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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구간 (악양 이야기)
악양골
둘렛길 악양구간은 하동읍의 먹점골에서 먹점재를 넘으면서 시작하여 신선대 아래의 윗재를 넘으면서 갈무리한다. 그다음은 화개골이다.
그리고 둘렛길 제13구간은 대축마을에서 섬진강 물이 드나들었다는 무딤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입석마을을 거쳐서 윗재를 향하게 되는데, 이 모두 악양골을 가로지르는 여정이 된다.
따라서 제13구간은 그 전부가 악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이 우리가 악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악양의 지형
악양은 남 ˓ 동 ˓ 북 삼면이 지리산 준령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유일하게 트여있는 서쪽은 섬진강이다.
한편 섬진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19번 국도는 악양의 트여있는 서쪽을 가로지르는데, 이와 접하는 서남의 개치마을과 서북의 외둔마을이 악양의 관문이 된다.
악양은 남쪽으로는 하동읍과 적량면, 동쪽으로 청암면, 북쪽은 화개면, 서쪽은 섬진강 건너의 광양시 다압면과 각각 접하고 있으며, 이웃 청암, 화개와 마찬가지로 1곡(谷) 1면(面)을 이루고 있다.
악양의 최북단은 거사봉이다.
이 거사봉을 분기점으로 하여 능선은 동남과 서남으로 갈라져 악양골을 양팔로 감싸 안고 있다.
거사봉에서 동남으로 뻗은 능선은 시루봉, 칠성봉, 구재봉을 거쳐 미점(개치)으로 내려서고, 서남으로 뻗은 능선은 형제봉, 신선봉, 고소성을 거쳐 평사(외둔)로 내려서는데, 이 모두 섬진강을 만나면서 갈무리한다.
풍수적으로 풀어본다면 거사봉이 악양의 주산이 되어 이를 중심으로 좌우의 동남릉과 서남릉이 각각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섬진강 건너의 백운산이 안산이 되어 골 안쪽은 배산임수의 잘 짜인 형국을 이룬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동남의 구재봉에서 중앙의 최북단 거사봉을 거쳐 서남의 신성봉까지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릉 속에 은혜롭게 들어앉은 분지가 악양골인 것이다.
악양을 감싸고 있는 능선의 끝자락을 갈무리하는 미점리 개치마을과 평사리 외둔마을은 다른 한편으로 열려있는 악양의 관문이 되기도 하는데, 이 사이의 널찍하게 펼쳐진 공간이 무딤이 들판이다.
악양의 서남 관문인 미점리 개치마을에서 골 안쪽을 향하여 축지리, 신대리, 신성리에 이르렀다가 다시 골 바깥을 향하여 입석리, 봉대리를 거쳐 악양의 또 다른 관문인 평사리 외둔마을에 이르면 무딤이들을 사이에 두고 한 바퀴를 돌게 되는데, 이르자면 이곳이 바깥(外) 악양이라 할 것이다.
한편 악양골의 안쪽은 동쪽의 칠성봉 기슭의 신흥리, 정동리, 중대리, 동매리를 거쳐 시루봉과 최북단 거사봉 기슭의 등촌리에 이르렀다가 다시 바깥 악양을 향하여 서쪽의 형제봉 ˓ 수리봉 기슭의 동매리, 매계리, 정서리에 이르면 악양천을 사이에 두고 동, 북, 서향으로 한 바퀴를 돌게 되는데, 이 모두 심산의 자락에 묻혀있는 유곡(幽谷)의 마을들이다.
거사봉의 바특한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청학이골을 거쳐 악양천을 이루고, 여기에 시루봉골의 청류와 매계골의 옥류가 합류하면서 물길은 외악양을 향한다.
이렇듯 악양은 너른 들의 외악양과 깊은 골의 내악양으로 구분되는데, 섬진강이 이뤄놓은 널찍한 무딤이들과 지리산 준령이 감아 싼 별유천지의 악양동천이 조화를 이루고, 열려있는 악양벌의 풍요로움과 닫혀있는 악양골의 신비로움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외악양은 속계(俗界)를 담았지만 혼탁하지 않고, 내악양은 선계(仙界)를 담았지만 몽환적이지 않은 그림으로 악양의 산야하(山野河)를 담고 있는데, 속(俗)과 선(仙)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면서 한편으로 속의 때(塵)와 선의 감춤(秘)이 적절히 배합되어 가경을 이루는 곳, 이곳이 악양이다.
악양 지명 유래
악양은 삼한시대에 변한의 낙노국(弁辰 樂奴國)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소다사현(小多沙縣)으로 불리었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757년)에 이르러 악양현으로 개칭되어 하동군의 영현이 되었다.
그 후 고려 현종 9년(1018년)에는 진주의 영현으로 되었다가,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악양면으로 되면서 하동군에 이속되었다.
악양의 지명과 관련하여 중국 호남성(湖南省) 악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전통적인 견해와 소다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유력한 견해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자의 중국 악양유래설에서도 중국 악양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란 견해와 당나라 장군 소정방에게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로 갈라진다.
악양을 소정방과 연관시키는 견해는 나당연합군의 장수로 이 땅에 왔다가 자신의 고향인 악양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정방이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660년이었는데, 악양이란 지명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757년이었으므로 이 견해는 취할 바가 못된다.
그리고 중국 악양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견해는 이웃 산청의 옛 이름인 산음이 중국 절강성(浙江省) 회계군 산음현에서 유래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 악양이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악양현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동정호, 군산, 악양루는 중국 악양의 동정호와 주변의 명승을 그대로 인용한 이름으로 하동 악양을 설명하기에 가장 간명하다.
