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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첫째 날(9월 3일)
(28)
대우조선 없으면 옥포, 능포도 없다?
9월 3일 새벽같이 능포(菱浦) 방파제로 갔다.
간밤에 장미공원에서 내려다 본 능포바닷가, 보이는 것은 불빛이 전부였지만 그 인력이
먼동 트기 기다리느라 지루했다는 듯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아침 6시반인데 출근버스에 오르는 DSME(Daewoo Shipbuilding & Marine Engineer
ing co., Ltd./大宇造船海洋) 유니폼(uniform)의 남녀들이 장사진이다.
산 자락에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같은 유니폼이다.
모두 DSME(대우조선해양) 아파트다.
대우조선 없는 능포는 어떤 모습일까.
대우조선 없으면 능포도 없다?
하늘로 솟구치려는 듯 힘찬 모습의 돌고래 2마리(조형물)가 반기는 능포항.
바닷가에 늪이 있다 해서 마을이름이'능개'였는데 늪에 마름(菱)이 자생한다 하여'능포'
로 개명했다는 마을, 국가어항의 아침도 여느 어항과 다르지 않다.
밤새워 작업했거나 새벽에 출항한 어선의 귀환에 대비한 어민들의 발빠른 움직임.
어촌의 하루 인심을 좌우할 아침의 모습이다.
능포항에서 해안 따라 장승포항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은 장승포동이지만 거제시는 1989년에 장승포시로 시작했다.
1995년,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에 따라 장승포시와 거제군(巨濟郡)을 통합해 거제시
(巨濟市)가 되기 전에는.
그러나 능포에서 장승포로 가는 해안로는 없다.
출근길의 대우조선 직원이 알려준 장승포 해안로는 내 바람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거제시가 말하는 해안로인데 이름일 뿐 해안을 따라 난 길이 아니다.
장승포항은 간밤에 헤맨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다.
긴 방파제 안팎, 양지암 해안에는 밤을 새웠는지 새벽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강태공들이 요지부동이다.
그들중 상당수는 낚시용품과 세간을 실은 캠핑카(camping car)에 다름아닌 차를 몰고
한반도의 해변 낚싯터를 누비고 다닌다는 나이 지긋한 낚시족이다.
놀라운 것은 여자 강태공도 있는데 병원치료비보다 적은 비용으로 낚시를 통한 치료는
물론 관광도 하므로 이 이상의 경제효과가 없다는 그들의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의사 K박사는 낚시의 정신건강을 높이 평가했다.
질병의 상당 부분은 정신치료(psychotherapy)가 병원치료를 능가하며 낚시는 중요한
치료법 중 하나라니까.
차의 실내를 들여다 보고 사진을 찍으려다가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뻔 했는데 잘 풀려서
그들의 이야기도 경청하게 된 것.
새벽에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고 간밤에 걸었던 길을 역으로 걷는 아침.
두모동 입구로 나와 14번도로(거제대로)를 따라서 옥포로 갔다.
능포와 옥포 사이 옥포만은 전체가 대우조선이다.
거리의 젊은 남녀의 복장은 모두 대우조선 유니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000여명 종업원이 14조원의 매출을 목표(2013년)로 하고 있다는 조선회사.
대우조선 종사자가 빠져나가면 옥포만 일대는 공동(空洞)상태가 되고 말겠다.
거제도의 동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두 조선소(대우, 삼성)의 종업원이 43.000여명이며
연간 매출액이 28조원이란다.
미성년자와 노령자, 외국인을 포함하여 총 인구가 25만여명인 거제시에서 조선업계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비중 만큼 이 지역의 삶의 질도 높을까.
옥포대첩만은 연합함대의 승리다
거제소방서에서 식수를 얻은 후 옥포 다운타운을 관통해 언덕배기 옥포공원 2층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옥포동과 아주동, 옥포만 저편의 능포동과 장승포동 등 대형 해안도시를 방불케 한다.
지금은 골리앗 크레인을 비롯해 온갖 중장비와 선박들로 몹시 어지러운 옥포만.
