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법당(如如法堂)
30, 제삼십조승찬대사 전법게
第三十祖僧璨大師 傳法偈
꽃과 종자는 땅에 의지하고,
땅에 의지하여 종자와 꽃은 나지만,
종자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도 땅도 나지 않노라!
華種雖因地 從地種華生
若無人下種 華地盡無生
(三十祖僧璨大師傳法偈)
대사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 처음에는 속인의 몸으로 이조(二祖
)를 뵈었다. 중이 된 뒤에 법을 전해 받고는 서주(舒州)의 왕공산
에 숨었다가 나중에 후주(後周)의 무제(武帝)의 파불(破佛)사태를 만났을 때 대사는 태호현(太湖縣)의 사공산(司空山)에 왕래하면
서 일정한 장소가 없이 십년을 지나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수(隋)의 개황십이년(開皇十二年) 임자(壬子)에 이르러 도신(道
信)이라는 사미가 나이 열 네살의 몸으로 와서 대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하는 법문을 일러 주소서.
대사가 대답했다. 누가 너를 속박 했더냐? 아무도 결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이 이 말에 크게 깨달아 구년(九年)을 힘껏 모셨다.
뒤에 길주에서 계를 받고 시봉을 계속했는데 대사는 자주 자주
현묘한 법으로써 그를 시험해 보다가 인연이 익었음을 알고 곧 옷과 법을 전했다.
꽃과 종자는 땅에 의지하고. 땅에 의지하여 종자와 꽃은 나지만. 종자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도 땅도 나지 않노라.
대사가 다시 말했다. 옛날에 혜가 대사가 나에게 법을 전하신 뒤엔 바로 업도로 가서 삼십년 동안 교화 하다가 입적 하셨는데 나는 이제 그대를 만나 법을 전했거늘 어찌 여기에 묵고 있으랴.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이년동안 노닐다가 옛터로 돌아와서 한 달이 지나니. 백성들이 모여와서 크게 공양을 베풀었다.
대사는 네 무리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널리 연설 한 뒤 법회 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하고 임종하니. 이는 곧 수(隋)의 탕제(煬帝) 대업이년(大業二年) 병인 시월십오일(丙寅十月十五)일 이었다.
당(唐)의 현종(玄宗)이 감지선사(鑑智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각조(覺照)라 하였다. 송(宋)의 경덕원년 갑진년(景德
元年甲辰)까지는 무릇 사백년(四百年)이 된다. 처음 하남의 원 이상(李常)이 본래 조사의 가풍을 흠앙하여 현묘한 이치를 깊이 깨달았는데 천보사년 을유(天寶四年 乙酉)에 이르러 하택 신회(
荷澤神會)를 만나 물었다. 삼조(三祖)대사가 어디에서 장사를 지
냈습니까? 듣건대 나부 산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혹은 산곡사(山谷寺)에서 임종했다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
겠습니다.
신회가 대답했다. 승찬 대사는 나부 산에서 산곡사로 돌아 사
신지한달 남짓해서 열반에 드셨으니. 지금 서주(舒州)에는 삼조
(三祖)의 묘소(墓所)가 있소. 이상이 믿지 못해 하더니. 때 마침 서주 별가로 전근되게 되므로써 산곡사 중들에게 물었다.
듣건대 절 뒤에 산조의 묘소가 있다고 하니. 사실인가? 그때에 혜관(慧觀)이라는 원로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상이 기뻐하면서 요좌(寮佐)들을 데리고 같이 가서 예배하고 또 광중을 열어보니.
시체가 있기에 화장을 해서 사리 삼백과(舍利 三百顆)를 얻었다.
그중에 100顆은 탑을 세우고 100顆는 하택에게 보내어 앞의 말을 증명 시키고. 100과는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나중에 낙양으로 돌아 왔을 때에 자기 집에서 공양을 베풀면서 경사로워 했다. 이때 서역(西域)에서 온 건나(健那)라는 삼장이 모임 속에 있었는데 이상이 그 삼장에게 물었다. 천축(天竺)의 선문(禪門)에 조사(祖師)가 몇 분입니까? 건나 삼장이 대답했다. 가섭으로 부
터 반야다라에 이르기 까지 이십칠인(二十七人)의 조사(祖師)가 계시오.
만일 사자존자의 곁가지(傍出)인 달마달(達磨達)이하 사세(四世)의 이십이신(二十二人)을 합치면 모두 사십구인(四十
九人)의 조사가 계시오. 만일 칠조(七佛)로부터 승찬 대사에 이
르기 까지 곁가지를 치지 않으면 삼십칠인(三十七人)의 조사가 계시오. 이상이 또 모임에 있는 노덕에게 물었다. 예전에 조도
(祖圖) 조사계보(祖師系譜)를 보았는데 혹 오십여인(五十餘人)의 조사를 인용했고. 내지는 곁가지가 들쑥날쑥하고. 종족이 일정치
를 않으며. 혹은 헛 이름난 있는 것을 인용했으니. 무엇으로 증험
하겠습니까?
그때에 육조문하(六祖門下)인 지본선사(智本禪師)라는 이가 있다
가 대답했다. 그 까닭은 후위(後魏)의 첫 머리에 불법이 약간 침
체하였는데 이 때에 담은이라는 사문이 있다가 어지러운 틈에 흰 비단에다 조사의 이름을 아는 대로 혹은 차례를 잊은 대로 써서 옷깃 속에 넣고 바위굴에 숨겼소. 그로부터 삼십오년(三十五年)이 지나 문성제(文成帝)가 왕위에 오르자 불법이 다시 중흥(中興)했
는데 담요의 이름과 행이 모두 높아져서 끝내는 승통(僧統)이 되
었소, 그는 여러 사문들을 모아 거듭 상의 한 끝에 결심하여 부
법장전(付法藏傳)이라 하였는데 그 사이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는 것은 담요가 기록 할 때에 두려움에 쫓겼기 때문이요.
또 삼십년(三十年)을 지나 황제가 국자박사(國子博士) 항원진
(黃元眞)과 북천축(北天竺)의 삼장 붕타선다(佛陀扇多)와 길불연
(吉弗煙)등에게 명령하여 범본(梵本)을 거듭 참고하고 종지(宗
旨)을 참작하여 스승과 제자의 전승을 서술케 하니. 어긋남이 없게 되었소. 하였다. 삼조 승찬 대사는 부처님으로부터 삼십조
(三十祖)에 해당합니다. 중국의 선문(禪門)으로 보면 삼조(三祖)
가 됩니다. 삼조 승찬 대사는 육신의 병을 이기고 법을 잇는 분
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금과옥조로 외우는 신심명(信心銘)을 지으신 조사이기도 합니다, 신심명은 앞에서 한번 다 설했습니다,
신심명을 보면 조사의 진면목이 뚜렷합니다. 간결, 명료한
언구로 불조의 가풍을 남김없이 들어낸 것이 신심명입니다.
수행에 반조하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