다만 이 설에 대하여 삼국사기 기록을 제시하면서 반박하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이에 의하면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덕왕 때 소다사현을 악양현(嶽陽縣)으로 고쳤다고 하는 기록(嶽陽縣 本 小多沙縣 景德王 改名)이 있는데, 이는 중국의 악양현(岳陽縣)과 표기가 다르고 현재의 악양(岳陽)과도 그 표기가 다르다고 한다.
즉,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기가 고려 인종23년(1145년)이었으니까 적어도 이때까지는 악양(嶽陽)으로 표기되었고,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 악양(岳陽)으로 개칭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신라 경덕왕(757년)에서 고려 인종 때까지의 악양(嶽陽)이라는 표기와 현재의 표기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수의 견해는 嶽, 岳 모두 ‘큰 산 악’으로 같은 의미이고 岳은 嶽의 약자이므로 혼용하여 쓸 수 있다고 하는데, 반대설은 중국의 악양과 현재 하동 악양의 지명은 ‘嶽’이 아니라 ‘岳’으로 표기되고, 그 용례 상 嶽 자가 들어있는 산 이름으로는 설악산(雪嶽山), 황악산(黃嶽山) 등이 있고 岳 자는 관악산(冠岳山), 월악산(月岳山) 등으로 구분하여 표기하므로 양자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소다사(小多沙)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면 소다사를 작다는 뜻의 한자어 ‘소’와 우리말 ‘따사롭다’를 음차(音借)한 ‘다사’로 해석하면서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악양이라는 것이다.
즉, ‘악’은 우리말 ‘아가(岳兒)’의 음차로 작다는 뜻으로 소다사의 ‘소’에 해당하고, ‘양(陽)’은 볕을 뜻하는 한자어로 ‘따사(다사)’에서 훈차(訓借)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다사’는 하동의 옛 지명인 한다사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논거로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후기 가야연맹시대 하동의 지명이었던 대사국(帶沙國)이 한다사로 바뀔 때 악양의 지명도 낙노국에서 소다사로 바뀌었는데, 여기에서의 ‘다사’는 ‘대사’의 변형된 또 다른 이름이었다고 하며, 이들의 용례를 보면 물과 관계있는 지명에 많이 사용되었고(의령의 다사리, 영천의 다사, 달성의 다사, 해남 다사리 등), 실제로 섬진강의 당시의 이름이 다사강(또는 基汶河)이었다고 한다.
한편 낙노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낙(樂)은 ‘아’로 읽고, 노(奴)는 양(良), 나(那), 양(襄)과 같은 당시 가야 소국의 국읍(國邑)이라는 의미에 붙는 접미어로 해석하여 악양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낙노국에서 소다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악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면 낙노국-소다사-악양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결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 이 또한 취할 것이 못 된다.
이렇듯 악양의 지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병존하고 있다는 것은 악양이 역사적으로 다양한 얼굴로 투영되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미천한 지식으로 소화하기에는 무리일 수밖에 없는데, 과한 욕심으로 채우다 보니 알맹이 없는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러한 논의가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가거지(可居地) 악양골
이중환은 택리지의 ‘산수편’에서 지리산을 소개하면서 악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산의 남쪽에는 화개동(花開洞)과 악양동(岳陽洞)이 있는데, 모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이 이자겸의 횡포가 심해지자 장차 화를 당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동에 숨어 살았다.
그 후 조정에서 그를 찾아서 벼슬을 내리고 불렀지만, 한유한이 그길로 숨어 버린 채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며 혹은 신선이 되어서 갔다고도 한다.
…(중략)… 옛날부터 전하기를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溪, 악양의 매계리를 일컫는다)이다.
근래에 들어 비로소 조금 사람들의 왕래가 있다.
이곳 악양이 청학동인지 아닌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말하는 가거지(可居地)의 네 가지 요소인 지리(地理), 생리(生利), 산수(山水), 인심(人心) 모두를 두루 갖춘 곳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가거지란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풍수적 길지에 해당하는 ‘지리’, 생업에 유리한 입지를 중시하는 ‘생리’, 풍류를 즐길 만한 아름다운 풍광을 중시하는 ‘산수’, 세사의 풍속과 주변 사람들의 인성을 중시하는 ‘인심’의 요건을 충분하게 갖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악양은 택리지에서 청학동으로 거론될 정도로 풍수적 길지인 ‘지리’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빼어난 경승지가 산재하여 ‘산수’ 역시 최고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양의 거지는 배고픔을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심’ 또한 후박하다.
그리고 생산성이 높은 비옥한 토지와 물자교류에 필요한 교통조건을 중시하는 ‘생리’는 가거지의 입지조건 중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데, 악양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섬진강으로 통한 해운이 발달한 곳으로 생리의 요건 또한 확실하게 갖춘 곳이다.
그래서 가거지 악양인 것이다.
슬로시티 악양
최근 들어 새로운 가거지 요건으로서 슬로시티(Slow City)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면서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을 이르는 말이다.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1986년 패스트푸드(즉석식)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여유식)운동의 정신을 삶으로 확대한 개념이다.
이 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의 몇몇 작은 도시의 시장들이 슬로시티를 선언하면서 전 세계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5만 명 이하이고, 도시와 환경을 고려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며 전통문화와 음식을 보존하려 노력하는 등 일정 조건을 갖춰야 슬로시티로 가입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담양군(창평면), 완도군(청산도), 신안군(증도)이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것을 시작으로 2009년 이곳 악양이 지정되었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느림의 기술(slow ware)은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두는데, 이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지키는 것으로 달콤한 인생과 정보 시대의 역동성을 조화시키고 중도를 찾기 위한 처방이다.
빠른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빠른 사회(Fast City)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의 슬로시티 운동은 가거지의 새로운 개념,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한다.
이곳 악양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유로 다향(茶香), 문향(文香), 도향(都香)의 세 가지의 향기를 꼽고 있다.