저 바다가 420년전 임진년(1592) 5월 7일(음), 적선 26척을 격침시킴으로서 파죽지세로
몰려왔던 적의 예봉을 꺾은, 임진왜란 해전사상 첫 승전인 옥포대첩의 현장이렸다.
옥포대첩로(덕포, 김영삼 전대통령 생가길)를 따라 옥포대첩기념공원을 향했다.
기념공원은 도로에서 분기한 막다른 길 2km쯤의 해안에 있다.
'승전길'이라는 이름의 이 길은 아마도 공원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성되었을 것이다.
막다른 길임에도, 인색하게도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안내가 없다.
차량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도보자들이 막다른 길이라 해서 찾아기지 않을까
저어되었기 때문일까.
그보다, 길 내는데 이골이 난 나라에서 대첩공원과 덕포해수욕장을 잇는 순환도로를 왜
만들지 않을까.
덕포 피서객들의 산책코스가 될 것이며 연계해서 개발할 수도 있을 텐데.
차로가 어렵다면 가장 손쉽고 전국에 지천인 방부목 데크도 있는데.
하긴, 이 나라 위정자들에게 보행자가 안중에 있기나 한가.
조금 전에 옥포대첩기념공원 안내판을 읽고 왔다.
"왜선50여척중 26척을 격침시킴으로서 적의 사기를 꺾고 이후의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이 상단의 내용과 달리, 다른 주제인 하단에서는 "적선 전부를 격침시켰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여기 대첩기념공원에서는 "50여척 중 30척이 격파되었다"고 알리고 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옆에 서있는 영문판에는 적선 50여척중 26척 이상을 파괴했다
(destroyed more than 26 out of over 50 enemy ships)고 적혀있다.
파괴와 격파, 격침의 뜻이 다름은 논외로 하더라도 숫자가 왜 제각각인가.
50여척 전부를 격침, 30척을 격파, 26척 이상을 파괴 또는 26척 격침 어느 쪽이라 해도
임진왜란에서 육해전을 통틀어 첫 승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신뢰를 좌우하는데 숫자 이상 정확한 것이 없건만 왜 이처럼 제멋대로 일까.
귀가 후, 충무공의 말을 직접 들어보려고 했으나 난중일기에는 아쉽게도 그 무렵인 5월
5일~28일의 기록이 없다.
다른 옛 기록들에도 옥포해전 적선의 총수가 50여척과 30척으로 각각이지만 충무공의
승첩장계(玉浦破倭兵狀)에는 50여척중 26척을 부쉈다고 했다.
옥포대첩기념공원도 이사수(移徙數)가 있는가.
최초의 건립은 1957년에 했으나 이사를 거듭하여 3번째 장소인 현 위치에 안정되기는
1996년 6월이었다니까.
임진전란 중 18개 주요해전에서 아군은 17승 1패했다.
1패는 원균의 칠천량해전(漆川梁/정유7월14일~16일)이며 이순신은 17전 전승이다.
(23전 23승, 43전 38승 5무 등의 주장도 있지만 주요전투는 18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불세출의 영웅이다.
옥포해전 역시 이 충무공이 없없다면 대첩을 감히 꿈꿀 수 있는 일인가.
그러나 옥포해전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외에도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와 경상의 무수한 수장들이 합세한 연합함대가 치뤘다.
비록 91척 중 85척이 전라좌수군의 선박이라 하나 경상우수영 영내에서 벌어진 전투다.
그렇다면 옥포대첩을 기리는 자세에는 문제가 있다.
치우쳤다는 말이다.
다른 모든 승리와 달리 옥포대첩만은 연합함대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승첩 장계(狀啓)건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형식상이나마 연합함대의 승전이므로 원균이 원한 연명장계도 일리가 있는데 이순신이
완곡하게 거부한 후 단독장계를 올림으로서 두 장수 간의 골이 깊어가게 되었다잖은가.
고장난명이라는데 문제가 많은 원균이지만 이순신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다시 꼼꼼히 읽으며 해본 생각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을 이순신 장군을 통해 실감하며 평상시라면 꽤 정갈하거나
까다로운 분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라고.
