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ㆍ최승희 등 `친일명단' 4천776명 발표 - 민족문제硏 "60일간 의견수렴 후 8월 발간"
(서울=연합뉴스) 박인영 기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29일 안익태, 최승희, 반야월 등을 포함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4천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시도된 `친일인사' 선정 작업을 통해 발표된 친일인사들은 매국, 중추원, 관료, 경찰, 군, 사법, 종교, 문화예술, 언론출판 등 16개 분야에 걸쳐 설정됐다.
분야별로 매국인사 24명, 수작.습작 138명, 중추원 335명, 일본제국의회 11명, 관료 1천207명, 경찰 880명, 군 387명, 사법 228명, 친일단체 484명, 종교 202명, 문화예술 174명, 교육학술 62명, 언론출판 44명, 경제 55명, 지역유력자 69명, 해외 910명 등 5천207명(중복자 포함)이며 중복인사를 제외하면 4천776명이다.
편찬위는 친일파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ㆍ식민통치ㆍ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라고 정의했다.
사전에 수록된 친일 인물들은 ▲조약체결 등 매국 행위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 등 민족반역자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 식민 지배의 하수인 노릇을 했거나 침략전쟁을 미화.선전한 문화예술인 등 부일협력자 등 두 부류로 나뉜다.
선정 기준으로는 일제에 협력한 자발성과 적극성,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여부를 고려했고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 편찬위의 설명이다.
또 군, 경찰, 헌병 등 식민통치 기구의 복무자들에게는 보다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으며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았던 출세형 협력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
이번 명단에는 1차 발표에서 거론된 박정희, 방응모, 김활란, 홍난파를 비롯해 시인 박팔양, `선구자'의 윤해영, 아동문학가 김영일, `고향의 봄' 이원수,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또 조선독립신문 윤익선 사장,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 고승제 전 서울 상대 교수, 3선 서범석 전 의원, 고재필 전 보건사회부 장관, 진의종, 신현확 전 국무총리 등도 교육학술 분야와 해외 친일인사 분야에 수록됐다.
국내 중앙 인물과 군장교를 중심으로 발표했던 1차 명단과 달리 이번 2차 발표에서는 추가조사에 의해 행적이 보완된 친일 혐의자와 지역유력자,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인물들이 대거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날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와 함께 앞으로 60일간 유족 또는 명단에 오른 친일인사 관련 기념사업회의 이의 제기를 받고 학계의 의견도 수렴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총론편 1권, 인명편 3권, 부록 3권 등 총7권으로 구성되며, 이 중 인명편 3권이 8월말 우선 발간된다.
편찬위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지방편·해외편) 4권, 식민지통치기구사전 1권, 자료집 4권, 백서 1권 등 총 17권의 친일문제연구총서를 2015년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편찬위는 "친일청산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심판의 의미보다는 민족 억압과 차별 없는 사회,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 내부의 반성이 확고할 때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과거사 청산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수록대상자 명단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기자] 다음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29일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 인물 4776명(중복자 포함 5207명)의 명단이다.
▲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28일 오후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 "조사할 자료의 양이 너무 방대해 진행될 때마다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 이경태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가곡 '가고파', '목련화'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 아동문학가 이원수, 시인이자 작사자인 윤해영, 무용 분야에서는 조택원, 최승희…. 재일조선인 권일, 만주에서 활동한 윤상필이나 윤익선 등이 포함된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친일 인사 4800명의 명단 발표 하루 전날인 28일 오후에 만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의 말이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있었다. 조 사무총장만이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두가 밤을 샌 듯 했다.
그러나 발표 하루 전인 만큼 사무실 안은 긴장감과 촉박함이 머무르고 있었다. 조 사무총장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9일 발표할 친일인명사전의 자구를 수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해 그와 1시간 여 2차 명단발표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안익태·최승희·김동진·조두남·이원수 등 2차 친일명단에 수록"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이래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애초 5년 정도 계획이었는데? "사업계획이 방대했다. 지난 2001년 12월에 편찬위원회가 발족되고 2002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이 본격화됐으니깐 약 7년 동안이다. 모두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계속해서 기간이 연장되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렇게 방대한 작업일 줄 몰랐다. 해나가면서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우선 1차 사료도 방대했고, 지방이나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파의 경우에는 자료도 부족하고 재정도 빈약했다. 민간연구소가 단독으로 추진하기에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지금도 자료는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국민들에게 약속한 바도 있고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 8월 말에 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도 자료라든가 심층조사가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1차적으로 정리하고 추가조사를 실시하려고 한다."
- 이번 명단 발표에 해외 인물이 대거 들어간다고 알고 있다. "이번 발표 인사 다수가 해외와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차 발표 때는 중앙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 중심이었지만 이번 2차 발표 때는 지방유력자, 일본과 만주, 중국 관내 그리고 러시아 등에서 활동한 친일파 인물들이다."
- 특히 어디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나? "만주 쪽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다. 거기에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우선 만주는 일본괴뢰정부인 위(僞)만주국이 건설된 사실상의 식민지 지역이었다. 조선인은 만주국에서 일본인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 존재였다.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각종 지배층을 형성한 것처럼 조선인도 만주국 통치의 일익을 담당했다. 아류 제국주의자의 역할을 담당한 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강제이주 당한 농민들이 많지만 출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만주로 이주한 일제의 첨병들이 많다.
