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신호등 건너편을 바라본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얼굴을 비껴서고,
조금 더 멀리 시선을 준다.
매일 보는 도시의 풍경속에
몇 그루 은행나무 가로수가 안쓰러운 일탈을 시작한다.
그들이 물들기 시작하고,
바람의 유혹에 옷을 벗기 시작하니 가을이다.
찬란한 햇살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내리면
도시의 거리를 떠다니는 투명한 공기입자.
끈끈한 습기가 증발된 맑은 기운에 눈이 부시고,
문득 돌아 본 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그늘이 차가워 보이면 가을이다.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자기가 소속된 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가을이다.
봄은 움트어 터뜨리길 좋아하고
가을은 품고 있는 것을 털어내고 싶어 한다.
사계절 중 가장 많은 색깔을 갖고 있는 가을.
어디에서 맞이하느냐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가을.
붉은 열정과 쓸쓸한 해후를 동시에 갈망케 하는 가을.
그 가을의 절정 10월이 다 가기 전에 나는 꼭 가야할 곳이 있다.
오월에 태어난 내가 24살 되던 해 시월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의 성을 물러준 아비와 강제 이별을 시키고, 16년을 가족란에 어미와 저 이름만 쓰게 만든
옳지 않은 어미가 대학 마지막 가을생일을 맞이한 아들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아들은 학생 조종사다. 적지 않은 비행 실습비를 나라에서 고스란히 지불하니
어미의 부담은 덜어줬지만 그 댓가로 10년을 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해야 한다.
그 아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고, 혹독한 전투기 조종훈련을 앞두고 있고,
어미와 떨어져 지내야하는 기나긴 시간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긴 머리를 한 아들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파격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공군 조종사나 민간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의 머리 모양이 히피족처럼 바꾸어질 확률은 제로이다.
그것은 지구가 자전하는 법칙을 벗어나는 것 처럼 절대 불가능한 일이리라.
우리 집에는 그 흔해빠진 가족사진이 없다.
어미 혼자 웃고 있거나, 아들 혼자 덩그러니 폼 잡고 있는 사진 몇 장만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초등학생 때 모습. 집집마다 방문하여 아이들을 지도하는 학습지교사를 할 때,
줄기차게 마주쳐야 했던 저마다의 가족사진들.
아빠의 근엄한 모습이 약간은 어색하게 아이들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고 있고,
인자한 엄마의 미소가 죄다 비슷비슷해 보였던 그들의 가족사진.
그 사진들을 볼 때 마다 공연히 기가 죽고, 명치끝을 뾰족하니 찔러댔던 죄의식에 아팠던 기억들.
참으로 당당하게 키웠지만,
그 당당함이 가족사진에 으레 있어야 할 아빠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사진을 찍고 싶다 아들아, 네가 태어난 23번째 생일 기념으로 우리사진 찍어 벽에다 걸어두고 싶어”
“아빠 자리가 없어 싫다며?”
“상관없어. 이제 그딴 거 하나도 안 부러워.”“그래? 살 좀 빠지면”
해보는 소리다. 내 눈엔 쪘다는 살이 어디에 몰려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도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들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네 살이 빠질 때면 엄마가 또 찔거야. 겨우 다이어트 했는데..”
“비행해야 돼”
“엄마 마지막 소원!! 아니, 유언!!”
“크~ 졌다! 대신 뒤에 한 말은 취소해 마미!”
“취소! 사랑해~”
아들 비행실습장이 있는 태안으로 떠나는 날.
구름과 비와 바람이 밤새 긴급 전략회의를 했는지
푸르른 창공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과 근사한 햇살이 집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푸른 제복에 하얀 모자를 쓰고,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멋진 미소를 바라보는 설레임이 느껴지는 그런 가을 날씨였다.
고속도로를 감싸고 있는 터널 위 낮은 구릉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을 햇살에 지 몸을 붉히고,
작은 촌락마다 황금빛 벼이삭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제는 쓸모없는 나무라하여 더 이상
가로수용으로 심지 않는다는 잎사귀 넓은 플라타너스는 여름내 무겁게 달고 있던 잎들을 털어내고
있고, 성질 급한 담쟁이 넝쿨은 칙칙한 갈색 물감을 칠한 체 어여쁜 단풍나무를 질투하고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내가 아이를 낳았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 아이의 탄생을 축복했겠구나.
작년엔 하나밖에 없는 자식 생일도 잊어먹고 뒤늦게 얼마나 미안했던가.
먼 곳에 아들을 보내놓고 일 년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 이런 무심한 어미가 또 있을까.
다행인 건 어미의 무심함을 아들이 헤아려 준다는 것이다.
무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를 일찌감치 알아 버렸기에 체념도 빨랐다.
