 뜻일까?
아마도 가락국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일본학자들은 짐작한다.
한반도의 현관은 ‘가라(加羅)’였다. 지금의 김해이다.
백제나 중국 쪽에서 오는 배도 일본에 가려면 일단 김해에 들러 대마도를 거쳐 ‘가가라(名羅) 섬’ 앞을 지나 가라쓰 항구에 당도하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해류가 그같이 흐르고 있는 까닭이다.
‘가가라’란 ‘가라’로 가는, ‘가라 行’의 뜻이다.
그래서 '가라'로 가는 뱃길 목에 있는 섬이 가가라지마(加唐島)요 ‘가라’로 이어지는 바다가 ‘가라노와다’인 것이다.
‘가가라’는 또 다른 뜻이 있는 지명이었다.
‘가거라’의 옛말 ‘가가라’다. ‘잘 가거라’라는 뜻까지 담아 다정한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근거는 「釋日本記(「일본서기」 주석서)」에 ‘名羅(명라)’를 ‘가와라’라 읽도록 토가 달아져 있는데 ‘가가라’라고 불리는 한편 ‘가와라’라고도 불렸다는 얘기가 된다.
‘가와라’는 ‘갔다 오라’는 뜻이다.
실제로 「만엽집」만엽집에는 가야로 가는 배를 이 '가가라' 바닷가에서 배웅하는 애틋한 노래가 있다.
‘가가라’처럼 고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고 고스란히 전해져온 지명이 일본에는 지천에 깔려 있다.
일본 언어의 화석은 고대 한국어로 봐도 무방하다.
일본은 온천의 나라다.
고대부터 온천이 솟아난 고장의 지명은 대체로 고대의 이름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돗토리현에 있는 <미사사(三朝·みささ> 온천의 주인이 ‘三朝’라 쓰고 ‘미사사(·みささ)’라고 읽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작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三朝’의 일본식 훈독은 ‘미아사’이고 음독으로는 ‘산쵸’이다.
그러므로 ‘미사사’는 아니다.
그런데 고대 한국어로 풀면 ‘미사사’는 ‘물솟아’란 뜻의 ‘미삿아’인데 온천물이 솟아올랐을 때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주자 안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옛날에 온천물이 막힌 적이 있었는데 다시 뚫어 솟아오르게 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만엽집」의 쓰임새에도 이와 흡사하게 우리 옛말을 일본식 한자의 훈독과 음독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빌려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근무했던 『노래하는 역사』 의 애독자도 이 같은 예를 작가에게 전해왔다고 한다.
아비코(我孫子)라는 지명에 대한 해석이었다.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은 아들을 보통 ‘아비’라고 부르고, 그 아비의 아이(子,こ)이니 바로 ‘내 손자(我孫子)’이고 일본말로는 ‘아비코’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이’를 뜻하는 일본말 ‘こ(코)’는 원래 우리말 ‘아고’ 이었다.
일본 사람들에겐 이러한 해석이 마냥 신기하게 비치는 듯하지만, 우리 조상이 왜 땅에 건너가 붙인 보통 말이니 우리나라 보통 사람이 알아맞히는 것은 당연하다.
아비코(我孫子)라는 성을 지닌 사람도 일본에 꽤 많은데 한국계 도래인의 손자 즉 후손들은 아니었을까?
일본 지명사전에는 자신없이 이렇게 적혀있다고 작가가 전한다
아비코(我孫子)의 ‘아’는 접두어이고 ‘비코’는 귀한 사람을 가리킨 일본말 ‘히코’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광고 : 별로 없다
왜 이즈음에 광고가 부쩍 줄었는지 궁금했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 1993년부터 시작된 재난 일지가 눈에 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무법의 본을 보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1993년 3월 28일. 부산 구포 열차 전복 사고.(사망: 78명)
1993년 4월 19일. 충남 논산 서울신경정신과의원 화재.(사망: 66명)
1993년 6월 10일.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사망: 292명)
1993년 10월 10일.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사망: 34명)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사망: 20명)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사망: 101명)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사망: 50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