두 번째로는 만주의 구조적 환경 때문이다. 만주는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일제는 이를 타압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활용했다. 간도특설대, 신선대 등 조선인부대를 동원해 항일세력을 탄압하는데 악용했다. 이런 조선인부대에서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이들이 수록될 예정이다."
- 이번에도 일반 국민들이 알고 있는 저명한 인물들이 포함됐나. "특정 개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누구를 지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지만 상당한 지도층 인사들이 있다. 새롭게 추가되는 인물 중에서 일반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분은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가곡 '가고파', '목련화'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이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시인이자 작사자인 윤해영 등도 수록된다. 무용 분야에서는 조택원도 있고 최승희도 있다. 최승희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의 주민들이 석명서(釋明書 : 사실을 설명하여 밝힌 글)를 제출해 최승희가 국방헌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해 추가조사를 할 계획이다. 나머지는 재일조선인 권일, 만주에서 활동한 윤상필이나 윤익선을 들 수 있겠다."
"반민족행위 청산 앞장 선 이들이 용공세력 몰리는 웃지 못할 상황"
▲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지난 2005년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회견장밖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정한 독립투사라며 항의시위를 벌이던 '박정희 바로알리기 자발적 국민모임 새로운 물결 21' 회원의 피켓을 회견 참가자가 가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이번에도 인명 수록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것 같다. 특히 29일 명단 발표를 앞두고 일부 우익단체들이 저지를 결의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한국의 소위 우익세력들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한다. 사실 반민족행위에 대해 정상적인 나라라면 우익세력이 가장 1차적으로 안고 가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독특하게 역사 바로세우기, 친일청산 등 학술운동·실천운동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용공세력으로 지탄 당한다. 해방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들이 좌파로 몰리는 그런 웃지 못 할 상황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의 정치현실과 역사인식이 상당히 왜곡돼 있다는 반증이다."
- 친일명단에 수록될 인사들에 대한 기준은 어떤가. "현재 연구소가 집적한 인물정보만 100만 건이다. 이 중에서 친일혐의자 즉 조사대상으로 삼은 모집단이 2만에서 3만 정도 된다. 이 중에서 엄정하게 선정한 것이 4800명이다. 편찬위원회나 연구소는 양쪽의 공격을 다 받게 돼 있다. 기본적으로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세력은 '마녀 사냥', '전민족친일론' 등 각종 궤변으로 공격할 것이다. 또 한 쪽에서는 '일제강점기 36년과 제국주의 침략과정까지 생각한다면 무려 40~50년 가까이 되는데 고작 5천명 밖에 되지 않냐'며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편찬위원회와 연구소는 가능한 객관적인 기준 아래 행동하고자 했다.
수록대상자를 선정하는 원칙도 확실하게 정해놨다. 자발성과 적극성. 즉 피치 못해 끌려간 것은 제외했고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등 얼마나 반복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부역했는지도 따져봤다. 또 교사로 넉넉히 살면서도 군 장교를 지원하는 것처럼 먹고 살 지위에 있으면서도 부나 명예를 쫓아서 친일행위를 한 이, 영향력이 큰 지식인·문화예술인들도 그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따졌다.
특히 경찰·군인·헌병 등 폭압기구에서 종사한 이들은 다른 일제 복무자들과 다르게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적용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살상하는 등 직접적인 반민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순사나 면서기 등이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세대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겼고 명료하게 기억이 남아있지만 문헌 등 자료에서는 '순사를 했다'는 정도만 남아있어 구체적인 친일행위가 없다면 수록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단의 집행자들보다 상부에서 지휘하고 명령한 이를 더 주목해 구조적 책임을 묻고자 했다."
- '친일파'를 어떻게 규정했나? "친일파는 추상적인 용어다. 그러나 친일파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친일파는 민족반역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라 지칭하는 것은 매우 비난하는, 모욕적인 단어다. 우리는 이 '역사성'을 존중했다. 일제강점기 체험세대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존중한 것이다. 그래서 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와 우리가 지칭하는 '친일파'는 다르다. 반민족행위자는 각종 국권을 상실케 한 조약을 맺거나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은 이, 또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살상한 이들이지만 친일파의 개념은 좀 더 포괄적이다.
민족반역자는 친일파의 한 부류에 불과하다. 식민지배기구나 군·경찰 등 식민통치를 지탱하게 만든 하부구조에 복무하거나 매판지주나 매판자본가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권력에 기생한 자,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지식인·문화예술인, 이런 부류를 부일협력자로 분류해 친일파로 본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등급을 나눠 이들 중 상층부를 반민족행위자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록했다."
"정권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미래세대에게 더 큰 부담 될 것"
▲ 반민족범죄자와 평생 싸워왔던 문학평론가이자 재야사학자인 임종국 선생이 남긴 친일인물카드
ⓒ 이경태
-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신적 뿌리는 아무래도 임종국 선생 아닌가. 얼마 전 임종국 선생의 '친일파총서' 발간계획이 공개되기도 했다.
"정말 우연찮게 발견됐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님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인 한편, 연구의 토대를 놓아주신 분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남겨놓으신 자료가 방대했다. 그 때 선생님의 빈소에서 그 분의 유지를 잇고자 뜻을 모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첫 출발이 선생님이 정리하신 방대한 양의 친일인물카드였다. 그것을 주춧돌 삼아서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일파 총서' 계획을 살펴보면 선생님은 대략 1만명에서 2만명 내지의 친일인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셨던 고 조문기 선생도 이번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빠질 수 없는 분 아닌가. "조문기 선생께서 과분하게도 우리 연구소 직원들을 '밤낮 없이 싸우는 독립군'이라고 칭하셨다. 매순간이 '전쟁'에 가깝지만 격려가 참 많이 됐다. 이번 인명편에 불과한 사전편찬이지만, 눈 앞에 두고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 빈소에서 많은 이들이 울었다."