어릴 땐 특수한 상황에 있는 아이가 잘못 될까 봐 노심초사 마음을 놓지 못했다.
괘도를 이탈하여 한 없이 우주를 배회하는 고장 난 위성이 될까 봐 온 신경이 그 애에게 쏠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작은 행성에 무사히 착륙했고,
다음 목적지별을 여행하기 위해 기지에서 훈련을 받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제는 성인이 되었으니
마음에서 조금씩 내려놓아야 한다.
자식이 어디 내 것이 될 수가 있는가.
그래서 더 무심해지려고 하는데,
이면엔 상처받고 싶지 않은 어미의 영리함이 깔려있다.
그저, 둘이 찍은 사진이라도 바라보면서,
내게 저런 아들이 있구나, 정도면 된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다고 했다.
내 부모가 가진 기대에 나라는
자식은 뒤통수만 내려친 것이 아니라
좌우 어퍼켓을 한 방씩 먹였다할 만큼
엄청난 실망감을 주었다.
그런 내가 자식에게 무엇을 바란다면 양심불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요구할 때도 있다.
성공하게 된다면 키워준 값을 좀 내 놓으라고..
저가 성공한다면,
어미를 좀 보살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모순덩어리 모정이다.
저만큼 아들이 서 있다.
하얀 비행 제복을 입고 내 차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으며 한 쪽 손을 들어 보인다.
미소 지을 때마다 한 쪽 볼우물이 패인다.
그 보조개를 나는 좋아한다.
차 문을 열어 주며 밖으로 나온 나를 포옹해주고 반가움의 볼키스를 한다.
나는 아들과의 포옹을 좋아한다.
돈을 주거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손쉽게 서로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포옹.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순식간에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는 이 서양식 인사법을 나는 좋아한다.
물론 대상이 한정되어 있다.
아들은 안기 좋아하는 어미의 인사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도 안아주고,
이모를 만나도 안아주고, 사촌들을 만나도 안아주기 인사를 한다.
심지어, 헤어진 저 아빠를 만나도 인사법을 달리하지 않는다.
포옹을 하면서 인상을 쓸 수가 없으니 언제나 미소 띤 얼굴.
그래서 아들은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애로울 수 있다.
나는 이 주책스런 인사법 때문에 오해 받은 적도 간혹 있지만,
내 아들의 마음이 사랑과 배려와 자애로움으로 가득차길 소망한다.
꽃지 해수욕장으로 가서 조개구이와 회를 먹으며 각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떨어져 지낸 시간의 공백을 메워 나간다. 서로간의 요구 사항을 강요하지 않는다.
있다면 의논하고 서로 무리가 되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 들어주려고 한다.
그저 자신들의 일상에 대한 잔잔한 대화. 가슴 저 밑바닥에는
둘 만의 공동체 의식이 잔잔히 깔려있다. 아들의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대화의 형식도 달라진다.
우리는 최대한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한다. 일방통행이 거의 없다. 모자 가정의 대화법이다.
가위를 들고 조갯살을 잘라 내게 내미는 아들.
저만큼 커 줄 때 까지 모든 부모가 그랬듯이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자식은 대개가 부모가 끝없이 펼쳐 놓는 그 우여곡절을 먹고 자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깨어버린 그 순간,
훌륭한 어머니가 되긴 틀려먹은 여자가 단지 어미라는 자격으로 존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있는 가정의 교육법을 끌어다 쓸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에다 러시아 법을 적용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서부터 나는 무엇이든지 아들에게 얘기했다.
설령 그것이 부끄럽고, 곤혹스런 이야기라도 의논했다.
속상하면 왜 속상한지 좋으면 왜 좋은지를 말했다.
그래서 아들 가슴에 삶의 찌꺼기 같은 불만과, 상처와 비밀이 쌓이는 것을 방지했다. 모두,
되도록이면 전부를 내게 말할 수 있게 했다. 진정한 친구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니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는 팝송을 함께 흥얼거리고,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봤다.
잘 놀아주는 엄마로 소문이 났다.
항상 유쾌하고 따뜻해 보이지 않으면 아들 가슴에 고드름이 달린다.
나는 어릴 때 맺힌 얼음 고드름이 얼마나 뾰족해지는 지를 안다.
그것은 결국 자기 가슴팍을 찌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찌를 수 있다.
고상하고 우아한 엄마의 옷은 애당초 걸치지 않았다.
천만 다행히도, 그런 교육법은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어떤 친구들을 만나도 그 친구들 험담을 하지 않았다. 헤어진 아빠를 욕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저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명절 땐 가기 싫다는 아들의 등짝을 밀어 본가에 보냈다.
뿌리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로 크게 할 수 없었다.