다향으로는 산자락에 지천으로 깔린 야생차나무와 천 년을 넘게 이어온 차 제조의 전통을 들 수 있으며, 이웃 골 화개와 함께 녹차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향으로 단연 박경리 대하소설의 토지와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토지문학제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산과 들과 강이 어우러진 이곳 특유의 풍토는 도시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도향이 된다.
악양은 이러한 신개념 가거지의 요건까지도 구비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봄이면 녹차, 매실, 가을이면 알밤, 대봉감 등이 슬로시티 악양의 슬로푸드가 되어 풍성함을 더해주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가거지로 우뚝 선 것이다.
악양팔경
악양의 경승지 중 빼어난 여덟 곳을 꼽아 이를 악양팔경이라 부른다.
동정추월(洞庭秋月;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빛)과 한사만종(寒寺晩鐘;한산사의 저녁종소리), 소상야우(瀟湘夜雨;소상의 밤비), 원포귀범(遠浦歸帆;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돛배), 어촌낙조(漁村落照;어촌의 저녁노을), 평사낙안(平沙落雁;평사리 들판에 내려앉는 기러기), 강천모설(江天暮雪;강 하늘에 내리는 저녁 눈), 그리고 산시청람(山市晴嵐;산마을에 피어오르는 맑은 아지랑이)이 그것이다.
가을밤 동정호에 비친 달빛과 한산사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저녁 종소리….
눈을 감아도 훤히 보일듯하고 귀를 막아도 선연히 들릴듯하다.
악양의 경승이 이 여덟 곳뿐이랴 만은 예사롭지 않은 악양의 풍격(風格)을 고양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악양팔경은 악양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소상팔경(瀟湘八景)
소상팔경이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의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소상강(瀟湘江) 주변의 풍경을 일컫는 말이다. (소상강은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되어 동정호에 유입되기까지의 강줄기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 악양의 지명이 중국 호남성 악양현에서 따온 것이듯 소상팔경도 자연스레 이곳 악양의 팔경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소상팔경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중국 북송대 문인이자 화가였던 송적(宋迪)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 생활 중 불미한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 유배 생활을 하던 그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소상강 일대를 유람하면서, 팔경시를 짓고 8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원조인 소상팔경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강에서 돌아오는 돛단배
산시청람(山市晴嵐) 산마을에 피어오르는 맑은 아지랑이
강천모설(江天暮雪) 강 하늘에 내리는 저녁 눈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가을 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연사만종(煙寺晩鐘) 안개 쌓인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어촌낙조(漁村落照) 어촌에 비친 저녁노을
이 원제의 소상팔경에서 구체적인 지명이 거론되는 것은 동정호와 소상강뿐이고, 나머지의 화제(畵題)인 평사, 원포, 산시, 강천, 연사, 어촌은 일반적인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평사(平沙)’는 평평한 모래밭을 의미하고, ‘원포(遠浦)’는 포구, ‘산시(山市)’는 산마을, ‘강천(江天)’은 강과 하늘, ‘연사(煙寺)’는 안개 속의 절, ‘어촌(漁村)’은 글자 그대로 어촌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정지명을 거론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제의 시어들은 빼어난 경승을 찬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쓸쓸함, 외로움 같은 음울한 느낌이 묻어나게 하는 그런 것들이다.
어쩌면 송적의 소상팔경은 유배된 자신의 심정을 화폭에 담은 것이지 소상강 주변의 구체적인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문인 사대부들은 중국의 이념화된 정형(定形) 산수를 자연경의 모델로 삼았는데, 그 대표적인 화제(畵題)가 소상팔경이었다.
원류인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의 소상팔경도 역시 작가의 상상으로 비친 곳을 8경으로 구성하여 그린 것이다.
따라서 실경산수화는 아니며, 우리나라의 악양과도 전혀 관련이 없음은 물론이다.
악양팔경의 재구성
앞에서 거론한 악양팔경은 이름만 그렇다는 것이지 중국의 소상팔경을 그대로 베낀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소상팔경과 비교해 보면 산시청람(山市晴嵐)을 고소(姑蘇)청람으로, 연사만종(煙寺晩鐘)을 한사(寒寺)만종으로 바꾼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더욱이 소상야우(瀟湘夜雨)의 소상은 중국의 동정호로 유입되는 강 이름으로 이곳 악양과는 무관한 장소임에도 이를 악양팔경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악양팔경이 중국의 소상팔경의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짝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단순한 모방이란 독창을 포기한 소극적 게으름이지만 짝퉁이란 영혼 없는 이미테이션(imitation)으로 적극적 흉내의 맹목성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악양팔경이 짝퉁 소상팔경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악양의 독창적 영혼을 가진 그림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소상팔경의 관념산수적 그림을 지양하고 악양 자체의 형승을 구체화하려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악양에는 그 어디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가경의 경승지들이 산재한다.
악양의 팔경을 꼽으라 한다면 굳이 소상팔경의 화제를 차용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인데, 기왕에 소상팔경에서 따온 것이라면 이를 악양 자체의 풍경에 대입하여도 음울한 뉘앙스의 소상팔경과 다른 가경의 악양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상팔경의 산시(山市), 평사(平沙), 어촌(漁村), 원포(遠浦), 연사(煙寺), 강천(江天) 등은 특정 장소의 실경을 이야기 한 것이라기보다 관념산수의 화제로 삼은 것이므로 이곳 악양의 팔경으로 인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를 실경의 악양에 대입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한다면 적어도 짝퉁 소상팔경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상을 ‘섬진(강)’으로 바꾸고, 산시를 ‘고소(성)’로, 어촌을 ‘개치(마을)’, 연사를 ‘한(산)사’, 강천을 ‘신선(대)’로 각각 바꾼다면 비록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느 정도 악양 자체의 그림이 될 것이란 생각이 그것이다.