장군이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러 합천 초계의 도원수부로 가는 중에 산청 단성면 한
마을(現남사예담촌/통영별로 걸을 때 들른 곳)의 어느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6월 초1일 경신 비가 많이 내리다............저물어 진주경계인 단성땅 박호원 농노 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이 반가이 맞기는 했으나 잘 방이 마땅치 않아 고생스럽게 밤을 보내다.
六月初一日庚申 雨雨....暮投丹城境地 晉州地境朴好元農奴家 主人欣然接之 而宿房不好
艱難過夜> (亂中日記 丁酉日記中)
농노도 사람이고, 농가도 사람 사는 집인데 아무렴 감옥보다 더할까.
모진 옥살이를 하고난 직후인데도 이 집이 얼마나 지저분했기에 "힘들고 고생스럽게 밤
을 보내다" 라고 적었으니 말이다.
솔직한 것은 좋지만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은?
더구나 그 농노는 송월당 박호원(松月堂朴好元)의 하인이다.
박호원은 임꺽정 토포사의 종사관으로 토적에 공을 세웠고 승지,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좌참찬을 지냈고 훗날 종1품 좌찬성에 증직된 분이다.
5세때 모친을 여읜 그는 사모(思母)의 정이 남달라 모친 묘가 있는 이 곳에 전답을 약간
매입해 농막을 짓고 하인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충무공이 바로 그 농막에서 1박한 것.
충무공은 호불호의 사람 구분을 숨기지 못한 분인 것 같다.
난중일기에 열거되는 인명에 고하를 막론하고 간단하게나마 직함 적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마뜩치 않은 사람은 대개 이름만 기록하지 않았나 싶다.
송월당 박호원도 그 중 하나였는지 이름 석자만 적었다.
이미 고인이며(선조17년/1584사망) 18세나 연상이지만 자기 시대에 정2품에 오른 분을
모를 리 없으며 자기가 1박한 집 농부가 박호원 대감의 농노임을 알았으면서도.
난중일기를 번역한 한 저명 문인이 '朴好元農奴家' 를 "박호원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
이라고 실수를 했다.
좌참찬이 농사짓는 종으로 추락한 어처구니없는 이 실수의 빌미 제공자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호원의 이름 앞 또는 뒤에 직함 하나만 적어놓았더라면 그같은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
지지 않았을 테니까.
큰 산이 무너졌다 : 태어난 것을 원망한 대통령
대첩공원을 돌아나올 때는 화가 났다.
걷는 것이 페이버릿(favorite)인데 걷기 싫어서 라면 말이 되는가.
순환로가 조성되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지만 곧 해결사가 등장했다.
우리 카페에서 재회하게 된 초현우(장호주)님이다.
도로공사 중인 옥포대첩로, 덕포천을 건넌 후 주유소 SK에너지를 지날 때 그의 융숭한
대접과 장도의 안녕을 비는 격려가 늙은 나그네의 기분을 새롭게 한 것.
덕포동(德浦) 하덕마을 정자나무 아래에 세워진 색다른 기념비에 잠시 발길이 멎었다.
1954년 초까지 전기문명권에서 제외되었던 마을.
"내고장출신 독지가들의 애향정성과 전동민의 굳게 뭉쳐진 새마을정신으로 숙원이었던
전기불이 이 마을에 밝혀진 날을 영원히 기념키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전기불이 켜진 1954년 4월 ?일을 이 마을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새마을정신은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창작용어가 아니고 거제 하덕에는 그 10여년 전에
이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가.
내가 태어난 마을도 1945년 이전에는 전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광복 직후,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일에 앞장선 이는 내 아버지였다.
비용도 문제지만 물자가 귀한 시기라 돈이 있어도 4km가 넘는 거리에 세울 전주와 전선,
제반 자재 확보가 난제였는데 이를 해결했고 내 집은 종사자들의 식당과 숙소가 되었고,
마침내 내 집에 최초로 전기불이 켜지게 되었다.
