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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구경은 가겠지만, 주인공으로 각광을 받는 것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 때 아줌마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한 아줌마가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일한씨 주인공으로 나가세요! 저희들이 적극 밀어드릴 게요.”
“그래요, 나가보세요. 황녀와의 결혼이 별 따기보다 어려울 텐데,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너무한 거 아녜요?”
“저희들도 여기 관광 온 보람이 있게 일한씨가 무대에 나서세요.”
“오늘이 일한씨 차례라 하잖아요?”
“아마 일한씨가 나가면 그 황녀도 일한씨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할 걸요?”
“일한씨 재주를 한 번 보여줘 봐요.”
김일한이 아줌마들을 바라보며 웃는다.
“제가 선택되면 서울로 내려가기 어려울 텐데요?”
“에이, 그러면 더욱 좋지 뭐. 일한씨가 어떻게 저희들하고 오래 있을 수 있어요?”
서울 아줌마들이 일한에게 오늘 밤 대회에 나가라고 성화를 부리며 등을 떠민다.
“그래도 전 안 됩니다. 사양입니다.”
“왜요? 밑져봐야 본전 아녜요? 오히려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고, 또 부마간택 대회의 신랑 후보자로 등단했다는 유리한 경력도 생기잖아요?”
“여하튼 싫네요.”
“아휴 총각도 답답하다.”
서울한식집 주인 할머니가 입을 연다.
“여기까지 관광 온 우리를 위해서라도 좀 나가 주시면 안 되겠어? 어째서 자기 생각만 하나? 자기보다 남을 위해서라도 한 번 출연하면 안 될까?”
김일한으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김일한이 부마간택대회에 출연해서는 안 될 합리적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감感이 있었다. 그 감이 그를 말렸다. 거기에 나가지 말라고.
김일한은 경험상으로 직감, 예감, 육감, 직관 등 감을 따라 행동할 때 거의 언제나 실수를 하지 않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으므로 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이 부마간택대회에 출연하라고 성화를 부릴 때 참으로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저는 출연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한 차례 일한이 간곡한 어조로 사양했다.
“아, 그렇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머럴드가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일한과 일행은 에머럴드와 헤어진 후 북궁을 한 바퀴 돌았다. 북궁의 북쪽은 하늘 천天자 형태로 전각들이 배열되어 있다. 그 중 임금의 침전인 영안전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은 맨 윗변의 중앙부분이다.
관광객들이 사전에 이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지상에서는 건물군 전체가 취하고 있는 하늘 천자 형상을 파악할 수 없다.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야만 하늘 천자로 보인다.
지상에서는 따라서 건물 배열 구조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시 당국에서는 건물군 전체와 곳곳의 동산, 녹지, 정원, 연못, 누각 등등을 죄다 돌아볼 수 있도록 세 가지 코스를 정해 나들목 도로면의 차량 유도색처럼 청, 황, 녹의 세 가지 색깔을 도로면에 칠하고 화살표를 만들어 놓았다. 셋 중 하나만 따라가도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북궁의 북쪽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전체적으로 땅 지地 자 형상을 이룬 건물 군이 서편으로, 클 태太(사람 人과 같은 뜻)자 형태를 띤 전각들이 동편으로 늘어서 있다.
물론 글자 밖에도 전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세 글자, 천지인天地太이 확연히 눈에 띈다.
이는 우리민족 전통 신교神敎의 삼신일체三神一體 하느님, 즉 천일신天一神(하늘의 한분 하느님), 지일신地一神(땅의 한분 하느님), 태일신太一神(=人一神, 인간으로 나타나시는 한 분 하느님)의 이름을 딴 것이며, 그런 천지인 글자 형상의 배치도에는 삼신일체 하느님나라의 구현을 지향한다는 칸셉concept이 들어있다.
일행은 바삐 돌아서 북궁을 대충 구경하고 황홀객잔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저녁 술시(7-9시) 초입에 황궁 남쪽 입구의 대시전 뜰로 들어갔다.
곳곳에 임시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고 드넓은 무대는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일한 일행이 들어섰을 때, 무대에서는 공연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 밤의 레퍼토리는 아주 특이했다.