그리고 평사와 동정은 지명 그대로 원용하고, 원포귀범은 ‘개치포구에 멀리서 돛배가 돌아온다’라는 의미가 연결되니까 그대로 사용하면 될 것이다.
고소성 산자락에 맑은 기운이 퍼질 때 (姑蘇晴嵐,고소청람)
평사리 들판에 기러기 내려앉는다. (平沙落雁,평사낙안)
저녁노을 물든 어촌 개치에 (開峙落照,개치낙조)
멀리서 돛배가 돌아오고, (遠浦歸帆,원포귀범)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은은히 퍼질 때 (寒寺晩鐘,한사만종)
동정호에 가을 달빛 비친다. (洞庭秋月,동정추월)
섬진강의 밤비나 (蟾津夜雨,섬진야우)
신선대에서 내리는 저녁 눈은 (神仙暮雪,신선모설)
한 폭의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된다.
비록 내 주관적 상상, 다듬어지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지만, 악양 자체의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소상팔경의 맹목적 이미테이션을 답습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도가 진품 악양팔경을 만드는 조그만 초석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고소성, 한산사
악양팔경 중 고소청람의 고소성과 한사만종의 한산사는 중국 호남성에서 유래된 악양과 달리 특이하게도 중국 강소성 소주의 고적에서 유래되었다.
어떻게 하여 강소성의 소주에 있는 고소성과 한산사가 이곳의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인지는 전해지는 바 없다.
아무튼, 강소성 소주는 춘추시대의 오(吳)나라 수도였으며, 고소는 소주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고소성은 춘추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오월쟁패(吳越爭霸)의 흥망성쇠의 고사가 깔린 곳이고, 한산사는 당나라 때의 기승인 한산과 습득의 기담(奇談)이 전해지는 곳이다.
고소성(고소대(姑蘇臺)라고도 함)은 오나라 왕 합려가 축조하였고 그의 아들 부차가 이를 호화롭게 증축하였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등 유능한 참모들을 거두어들이고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으나 이웃한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오왕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고(臥薪), 그 결과 오나라를 침공한 월나라를 대파하고 월왕 구천의 항복을 받았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의 고소성에서 말을 기르는 부차의 종으로 인욕의 세월을 보내던 끝에 월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구천은 굴종(屈從)의 치욕을 되새기면서 자리에 쓸개를 걸어 두고 그 쓴맛을 핥으며(嘗膽) 복수를 다짐하였다.(오왕 부차의 와신과 월왕 구천의 상담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가 생겼다.)
그는 자기의 참모 범려와 문종을 통하여 오왕 부차의 참모 중 백비를 매수하고 한편으로 오왕 부차에게 미인계로 월나라 여인 서시(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힘)를 바쳐 오나라 공략의 작전을 펼친다.
그리하여 오나라 전력의 핵심인 오자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서시는 빼어난 미색으로 오왕 부차가 고소대를 호화롭게 증축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사업으로 국고를 탕진케 하고 연이은 연회와 유희로 정사를 태만케 하였다.
(오자서는 월나라의 항복과 월왕 구천의 본국 귀환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월나라와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백비의 모략으로 부차가 오자서에게 칼을 주면서 자결을 명하자 오자서는 부하들에게 자신의 눈을 뽑아 고소성 동문에 걸어 두어 후에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여 오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러한 월나라의 끈질기고 집요한 공작으로 결국 오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의 침공으로 고소성이 함락되자 자신의 명령에 따라 자결하였던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면서 눈을 가리고 자결하였다.
이렇게 오월의 물고 물리던 치열한 오월쟁투의 막이 내리면서 고소성의 흥망성쇠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한산사는 고소성 외곽에 있는 소주의 대표적인 사찰로 남조시대 양나라 때에 창건(6세기경)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중건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당우는 청나라 말에 중건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묘리선명탑원(妙利善明塔院)이었는데 당나라 정관 연간(627~649)에 두 명의 기승이자 시승(詩僧)이었던 한산과 습득에 의해 알려지면서 한산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연유로 절강성 천태산(天台山)에 있었던 이들이 강소성 소주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천태산 국청사에서 불목하니로 잡일을 하던 습득과 인근 한암이란 동굴에서 기거하면서 국청사에 드나들었던 걸승 한산은 죽이 잘 맞는 도반이었다.
대중들은 한산을 미친 사람으로, 습득을 모자라는 바보로 취급을 했으나 이들의 자유분방하고 광적인 기행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무위도인(無爲道人)으로서 거침이 없었다.
한산사는 원래 조그만 암자였으나 이들이 자리 잡으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절 이름도 한산사(寒山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은 불(佛)과 속(俗), 선(仙)의 구분을 허물고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유의 세계를 시로써 읊기도 하였는데 현재 수백여 수의 시가 전해진다.
이후 한산사가 더 유명하게 된 것은 같은 당나라대 시인 장계(张继)가 풍교야박(枫橋夜泊)이라는 시를 쓰면서였다.
밤이 되어 풍교에 배를 정박한다는 제목의 이 시는 장계가 과거 시험에 떨어지고 집으로 가는 배에서 자신의 애절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낙방 선비의 절망적 서러움을 투영하는 듯,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가을밤의 스산함으로 뱃전에 부서진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는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졸고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가 나그네의 뱃전에 부딪히네
여기까지가 중국 강소성 소주에 있는 고소성과 한산사에 대한 내력이다.
중국의 그것에 연유한 이곳 악양의 고소성과 한산사는 삼국시대에 축조되고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자세한 연혁은 깜깜이다.
다만 ‘경상도읍지(1833년경 편찬)’ 하동부 고적조의 “악양은 옛 현명이나 지금은 방명이다. 부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봉황대와 고소성과 한산사의 유지와 동정 · 군산 · 평사의 호(湖)가 있다.”라는 기록과 ‘하동부읍지’에는 “고소성은 악양 신선대 아래 있다. …성 밖에는 한산사의 폐허가 남아있고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천연의 반문(班紋)이 있어서 세칭 반죽(斑竹)이라고 한다.”라는 기록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고소성과 한산사는 형제봉,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소위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빼어난 조망처로 유명하다.
