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코보대사는 사찰사냥꾼'이라 하면 불경죄?
10월 10일(陰曆)은 쌍십일(雙十日).
십(十)이 겹친다 해서 쌍십절(雙十節), 쌍십국경(國慶) 또는 쌍십경전(慶典) 등으로 불리
는 중화민국(현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다름)의 건국기념일이다.
1911년 10월 10일에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 주도의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중화민국)을
세운 날이라 해서 중화민국 최대의 국경일이었다.
이와 달리 한국의 쌍십일(양력 10월 10일)은 백두대간 영동삼도봉에서 삼도(三道)화합의
축제가 열리는 날.
한국에 있다면 예외 없이 백두대간 자락인 김천의 해인산장에서 맞을 날의 먼통이 터왔다.
경북의 김천시와 전북의 무주군, 충북 영동군 등 3시군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해발1.075m
영동삼도봉, 이곳에서 펼치는 쌍십일 삼도화합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박하는 집이다.
해당 지역민이 아닌데도, 첫 백두대간 종주 이래 국내에 있다면 빠지지 않고 해마다 참석
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남북의 분단도 절통한 일이거늘 동서까지 분란과 갈등 상태인 것이 한스럽기 때문이다.
남북의 문제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이라 해도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동서의 문제는 웬만한 속죄의 제물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시코쿠
헨로에서 새삼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들의 제일의 원수(敵)가 당(唐)이 아닌 신라인들이었다는 사실
을 확인할 때 모골이 송연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취기가 있으며 깨어나지 못하는 젊은이를 두고 산책 삼아 새벽의 경내를 걸었다.
2곳 사찰이 하나처럼 묶여 있으므로 꽤 넓다.
이미 언급했듯이 한 경내에 88레이조의 두 후다쇼(札所)가 자리한 유일한 곳이다.
동일 시기에, 동일 장소에 들어섰으므로 창건자도 동일 인(法相宗의 高僧 日証上人)일 것
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타이호(大寶) 3년(703), 코토히키산(琴彈山)에서 수행중이던 그(日証)는 거문고를 연주중
인 노인을 태우고 해상에 떠있는 배를 발견했다.
노옹이 하치만다이묘진(八幡大明神)임을 감지한 그는 거문고와 배를 산상에 올려서 코토
히키하치만궁(琴彈八幡宮)을 건립해 모셨다.
교키보살이 요로(養老) 6년(722)에 방문했고 다이도(大同) 2년(807)에는 코보대사가 들러
코토하키하치만궁의 본지불(本地佛)인 아미타여래를 묘사하여 본존으로 모셨다.
뒤따른 것은 사명(寺名)이 싯보잔진네인(七寶山神惠院)으로 바뀌며 68번레이조가 되었고
소속이 그(코보대사)의 진언종으로 변한것.
진자(神社)에는 진구지(神宮寺/明治維新 이전 진자에 부속되었던 사찰)가 필요했다.
그래서, 코토하키하치만궁의 진구지를 옆에 건립함으로서 한 경내에 두 사찰이 있게 되었
으며 건립 당시에는 진구지호코인(神宮寺寶光院)이라 했단다.
이 후다쇼 역시 진네인과 동일한 궤적을 밟아 현재의 이름(七寶山觀音寺)으로 바뀌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코보가 두 레이조를 일시에 M&A(mergers and acuisitions)했다는 것.
경제계에서는 M&A의 명수를 '기업사냥꾼'이라고 하는데 '사찰사냥꾼'이라 하면 불경죄를
범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그를 탁월한 경영자로 본 것 보다 엄청 비하하고 있으니꺼.
일본의 어느 자료는 시코쿠헨로의 88레이조 중에서 교키보살이 창건한 후다쇼가 내 통계
(28개소)와 달리 30개소라 한다.
그 자료를 따르면 교키보살은 시코쿠의 88레이조 중에서 34.%를 창건했는데도 겨우 3곳
레이조 외에는 모두 코보대사의 진언종이 되었다.
그러나, 코보대사는 88개소 중 37개소(42%)를 창건해서 그의 진언종(眞言宗)을 80(90%)
개소로 늘렸으니 싹쓸이에 다름아니잖은가.
마두관세음보살(馬頭観世音菩薩)의 모토야마지(本山寺)
단 한밤에 맛을 톡톡히 느꼈는지 젊은이에게서는 헤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의 침낭을 사용했음에도 어떠한 인사말도 없는 이 매너 부재자와 함께 길을 나선 시각은
이른 아침 6시 18분.
