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西岳)에 안긴 “관왕묘”

- 당시 안동시장의 현몽에 의한 관우의 형상 "무안왕상" -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명장 “관우”(關羽)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격인 묘우로써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 신앙이 대대적으로 전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도입된 배경에는 임란 때 참전한 명나라 군사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생활 습관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과의 절묘한 만남으로 관왕묘가 건립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
선조31년(1598) 한양의 남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된 것을 필두로 같은 시기에 성주, 강진, 안동, 남원 등지에도 건립 되었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강화에는 더 많이 건립 되었으며, 이곳 안동의 관왕묘는 1598년 안동에 주둔 하였든 명나라 진정영도사인 쉬후첸(설호신;薛虎臣)이 목성산(현 목성동)기슭에 창건 하였단다 .
그 곳은 안동부성 서쪽 향교 맞은편에 있는지라 향인들은 문묘와 마주보고 있는 것을 꺼려서 선조39년(1609)에 서악의 동대인 현 위치로(안동시 태화동) 이건하였고 1904년에 해체 복원하였으며 묘(廟)라 하는 것은 장수의 사당 등에 붙여진 명칭으로 안동에는 고려 개국과 관련하여 3태사묘 가(안동 장, 안동 김,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됨) 시내에 있다(안동 의료원 앞부분에)

- 관왕묘 전경 -
(양 협칸은 문이나 중앙 어칸은 창이다 , 왜...어칸 하부에는 창에만 적용하는 머름이 있다)
옮겨지는 과정에서인지 모르나 공간 배치형식의 특이성은 발견할 수가 없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당건축의 형식으로 지형의 위쪽에는 묘(참배공간)가 있고 입구에는 솟을삼문으로 “무안왕묘”란 현판을 달고 있다 .
아래에는 낮은 지형에 맞추어서 비대칭의 좌우 익체(동서재 또는 동서무)를 배치하고 그 밑에는 후대에 추가한 누각이 정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입구에는 어느곳에서 옮긴 것인지는 모르나 인왕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서 양쪽에다 입석형태로 마주보게 세워져있다 .
평면의 형식으로는 정면3칸에 측면3칸으로 구성 하였으며 체목은 빈약한 것으로 보이나 안전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이 있는 벽체는 당시 중국 건축의 특칭중의 하나인 조적식 벽체면으로 벽돌이 아니라 구하기 쉬운 막돌로 서.북.동 3면에 쌓았다는 것은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
무엇보다도 눈에 뛰는 것은 중앙 어칸으로 출입문이 아니라 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장군과 직접적인 첫 대면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 권력자의 위상을 느낄 수가 있었다 , 조건 없이 협간 출입 하라는 명령 같아서 유심히 지켜보면서 .......
사당건축의 특성과 같이 겹처마의 맞배집이며 , 건축양식으로 분류할 만큼은 아니나 주심포식으로 건축적 의의보다는 관왕묘가 가지는 용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기둥간의 문 위에는 교창이라고 45˚ 비스듬히 사선으로 창살이 형성되어 있고 창방이라는 가로의 제위에는 연화장식의 화반을 2곳에 설치하였고 후면 협간에는 원형의 화반을 놓았다
천정은 모두 우물천정으로 측면 중앙간에 단을 지어서 높게 하였고 바닥에는 마루 등 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장수와 연관된 자들이(군인) 전투화 차림으로 쉽게 접근하기 위함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지금은 장판지를 깔아 놓았지만

- 내부 동측의 문인상 -
관왕묘에 석상을 봉안한 곳은 이곳뿐인데 당시 안동부사의 현몽에 의해 좌상으로 무안왕상(武安王像)을 조성 봉안 하였고 내부의 벽면에는 삼국지의 장면인 서측에 삼고초려(三顧草廬)도와 동측에 적벽화전(赤壁火戰)도가 묘사되어 있다 ,무안왕상 앞 좌우에는 관운장과 관평 ,주창 등 막료들의 입상(목조)도 봉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묘정(지금은 실 내부)에 있는 이 비석은 1598년 건립된 것으로 당시 명나라 군의 참전관계 기사와 장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단다 .
** 삼국지중 삼고초려와 적벽화전 **
=유비(劉備)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서(徐庶)는 그와 헤어지면서 유비에게 말했다 .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누워있는 龍입니다......!
장군께서 그를 만나 보시럽니까........?
뜻을 굳힌 유비는 꿈적 않고 농사일에만 열중인 제갈량의 초가로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
이윽고 제갈공명은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고 조조(曹操)의 백만대군을 적벽대전에서 격파했다는 이야기........
그 후로는 유비는 제갈공명과의 관계를 수어지교(水魚之交)라 묘사 했다네요 =
(다음에서)
- 글 참고 안내판의 문구 -