고전음악과 현대무용이 융합된 짧은 뮤지컬, 장중한 가곡, 신나는 팝송, 트로트, 동요, 니그로 스피리츄얼negro spiritual, 구성진 진도아리랑, 육자배기 등이 사회자의 별도 소개 없이 순번에 따라, 한 팀의 공연에 대한 청중들의 박수가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다음 팀이 벌써 등단한 가운데, 물 흐르듯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
사비수 나린 물에 석양이 비낄 제
버들꽃 나리는데 낙화암 예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누나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칠백 년 누려오던 부여성 옛터에
봄 만난 푸른 풀이 옛 빛을 띠건만
구중의 빛난 궁궐 있던 터 어데며
만승의 귀하신 몸 가신 곳 몰라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어떤 밤 물결 속에 북소리 나더니
꽃 같은 궁녀들아 어디로 갔느냐
임 주신 비단치마 가슴에 안고서
사비수 깊은 물에 던졌단 말이냐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사비수泗沘水)
이 가곡은 원래 20세기 인물 춘원 이광수(1892-1950)가 백제 멸망의 비극을 슬퍼해 지은 “낙화암”이라는 시로서, 백제의 후예인지도 모를 일본인 양전정梁田貞이 곡을 붙였다고 한다.
바리톤 가수의 가창으로 음악이 울려 퍼질 때, 청중들 가운데서 여러 사람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김일한 역시 한때 조상들의 고토를 다물해(되찾아) 회대淮岱지방(회하와 태산일대, 즉 산동성을 포함한 중국 동부 해안의 화복평원 지역)을 경영했던, 부여민족 백제의 드넓은 혼이 한민족 가운데서 사라져버렸음에 남몰래 탄식했다.
이어서 진도아리랑이 대금과 해금, 가야금의 반주에 맞추어 공연되었는데, 가수의 목소리가 일한과 청중의 심금을 울린다.
♬
아리 아려라 쓰리고 쓰려라 알(심장) 앓이가 났네
내 님을 뵙고파 가슴앓이가 났네
너울너울 남해바다 갈바람을 부르고
울렁울렁 이 가슴은 임의 사랑 부르네
높고 높은 가을 달은 구름 속에 출렁이고
낮고 낮은 이 가슴은 임의 품에 출렁이네
아이 좋아라 지화자 좋아라 알 앓이가 나았네
내 님을 뵈옵고 가슴앓이가 나았네
구성지고 구슬프기까지 한 진도아리랑이 장내를 휘두르는 가운데, 가사가 화면에 떴다. 일한은 매아리 자매가 가끔씩 신경 쓰여 그 쪽을 바라보니, 여경 매아리와 백의녀 매아리는 김일한과 눈이 마주쳤다가, 눈길을 돌린다.
“꽃밭에서”라는 동요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환꽃과 코스모스의 청순한 이미지로 물들이고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이끌고 갔다.
♬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2절의 마지막 행이 두 차례 반복되었다.
‘날 보고 꽃 같이 살자 그랬죠.’
이 가사를 들으며 김일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뜻 일전에 만난 이름 모를 그 아가씨, 백악산공원에서 함께 호흡기도를 드리고, 황홀객잔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했던 그 처자의 영상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환꽃처럼 순결하고 고결한 이미지였어. 평범한 듯한 그 여자의 삶은 아마도 환꽃이나 모란꽃처럼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귀하고 거룩할 거야.’
일한은 동요 속에 흡수되어 떠오른 그녀의 영상이 머릿속 화면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아,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자 여느 때처럼 이녹옥이 화려한 에머럴드 빛 한복 차림으로, 운홍옥은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루비 색깔의 옷차림으로, 임청옥은 역시 수려한 모양의 사파이어 빛깔 상하의를 입고 등장했다.
청중석에서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났다. 그녀들의 절세 미모는 가을 밤 뭇 남성들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온 여자들의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사파이어 림이 청중을 돌아보며 말한다. 오늘은 그녀가 주 사회자인 것 같았다.
“오늘의 주인공은요, 바로 여러분 청중 가운데 계십니다.”
사파이어 림이 이렇게 운을 떼자 청중들은 서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사파이어 림도 청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칠성급 호텔로서 백악산아사달 성의 명물이었죠? 사해제일관! 그 호텔의 소관주이신 김일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어서 앞으로 나오세요!”