- 최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위원회 통폐합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권철현 주일 대사가 '과거사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기류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분명히 그런 경향이 있다고 본다. 과거사위원회 통폐합의 명분으로 예산의 절감이나 효율성 추구를 내세우고 있지만 옳지 않다.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위원회의 경우 접수된 것이 수십만 건이지만 처리된 것은 4만여건에 불과하다. 모든 위원회가 지금도 인원과 재정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태다. 모든 위원회가 공히 모처럼 맞은 과거사 정리 기회를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상황이다.
과거사 문제는 정권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는 국가 정통성이 달린 문제다. 일제강점기 문제만 하더라도 6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해결하지 못한 민족사의 과제다.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든 풀고 미래를 위한 모색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덮는다고 덮혀질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정리할 기회를 잃으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부담이 된다. 다시 정권이 바뀌면 다시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국가 전체 차원에서도 매우 소모적이고 근시안적인 사고다."
- 조 사무총장께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인데, 최근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환수에 대해 행정소송을 내는 등 반발이 심해진 것도 최근의 사회 기류에 따른 것 아닌지 생각해본 적 없나? "오랫동안 상속 보유하고 있던 재산을 갑자기 환수하겠다고 했을 때 개인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재산은 대단히 반민족적이고, 부도덕한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후손이 선대의 죄를 인정한다면 이미 제정된 법이 잘못됐다고 위헌 소송하는 것은 바람직 못하다고 본다. 재산조사위원회가 주로 환수대상으로 삼는 토지나 임야는 그들이 가진 재화 중 극히 일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사실 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환수토록 한 법이 제정됐나.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나 제3자 소유로 돼 있는 재산을 되찾아가겠다고 소송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 사안이 불거졌다. 시민사회가 공연히 없는 법을 만들어서 재산을 환수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준동하면서 이 법이 추진된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이 이를 너무 소아병적으로 보지 말고 이미 후손으로서 기득권을 충분히 누린 만큼 선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접근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소송 등 역으로 문제제기를 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보자는 국가적 대의를 훼손시키거나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금운동 통해 시민들의 관점이 매우 건강하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
▲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국민모금운동 성과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며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과 다르게 일반 시민들이 매우 건강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격과 함께 깊은 책임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 이경태
- 7년 간의 편찬 과정 중 특별히 기억이 남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나? "아무래도 국민모금 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 편찬자금 모금액을 5억 원으로 잡은 것도 그렇게까지 전개될 것이라 몰랐기 때문이다. < 오마이뉴스 > 에 네티즌 1명이 댓글을 달면서 시작된 모금운동이 다른 언론들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모금운동이 됐다. 방송사에서 불우이웃돕기라든가, 재해모금운동도 이 정도로 단시일 내에 거액의 성금이 조성된 예가 없었다. 그를 지켜보면서 민족문제라던가 민족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관점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과 다르게 매우 건강하다는 것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엄청난 책임감도 느끼게 됐다."
- 현재 연구소의 재정 상태는 어떤가. "모금운동을 계기로 회원이 배로 늘어나 5천명이 넘는다. 회원들이 매월 월회비를 내주고 있는데다 연구소도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예산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동력은 회원들의 작지만 강한 힘들이다."
- 마지막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 이후 계획은 무엇인가? "우선 이 사업이 이렇게 첫 결실을 내놓게 되기까지 지지해주고 곁에 있어준 국민들과 연구소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 인명편 출간은 편찬사업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깊은 책임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조사활동을 해 나가겠다.
또 친일인명사전을 외화하는 운동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교육활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작업 전체가 학술적인데 이를 시민이나 학생들에게 알릴 현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민중생활 역사관'(가칭)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송기인 신부님이 재직 기간의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쾌척해주시는 등 기금도 모아가고 있다. 인명편 발간 이후에는 이에 좀 더 신경을 쓰려고 하고 있다."
수록대상자 선정기준은?
【서울=뉴시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2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8월 말 출간 예정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 인물 4800여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1차 명단(2005년 8월 29일 발표)은 전국적 규모의 국내 중앙 인물과 군 장교를 중심으로 발표했지만 이번 2차 발표에서는 추가조사에 의해 행적을 보완한 친일 혐의자와 지역유력자,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인물들이 대거 포함됐다.
편찬위원회측은 "선정 기준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발성과 적극성,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여부를 고려했으며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평가했다"고 밝혔다.
◇친일파 개념 편찬위원회가 채택한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사람이다.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사람을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됐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과 규정성을 고려해 그대로 수용했다.
◇수록대상자 범주 사전에 수록된 친일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조약체결 등 매국 행위에 가담한 자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자와 같은 민족반역자(반민족행위자)가 한 부류이고,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자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지식인 문화예술인과 같은 부일협력자가 나머지 한 부류다.
편찬위원회는 이 중 민족반역자 전부와 부일협력자 가운데서 일정한 직위 이상인 자, 그 외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할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를 수록대상으로 선정했다.