아홉 살짜리 아이를 혼자 열차에 태워 대구까지 가게 하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미가 아니라
계모라 하더란다. 이듬해엔 혼자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어머니께 전화 드렸더니
“니가 정신이 있나 없나!” 하시더니 그만 아득하니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강한 남자로 키우고 싶었다.
너무 강하게 키웠나.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혼자 살 수 있으니 방을 얻어 달라고 해서
빤히 쳐다보자 실실 웃는 아들 녀석. 능글맞은 어떤 사내자식이 그 곳에 서 있었다.
그 능글맞던 아들이 내 손을 꼭 잡고, 내 눈을 맞추며 이곳에 함께 있다.
이제, 조금 가슴을 쓸어내려도 되려나... 모르겠다.
자식의 키가 커질 때마다 지나간 사연은
저절로 덮어진다는데 자꾸만 옛 일이 생각난다.
울 엄마 살아계실 적에 늘 그랬다.
자식을 여섯이나 두니 남의 자식 흠잡을 수 없고,
내 자식 자랑도 쉽게 할 수 없다고.
그만큼 조심스럽고 마음 놓을 수 없는 자식이라는
존재를 내놓고 흔들어 자랑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조종사가 되길 바란다는 내 말에 아이는
멀뚱히 날 바라보았다. 갑자기 천정을 뚫고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서 벌벌 기어 나오는
외계인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으로.
공군사관학교를 가면 좋겠다고 하자 이번엔
그 외계인이 벽을 기어 올라타고 지붕을 향해
기어가는 광경을 보고 있는 아이처럼
두 눈동자를 상하 좌우로 굴리더니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소릴 바락 질렀다
“미쳤어 엄마? 왜 내 청춘을 그런 군대에서 보내라는 거야? 말이 돼?
고등학교도 감옥 같은데 군대라니.” 그랬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 쥐어박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그 청춘을 어디에서 보내고 싶은데? 군대에서 보내면 청춘이 노랗게 변한대?”
말싸움을 하면 당해내지 못하는 어미의 언변을 아는지라 싹뚝 잘라 버린다.
“안 가! 아니 못 가! 무조건, 죽어도!”죽어도 못 간다는 공사는 원서도 못 내보고,
그나마 자유롭게 비행 자격증을 딸 수 있는 항공 운항과로 입학하기까지 물론 많은 곡절이 있었다.
일반 대학교 진학이 가능한 아이였지만 어미의 선택을 따라주었다.
대신 아들은 느긋해졌고, 나는 조바심 나고 불안했다.
그런데 2학년이 된 어느 날 F16전투기와 그전투기를 모는 빨간 마후라를 만나고 온 뒤에
아이는 전화기를 통해 또 다시 소릴 질렀다.
“엄마! 쩔어, 완전 쩔어!! 으아아아~ 나는 죽어도 전투기 안에서 죽을 거야!!”
그때 알았다. 쩔어 라는 말이 극 감동을 받았을 때 내지르는 아이들 은어라는 걸.
지금은 오히려 어미의 걱정을 안심시키는 아이.저는 백 프로 만족한다는데.... 모르겠다. 잘한 짓인지.
물가에 흔들리는 갈대밭이 나타난다.
어쩌면, 단풍보다 훨씬 더 가을을 흠모하는
바람의 숭배자 갈대.
바닷가 바람이 우리를 따라 그 곳으로 몰려왔는가.
작고 가녀린 그들의 군락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내가 감탄하자 내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차를 멈추고,
손을 맞잡고 갈대밭을 거닌다.
확실한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어떠한 포즈도 망설이지 않고 응해주는 아들.
행복했다.
별난 어미를 만나 별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아들과 나는,
별나지 않은 가정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결손가정’이라는 말이다.
TV에서, 학교에서, 신문에서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
머리에서 어떻게 저런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는지 분노했다.
세상에 결손가정 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반대되는 가정은 충만가정, 아니면 완벽가정이라 부르는가.
완벽한 가정의 정의가 무엇이며 과연 있기나 한가.어떻게 줄줄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결손가정에서 자란 탓을 하는가. 어미가 없이 아비가 없이 혹은 두 부모가 없이
살아가야 하는 그 많은 아이들의 가슴에다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느끼게 하는
그런 막말을 돌멩이 던지듯 마구 내던지는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이 가슴에 멍이 들까봐 내 가슴에 멍이 들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위인전을 뒤졌다. 세상을 움직였던 위대한 위인들의 가족력과 가정환경을
파헤쳤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렵고 불우한 환경을 이겨냈기에
세상을 바라 볼 줄 아는 의지와 신념을 키웠다. 다른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 폭을 넓혀갔다.
“어느 대통령도 이혼했대. 어느 앵커는 사생아였고, 지금 뜨는 그 가수는 엄마 없이 자랐다더라.