김일한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같이 간 일행, 매아리 자매도 대경실색했다. 김일한이 극구 사양했는데도, 사회자들이 그를 이렇게 지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일한 공자님, 속히 앞으로 나오세요. 시간은 금입니다. 모든 청중은 공자님의 훤칠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눈이 시리도록 찾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김일한은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에라! 이판사판이다!’
그놈의 이판사판! 잘도 써 먹는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될 대로 되라! 김일한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서 나오자 청중의 이목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청바지에 티를 걸친 평범한 옷차림의,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총각이다. 그러나 그의 이목구비가 대단히 아름답고 수려하며 귀공자 티가 나는 게, 밤의 등불 가운데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커다란 화면에는 그의 전신이 사로잡힌다.
그가 뛰어서 무대 위로 오른 후 사회자들과 청중에게 차례로 정중하게 절한다. 청중들 가운데서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특히 동행한 서울 아줌마들은 김일한의 이름을 연호하며 난리다.
“와! 김일한! 김일한! 김일한!”
그 때 비로소 김일한이 유명한 사해제일관 회장의 아들임을 알게 된 서울 일행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놀람도 섞여 있었다.
“네, 저를 환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일한이 다시 한 번 인사한다.
“김일한 공자님, 이곳에 오른 소감이 어떠세요?”
사파이어 림이 묻는다.
‘그저 황당할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불쑥 나오고 말았다.
“영광입니다. 하지만 좀 괴롭습니다.”
“괴롭다니요? 혹시 일전의 화재 사건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마치 상품으로 나온 것 같아서요.”
김일한의 직설적인 어법에 갑자기 사회자들과 청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냉각된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파이어 림이 분위기를 수습하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오늘도 여느 때처럼 스무고개를 넘어가는데, 시각은 자정까지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심사위원들께서 김일한 공자님의 여러 면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김일한이 자리에 앉은 후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그럼 시간이 촉박하므로, 첫 번째 고개를 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무엇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아주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질문인데요, 그래도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일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저는 사람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진실하고 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누구나 그렇겠죠. 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좋으신가요?”
“그건 제 취향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잖아요?”
“공자님은 진실과 정직과 용기에 취향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군요. 그럼 공자님은 자신이 그런 사람 즉 진실하고 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것을 지향합니다.”
그의 대답이 간단하다.
“그 면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셨는지요?”
사파이어의 질문도 집요했다.
“글쎄요. 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아! 자기 수준에 도달하셨다. 진짜 애매하지만 또한 명언이군요.”
“질문이 애매하니 대답도 구체적으로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여기에 만장하신 청중들 앞에서 그 수준을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진실도 좋고 정직도 좋고 용기도 좋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다. 김일한이 잠깐 숙고하다가 대답한다.
“전 지난 삼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 폭탄적인 발언에 청중들이 웅성거리고 서울에서 온 아줌마들도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청중의 반향은 컸다.
“아, 진실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신 건가요?”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요지는 왜 제가 영어생활을 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단지 나라를 중국에 팔아먹으려 했다는 어마어마하고 어린애 장난 같고 황당무계한 죄목이 있긴 했지만.”
김일한의 입에서 이런 원색적인 내용이 발설되자 사파이어는 매우 난감해졌다. 하지만 그녀도 머리 굴리기라면 누구에게나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게 왜 공자님의 용기나 정직, 진실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에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답한 후 김일한이 부언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얼마 전 밤중에 사해제일관의 모든 건물들이 죄다 소실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심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사파이어 림이 재빨리 받았다.
“당국에서는 조사 결과 누전으로 인한 화재라고 발표했으나, 누전으로 각기 동떨어져 있는 모든 건물이 한꺼번에 소실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런 것 같은데요. 하지만 당국이 그렇게 발표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또 그 날 밤,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면 불티가 날리면서 불이 옮겨 붙을 수도 있었겠고요.”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서에서 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세게 타오르는 바람에 진압을 마쳤을 때는 모든 건물이 거의 전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궁색한 말씀이군요. 누전으로 한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면 목격자들이 곧바로 신고했을 것이고, 소방차가 즉각 출동해 진화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은 보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파이어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당국은 누전으로 인한 화재라는, 어불성설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런 결론에 대해 사회자님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글쎄요, 전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하지만 그건 확실히 제 머리로서는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모든 건물에 발화장치를 설치한 다음 그 날 밤 원격조종으로 폭파시킴과 동시 불에 태워버린 겁니다. 소방차의 출동도 고의적으로 늦추어졌을 겁니다.”