- 내부 서측에 무인상 -
현재 이곳을 관리 하시고 도교에 관심이 있으시며 아주 명석해 보이기는 ... 법사 아무게님 과의 시간여 나눈 이야기를 정리 할까 합니다 다소의 과장으로도 보여지는 대목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허무 맹낭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그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
뭐 구름을 없어지게 한다는 둥 남침용 북 잠수함을 기로 눌러서 가라않게 한다는 둥 대권등 소원을 성취고자 한다면 이 곳의 기도가 필요 하다는 둥 .....
“관우”라는 인물은 선녀의 몸에 하늘의 기운이 흘러서 자연적으로 회임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태어난 인물이 바로 관우 라네요 .
관왕묘가 들어오게 된 것은 앞에서 애기 한 것처럼 임진왜란 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디다 , 국운에 먹구름은 끼이고 그 해결책의 시기를 우리 스스로 놓친 마당에 당장의 대안은 하는 수 없이 중국(명)에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는 체면이고 위신이고 간에 마침 향리인 유성룡 선생께서 사신으로 명에 가게 되었답니다 .
핵심적인 이유는 원병요청 때문에 명의 장수 이여송과 날씨며 안부며 정치 상황등 이런 저런 애기를 하고 본론에 도달할 즈음 명의 장수가 뜬금없이 “당신의 나라에서는 우리국 장수 중에서 누구를 흠모하오”하니까 한참을 생각다가 별 의미 없이 “관우장군을 좋아 하지요”화답 하니까
껄껄껄 박작대소 “우리국 에서도 최고로 모시는 장수로써 한집건너 한집이 그 사당이라오”그럼 박수 치기요....
우연치 않게 회담이 깨끗하게 성사되고 “그럼 원병 가지요”
그러고선 돌아오는 길 곳곳에 관우장수의 위폐를 모시도록 하고 고향인 안동에도 위폐를 모시게 된 것이 시발 점 이라네요

- 입구 동측의 인왕상 (남 또는 무인-외부 감독....?)-
그리하여 명나라 군사들이 주둔하게 되고 하루는 안동부사(시장)의 꿈에서 처음 보는 장수가 나타나 나는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데도 잠만 자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한참 뒤에야 일어나 보니까 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더라는 것......
그래서 그 형상을 만들고 집을 지어 주었다네요 물론 치성도 올리고 했겠지요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이번에는 어느 누구에게서 또 현몽하기를 더러워서 못 지내니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하드란다 몇 번에 거처서 이상타 싶어서 사람을 보내어 주변을 살피게 하였더니 사람의 손목과 손가락이(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남긴 것..?) 흩어져 있다는 것 하는 수 없이 좋은 자리를 물색 하다가 안동의 서악(西岳:지금 태화동 서편)호두혈(虎頭穴) 자리로 옮기고 나니 한해 한두번 정도 당하는 호환은 더 이상 없어져 관우장군의 기로 다스렸다고 향리인들의 칭송이 자자 했다네요...
그러다가 일정 때 일인들이 임란 때 원병 온 군사들을 미워한 나머지 그 비석을 마구마구 쪼아 훼손 하였다란 연로하신 어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가 있다네요

- 입구 서측의 인왕상(여 또는 문인-내부감독.....?) -
마지막으로 들려주신 이야기는 최영 장군 모시고 강감찬 장군 모시는 어느 무속인 처럼 이곳에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자녀들의 머리가 촉명하여 진다네요 아들을 낳을수 있데요 관운(시험)에는 아주 좋은 결과가 있다네요
불쑥 앞으로는 미륵신앙이 도래 된다네요 이 관우석상도 미륵의 한 축에 해당이 된다는 듯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생사여탈 능력도 가지고 있다나.......
이 몸이 싸이로 보였나 참나원 , 살다가 보니 별별소리 다 듣고 사는구만 조금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맞장구를 처 주었더니 고만에 넘치니..............
그렇다면 이곳에 와서 기도할 자 누가 없나요 .....................?
저요......! 광고주가 절대로 아님을 천명 합니다 .
님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 기도는 하든 말든 ..................!

+ 출전; 신종기의 월곡의 건축등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