떠날 때 한바퀴 돌아본 건물은 당초에 짐작했던 휴식공간이 아니고 테라카페, 헨로용품점
'고도안'(寺Cafe&遍路goods梧桐庵)이다.
우동과 찻집이며 순례용품을 파는 집.
매주 목요일이 정기휴일인데 바로 어제(10월9일)였으며 영업일이라 해도 영업시간(09.00
~16.00) 밖인 밤이라 지장 없는 장소다.
66번움벤지를 떠나 칸온지시에서 미토요시(67번大興寺)를 거쳐 다시 칸온지시(68번, 69
번)로 갔다가 재차 미토요시(70번本山寺)로 가는 장난스런(?) 길이 계속되는 아침.
같은 야하타초(八幡町)지만 어제 건넜던 상카교(三架橋)의 좌측(북동쪽) 다리(染川橋) 앞
에서 잠시 저울질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리 양편, 사이타강변 길을 따르면 70번후다쇼 앞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는 길(북쪽)은 4.5km.
다리를 건너서 가면(남쪽) 건너는 다리가 다르기는 해도 되건너야 하기 때문에 4.9km가
되는 길 등 두 길 중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였다.
북쪽길은 400m의 단축 효과는 있으나 자칫 헨로미치를 놓칠 위험이 있을 듯 한데 반하여
남쪽길은 강변길을 고수하면 잘못 들 염려가 없는 길이다.
400m는 무시해도 되는 부담이므로 지체 없이 사이타강을 건넜다.
내가 이러는 사이에 뒤따라 오던 젊은이가 앞서 나갔다.
자기 핸드폰 내비의 지시가 내 의도와 같은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의 이같은 행보가 왜 야속하고 괘씸하게 생각되었을까.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인지 다리 통증이 유난히 심해서 뒤쳐질 수 밖에
없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
같은 일본청년이지만 그와는 극과 극인 니시오를 향한 고마운 마음을 새로이 갖게 했다.
양자(兩者) 비교의 결과다.
시게니시초(茂西町) 지역이 오쇼지교(大小路橋)의 남단을 지나면서 시게키초(茂木町)로
바뀌어 보(洑)를 지났다.
차도와 인도를 따로 가설한 2지역의 다리, 이나츠미교(稻積橋)와 카나쿠마교(鹿隈橋)를
거치는 동안에 행정구역은 무라쿠로초(村黑町)와 나가레오카초(流岡町)를 통과했다.
칸온지시에서 미토요시로 넘어가 JR요산선(予讚線)을 반지하(半地下) 상태로 횡단했다.
지극히 짧게 칸온지시로 복귀했다가 사이타강((本山寺橋)을 건너는 중에 환원된 미토요시
의 모토야마지 오중탑((本山寺五重塔/5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코쿠레이조 중에서는 31번(竹林寺), 75번(善通寺), 86번(志度寺)과 여기(本山寺)뿐이라
하므로 70번후다쇼에 접근중임을 의미했다.
곧(아침7시54분), 왼쪽의 70번레이조 모토야마지의 인왕문(仁王門)에 당도했다.
전혀 무의미한 행정구역들과 심술쟁이인 듯 지리멸렬한 길들을 간단없이 나열하고 있는
것은 변화가 무상한 헨로미치임을 알리는 일종의 고발과정이다.
코보대사가 후세의 아루키 순례자들을 고생시키려고 그랬겠는가.
아무리 심성 고약한 에몬사부로라 해도 이미 개심하여 애오라지 코보대사와의 상봉만을
바라며 걸었는데 헨로미치에 심술을 부렸겠는가.
단순했던 당시의 아루키 헨로미치가 잦은 행정구역의 개편과 각종 토목과 건설의 공사에
괄시받으며 이리저리 쫓겨 다닌 결과다.
문제는 이런 상태로 확정되지 않고 이 괄시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뻔하다는 사실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본도 한국의 나쁜 점을 본받으려 하는가.
차량 위주 일변도로 아루키 헨로상들의 도보 환경은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으니.
모토야마지는 다이도(大同)2년(807)에 헤이제이천황(平城/재위806~809)의 칙원에 따라
코보대사가 70번째 레이조로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본당을 하룻밤 정도의 단기간에 지었다는 전설이 있는 후다쇼.
자신이 조각해 모신 본존은 머리에 말머리를 이고 있다 해서 마두관세음보살(馬頭観世音
菩薩)이라 하는데 시코쿠레이조에서 유일한 본존이란다.
창건 당시의 사명이 초후쿠지(長福寺)였는데 훗날 모토야마지로 바뀌었으며, 코보가 세운
레이조의 이름이 타인에 의해 바뀐 유일한 경우가 아닌지?