“이 밝은 하늘 아래 누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사해제일관은 언제나 손님이 붐비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게 문제입니다. 손님으로 가장한 투숙객이나 종업원으로 들어온 범인이 각 건물마다 은밀하게 폭파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었겠죠.”
“그럼 눈에 띌 텐데요? 그리고 탐지기로 발견되지 않나요?”
“요새는 범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쉽게 눈에 보이지도 않고 탐지기에 포착되지도 않는 소량의 폭약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해제일관을 미워하는 어떤 범인이 그런 흉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씀이군요?”
“꼭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근데 이 이야기가 공자님의 진실, 정직, 용기를 보여주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국가전복 기도죄로 수감되어 삼년을 보냈고, 출옥 직전 저희 집이 모조리 불타버렸습니다. 누가 저지른 일일까요?”
“아!?”
사파이어도 더 이상 답변하지 못한다. 그의 말은 국가 혹은 어떤 거대한 적대세력이 범인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삼년동안 가두어버린 국가 혹은 어느 막강한 세력, 만일 그의 추측이 옳다면 자기 가족의 근거지인 사해제일관까지 파괴해버렸는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세력이, 어찌 이런 말을 듣고 김일한을 가만 놓아두겠는가?
“공자님의 용기가 가상하고 또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만, 아마도 크게 잘못 짚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조국은 단지 정권유지를 위해 한 개인을 아무 이유 없이 무자비하게 핍박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다른 세력이 그랬다면 모르지만요.”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제 판단이 틀렸기를 간절히 빕니다.”
사파이어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후회했다.
‘이 남자의 말은 마치 시한폭탄 같다. 내가 괜히 고집해 이 사람을 청중 가운데서 기어코 불러내자고 주장한 게 큰 실수다.’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 그럼 첫 고개를 넘으셨습니다. 이제 둘째 고개로 갑니다.”
김일한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침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공자님의 장기長技는 무엇입니까?”
“무예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은요?”
“기마술, 사격술, 검술 등입니다.”
“잘 됐군요. 검술을 지금 이 자리에서 선보이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럼 제가 제 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녀가 허리에 찬 검을 푸는 동안 도우미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김일한은 검술을 펼쳐보였는데, 검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며칠 전 김이한의 검술을 감상한 이들은 그것이 김이한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다.
김일한도 김이한처럼 팔괘변검八卦變劍을 약 1분 동안 전개했던 것이다. 그의 신법의 번개 같음과 도약의 가랑잎 같음, 검법의 질풍노도 같음, 회오리치는 신형의 맹수포효 같음도 김이한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청중은 그의 특기에 넋을 잃었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밤바람은 살랑거리지만 청중의 눈과 피부에 닿지 않는다. 군중의 열기만이 장내에 가득하다.
그의 검법이 끝나고 이십여 분 동안의 정회停會가 선언되었다. 각자 볼 일을 본 청중들 가운데 일부는 떠나가고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자리가 정돈되고 사회자들이 등단한다.
“자, 그럼 넷째 고개를 향해 출발하실까요?”
사파이어 림이 선포했을 때는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일한과 청중을 번갈아 본 후 말을 잇는다.
“오늘은 특별 손님 한분을 더 초대했습니다. 글쎄요, 손님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군요. 아무튼 매우 귀중한 분을 이 자리에 함께 모시겠습니다.”
임청옥의 말에 장내의 소란함이 다소 진정된다. 임청옥은 김일한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맞히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것이 넷째 고개의 시작인가요?”
“네!”
그녀가 상큼한 어조로 대답한다.
“제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오, 그래요? 혹시 틀릴지도 모르니 미니mini 스무고개 아니 열 고개만 이용해 보시겠어요?
“그것도 좋습니다. 그분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여자예요.”
“젊습니까, 늙었습니까?”
“젊어요.”
“중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다.”
“제가 알아맞혀보겠습니다. 그 분은 황홀공주라고 불리죠?”
“우와! 공자님은 참으로 탁월한 예지능력을 소유하신 것 같습니다. 바로 맞히셨습니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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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6. 7. 31. 한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