두 곳 모두 지리십경 중의 하나인 섬진청류의 섬진강과 악양팔경 중의 하나인 평사낙안의 평사리 무딤이 들판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view-point)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지형적 근접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시각적 대상물의 구성이 달라짐으로 인하여 닮은 듯 다른 느낌의 그림을 이룬다.
고소성은 능선의 등 날이 섬진강으로 곧추 고개를 숙이는 끝자락에 있는 관계로 그 경관의 중심은 섬진강이 되고 무딤이 들판은 그 보(補)가 되는 데 반하여, 고소성에서 남동으로 내려선 곳에 위치한 한산사에서는 무딤이 들판이 그 경관의 중심이 되고 섬진강은 그 보가 되면서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빼어난 풍광은 우열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데 중국의 고소성, 한산사의 풍경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악양의 경승을 이룬다.
토지 이야기
악양의 평사리는 소설 ‘토지’의 주무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사리 하면 ‘토지’를 연상하게 되고, ‘토지’ 하면 평사리 들판과 최참판댁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최참판댁 마당에 서서 섬진강과 널찍하게 펼쳐진 평사리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토지가 상징하고 있는 인문학적 의미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설 ‘토지’는 소설가 박경리가 25년간 집필한 5부작 16권의 대하소설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광복에 이르기까지 지주계층이었던 최참판댁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1897년 음력 8월 15일(한가위)에서부터 시작하여 1945년 (양력)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끝맺기까지의 만 48년, 약 반세기의 장구한 세월을 장대한 스케일로 구성한 대작이다.
그 줄거리를 요약해본다.
소설 토지의 줄거리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만석꾼 최참판댁의 며느리인 별당 아씨(서희의 어머니)가 하인 구천이와 눈이 맞아 지리산으로 도망치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구천이는 최참판댁의 윤 씨 부인(서희의 할머니)이 청상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훗날 동학당 접주가 되어 사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게 된 아들 김환이다.
아버지를 따라 동학당에 참가했던 김환은 몸을 숨기기 위해 구천이란 가명으로 최참판댁에 찾아들고, 자신의 출생과 이복형인 최치수의 부인 별당 아씨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별당 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치수는 어머니 윤 씨 부인이 구천이를 감싸고도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면서, 먼 친척인 조준구와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성불구자가 된다.
그는 조준구가 구해 준 총으로 구천이와 자신의 부인(별당 아씨)을 응징하기 위해 지리산에 들어가 찾아 헤매었으나 실패하고 돌아온다.
별당 아씨는 김환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김환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로 돌아간다.
최참판댁 가문의 재산을 탐낸 귀녀와 몰락 양반 김평산의 음모로 최치수는 교살당하고 음모를 꾸민 두 사람은 윤 씨 부인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먼 친척인 조준구는 최참판댁에 찾아들어 재산을 노린다.
그러던 중 마을을 휩쓴 호열자(콜레라)로 윤 씨 부인이 죽게 되자 조준구는 최참판댁의 유일한 생존자인 최치수의 외동딸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면서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최참판댁의 모든 재산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재산을 빼앗긴 서희는 조준구에게 맞서지만 역부족이다.
이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조준구의 행패에 불만이 쌓인 마을 사람들은 목수 윤보를 선봉으로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최참판댁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재물을 탈취하고 조준구 내외를 죽이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
그 틈에 서희는 머슴인 길상으로 하여금 토지문서를 찾게 하여 일시 힘을 회복하지만, 조준구 내외를 죽이는 데에 실패하고 할머니 윤 씨 부인이 남겨 준 패물을 지니고 이들과 함께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떠난다.
‘토지’의 1부는 여기서 끝을 맺는데,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체제와 신분질서의 붕괴 등 구한말 사회적 격변기에 최참판댁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2부에서 서희는 간도의 용정에서 윤 씨 부인이 남긴 금은 등의 보석을 자본으로 장사에 성공하여 거부가 되고, 머슴이었던 길상과 혼인한다.
그리고 2부에서부터 이야기의 배경은 평사리를 벗어나 만주와 동경, 서울과 진주 등의 공간적 범위가 넓어지고, 서희와 길상 그리고 평사리의 사람들 이야기는 독립운동 등의 민족적 담론으로 확대되면서 마지막 5부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토지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
토지의 사전적 의미는 경작지나 주거지 따위의 사람 생활과 활동에 이용하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토지는 재화(財貨)를 생산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으로 노동(labor), 자본(capital)과 함께 생산의 3요소로 꼽는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생산 3요소 중 노동과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토지보다 상대적으로 크지만, 과거의 농경사회에서는 토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농경사회에서의 토지는 필요한 재화 대부분을 생산하였던 가장 기초적인 생산요소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경제학적 생산요소라는 파생적인 부분을 담론화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토지라는 거대담론의 출발은 단순한 객체로서의 분석이 아니라 인간과의 유기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므로 인문학적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고찰하여야 한다.
그러나 나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이러한 토지개념을 논하기에 역부족이므로 토지의 본원적 부분에 대한 검토는 생략기로 한다.
다만 역사적・사회적 측면에서 부의 척도인 토지개념을 소설과 관련하여 개괄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의 토지는 삶의 터전이자 생존의 기초가 되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며, 토지의 소유 관계에 따라 빈과 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사회의 계층적 구조를 나누면서 권력의 유무를 가름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소설 속의 최참판댁을 만석꾼이라 하는 것도 소유 토지에서의 소출을 부의 크기로 작량하여 이야기한 것이었으며, 당시 토지와 벼 수확의 양에 따라 부호를 천석꾼・만석꾼 등으로 불렀던 것이었다.
