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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5km 가량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의 안내석
최경환, 최양업 신부 생가쪽에서 바라본 다락골 (뒷쪽 산 밑 길이 보이는 마을이다)
다락골, 성지 성당과 새 성당 공사현장이 보인다.
다락골은 전국 최다 순교자 묘와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이곳을 속칭 다래골이라 하는 데, 교회사에는 옛지명인 홍주 다릿골로 나오며, 현재의 행정상 지명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해발 791m의 오서산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지형이 다락 같이 생겼다 하여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해서 다래골로도 불렸다 한다.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도 한다. (글- http://www.paxkorea.co.kr)
성지에서 찍은 현재의 다락골 마을
다락골은 한 때 열심한 교우촌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된다. 신해박해를 피해 교우인 이씨 부인이 12세의 아들 최인주 (성 최경환의 부친)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침선과 예번에 능통하였고 또한 경주 최씨 집안인지라 경주 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열심한 신앙 생활로 많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박해 시절 천주교 교우촌임이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은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도 마을이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 고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무명 순교자 묘지와 최양업,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성지 성당
성당과 사제관
주차장과 부속건물
성지교육원 (성당) 건립 현수막
성당 종탑과 부속건물
성지 성당
성지 성당
성당 입구
성당 입구
성당 입구
성당 입구
입구 성모상
성당내부 제대
십자고상
최경환 신부 유해
최경환 신부 유해
최경환 프란체스코 유해
성당 내부 십자가 14처
1-2처
3-4처
5-6처
7-8처
9-10처
11-13처
13-14처
성당 내부 후면
창문
창문 조각상
사제관 입구
사제관 입구
무명순교사 상
줄무덤 오르는 길 입구 순교자상, "구석에 혼자 남아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 서한 중에서)
순교자상
순교자상
순교자상
두번째 순교자상
순교자상
순교자상
순교자상, 치명에 의한 고결한 순교정신을 상징한다.
줄무덤에 오르는 십자가의 길 14처 항아리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줄무덤에 오르는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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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넘어서 제1,2 줄무덤이 있다
줄무덤 야외미사 장소
줄무덤 야외 제대
줄무덤 야외 제대
줄무덤 안내판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가니까 어린애가 울며 보채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단다"라고 달래어 데리고 가서 홍주 감영에서 치명당했으며 외인 친척들이 야음을 틈타 시신을 몰래 훔쳐 50여 리 길을 산길로 업어다가 이 마을 뒷산에 황급히 일가족씩 묻어 줬다 한다. 마을 노인들의 구전 내용이다.
제1 줄무덤
줄무덤의 총수는 37기 이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 1 줄무덤, 뒷편과 주변에는 경주 최씨 종산의 묘들이 있다.
오기선(요셉) 신부는 회고록 " 곡예사 같은 인생" 에서 줄무덤에 대해 두 가지로 증언한다. 하나는 1952년 당시청양 사람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했던 최영천 노인 등을 만나 직접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 오기선 신부 직접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또 하나는 1920년대에 공주에 살던 손 아오스딩 노인이 "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 " 하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약 250여 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 신부에게 직접 증언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청양 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었다.
제 1 줄무덤
제 1 줄무덤
줄무덤 무명 순교자 묘비
제1,2,3 줄무덤에 묻혀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줄무덤 제대
제 2 줄무덤, 제 1줄무덤 바로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줄무덤이 있다.
제 2 줄무덤
제 2 줄무덤
제 2 줄무덤
제 2 줄무덤
제1,2,3 줄무덤 안내판
제 3 줄무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제 3 줄무덤
제 3 줄무덤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입구
성 최경환의 생가터는 다락골 줄무덤으로 들어가는 길 조금 못 미쳐에 있다. 다락골의 입구인 이곳을 ‘샛터’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 신부님께서 1821년에 태어나신 곳이다. 또한 이곳은 1805년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하다.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는 최인주인데, 12살 때 서울에서 어머니 경주 이(李)씨를 모시고 1791년 진산사태로 시작된 신해박해를 피해 이곳 ‘샛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곳에서 700m 쯤 떨어진 다락골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생가터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 주었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글- http://www.paxkorea.co.kr)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입구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하여 최양업 신부님을 낳았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과 집안인 어머니를 둔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진외 6촌간이 된다. 최경환 성인이 장가를 들고 사흘만에 재행을 가니 처가 동네 교우 여인들이 몰려와 “구교집 서방이니 교리를 듣자.”며 신랑을 달아 먹으려 했을 때 사실 교리에 대하여 밝지 못한 최경환 성인은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칠극(七克)이라는 책, 즉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죄악이 되는 일곱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가지 덕행을 다룬 수덕서를 며칠 밤을 새워 다 외우고 나니 교리에 밝아져 강론을 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미신이 성행하여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가족과 상의하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안양 수리산 성지 성 최경환 생가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에 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로 풀려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입구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 (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 최양업(토마스, 1821-1861)신부
우리나라 제 2대 방인 사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다락골 출생,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 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의 두번째 신부가 되었다.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며 사목활동 12년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 하였다. 19통의 라틴어 서한 " 한국 순교자전" 을 번역 교황청에 올려 가경자가 되게 했고, " 성교요리 문답 " , " 천주성교공과 " 등 교리 문답서나 기도서를 간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초대 성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 정신, 2대 최 신부에게서는 땀의 순교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입구 마을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경당 입구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경당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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