온 마을민이 내 집 앞마당에 가득 찼고 축제분위기였는데 장죽을 문 촌로는 백열전구에
긴 담뱃대를 대고 빨면서 불이 붙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근 70년년 전의 일이지만 늘 생생한데 이 기념비가 나로 하여금 그 때를 반추하게 했다.
60년전, 전기가 하덕마을 변혁의 주인공이었다면 2010년대에 들어서는 짚라인(Jipline)
이라는 신종 레포츠가 온 마을을 들뜨게 하고 있나 보다.
열대우림의 울창한 밀림 사이를 이동할 때 뱀,벌레와 독극식물들을 피하기 위해 큰 나무
사이에 로프를 걸어놓고 이 로프를 타고 옮겨가던 교통수단에서 비롯되었다는 레포츠다.
우리나라에서는 문경과 주문진에 이어 덕포가 3번째라는 짚라인.
'아라나비'라는 이름의 짚라인이 많은 사람을 덕포해수욕장으로 모이게 할 것이라고.
바다 위를 나비처럼 날은다는 뜻으로 '바다'라는 순우리말 '아라'와 나비의 합성어란다.
아라나비 발상도 거가대교 효과일 테지만 국제펭귄수영축제와 더불어 덕포해수욕장의
양대 명물은 과연 그늘 없는 양지일까.
거대한 APL(American President Lines Ltd)선박이 덕포해수욕장 앞까지 다가왔다.
따라붙은 배도 따로 있으면 꽤 크게 보이련만 코끼리등의 파리처럼 보일 정도다.
컨테이너선인 듯 한데 치료받으러 왔는가 어머니 품에 안기러 왔나.
저 정도의 선박을 만들어 바다에 띄운다니까.
심장 뛰는 소리에 산과 바다가 흔들리고 무료한 듯 하품하는데도 포효로 들리는 괴물의
접근이 가능하다면 덕포해수욕장 앞바다의 수심이 엄청 깊음을 의미한다.
내가 걸을 해변길이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곧 장목면(長木)이다.
차도를 따르지 않으려면 바다 위를 걷거나 헤엄쳐야 하는데 나는 예수가 아니고 맥주병
이기 때문에 위험해도 차도를 걸을 수 밖에 없다.
아스팔트길을 따라가다 장목면 외포리(外浦)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의 생가를 만났다.
거제시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려고 중건했다며 새로 지은 기록전시관도 함께 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으나 출생이 원망스럽다(IMF 직후)는 분이 태어난
집을 왜 방문하는가.
길손의 고민은 월요일이 해결해 주었다.(월요일 휴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에 시종일관 반대투쟁을 하며 "닭의 목을 비틍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그들(군사독재그룹)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건만 마칠 때는 IMF라는 큰 선물(?)을 남기고 한 말이
"출생한 것을 원망한다"(태어나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IMF도
불러오지 않았을 것이니까)고 했다.
큰 산(巨山/그의 호)이 무너진 불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오래 기억될 만한 전직 대통령이다.
IMF구제금융의 치욕에 묻혀버렸지만 그가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을 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던 그는 빌릴 머리조차 없다고 비판받았지만 머리가 아니고 단호한
결단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군부뿐 아니라 정치권력 까지 좌지우지한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를 비롯하여 정치군인
집단을 척결하고 소속 당내의 군사정권 세력까지 정리한 것.
그가 정치군인 세력을 숙청, 제거하지 못했다면 김대중 정권의 등장이 가능했겠는가.
그랬다면, IMF구제금융 문제는?
햇볕이 세면 그늘도 짙다
옥포대첩로를 따라 외포천(외포교)을 건넌 후 서목(庶木), 시방(矢方) 마을을 지났다.
복항(洑項), 대금(大錦) 마을도 지나 거가대로(?/58번도로?) 밑을 통과했다.
(김영삼 생가 이후의 거제도 사진이 단 1장도 없어 헷갈린다. 디카가 왜 그럴까)
장목면소재지에 도착해 맨 먼저 간 곳은 식당.
옥포의 빵1개와 옥포대첩기념공원의 200ml 우유1팩이 전부니까 시장할만도 했다.
그러나 식당마다 손님 거절이다.