소설 ‘토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악양 평사리 들판의 장소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한다.
농경이 절대적 주를 이루는 시대적 배경 속의 너르고 기름진 평사리 들판의 토지는 만석꾼 최참판댁의 권력과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한 최참판댁이 어느 날 갑자기 평사리의 토지를 잃게 되면서 외동딸 서희는 미지의 간도로 쫓기듯 떠난다.
하루아침에 만석지기 지주의 신분에서 낭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서희가 새롭게 부를 창출한 것은 토지가 아니라 장사였으며, 그녀는 평사리의 지주 신분이 아닌 간도 용정의 거상 신분으로 전환하게 된다.
거부가 된 그녀는 잃었던 평사리의 토지를 다시 찾았으나 과거 누렸던 최참판댁의 명예와 절대적인 권위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자 척도로서의 토지개념은 이미 그 절대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평사리 토지는 더 최참판댁의 존엄을 창출하는 원천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토지의 역사적・사회적 비중과 기능이 봉건사회 질서의 붕괴와 함께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면서 그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
실재의 장소, 악양 평사리는 소설 ‘토지’의 설정된 배경일 뿐이며, 최참판댁과 등장인물 역시 실존의 팩트(fact)가 아닌 설정의 픽션(fiction)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운 평사리 들판과 주변의 풍경은 최참판댁의 이야기를 팩트로 오인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 준다.
정작 작가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였던 평사리가 소설에서는 예전부터 당연히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하동군이 조성한 최참판댁과 드라마 세트장에서 평사리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소설 속의 실재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공간 구성과 위치 설정이 탁월함을 느낄 것이다.
픽션의 공간이 이처럼 실재적(實在的) 공간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 ‘토지’에서 평사리의 장소적 배경은 5부작 중에서 1부뿐이지만, 소설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소설의 원형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또한, 토지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역시 1부뿐이다.
1부에서는 평사리 토지의 지주인 최참판가(家)의 사람들과 하인・머슴, 평사리 토지에 기대어 생활하는 소작인들, 그리고 최참판댁 토지를 탈취하려는 자들과 얽히고설킨 토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2부로 이어지면서 소설 토지의 모티프는 이미 토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설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은 1부의 평사리의 토지 이야기는 나머지의 5분의 4의 이야기를 덮고도 남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소설 ‘토지’라 하면 평사리의 토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 남부능선 - 형제봉, 고소산성
형제봉은 악양을 둘러싼 산군(山群) 중에서 악양을 대표하는 산이다.
지리산 형제봉 하면 주능선상의 명신봉과 벽소령 사이에 있는 형제봉(1433m)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주능선에 비켜있지만, 악양의 형제봉 역시 어엿한 지리산의 형제봉이다.
오히려 지리산 주능선상의 형제봉보다 이곳 악양의 형제봉이 일반인들에게 선호의 대상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주능선상의 형제봉은 주변의 명신봉(1586m), 삼각봉(1462m), 벽소령, 덕평봉(1522m) 등 쟁쟁한 산봉들에 묻혀 존재감이 상쇄되는 데 반하여 악양의 형제봉(1115m)은 비록 주능선상의 형제봉(1433m)보다 낮지만, 주변의 산릉에서 가장 우뚝하게 의연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악양의 형제봉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 지리산의 주능선, 남으로 백운산 능선, 동으로 칠성봉・구재봉 능선 및 서쪽으로 불무장등・황장산 능선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는 점과 지리산의 청학동이라 일컫는 화개골과 악양골의 중심에서 그 늠름한 위용을 드러내는 봉우리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다.
또한, 봄이면 만산홍화(滿山紅花)의 철쭉이, 가을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단풍이 산릉을 불태우면서 황홀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새벽안개 엷게 퍼진 신선대의 암봉과 이슬 머금은 낙락장송은 몽환적인 풍광으로, 저녁노을 짙게 깔린 백운산 능선 위에 피는 적광(赤光)의 향연과 그것을 여과 없이 투영한 섬진강의 물빛은 농염한 그림으로 선경을 이룬다.
아무튼, 형제봉이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대다수 사람은 지리산 주능선인 영신봉에서 삼신봉, 내삼신봉, 상불재를 거쳐 불일폭포, 쌍계사로 하산하기 때문에 그것이 남부능선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남부능선은 상불재에서 계속 능선을 타고 관음봉, 내원재, 원강재, 형제봉을 거쳐 신선봉, 고소성까지를 이르는 구간을 말한다.
형제봉은 직선거리 약 100m 사이를 두고 남쪽의 제1봉과 북쪽의 제2봉이 비슷한 형상으로 나란히 자리 잡은 모습이 다정스러운 형제 같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형제봉에 대하여 북쪽 봉을 제2봉 또는 윗봉, 남쪽의 봉을 제1봉 또는 아랫봉이라 부르고 있는데, 제1봉의 표지석에는 성스러울 ‘성(聖)’, 황제 ‘제(帝)’로 표기하여 엉뚱한 해석을 하게 한다. 경상도 특히 하동지방에서는 ‘형’을 ‘성’으로 부르고 이에 터 잡아 ‘성제봉’으로 불렀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원래의 의미를 심하게 훼손한 것이다.)
이곳 형제봉과 시루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이곳 악양골에 9년 동안 비가 내려 천지가 물바다가 되었다.
그리하여 악양골 북쪽의 시루봉이 떡시루만큼 남고 골 전체가 물에 잠기었다.
두 형제가 홍수를 피해 산에 올라 형은 윗봉, 동생은 아랫봉에 서 있었는데 형은 발목까지 물이 차고 동생은 무릎까지 물이 찼다.