◇선정원칙 자발성과 적극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했으며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여부도 참조했다.
편찬위원회는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의 경우,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으며 군·경찰·헌병 등 식민통치 폭압기구의 복무자들에게는 보다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으며, 말단의 집행자보다 상급의 지휘 책임을 더 중시했다고 덧붙였다.
◇선정 절차 편찬위원회는 객관성과 엄밀성을 사전 편찬의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았다. 엄격한 증거주의 아래 집필했으며 확증이 없는 사안은 판단을 유보했다.
또 기록의 측면에 중점을 둬 친일행위를 한 인물들의 경력과 행적 등 사실관계만을 담았고, 가치 판단과 주관적 서술은 가능한 한 배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물 정보의 집적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문서·신문·잡지 등 문헌자료를 1차 분석 대상으로 삼았으며, 해방 후의 신문기사·회고록·증언 등은 방증으로 채택했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 관보·직원록 등 관찬사료 23종 200여권, 매일신보·만선일보 등 신문자료 40여종, 삼천리·조광 등 친일 잡지·기관지 80여종, 조선신사록·조선인사록 등 명감류 140여종, 각 도·시·군지 등 지지(志誌)류 160여종, 각종 연감·사전류 60여종, 공훈록 40여종, 일기·회고록·평전류 1500여종 등 총 2000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 등 방대한 기초자료가 활용됐다.
연구소는 이를 분석, 재정리해 100만여 건에 달하는 인물정보를 구축했고 이를 토대로 2만5000건에 이르는 친일혐의자 모집단을 추출, 다시 정밀 분석했으며, 권위 있는 전공자들의 검증을 거쳤다.
편찬위원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와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관련 논문과 저술을 참고해 수록대상을 선정했다.
편찬위원회에는 귀족.관공리, 경찰, 군, 교육·학술, 언론·출판 등 20여개 분야의 전문분과위원회가 구성돼 있으며 전문분과위의 의견서를 상임위원회가 심도 있게 검토한 후 자문위원회의 지도와 조언을 수렴해 최종 결정을 내렸다.
<배민욱기자>
애국가와 안익태 친일은 별개로 봐야
[CBS 뉴스레이다 대담]
2008년 4월 30일 (수) CBS 뉴스레이다 1부(FM98.1 MHz 매주 월~금 08:00~08:30 진행 : 임미현 앵커)
(대담 -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친일인명사전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4,776명의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간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이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 임미현 / 진행
거의 3년 만에 최종 명단을 발표를 하셨는데요. 고생 참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준비해 오셨나요? ◆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1차 명단을 3,090명 발표한 이후에 꼭 3년 걸렸는데요. 그동안 정말 바쁘게 이 일에 많은 사람들이 관계해서 고민도 많이 하고 토론도 많이 하고 자료도 많이 수합하고 해서 일단 어제 4,776명을 친인인명사전에 수록할 대상자로 발표를 했죠.
◇ 임미현 / 진행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을 듯싶은데요. 그 기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 윤경로 이 기준은 2002년부터 2002년 2003년 2004년 몇 년에 걸쳐서 여러 번에 걸친 공청회와 전문가 회의 등등 여러 번 회의를 갖고 기준을 정했습니다. 이 시간에 복잡한 기준을 다 이야기 하기는 어렵고요. 대체로 이제 일정한 일제시대에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분들, 그런 분들은 '당연범'으로 들어가는 걸로 했고, 그 외에는 구체적인 친일 행적이 드러난 분들을 대상으로 했죠.
◇ 임미현 / 진행
증거 자료가 명확한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씀이시죠? ◆ 윤경로 그렇습니다. 한 분도, 근거 없이 한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 임미현 / 진행
하지만 후손과 기념사업회, 또 보수 단체의 반발이 만만치 않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 윤경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예상을 했던 일이죠. 지난 1차 발표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수가 더 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의제기가 있을 것이다, 라고 예상은 했고. 그래서 이제 저희가 원래는 올해 8월 달에 책을 간행할 예정인데, 이렇게 4월 달에 미리 발표를 한 것은 한 4개월 정도 발표를 하고 이의제기를 받으려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설득할 부분은 설득하고 설명할 부분은 설명하고 혹 우리가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잘못한 부분은 우리가 수용하고, 그런 절차를 거치려고 합니다.
◇ 임미현 / 진행
이번 친일 명단 발표에 대해서 이명박 대통령은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친일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죠? ◆ 윤경로 저는 뭐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론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공(功)과 과(過)가 있죠. 그러니까 공과 과를 균형 있게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 하는데. 우리나라의 인물사전이라 함은 지금까지 다 '공(功)'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특히 일제 식민지 시대 40여 년 간의 기간에 활동한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개 그 이전의 행적이나 해방 이후의 행적만을 쓰고 있는데, 바로 이번에 친일인명사전 이것을 통해서 그 비워있던 공과(功過)의 '과(過)' 부분을 채워주는, 그런 아주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선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부분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임미현 / 진행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최종 명단에 올랐는데요.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친일 행위를 더 했다고 보시나요? ◆ 윤경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실 친일 행위로 말하면 그렇게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러나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준을 일제시대 위관급 이상을 한 분들, 말하자면 그 분이 다 아시는 대로 대구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편생활을 하셨는데, 그냥 그대로 갔으면 여기 오를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일본군 장교가 돼서, 그래서 말하자면 독립군과의 적대관계를 가졌다든지 그런 점에서 그것은 대상에 들어갔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분 개인이 무슨 전 생애에서 친일행위가 절대적이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준을 그렇게 잡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예외 시킬 수 없으니까 제외시킬 수 없으니까, 거기에 들어간 거죠.
