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통일운동의 귀착점은 생명공동체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
경기도 성남시 태평3동 복지회관. 주민교회가 위탁 운영을 하는 곳이다. 1층에는 어린이집이 있고 지하 식당에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인근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새해 첫 출근길을 비상사태로 몰고 간 폭설로 인해 2, 3일 어르신들의 발걸음도 줄었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다소 기온이 상승해 평상시의 인원, 약 150명을 회복하여 준비한 분량은 오전 11시 이미 동이 났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 주방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식사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과 친숙한 인사를 나누는 이해학 목사. 아흔을 넘긴 노모를 대하듯 건네는 수인사에 정이 묻어났다.
70년대 빈민선교를 시작으로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의 선봉에 서 온 그의 이력은 해방둥이로부터 출발한다.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마다 그의 인생사도 획이 하나씩 그어졌다. 4·19 의거 당시 대열의 선두에서 진압 경찰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생긴 이마의 상처는 아직도 선연히 남아 그날의 현장을 웅변해주고 있다.
사상계를 통해 신학의 기틀 마련
노령산맥이 만들어낸 분지 순창이 고향인 그도 한때는 문학 소년이었다. 중농(中農)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중학생 때부터 고학을 해야 했다. 6·25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이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마구 죽였다. 아버지도 대나무 밭, 갈대 밭에 숨어 지내다가 지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에서는 그에게 머슴살이나 하면서 혼자된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어떡하든지 공부 시킬 것”이라며 아들이 공부를 하도록 북돋았다. 중학교는 남원으로, 고등학교는 광주로 갔다.
광주공업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학동아리 ‘청도(靑島)’를 결성해 활동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다. 사직공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김현승 시인에게 사사 받으면서 문학적인 재능을 키워갔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자 학교에서는 그를 조교로 채용해주었다. 도서관 사서를 보조하면서 학창 시절 교지 편집을 했던 경험을 그대로 살려 교지 만드는 일을 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사상계>를 읽기 시작했어요.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서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와 함석헌 선생의 역사신학, 김재준 목사의 생활신학을 발견했지요.”
이듬해인 1963년, 교회 선배들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순복음 신앙에 젖어 있던 그는 순복음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사상계>의 틀로 순복음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곳에서도 함석헌연구동아리를 만들어 함석헌 선생의 저서를 읽고 토론했다. 한편으로는 순복음 신앙에 입각해 새벽기도 때마다 자유주의 신학을 내세우는 한신대와 연세신학대학원을 성령의 불칼로 없애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탁 차서 한신대로 가게 하셨다.”고 그는 고백했다.
순복음신학원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인들을 교단의 책임자로 키우지 않으려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갈등이 있었다. 그들에게 따졌다. “당신들은 복음을 들고 한국에 와서 봉사하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에게 주도권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반론을 제기하면 일벌백계로 쫓아내는 것은 제국주의의 논리다.”라고. 이런 학교는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며칠만 지나면 졸업이었지만 박차고 나왔다.
이후 매일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어느 날 김재준 목사의 <하늘과 땅의 해후>를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다가 도서관에서 엉엉 울면서 뒹굴었다. 그때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상(像)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엄격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미련함을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셨다.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상이 주는 당혹감과 충격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폭이 넓고 크신 하나님, 모두를 안아 살리는 기운을 느꼈다. 1966년 한신대에 입학하여 73년에 졸업하기까지 그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했다. 1971년 위수령 파동 때 학생 데모의 주동자로 다른 친구 두 명과 제적을 당하게 된 것. 문교부의 강압에 끝까지 저항하는 한신대 교수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자퇴를 결심했던 그들에게 학교 측에서는 다른 형태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고, 1975년에는 문교부에서 인증하는 졸업장도 받게 되었다.
주민과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
1970년대 초, 성남은 서울의 도시 개발 명분에 밀려난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지였다. 살 집도, 일할 곳도 잃어버린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근근이 하루를 이어가던 잿빛도시였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수도권 특수지역선교회(KMCO) 실무자로 일하던 이해학 목사는 1973년, 성남에 첫발을 내딛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역의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고 그들을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역의 큰 교회를 다니면서 사역의 취지를 얘기하며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거부했다. 그는 브라질의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방식을 차용해 국가 폭력에 의해 빈민으로 전락한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빈민들을 지역의 주인으로 섬기고 지역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은 ‘위험한’ 꿈이었다.