그때 밑에 있는 동생이 위에 있는 형을 보니 그 뒤쪽에 봉우리가 떡시루만 하게 보여 그 봉을 시루봉이라 하였다고 하고, 형과 동생이 서 있었던 윗봉, 아랫봉을 형제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시루봉은 형제봉의 북동측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로서 거사봉과 회남재 중간에 위치한다)
사실 윗봉에서 아랫봉을 보면 아랫봉이 높은 것 같고, 아랫봉에서 보면 윗봉이 높게 보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형제 같기도 하다.
형제봉에서 철쭉능선, 신선대, 신선봉을 거쳐 고소성에 이르기까지의 능선은 그 자체의 그림도 아름답지만, 섬진강의 푸른 물길과 은빛 백사장이 이루어 놓은 비경을 원 없이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가 된다.
이러한 남부능선을 마무리하는 곳이 고소성이다.
이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인데, 이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뒤로는 준령을 등지고 섬진강의 큰 강이 앞을 가로막은 천연의 요충지로써 남해에서 호남 지방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사적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하동군에서는 고소성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이곳에 서면 눈 앞에 펼쳐진 너른 악양 들판과 백사청강의 섬진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으며, 특히 석성의 끝부분에 우뚝 선 소나무는 섬진강 조망처의 가늠쇠가 된다.
두류산 은자(隱者) - 남명의 유두류록(遊頭流錄)과 한유한, 정여창
“잠깐 사이에 악양현을 지났다. 강가에 '삽암(鍤巖)'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은거한 인물이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그날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이 묘연했다. 아, 나라가 망하려고 할 적에 어찌 어진 이를 좋아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략)… 문득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한 잔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이 탄식하였다.”
이 글은 남명이 그의 나이 58세(1558년)에 12번째의 지리산을 유람하기 위해 이곳 악양을 지나면서 한유한을 기려 한 잔의 술을 올렸다는 ‘유두류록(遊頭流錄)’의 일부이다.
한유한은 최치원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
그는 고려 중기 최충헌(앞의 글 ‘가거지 악양골’에서 인용한 택리지에는 이자겸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고려사, 동국통감 등의 기록을 참조한다.)의 독재와 매관을 보고서 “난(難)이 장차 닥쳐올 것이다.” 하면서,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자락 악양에 은거하였다.
청백한 절개를 굳게 지키며 세속의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의 인품을 높게 평가하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의 직을 제수하여 사신을 보냈으나 그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벽에다가 “한 조각 사륜이 산골짝을 날아드니(一片絲綸飛入洞, 일편사륜 비입동), 비로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짐을 알았네(始知名字落人間, 시지명자 낙인간).”라는 글귀를 적어두고 북쪽 벽의 창문을 통하여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현재의 부춘리 지명이 그가 손수 불출동(不出洞)이라 바위에 쓰고 평생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리고 한유한이 살았다는 삽암은 현재 평사리 외둔 삼거리(화개방향의 19번 국도와 악양방향 1003번 지방도의 교차점)의 강변에 있는 바위이며, 옛날부터 섬진강의 나룻배가 다니던 곳으로 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계속하여 남명의 ‘유두류록’을 이어본다.
“정오가 될 무렵 도탄에 배를 정박하니 …(중략)… 도탄에서 1리쯤 떨어져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거처하던 옛 집터가 남아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함양군의 옛 이름)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연산군)에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남명은 삽암을 지나 도탄(아마 현재의 화개장터 부근으로 추정된다)에 도착하면서 정여창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 일두 정여창(1450~1504)은 김종직의 제자로 학식이 높고 행실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성균관에 학문을 연마하던 중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매번 사양하였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모친상을 마치고 지리산 악양에 들게 된다.
그의 나이 40세 전후로 하여 약 3년간 이곳 악양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지금도 화개면 덕은리에 정여창을 추모하는 악양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덕은(德隱)’이란 지명이 덕이 있는 사람이 숨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정여창의 은거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41세(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던 그가 그해 과거에 급제하면서 악양의 은거를 접고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어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은 좋아하지 않았다.
46세(1495년) 안음현감에 임명되었으나, 49세(1498년, 연산군 4)에 무오사화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나이 55세(1504년), 그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두 달에 걸쳐 고향인 함양에 옮겨와 안장하게 되었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의 무덤은 파헤쳐져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참수하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었다.
이해 9월에 일어난 이른바 갑자사화에 연루된 것이었다.
이처럼 남명은 지리산 유람 중 한유한과 정여창이가 살던 곳을 지나면서 한유한의 은거 생활과 정여창의 안타까운 죽음을 탄식하고는 유두류록 말미에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준다면, 십 층의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十層峯頭冠一玉),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것이다(千頃水面生一月).”라고 세 분을 이야기하면서, “바다와 산을 3백 리 길이나 유람하였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자취를 다 보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看水看山. 看人看世), 산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山中十日好懷) 하루 사이에 좋지 않은 생각으로 바뀌었다(翻成一日不好懷).”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하였다.
(남명이 한유한, 정여창과 함께 거론한 조지서(1454년~1504년)는 하동 옥종 사람으로 1474년(성종 5) 과거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 이후 세자시강원 보덕(세자시절 연산군의 스승)을 역임하였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하동 옥종)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세자시절 자신을 엄하게 교육하였던 그를 연루해 참형에 처하였다. 참형을 당한 조지서의 시신은 저잣거리에 내걸렸다가 강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분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가 있으면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지리산의 은자(隱者)였다가 은거지 지리산을 벗어나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던 정여창과 조지서는 갑자사화 때 각각 부관참시와 참형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임금의 부름에 불응하였던 한유한은 관직을 피하여 더 깊숙한 지리산으로 들어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絲綸入洞踰垣走(사륜입동유원주) 임금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方丈千秋獨一仙(방장천추독일선) 방장산에는 천 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한유한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문인 박민(朴敏, 1566~1630)의 시이다.