◇ 임미현 / 진행
또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다고 밝히셨는데요. 안익태 선생이나 최승희 선생의 경우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선정이 된 건가요? ◆ 윤경로 저도 개인적으로는 안익태 선생이 들어간 것은 참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애국가를 작곡하신 분이고 국민적인 존경하는 분 중 하나였는데, 불행하게도 최근에 이 분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나왔는데, 일제 때 1938년도에 일본 천왕을 찬양하는 '에텐라쿠'라고 하는 걸 작곡하고 연주한 사실이 밝혀졌고요. 또 만주국 창설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 '만주 환상곡' 이런 것을 지휘한 일, 또 일본 탄생 2,600년을 축전하는 곡을 지휘하고 작곡한 일, 이런 등등이 나왔단 말이죠. 그럼 이 역사적 사실로 나왔으니, 이걸 어떻게 하느냐 이거죠.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사전이 나오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친일행적만 딱 간단하게 쓴 것은 아니고, 안익태 하면 안익태 선생 전 생애의 좋은 점들에 대해 공적을 다 씁니다. 그 안에 요 시기에 이런 일도 있었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죠. 다른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얘기했던 최승희도 그렇고 그 밖의 인물들 들어간 것도 그런 사연이라는 걸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임미현 / 진행
위원장님, 그런데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바꿔야 하느냐, 이런 논란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 윤경로 글쎄요, 저도 참... 그렇게 되면 바꿔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저는 애국가가 그 당시에 그러니까 그 이후에 이런 친일행적이 나오는 거지, 애국가는 이미 1907년을 전후한 시기에 그야말로 애국지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것에 곡을 붙인 게 안익태 선생인데, 그거 하고는 좀 별개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임미현 / 진행
애국가는 여전히 애국가로 남아 있어도 된다, 말씀이시죠? ◆ 윤경로 그에 대한 논란이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까지... 사실 걱정은 했습니다. 안익태 선생이 들어갔을 경우에 이런 문제가 야기 되지 않겠느냐에 대해서 우려를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 임미현 / 진행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약력]
-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박사 -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1981~2005) - 전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중앙위원회 의장 - 현 서울YMCA 시민논단위원장 - 현 국사편찬위원회(운영위원) - 현 국가보훈처(공적심사위원) - 현 한성대학교 총장
당사자, 보수단체 반발
[앵커멘트] 친일 인사 4, 776명의 명단이 오늘 공개됐습니다. 오는 8월 발간되는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인데 당사자 측과 보수단체 등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취재기자 전화로 연결합니다. 김지선 기자! 친일명단 공개, 지난 2005년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죠? [리포트]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오늘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될 인물의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모두 4,776명 입니다. 이번 명단은 지난 2005년 8월 29일 발표된 3,090명에서 1,680여 명이 추가됐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1차에서 거론된 박정희, 방응모, 김활란, 홍난파를 비롯해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가수 반야월, 시인 박팔양, '선구자'의 윤해영, 아동문학가 김영일, '고향의 봄' 이원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습니다.
또, 조선독립신문 윤익선 사장,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 고승제 전 서울 상대 교수, 3선 서범석 전 의원, 고재필 전 보건사회부 장관, 역시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진의종, 신현확 전 국무총리 등도 교육학술 분야와 해외 친일인사 분야에 수록됐습니다.
이번 친일 인사들은 매국과 관료, 경찰, 군, 종교, 문화예술, 언론출판 등 16개 분야에 걸쳐 선정됐습니다.
편찬위는 이들 친일파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국권침탈과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 우리 민족이나 다른 민족에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로 정의했습니다.
[질문] 앞으로 친일 인명사전 수록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답변] 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앞으로 60일간 유족이나 명단에 오른 친일인사 관련 기념사업회의 이의 제기를 받습니다.
학계의 의견도 수렴할 예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명단이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친일인명 사전은 총론편 1권, 인명편 3권, 부록 3권 등 총7권으로 구성되고, 이 가운데 인명편 3권이 오는 8월말 우선 발간됩니다.
[질문] 명단 발표에 대한 반발도 잇따르고 있다고요? [답변] 이번 명단 공개와 관련해 라이트 코리아 등 4개 보수 단체들이 프레스센터 앞에서 집회를 열고, 박정희와 안익태 등 일부 인사들이 명단에 포함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반발했습니다.
단체들은 연구소의 명단 선정이 편향적이라며 조만간 성명을 내고 이의를 제기하는 등 반대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이번 명단 발표가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선진화를 위해 애쓴 인물 사전을 새로 만드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승희 연구가인 강원대 한경자 교수는 최승희의 작품에는 일본 관련 내용이 없다며 최승희가 명단에 포함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밖에도 명단에 포함된 인사 연구 사업회나 후손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있어 진통이 예상됩니다.