일본은 소규모 저수지국(貯水池國)
평지의 20.000평방m, 6.000평이 넘는 너른 경내를 일별하고 나온 시각은 8시 20분경.
납경소가 문을 열기 전이라 극성스런 참배객이나 드물게 와있을 고요한 아침을 남겨두고.
도보길로 11.3km라는 71번이야다니지(弥谷寺) 길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7.4km를 11번
국도를 따르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아루키헨로미치는 모토야마지에서 4km쯤 되는 지점, 다카세초시모카츠마(高瀨町
下勝間) 타운의 초입에서 국도에서 분기하는 지방도(현도)와 함께 갈 수 있다.
모토야마지의 소재마을인 미토요시 토요나카초 모토야마코(三豊市豊中町本山甲)와 토요
나카초 카사다카사오카(笠田笠岡) 타운들을 지난 지점에서.
11번국도의 고수도 되지만 국도의 번잡하고 지루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7.4km의
국도헨로미치(헨로地圖)에서 3.4km를 미리 지방도헨로미치로 대체하는 셈이다.
국도를 고집하는 아루키헨로상도 7.4km지점에서는 현도 헨로미치로 올겨 가야 하니까.
70번레이조를 나와 11번국도에 진입한 후 바로 일본 전역에 분포되어(chain) 있는 아동복
전문점 니시마츠야(西松屋/右側)를 지났다.
곧, 신호등사거리(六の坪)를 건넌 후 몇개의 신호등을 지나 편의점 미니스톱(Ministop) 앞
에서 젊은이를 다시 만났다.
물러가지 않는 주기(酒氣)를 이주치주(以酒治酒)하는 중인지 캔맥주를 마시는 중인 그.
간밤에도 권하지 않은 그가 이 아침에 맥주를 권할 리 있는가.
함께 고가 인도교가 설치되어 있는 카사다소학교(笠田) 앞을 지나, 편의점 서클 K(circle)
도 지난 후 다시 앞서 나간 그는 11번국도(伊予街道)를 따라 직진을 계속했다.
그의 내비가 그러라고 지시하는 듯.
나는 좌즉의 2개의 농수용 저수지 사이로 분기하는 현도 헨로미치를 택했다.
거리로는 약간 부담이 가지만 차량을 피하고 지루하지 않는 이점이 있으며 어차피 전방
4km 미만의 지점에서 국도를 떠나 합류하게 되어 있으므로 젊은이를 내버려 두었다.
일본 전역이 아니고 시코쿠라는 제한적이기는 해도 농촌을 살피는 호기라 할 수도 있다.
이베리아반도의 동서남북을 6.000km 넘게 걸으며 부러워 한 것은 농촌의 수리시설이다.
농사용 운하 위주로 되어 있으므로 고저지대를 막론하여 물이 풍부하다.
살수시설도 대 단지는 규모에 따라 거대 항공기를 닮은 기구가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스위치 하나에 의해서 원형으로 서서히 회전할 때 양날개에서 뿜어내는 거창한 물은 아름
다운 무지개를 띄우며 대지를 흡족하게 한다.
과수원을 비롯해 소규모 전답 등에는 분수식 수도관의 매설로 거의 자동살수다.
우열에는 절대 우위가 없다.
상대적 비교급이며 가변적이다.
일본의 농촌은 이베리아반도에 비해서는 뒤지지만 우리나라의 농촌이 부러워 할만 하다.
천수답(天水畓)의 유무가 일차적 기준이라면 우리의 농촌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시대는
과거완료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자동화 수준에서는 열등하니까.
일본은 이베리아반도나 한국과 달리 중소 규모의 저수지국가다.
지진의 나라가 지진에 무력한 대규모 댐을 갖는다는 것은 인명과 재산의 수장을 원한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한 정책이겠지만 이점(利點)도 많다고 생각된다.
수량(水量)의 확보가 용이하고
분산 수용으로 위험이 줄고 동선이 짧아서 손실이 적으며
유지와 관리비가 절약될 것이니까.
지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나라도 심각하게 고민해 볼 문제다.
지진과는 무관하나 대규모 댐으로 인한, 소위 수공작전의 공포가 온나라를 흔들어 놓았던
사건도 있었으니까.
북한의 금강산댐을 이용한 수공작전에 수도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했다.
대비용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성금 모으기라는 코메디 같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朝鮮人の手から守りましょう"貼り紙に四国八十八カ所霊場会が激怒
2개의 헨로미치 중 후자를 택한 나는 몇개의 소규모 저수지길과 교차로들을 지나고 218번
현도 사거리를 건넜다.