하지만,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그를 좋아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같이 놀아주는 그에게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폐품을 수집해 독서실을 꾸미고,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어른들도 하나 둘 늘었다. 3월 1일, 열다섯 명의 어른들과 현판식을 갖고 주민교회는 교회의 틀을 갖추어갔다. 지역사회의학(Community Medicine)을 실현시키고자 ‘홈 비지팅(home visiting)’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의학은 리비아, 쿠바, 중국의 의료시스템으로 대중을 위한 의학이다. 의료체계에서 민중이 중심이 되고 의사가 보조 역할을 하는 것. 생존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이들에게 절실한 꿈이었다. 누군가 짐을 나누어 지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그는 복음을 전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주민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 주민생활협동조합은 그렇게 탄생했다. 신협은 1979년 12월, 교인 47명이 1천 원씩 출자하여 지금은 지역(성남시 수정구)의 신협으로 확대되었다. 자산도 천억 원을 넘어서고 조합원도 2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지역공동체 안에 있는 빈민들이 개인의 문제를 혼자의 힘으로 풀어나가지 못할 때 함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시작한 신협은 학자금 지원, 급한 병원비 지출, 소규모 창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주민생활협동조합은 1989년, 생명과 환경을 살리고 도시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성남과 인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농산물을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계하는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합원 자치운동, 다양한 소모임 활동과 지역사회 연대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1994년부터는 이주노동자 사역을 시작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서재를 상담실로 내놓았다. 환자들이 와서 방을 내주었다. 조선족만 오는 게 아니라 방글라데시 사람, 파키스탄 사람들도 왔다. 그들에게도 방 하나씩 내주다보니 교회 지하는 모두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밑 공간에는 조그마한 창고가 있다. 거기에는 코리안 드림을 이루지 못하고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이주 노동자들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다. 보통은 2~3개월 안에 유족들이 고국으로 모셔가지만 유족들이 찾지 않는 경우가 있어 애로를 겪고 있다.
민주화·통일운동의 선봉에 서다
고등학생 때는 4·19 부상자로, 순복음신학원 재학 시절에는 한일협정반대 시위, 한신대 재학 시절에는 위수령 파동에 걸려 제적되기도 했다. 빈민 선교는 늘 감시당하고 방해를 받았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를 범하는 그룹을 만들었다. 김진홍 목사, 인명진 목사, 김경락 목사 등을 규합하여 NCCK 김관석 총무실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잡혀갔다. 참으로 살벌한 시절이었다. 1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1년여 만에 풀려났다. 그 해에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는데 인혁당 사건 관련자가 희생양이 되어 한국의 인권상황을 문제 삼은 미국의 압박으로 이듬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에 연루되어 또다시 감옥생활을 했다.
근 3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 후에는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장로회 안에 통일연구원을 만들고 NCCK에 통일위원회를 만드는 데 뒷받침을 했다. 87년 6월 항쟁 때에는 주민교회가 성남시 6월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주민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고 그는 자부한다.
그에게 목회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아픔의 맥을 타고 넘어왔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민족 문제의 근원을 보고 더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영성이 기독교 영성과 어떻게 다른가 고민도 했다.
“기독교가 민족, 이념, 계층 갈등 문제를 뛰어넘어가 버리면 쉽게 축복론을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싸구려 축복이 되지요. 이 땅의 고난 받는 약자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는 그런 목회자들이 많이 나와야 해요.”
기장 민중교회연합, 생명선교연대,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등 이 땅의 아픔을 대변하고 그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투쟁하는 목회자 그룹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큰 위안이다. 그들은 개 교회의 성장보다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역사적 갈등 해소, 미래를 통합의 세계로 이끄는 행보를 하며 그런 신학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좀 더 긴 안목으로 예수의 정체성을 오늘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가 고민해야 해요.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단순한’ 영성을 가지고 인류사회의 근본 문제를 바라보면서 착실하게 자기 몸짓을 해가야 해요.”
이해학 목사는 빈민운동, 정치 투쟁, 통일운동의 귀착점은 생명공동체라고 말한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생명공동체의 꿈은 주민교회의 모토 ‘주민과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예수를 믿고, 이 시대에 태어나 민주화의 큰 강을 건너는데 구경꾼이 아니라 관통하는 주역이었다는 것, 민간 통일운동의 지도부에서 활동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함께 더불어 사는 생명공동체를 일구어가는 것이다.
1945년 전남 순창에서 태어난 이해학 목사는 민주통합시민행동 공동대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 공동의장, 6·15공동위원회 이사 등 민주화·통일운동의 선봉에 서왔다. 성남에서 주민들과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 주민교회를 키워냈을 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노인들의 공동체 ‘라쿰’의 문을 열었다. (2010.1.18.주간기독교/이성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