<지금까지 YTN 김지선[sunkim@ytn.co.kr]입니다.>
이대통령, "친일문제 공과 균형있게 봐야"
- 7대종단 대표 간담회..과거사관련위 정비 시사
(서울=연합뉴스) 심인성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4천776명의 명단을 공개한 것과 관련,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7대 종단 대표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는 데..."라며 이같이 밝혔다고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서울시장 재직시절 미당 서정주 선생의 후손들이 생가를 매각해 빌라를 지으려던 것을 서울시에서 사들여 복원한 사례를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인 데..."라며 "잘못은 잘못대로 보고 공은 공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특히 "이런 저런 과거사 청산관련 위원회 분들이 주로 과거 정부에서 임명됐는 데 과거사 관련 위원회 정리를 위해서는 법을 바꿔야 한다"면서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 대한 정비방침을 시사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덕 성균관장이 "새 정부가 경제살리기를 강조하다 보니까 자칫 인성교육, 윤리도덕에 대한 강조가 덜 된 듯한 느낌이 있다"고 지적하자 "우리가 열심히 살다 보니 국민의식이 소홀해 졌다. 가족관계나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같은 자랑할 만한 우리 정신유산이 좀 어설프게 서양문물에 묻힌 감이 있다"면서 "공교육을 살리고 강화하겠다는 것의 기본은 인성교육 강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새 정부가 가정복원 운동을 벌이려 하는 데 종교계도 적극 나서달라"면서 "우리 국민이 우수한 만큼 가정, 국민, 나라, 남북관계가 제자리를 잡으면 세계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식을 바로잡는 것은 정부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물이 스며들듯 하는 것인 데 이런 것이야말로 종교 지도자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종교계의 적극적인 지지를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 언급, "미국, 일본과는 신뢰를 회복했으니 북한과도 제대로 된 관계를 정립해 신뢰를 회복하면 된다"면서 "남북관계를 정상궤도에 갖다놔야 하며 진정성과 민족애를 갖고 가슴을 열고 만나야 한다"고 대북 대화의지를 거듭 피력했다.
또 "다른 나라도 돕는 데 동족끼리 돕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총리와 올해에만 5번을 만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못 만날 일이 뭐가 있느냐. 필요하면 언제든 만나겠다"면서 "다만 지금까지는 저쪽에서 욕하면 쫓아가서 욕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는 원칙을 갖고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강주 드림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 "춤추는 여인" 최승희
춤추는 최승희 - 뿌리깊은나무 발간(정병호1995)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을 만난 최승희.경성의 명월관에서 열린 우승 축하 잔치에 최승희가 참석했다
무용가 최승희 자료사진 무용가 최승희씨가 1937년 광주 공연 당시 숙명여고 동창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김정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의 모친 최영수.2002.7.24 (서울=연합뉴스)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미공개 사진 두점이 발굴됐다
그 옛날 최승희를 무용가의 길로 나서게 했던 이시이 바쿠 스튜디오는 80 년 전의 옛 모습 그대로이다. 스튜디오 안에는 이시이의 커다란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그 옛날 최승희를 무용가의 길로 나서게 했던 이시이 바쿠 스튜디오는 80년 전의 옛 모습 그대로이다.
김병철 남산예술원장이 장안평에서 발견했다는 최승희 사진. 1939년 프랑스 파리 공연 당시 보살춤을 추는 모습이다. /조선일보DB
재일동포 무용가 백향주씨가 1999년 3월13일 부산문화회관에서 '최승희춤'공연을 갖는다. /조선일보DB
서울 출생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씨./조선일보DB
월북 무용수 최승희를 다룬 영어전문채널 아리랑 TV '최승희 특집 다큐'.(1998.10.5)/조선일보DB
월북 무용수 최승희씨/조선일보DB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박물관에서 발견된 월북 무용수 최승희씨의 월북 직후활동을 증언하는 사진.사진에서 서있는 이가 최승희씨이고,최씨의 오른쪽 맨앞에 보이는 이가 최씨의 손아래 동서인 무용가 김백봉씨./조선일보DB
월북 무용수 최승희씨/조선일보DB
변월룡 화백이 그린 월북 무용가 최승희(1954)./조선일보DB
최승희와 중공군 연예공작대원. 중공군 연예공작대원들에게 둘러싸여 무용 강의를 하는 북한 인민예술가 최승희./조선일보DB
뮤지컬 '최승희'에서 최승희 역의 김성녀가 일본인 스승(김종엽)과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조선일보DB
보살춤 복장을 한 최승희. /조선일보DB
최승희가 작품 '리리크포엔'에서 춤추던 모습./조선일보DB
보살춤 복장을 한 최승희.
보살춤 복장을 한 최승희.