마루나카타카세점(高瀨店/슈퍼마켓) 후면을 지나 좁은 사거리와 23번현도 사거리를 건너
잠시 국도(11번)에 들어섰다.
국도로 돌아온 아루키헨로미치는 타카세강(高瀨川) 다리(高瀨橋) 앞에서 다시 분기한다.
다리의 왼쪽 가드레일 앞, 석지장과 헨로표지들의 안내를 받으며.
한데, 내가 이곳을 통과한 2014년(平成26년)10월10일에 53번째 헨로코야가 이 다리 저쪽
끝에서 약간의 거리지점에 건립중이었다.
어제(10월9일)도 코야(30番錢形)의 위치에 대해 지적했거니와 아루키헨로상을 위한 장소
라면 당연히 도보헨로미치의 노변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도 벗어난 곳에 건설중이다.
30번코야와 동일한 애로(장소) 때문이라니 애석한 일인데, 다른 코야와 달리 한국여인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유감이다.
한국여인 센다츠의 제창으로 만들어지는 '日韓友情の小屋'(한일우정의 오두막)라니까.
외국 여성 최초의 공인 센다츠(公認先達)라는 젊은 최모(崔某)여인이다.
본인의 소망 성취라면 축하해 줘야 할 일인데도 그럴 수 없는 것 또한 유감이다.
그녀와 나는 극복하기 어려운 세대간의 간격이 있다.
무엇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 정서가 극과 극이다.
상대가 외국이라는 점에서는 친일과 친미가 다를 것 없으며 개인의 성향을 왈가왈부,시비
한다면 그것이 되레 비이성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만은 세대를 떠나 걸러야 할 선행 조건들이 있는 나라다.
1950년 6.25민족동란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말로 알려진 한 일화로 한일관계를 설명할까.
파죽지세로 몰려온 북쪽 군대에 밀려 겨우 부산지역만 남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UN군사령부가 일본군을 차출, 한국전쟁에 투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대통령이 대노 일갈하기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국군의 대포들을
당장에 모두 현해탄쪽으로 돌려라" 했다는 것.
"북쪽은 언젠가는 하나가 될 동족이지만 일본은 영원히 가까이 해서는 안될 족속"이라며.
통칭 가깝고도 먼나라, 가깝지만 불가근(不可近)이고, 멀지만 불가원(不可遠)이어야 하는
운명적 관계라는 것이다.
센다츠(先達)란 시코쿠헨로의 안내자, 해설사를 말한다.
기본 조건은 시코쿠88레이조를 4회 이상 걸어서 완주해야 하는 것.
걷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므로 건장한 남녀가 최우선 조건이며 4회라면 4.800km쯤이 되고,
1일 20km를 걷는다면 240일이 소요되므로 자격을 갖추는데 8개월이 필요한 기간이다.
매회에 1개월의 휴식을 갖는다 해도 1년은 충분한 기간이 된다.
다만 일본의 외국인인 경우에는 역사적 인과관계가 중요 쟁점이 될 것이다.
가령, 내가 걷기 시작한지 10km 안팎에서 하차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서
한국인 센다츠인 그녀는 어떻게 대응할까.
1.592년과 '97년, 임진과 정유년에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으로 우리의 금수
강산은 피로 물들었고 선조(先祖)들은 무수히 죽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랬음에도 그들(참전한日本軍人)의 전공을 치하하고 있는 비석들을 대해야 하는(시코쿠
헨로미치변에 있는 공동묘지니까) 한국인으로서 말이다.
종교적 신념이거나 스스로 즐겨 하는 일이라 해도 그녀는 한국인이다.
일본인으로 살 수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로 임할 수도 없고 시코쿠헨로가 일본
내의 종교행사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와 선을 긋는 것이 온당하다며 피해 갈 것인가.
한국여인이 주지라는 이유로 13번레이조 다이니치지(大日寺)가 무수한 입에 오르내리고
최모 여인 역시 가십(gossip)거리가 무수히 생산과 회자를 거듭하고 있잖은가.
심지어
<"朝鮮人の手から守りましょう"貼り紙に四国八十八カ所霊場会が激怒>
("초센진노테카라 마모리마쇼" 하리가미니 시코쿠88카쇼레이조카이가게키도.
조선인의 손에서 지킵시다. 벽보에 시코쿠88개소레이조회가 격노)
구체적인 내용은 차마 옮기기가 민망할 정도다.
"스스로 지는 짐은 실 무게보다 가볍다"던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지나치게 배타적인 일본인들의 등쌀에 시달릴 그녀가 안쓰럽다.
<계 속>