다 저하기 나름이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얄팍한 변명이었지만,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인식할 까봐 두려웠다.
아들이 잊을만하면 주문처럼 툭 던지는 말.
‘결손가정을 만든 어미가 손가락질 당하지 않게 해라. 그것만 가슴에 새기고 행동해라.’
그런 말은 어쩌다 하고 ‘사랑해’ 소리는 줄기차게 해댔다.
모자 가정의 나름대로 교육법이지만, 지나고나니 약효가 훌륭하지 않았나 싶다.
언제부터인가, 결손가정이라는 그 몹쓸 말이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귀중한 자원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더디지만 반드시 사라져야 할 편견들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아들은 어미에게 자식이자, 보호자이며, 연인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그 역할을 해내느라 나보다 힘들었을 자식과 사진을 찍는데 삐죽삐죽 눈물이 차올라 더 많이 웃고
떠들며 히히거렸다. 거친 환경에서 너무나 잘 자라준 아들이 오늘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을 꼽으라면 아마도 아들과 함께한 이 가을 데이트를 꼽으리라.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샘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타고 날 때부터 큰물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소량이지만 웬만해선
더럽혀지지 않는 맑은 물이 늘 샘솟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큰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물을 바다로 향하게 하기 위해선 도랑을 지나고 강물을 지나야한다.
가는 도중 흙탕물을 만날 수 있고 잔인한 가뭄에 말라 비틀어져 결국 소멸될 수도 있다.
도랑으로 인도해주고 강물까지 흘러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바다를 만나지 않고 고래를 뛰놀게 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울 어미는 타고날 때부터 큰물을 품고 있었던 거 같다.
맑고 시원한 물을 담고 있는 옹달샘을 품고 태어난 사람을 만나 도랑의 바위틈을 지나
강물에서 섞여 바다로 인도하려고 했지만 여섯 마리의 작은 물고기를 키우는 것으로 역할을 마쳤다.
하지만 상처하나 입히지 않고 그 물고기를 강물까지 인도한 것은 어미의 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느 누구보다 넓고 풍부한 어미의 큰물 안에서 헤엄쳤건만 나라는 자식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좁은 도랑가를 찾아 거꾸로 흘러갔다. 자식이라는 물고기를 어떻게 해야 바다로 인도해야
하는지 고민할 나이가 되었을 때야 울 어미의 큰물을 벗어난 내 좁은 도랑물을 발견하고 한탄했지만,
이미 시간은 너무나 많이 흐른 뒤였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한 마리 초록 물고기라도 바다로 내보내는 것. 그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이다.
울 어미처럼 강물까지만 이라도 내 아이를 인도하고 싶은 바램이 글쎄, 어찌될지 그것도 모르겠다.
나는 예쁜 딸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일류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가진 사람들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넥타이를 만들어 아빠에게 선물할 줄 아는
딸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엄마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줄 줄 아는
아들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하지만 그들은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이 안주 할 곳은 부모 곁이 아니라 또 다른 행성이다.
그저, 무사 착륙을 빌어 주는 것 외에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쉽지 않은 것이 자식 자랑이라는데,
23년을 키워준 결과로 얻은 것이
가족사진 한 장뿐이라 해도
오늘 자식과의 가을 데이트를 좀 자랑하고 싶었다.
갈대밭에서의 사진 찍기를 마지막으로
아들의 생일날에 저녁이 찾아 올 시간이 되었다.
헤어짐의 포옹은 조금 길게 한다.
선심 쓰듯이 입술에다 가벼운 입맞춤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아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저 아이는 전화도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 조금씩 무심해지기. 성인이 된 자식이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돌아오는 서해안 고속도로.
저무는 햇살에 더욱 붉게 부풀어 사람들 시선을 잡아끄는 나무들의 가을 행진을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저 나무들은 지난날의 푸르렀던 녹음에 미련을 두지 않겠지. 푸르면 푸른 대로,
붉으면 붉은 대로 거들먹거리지 않으며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겠지.
아낌없이 주어야 다시 새 순을 잉태하는 저 나무들.
한 번도 자신의 역할에 불만을 품지 않는 저 나무들.
부모가 되고 나서야 드디어 알아지는 자식일 적 자신의 모습.
그럼에도 못 채워진 자신의 그늘을 혹시 자식에게 강요하지는 않는가.
나는 못 받았던 혜택을 자식에게 모두 다 베풀어준 양 의기양양하면서.
그런 부모들 얼굴 중에 내 얼굴도 끼어 있지 않은가, 되돌아보게 하는 저 나무들.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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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서도 숨죽여 읽었어요.풍기를 아니 한국을 대표하는 좋은 글 쓰는 사람 되세요 경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