최승희 분장을 한 탤런트 채시라의 사진이라고 지적되는 사진. 일제 강점기 컬러사진으로는 너무 색감이 좋으며, 무비카메라 기사까지도 등장한다는 점에서 MBC가 1995년 최승희 특집극을 촬영할 때의 사진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최승희(앞줄 오른쪽)와 남편 안막, 딸 안승자.(정병호 교수 제공)
북한 조선중앙TV가 최근 보도한 TV 화면을 통해 최승희가 1969년 8월 8일 작고했음이 확인됐다
최승희가 1930년 만든 현대풍의 '학춤'
1937년 최승희가 발표한 '화랑무'
최승희가 1943년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신에게 바친다'는 뜻의 명상 춤 '생찬'
최승희가 1951년 소련 순회공연을 마친 뒤 통역을 맡은 모스크바대 한인 학생 한 마르크스씨에게 사인해준 사진
최승희 국제무용축제에서 옌볜대학교 무용단이 최씨의 대표적 작품인 '쟁강춤'을 추고 있다
최승희가 1920년대 일본 동경에 있을 당시 모델활동을 하며 찍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진
2002년 8월1일부터 10월20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본관2층 하정웅기증 작품실에서 열린는 '춤꾼 최승희 사진전’.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씨의 생애 를 조명한 첫 전시회인 이번 사진전에는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인 정병호 중앙대 무용과 명예교수가 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인 재일동포 하정웅씨에게 기증한 최씨의 사진138점이 선보였다. 사진은 1937년 한국무용 '화랑의 춤'을 추는 최승희.(호남 지방판)
무용가 최승희씨 자료사진 무용가 최승희씨가 1949년 평양 시내 한 중국식당에서 당시 유명 예술가와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최승희 딸 안성희 무용가 김백봉 네번째가 최승희 맨 왼쪽 위가 최승희 남편 안막. 그 오른쪽 옆에 중국 인민해방군가 작곡자 정율성. 2002.7.24 (서울=연합뉴스)
김정미 기자
최승희(崔承喜1911 서울~1969. 8. 8 ) -전설의 무희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부대끼며 산 예술가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식민지 정치 현실에서 허덕이며 희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런 암담한 환경을 뚫고 높이 무대 위로 도약해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되어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였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날아 오를 수도 있다.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둡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나라에서 위대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도 예술이 가진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인도의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최승희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1930년대 한반도에는 그 이름이 희망 자체인 사람들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코리안 댄서로 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인 최승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한국의 춤을 당당히 공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37년 구미 각국 순회 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 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 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였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을 벗어나 높이 도약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힘차게 도약하는 최승희
총명하고 예술적인 소녀
최승희(1911-?) 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소학교를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숙명 여학교에 다니던 열 여섯 되던 해, 최승희에게는 인생을 결정할 사건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본 것. 최승희는 이날 이후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하였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최승희의 선택을 환영하였다. 일찌감치 개화한 집안에 기라성같은 엘리트 형제들을 둔 덕분에 최승희는 축복 속에서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좋고 예술적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최승희는 이시이의 무용단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이시이를 따라 일본 동경으로 무용을 배우러 갔던 최승희는 첫 번째 한국 귀국 때 이미 프로 무용가로서 자신의 독무대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부채춤 추는 최승희
한국무용의 체계를 잡다
최승희의 무용관은 다분히 사회적이며 민중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무용을 좋아했고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최승희는 안락한 이시이 무용단의 1급 무용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으로 불모지 한국에 무용 문화를 심으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린 최승희는 곧 이어 한국 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무용 속에서 백성과 어우러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참다운 무용의 형태를 발견했다. 그녀는 많은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무용을 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무용과 과감히 접목시킨다. 그녀는 새롭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아름다운 무용 춤사위를 만들어 냈고 직접 무용수로서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최승희의 장고춤
최승희는 승무. 칼춤, 부채춤, 가면춤 등을 무대 위로 올렸다. 이전 시기까지 기방이나 기층의 백성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던 한국의 춤 문화가 마침내 무대를 얻은 것이다. 그녀의 이 춤들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최승희는 자신이 개발한 한국무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때로 너무 뛰어난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쉽게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일본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최승희가 코리안 댄서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으로서는 최승희가 너무 좋은 선전 도구였다. 일본 군부는 최승희에게 ‘전선 위문 공연’을 강요한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러운 세계적 무용가가 된 최승희가 전선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은 일본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뿐 만 아니라 이미 구미에서 명성을 얻은 최승희였기에 외국에 대한 선전효과도 아주 컸다.
1942년부터 2년 간 최승희는 일제의 총칼 아래서 하는 수 없이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를 떠돌며 전선 위문공연을 다녀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전설의 무희 __최승희
월북과 그 이후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일제 시대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문학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원래부터 무용을 통해 사람들과의 공감을 추구하였던 최승희에게 안막은 더 할 나위 없는 배우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치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남편을 따라 월북의 길을 택한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 당하고 만다. 최승희 또한 1969년 정치적으로 숙청 당하고 그 이후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8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예술가적이며 이상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현실 정치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와 손기정
한 명의 천재적 예술가를 키우는 것은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그 예술가가 처한 주변의 환경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예술가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환경을 벗어나 높이 비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 천재 예술가를 키웠던 바로 그 환경이 예술가의 발목을 낚아채기도 한다.
우리에겐 천재 무용가 최승희가 있었다. 그녀는 식민지의 핍박 받는 한국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하였지만 결국 그 한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날개 꺾인 비운의 운명을 살아야만 했다.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최승희는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는 한국이 낳은 ! 세계적인 무용가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최승희의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는 우리 무용사에서 최승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처럼 최승희는 중국 운강석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석굴암의 벽조>라는 무용을 창작하고 그의 제자들이 실크로드 선상의 <돈황무용>을 천년 만에 재현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잡지모델로 일하던 시절의 최승희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족두리를 쓴 최승희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각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최승희의 보살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밞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최승희와 딸 안성희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최승희의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는 우리 무용사에서 최승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처럼 최승희는 중국 운강석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석굴암의 벽조>라는 무용을 창작하고 그의 제자들이 실크로드 선상의 <돈황무용>을 천년 만에 재현했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위). 최승희가 북한에서 숙청당하기 1년전의 마지막 모습(1966)(아래) ⓒ프레시안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좌)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우) ⓒ프레시안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최승희 춤을 대표하는 보살춤 ⓒ프레시안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작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석굴암의 벽조(1943) ⓒ프레시안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주은래가 특히 좋아했다는 최승희의 춤 <신노심불로> ⓒ프레시안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왼쪽부터 30년대초 최승희, 검무, 무당춤 ⓒ프레시안
왼쪽부터 30년대 최승희, 승무, 보살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승선/기자< td>
<꾼 / 해나>
안익태
1906. 12. 5 평남 평양~1965. 9. 16 스페인 마요르카.