시에스타(siesta/낮잠시간)가 없는 나라에서 점심시간이 좀 지났다 해서 이럴 수가.
늙은 길손을 맞아준 곳은 몸집이 후한 노파의 영양탕집.
삼천포에서 입은 상처들 중 얼굴은 아물었으나 손가락 마디들이 장기전을 펼 기세다.
들른 장목면의 의원은 의학박사가 원장이다.
박사라 그런지 거치는 과정은 복잡하나 이제까지의 드레싱 중 최하위다.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손으로 하기 때문인데 손재주가 없는 박사인가.
하긴, 박사 학위를 지식으로 땄지 손으로 땄겠나.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거제도의 새 관문이 되었다고 붕 떠있던 장목면.
지금도 애드벌룬(ad balloon)을 타고 있는 기분일까.
관문을 통과하는 바람은 훈풍만일까.
과연 축배를 들 일만 불러들일까.
거가대교 효과가 지대하다지만 독(毒)도 이미 통영까지 번져갔다.
섬의 식자들은 연육교의 건설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햇볕이 세면 그늘도 짙다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히치하이크를 위해 관포(冠浦) 교차로로 갔다.
부산으로 가는 거가대로에서 히치하이크 하기 가장 좋은 지점이다.
거가대로는 고속도로와 다름 없는 자동차전용도로인데다 다리와 터널들은 구조적으로
치량 외의 통과를 허용치 않으며 애매한 도중에서는 버스 이용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라산 등반 후 귀로에 부산 녹산공단 입구에서 히치하이크 하여 가덕대교와 해저터널,
거가대로를 통해 거제에 갔다가 돌아올 때 자세히 살펴보고 내렸던 결론이다.
거가대로의 진입 서행지점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아 거가대로 관리 SUV차에 편승했다.
도중에 가끔 정지했지만 곧 가덕도 회귀지점(거제시 차량이기 때문에)에 도착함으로서
부산땅에 입성했다.
가덕도(加德島) 섬길을 한참 걸어 부산행(강서?) 시내버스편으로 녹산공단 어느 지점에
내린 후(사진이 없어져서 지점들을 알 수 없다) 낙동강 하굿둑으로 갔다.
이 길이 부산 갈맷길 5코스 1구간이란다.
하굿둑에서 낙동강과 둑 위의 차로 허리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서 을숙도대교로 가는
길은 갈맷길 4코스.
이대로 가면 낙동정맥의 끝 몰운대에 당도하게 된단다.
온천장 아지트(게르만호프)의 약속과 좀 전의 부산산사람(진상귀)님과의 통화(약속)가
없었다면 아마 계속해서 걸었을 것이다.
시원한 강바람을 벗하여 불밝힌 밤길을 걸으면 피곤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나 계속 오는 산사람님의 전화에 을숙도대교를 조금 지난 지점에서 멈춰야 했다.
금남호남정맥 종주중 상봉했는데(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177번글 참조) 등산열정이
노익장이며 표현보다 내면의 정이 많은 분이다.
반갑게 재회한 그는 전에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한사코 봉투를 쥐어주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리 정이라 해도 결코 받지 않겠지만 이 때까지는 용도가 따로 있으므로
(지원하는 성주의 예원공동체) 고맙게 받아 이번에도 전번처럼 그의 이름으로 보냈다.
온천장에서도 기다리기 지쳐가는가 번갈아 전화가 왔다.
1월의 연1회 모임인데(1월 제3주 한라산 등산의 뒤풀이) 이번에는 특별한 회동이다.
다대포 몰운대에 안착함으로서 낙동정맥 종주를 마친 날 밤, 200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된 인연이 어느 새 10년의 연륜을 쌓았다.(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78번글 참조)
귀로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시는 것과 달리 장거리 바닷길 나그네임을 까마득히 잊고
늘 하던 대로 자정이 넘은 것도 개의되지 않았다.
여전히 내 새로운 길 이야기는 그들에게 최고의 안주가 되어. <계 속>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어느 쪽이 올바른 우리 말일까.
모두 다 맞다.
외국인들이 우리 말이 어렵다고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