비록 한유한처럼 지리산 신선으로 영생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정여창 역시 동방의 오현(東方五賢)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어 길이길이 추앙받는 영생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후기 (전구간 : 9.9km) 2020. 10. 17
(대축 ⇨ 입석 : 4km)
전형적인 가을날의 쾌청함이다.
몇 년 전 이 구간 순례 때 우리는 동정호, 최참판댁을 거치는 코스를 택했다.
오늘은 악양천의 둑방길을 타고 무딤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코스를 따르기로 하였다.
둑방길 양쪽에는 핑크뮬리가 연분홍 깃털을 하늘거리며 둘레꾼들을 맞는다.
오른편 악양천의 물빛은 하늘을 담아 청청하게 빛나고 왼편 무딤이 들판은 벼 이삭의 물결이 황금색 풍요를 담고 있었다.
지리산둘렛길 제13구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골 안쪽은 산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멀리 뾰족하게 솟아있는 거사봉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깃대봉이, 좌측으로는 형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우측으로 틀어 깃대봉 능선을 이어보면 구재봉과 지난 제12구간에서 넘어왔던 아미산 자락이 눈에 들어오고, 몸을 좌측으로 틀어 형제봉 능선을 이어보면 신선대와 오늘 넘어야 할 윗재 언저리가 시야에 다가선다.
둘렛길은 입석리 하덕마을이 마주 보이는 곳에서 둑방길을 버리고 우측의 무딤이 들판 안쪽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른다.
곧이어 1003번 지방도를 만나게 되는데 입석리 하덕마을의 초입이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꺾어 지방도를 따르면 악양면 소재지를 거쳐 악양의 골 안쪽에 이르게 되고, 좌측으로 꺾으면 평사리를 거쳐 골 바깥으로 향하게 된다.
둘렛길은 하덕마을 초입에서 입석(본)마을을 향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완경사의 오름길이다.
(입석 ⇨ 윗재 : 2.3km)
하덕마을과 입석마을은 행정상 입석리에 예속된 자연부락이다.
입석(立石)이란 선사시대 거석문화를 나타내는 신앙물인 선돌에서 유래하는데 이 마을 역시 마을 뒤 논바닥에 거대한 선돌이 있으며 지금도 이곳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둘렛길은 입석마을회관 앞마당에서 마을의 고샅길을 거쳐 오른다.
향토색이 정겹게 깔린 곳으로 짧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길이다.
마을이 끝나면서 구부렁 휘어진 오름의 임도를 따르는데 곧이어 마을 후면의 둔덕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입석마을과 무딤이 들판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이어지는 직선의 오름길에서 나는 심한 무기력증에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지면서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오늘 순례길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가는 선등자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함께 쉬면서 막걸리를 연거푸 두어 잔 들이켰다.
술기운이라도 빌려 볼 요량이었으나 다시 시작한 발걸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몸으로 중경사의 윗재를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나는 임도가 끝나는 숲길 초입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취사도구가 있는 내 배낭을 조규철 회원에게 맡기면서 구간의 나머지 길잡이를 부탁하였다.
나의 지리산둘렛길 제13구간은 이렇게 중단되었다.
부기(附記)
비록 도중에 중단한 둘렛길이지만 글을 마무리하고 끝을 맺기는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아 다시 글을 이어본다.
둘렛길의 ‘후기’는 둘렛길 여정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소회를 가볍게 적은 것으로 본기에서 다루기에 적당치 아니한 것을 보충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둘렛길 노정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어 후답자들의 길라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의도 또한 없지 않다.
이런 이유로 나머지 구간의 노정을 몇 년 전 순례의 기억을 더듬어 간략히 스케치해 보련다.
시멘트 포장의 임도가 끝나면서 윗재로 향하는 숲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서어나무 군락지의 숲길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부터는 된비알의 오름길이다.
서어나무 강골의 근육질 줄기는 언제 보아도 역동적이다. 힘이 넘친다.
그래서 소나무와 대칭하여 소나무를 문인상, 서어나무를 무인상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소나무의 휘어진 줄기가 선비의 유연한 품성을 연상케 한다면, 서어나무의 울룩불룩한 줄기는 무인의 단단한 강골을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윗재 ⇨ 원부춘 : 3.6km)
윗재는 고소성-신선봉에서 신선대-형제봉으로 연결되는 능선과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고개인데 혹자는 이를 아랫재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 지리산둘렛길(사단법인 숲길) 홈페이지에 아랫재라 표기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선봉과 신선대 사이의 능선 위에는 두 개의 재가 있는데, 아랫재・윗재가 그것이다.
문제는 어디를 중심으로 위・아랫재를 구분해야 하는가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딱 떨어진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추측건대 아랫재는 현재의 둘렛길에서 신선봉 방향으로 조금 내려선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위쪽의 신선대 방향에 윗재가 있다면 현재의 재는 아랫재가 될 것이리라.
아무튼, 하루빨리 혼용하고 있는 윗재・아랫재를 정리하여 더는 형제봉・성제봉(聖帝峰)처럼 원래의 이름이 왜곡되지 않았으면 한다.
둘렛길은 윗재의 고갯마루에서 너덜겅의 평길을 지나면서 다시 오름길로 이어지는데 신선대 암봉의 서사면 바특한 곳까지 오르고 나서야 내림의 길을 만나게 된다.
원부춘을 향하는 내림길은 참으로 고즈넉하다.
푸근하지만 청정함을 잃지 않고 소박하지만, 기품을 간직한 명품길이다.
길섶의 시누대가 터널을 이룬 곳, 작은 도랑의 앙증맞은 징검다리…,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원부춘을 향하는 물길 또한 참으로 순수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도랑이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소와 담을 이루면서 부춘천을 향한다.
그리고 원부춘이다.
첫댓글 오랜만의 포스팅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