작곡가, 지휘자, 첼로 연주자.
안익태/문화포장을 수여받고 이승만 대통령 ...
어린시절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풍금과 악보 등을 보면서 음악을 접했다.
1913년 큰형 익삼이 그에게 스즈키[鈴木] 바이올린을 사주어 처음 바이올린을 접했으며,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트럼펫을 배웠다.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숭실전문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고,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의 주선으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G. 게오르게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1운동 이후 친일교사 추방 데모를 벌인 주동자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마우리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1921년 도쿄[東京] 세이소쿠 중학[正則中學]을 거쳐 1926년 구니다찌 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했다. 방학중에 귀국하여 서울·평양 등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시내티 음악학교에 다니다가 작곡 공부를 위해 필라델피아음악대학 3학년에 편입했다.
1935년 커티스 음악학원에도 다니면서 F. 라이너에게 작곡과 지휘법을 배웠다.
1936년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카네기홀에서 주관하는 작곡 콩쿠르에서 〈한국환상곡 Korea Fantasy〉이 입선되었으나 뉴욕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의 거부로 낙선되었다.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여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있는 교포들에게 발송했다. 그후 오스트리아에서 F. 바인가르트너에게 베토벤 음악을 배웠고,
1937년 헝가리에서 코다이의 음악지도를 받으면서 〈한국환상곡〉을 수정했다. 〈한국환상곡〉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처음 연주되었다. 그뒤 다시 빈으로 돌아와 R. 슈트라우스의 손녀를 구출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슈트라우스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고,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지휘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6년 7월 5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롤리타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1947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연주회를 가졌고, 스페인 정부로부터 영주권도 받았다. 미국에서 지휘하려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중 나치에 협력한 슈트라우스의 수제자였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가 그후 2년 만에 입국허가를 받아 필라델피아에서 지휘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가 작곡한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되었으나 정작 그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55년 2월 19일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을 받아 귀국했다. 그뒤 한국을 드나들면서 국립교향악단의 조직과 국제음악제 준비를 서둘렀으나 교향악단은 결국 조직하지 못했고, 국제음악제도 교향악단원과의 마찰이 심해서 3회 공연에 그치고 말았다.
그후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애국가〉·〈한국환상곡〉 이외에도 〈강천성악 降天聲樂〉(1959)·〈진혼곡〉(1962)·〈논개〉(1962) 등이 있고, 저서로 〈R. 슈트라우스의 전기〉·〈R. 슈트라우스 서한집〉이 있다.
<백과사전>
안익태선생, 미공개 악보 발견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1965) 선생이 작곡한 교향시 '마요르카'(Poema Synfonico 'Mallorca')와 '포르멘토르의 로 피'(Lo Pi de Formentor) 자필 악보가 발견됐다. 연주시간이 각각 10분, 15분인 두 곡은 그동안 악보 없이 제목만 알려졌던 작품으로, 지난해 스페인에 살고 있는 유족들이 안익태기념재단에 기증한 유품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나왔다.
두 곡은 선생이 40대 이후 정착했던 스페인 마요르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재로 작곡한 교향시다. '마요르카'의 악보에는 '피날레, 교향시 마요르카, 안익태'라고 적혀 있고, '포르멘토르의 로 피' 악보에는 작품 제목과 선생의 서명, 날짜(1951년 8월22일) 외에 '존경과 애정, 기쁨을 다해 이 곡을 썼으며, 레오나르 세르베라(?)에게 바친다'는 말이 스페인어로 씌여있다.
안익태기념재단이 기증받은 악보들을 검토 중인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악보가 남아있는 안익태 선생의 작품이 10여 편에 불과한 상황에서 이번에 발견된 악보는 선생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기초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고 평가했다.
두 편 외에 악보가 남아있는 안익태 선생의 작품은 '애국가' 합창이 포함된 대표작 '한국환상곡'을 비롯, 교향시 '논개' '강천성악' 등 12편(편곡작품 제외)이며, '시의 조선' '방아타령' '고종의 승하' '야악'(夜樂) 등의 작품은 제목만 알려져 있다.
안익태기념재단은 올해 안익태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번에 발견된 두 곡을 포함해 그동안 국내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그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열고, 유품 전시회와 학술 심포지엄, 악보 출판 등도 추진하고 있다.
10여 년 전 유품 일부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은 '애국가'의 저작권을 우리 정부에 헌납했으며, 지난해 5월에는 나머지 유품 178점을 안익태기념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은 이 가운데 일단 악보를 가져왔으며, 지휘봉과 책, 사진, 편지, 여권, 연주계약서, 태극기 등 나머지 유품은 3월 말 들여올 예정이다.
●교향시란 시적이고 회화적인 내용을 담은 표제음악 성격의 관현악곡으로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대에 등장했다. 안익태의 스승 리하트르 슈트라우스가 남긴 교향시'영웅의 생애''죽음과 변용'은 걸작으로 평가되며, 안익태가 교향시를 쓴 것도 스승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